서울 이야기

-* 서울의 산 [40] *-

paxlee 2009. 5. 29. 21:23

 

                             15. 무 악(毋岳296m /안산鞍山)

 

 1. 명칭과 연혁

 - 무악 봉수대 오르는 길 -

 

무악은 일명 안산(鞍山)으로 불리우며, 기산, 봉화뚝, 봉우재, 봉우뚝으로 알려져 있다. 안산은 동봉과 서봉의 두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안산의 모양이 마치 말의 안장 즉 길마와 같이 생겼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며, 그 동쪽에 있는 현저동에서 홍제동을 넘는 고개를 길마재, 즉 안현(鞍峴)이라 하였다. 이러한 안산의 형세와 관련하여 조선 명종 때 남사고는 “서울 동쪽에 낙산이 있고, 서쪽에는 안산이 있으니, 반드시 당파가 생기는데 ‘駱’자는 ‘各馬’이니 동인은 갈라지고, ‘鞍’자는 ‘革安’이니 서인은 혁명한 후에야 안전하게 되리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 말이 맞았다.

 

그리고 무악은 풍수지리상의 형세로 볼 때, 서울의 진산인 북한산의 인수봉이 어린애를 업고 나가는 모양이므로 그것을 막기 위하여, 안산을 어머니의 산이란 뜻으로 모악(母岳)이라 하고, 이 산 남쪽의 고개를 떡고개, 남산 동쪽 고개를 벌아령(伐兒嶺)이라 하여, 어머니가 떡을 가지고 나가려는 어린애를 꾀이고, 또는 때리겠다고 얼러서 나가지 못하게 한다는 뜻이라 한다. 여기서 무악은 모악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길마재의 다른 이름인 무악재는 모악재로 부르기도 하였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얽혀 있다. 현재 이 고개는 몇차례에 걸쳐 깎아 내려 낮아졌지만 예전에는 고개가 높고 몹시 험준하였다. 그리고 양편에 밤나무와 수풀이 무성하여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는 무서운 고개였으므로, 이 고개를 넘으려면 여러 사람을 모아서 넘어 갔기 때문에 모아재라고 부르던 것이 모악재로 음이 바뀌게 되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또 무악재는 사현(沙峴)이라고 불리었다. 그 이유는 이곳에 모래바람이 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고, 무악 북서쪽 기슭을 따라 흐르는 모래내(沙川)가 있기 때문에 사현이 되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그런데 사현을 보고 성종 때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이 “하늘이 천 길의 한 관문을 지어서 한 군사가 천명의 군사를 누를 만하다"고 하였다. 그후 영조 45년(1769)에 영조는 부왕 숙종의 능인 명릉(明陵)의 공사를 시작하고, 몸소 이 고개에 올라서서 명릉 쪽을 바라보며, 이 고개의 이름을 추모현(追慕峴)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 안산 무악정 - 

 

높은 산이란 뜻의 기산(岐山)은 기봉(岐峰)과 같은 뜻으로, 고려 숙종 7년 남경의 규모를 논하는 『고려사』의 기록에서 보이는 이름으로 당시 남경의 서쪽 경계를 이루는 봉우리였다. 따라서 기록상에 보이는 무악의 가장 오랜 이름은 고려시대에 불리었던 기봉으로서 그 내용은 『동국여지비고』에도 전한다. 봉화뚝, 봉우재, 봉우뚝의 이름은 무악의 두 봉우리 정상에 봉수대가 있었던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두 봉화는 평안도 강계와 의주를 각각 기점으로 하여 이 곳에 이르러 남산 봉화로 최종 전달되었다.

 

조선왕조가 개창되어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면서 무악은 궁궐의 주산(主山)으로 주목되기도 하였다. 1393년 10개월간 진행된 계룡산 신도 건설공사가 경기좌우도관찰사 하륜에 의해 중지되었다. 태조는 하륜에게 다시 천도할 만한 곳을 찾아 아뢰게 하니, 하륜은 무악 남쪽 오늘날 신촌, 연희동 일대를 신도의 후보지로 지목하여 상주하였다. 그러나 태조는 조준, 권중화 등으로 하여금 서운관 관리들과 함께 현지를 답사케 하였다. 그 결과 그곳은 지역이 좁아 새로운 도읍지로는 불가하다고 하였다.

 

무악주산론(毋岳主山論)의 지형을 보면 북으로 무악이 있고, 서로는 백련산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한강변으로 산이 없고 조그만 능선 뿐이었다. 그리고 동쪽으로는 노고산, 와우산의 작은 구릉이 이어져 있어 성곽도시로서 불리하였다. 또한 무악 남쪽 산록에서 훨씬 남쪽으로 넓은 평지가 있으나 궁궐의 기지가 평탄치 못하고 협소하며, 좌우에 종묘와 사직을 놓고 볼 때 북악을 주산으로 한 지역보다 협소하였다.

 

그리하여 태조는 그 3년 7월 음양산정도감(陰陽刪定都監)을 두고 권중화· 정도전·성석린·남은·정총·하륜 등 중신으로 하여금 신도읍지를 고르게 하였다. 한편 8월에 유력한 천도 후보지인 무악 현지를 친히 살피고 판서운관사 윤신달(尹莘達)과 서운관부정 유한우(劉旱雨) 등에게 가부를 물었다. 이에 그들은 “무악은 국토의 거의 중앙에 위치하여 교통에 편리한 점은 있으나 풍수상으로 주산이 빠지고 산수가 포위하지 못하며 지형이 좁아 신도읍지로 불가하다”라고 하였다. 또한 정도전의 천도에 대한 극력 반대가 있었다.

 

여기서 태조는 천도계획을 바꾸지 않고 북악 남쪽 고려시대 남경 궁궐 터를 다시 살피고 중신들과 왕사 자초(自超)의 동의를 구하여 한양을 신도읍의 후보지로 정하였다. 따라서 개성에 돌아온 태조는 즉시 좌정승 조준·우정승 김사형 등의 상소에 따라 한양을 새 도읍지로 확정하였다. 또 개성에서 즉위한 태종은 그 4년(1404) 다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고자 천도를 꾀하였다. 이때 우정승 하륜은 무악 천도를 다시 건의하였으며, 중신들간에는 한경(漢京)과 송경(松京)의 도읍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에 종묘에 나아가 돈을 던져 길흉을 점쳤다. 결과적으로 한경천도를 확정하니 무악은 도성 밖에 위치하게 되었다. 이러한 무악주산론은 계속 생명력을 가지고 있어 세종 때 무악을 주룡(主龍)으로 삼아 그 서남쪽에 연희궁(衍禧宮)이란 이궁(離宮)을 경영하게 된다. 원래 연희궁은 조선 초 정종이 태종에게 왕위를 선양하고 거처하였던 곳이다. 그후 세종년간에 상왕인 태종을 위하여 여러 이궁을 건축하였는데, 서쪽 이궁으로 무악 명당에 연희궁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그 이름은 서이궁(西離宮)이라 하다가 태종이 세상을 떠난 후인 세종 7년 8월에야 정식으로 연희궁으로 불리었다.

 

세종은 연희궁을 병이나 날씨를 피할 목적보다 이어소(移御所)로서 사용하였다. 세종은 연희궁 주변에 과일나무와 뽕나무를 심게 했다. 세종 13년(1431) 4월의 기록을 보면 연희궁은 잠실로 쓰여 양잠을 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어 세조는 연희궁을 서잠실(西蠶室)이라고 하여 정5품의 관리를 배치하였다. 연산군 11년(1505)에는 연희궁을 수축하여 연회장으로 삼았다가 후에 폐쇄하였다. ?연희궁 까마귀골 수박 파먹듯 한다?라는 속담이 있는 것은 연산군이 연희궁에서 어찌나 질탕하게 놀았던지 여름이 되면 참외·수박들을 산더미처럼 버려 까마귀떼들이 몰려와서 그 과일을 쪼아 먹었기 때문이었다.

 

무악은 1624년에 발발한 이괄(李适)의 난 때 주된 싸움터였다. 이괄은 1623년 북병사(北兵使)로 부임하기 직전에 인조반정에 가담하였다. 일시 반정군의 대장에 추대되는 등 반정에서 수훈의 공을 세웠다. 그러나 반정 성공 후 논공행상에서 겨우 2등공신에 책정되고 한성부윤에 임명되자 불만이 고조되었다. 이어 도원수 장만(張晩)의 휘하로 부원수 겸 평안병사로 좌천되자 그의 불만은 더욱 커져 마침내 인조 2년(1624) 1월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이 경기도 개성·벽제에 이르자 인조는 공주로 피난길을 떠났으며, 곧 한성은 반란군에 점령되었다. 이괄은 1624년 2월 10일 입성하였는데 모집 군인 수천명과 각 관청의 서리와 하인들이 무악 북쪽에서 이괄의 일행을 영접하였다. 이괄은 입성하여 경복궁 옛터에 주둔하고 선조의 열째 아들 흥안군(興安君)을 새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각 지방군을 연합하여 반군을 추격하여 오던 도원수 장만은 반군이 입성하던 날 밤에 한성 근교의 안령(鞍嶺) 즉 안산고개를 점령하였다.

 

관군의 안령 점거를 11일 새벽에 알게 된 이괄은 전군(前軍)이 적은 것을 보고 창의문에서부터 둘러 나가면 북 한번만에 도원수 장만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하였다. 또한 그들은 우왕좌왕하는 도성민을 승복케 하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도성민을 성 위에 올라가 싸움구경을 하게 하니 곡성(曲城)에서 남산까지의 성채가 마치 흰 빨래를 널어 놓은 것 같았다고 한다.


전투는 처음에 동풍이 세차게 불어 반군이 크게 유리하였으며 관군은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싸움이 한참 무르익어갈 무렵 갑자기 서북풍이 강하게 몰아쳐 전세는 역전되었으며 급기야 반군의 도주가 시작되었다. 대패한 이괄은 야음을 틈타 수구문으로 빠져 나왔다. 12일 삼전도를 거쳐 광주를 지나 이천에 이르렀다. 여기서 그의 부하에게 살해됨으로써 일시 한성을 점령했던 이괄의 난은 끝이 났다.

 

이러한 이괄의 난은 조선 건국 이래 내란에 의해 도성이 함락된 유일무이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당시 무악 봉수의 이용으로 반란군을 진압한 사실을 전하고 있어 주목된다. 무악에서 저녁에 올리는 봉화를 일찍 올리니 남산에서도 이에 따랐다는 것으로, 이것은 정충신이 방어사로서 먼저 무악 봉수대를 점령한 다음 속임수로 저녁 일찍 후방에 아무 일이 없다는 신호로 봉화를 한 번만 올리게 하고 그 이튿날 아침에 무악을 싸움터 삼아 분투한 끝에 거둔 성과였다.

 

무악 서남 기슭 신촌동 134번지에 유경원(綏慶園)이 있었다. 유경원은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의 원묘이다. 1969년에 유경원이 경기도 고양군 신도읍에 있는 서오릉으로 이장된 뒤, 이 자리에 연세대학교 교회와 박물관이 건립되었다. 현재는 유경원의 부속건물인 제각(祭閣)과 홍살문만이 남아 보존되고 있다. 한편 무악에서 남쪽으로 뻗어 첫번째 봉우리를 이룬 205m 고지를 금화산(金華山)이라 부른다.

 

금화산의 이름은 산 형세가 둥글고 곱다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다. 그 서쪽에는 이화여자대학교가 자리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독립공원과 금화아파트가 있는데, 이 두 지역은 금화터널로 연결된다. 이 금화산은 일명 둥그재 또는 원교(圓嶠)라고도 하는데, 냉천동 뒤에 있어 모양이 둥글게 되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여기서 계속하여 남쪽 용산 방향으로 뻗는 산줄기와 서남쪽으로 북아현동·아현동과 큰고개를 거쳐 노고산 방향으로 나아간 산줄기가 있다.

 

이 서남방향 산줄기 가운데 중앙여고 뒷산에 해당하는 125m 고지의 복주산이 북아현3동과 대신동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 복주산은 노고산 북쪽 벌판에 우뚝 솟은 산으로, 산이 벌판에 솟아있고 서북쪽이 트여서 바람이 세므로 바람산 또는 풍산(風山)이라 한다. 또한 노인들이 여름에 이 곳에 올라와 쉬면 더위를 이기고 수(壽)를 더한다 하여 복수산(福壽山)이라 하였는데, 음이 변하여 복주산(福主山)이 된 것이라 한다.

 

그런데 125m 산봉우리는 금화산 205m 봉우리의 연장 능선상에 위치한 것으로 귀인의 대명사인 복주산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그로 인하여 아랫마을도 복주산동이라 불렀다. 복주는 옛 사람들이 즐겨쓰던 귀인이란 뜻의 용어로서 귀인이 마시는 물을 복주우물이라 하였다. 현재 북아현동 산 1616번지에 위치한 복주우물 약수터는 서대문 인근지역과 마포·아현지역 주민 등 하루 평균 200여명이 이용하고 있다. 복주산 아래 북아현동 199-1번지 중앙여고 터는 일명 애기능인 의령원(懿寧園)으로 사도세자의 큰 아들인 의소세손이 묻혔던 곳이기도 하다.

 

 

 

 - 안산의 봉수대 암벽 -

2. 자연상태

 

해발 295.9m의 무악은 인왕산에서 서쪽으로 비스듬히 뻗어 무악재를 이루고 솟은 산이다. 그리고 산줄기는 계속하여 한강을 향하여 네 줄기로 뻗어간다. 남쪽으로 뻗은 줄기는 금화산과 아현으로 이어져 약현(藥峴)과 만리현(萬里峴)을 거쳐 용산까지 나가고, 다른 한 줄기는 서남쪽으로 연세대학교를 감싸고 뻗어 계당치(鷄堂峙 : 신촌에서 동교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넘어 와우산을 일으키고 다시 뻗어 양화진 잠두봉(蠶頭峰)에 이른다. 그리고 노고산을 이루는 줄기와 연희동 104고지를 이루는 줄기가 있다.

 

따라서 무악은 한성에 도성을 쌓을 때 지형상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지금 도성은 인왕산에서 직접 남산으로 이어져 있지만, 인왕산에서 일단 무악으로 건너질러 거기에서 금화산 능선을 따라 가다가 약현 쯤에서 남산과 연결하도록 도성을 쌓자는 의견이 있었다. 일설에 무학대사가 인왕산 주산론을 들고 나와 지금 성벽 밖에 있는 인왕산 줄기의 선바위를 도성 울 안에 넣기를 주장하였으나 정도전이 이를 반대하여 이루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는 역시 무악의 묏부리를 따라 도성을 쌓자는 의견이 강했던 증거라 여겨진다.

 

무악은 옛 봉수대가 있던 정상 부근의 화강암 기반돌에서 볼 수 있듯이 서울 북쪽의 일반적인 지형과 같이 화강암 잔구로 암석의 절리에 의해 돔(dome) 형태의 원봉을 형성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보면 안산의 북동 사면은 화강암, 남서 사면은 편마암을 주성분으로 하여 이루어졌다. 따라서 편마암으로 구성된 안산의 남서 사면인 봉원동·연희동 일대는 경사도가 10°안팎의 산록 경사면이 해발 고도 100m 이하에 발달하여 있으며, 이 완사면과 연결된 섬모양의 구릉과 잔구가 곳곳에 산재하고 있다.


그리고 봉원사 북동쪽으로 기울어지는 안산 능선에 자연적으로 생긴 백석들이 묘하게 연결되어 마치 관음보살이 합장하고 동편 하늘을 우러러 보고 누워 있는 듯한 모습의 관음바위가 있다. 서울 시가지를 향해 있어 서울의 평화를 지켜준다고도 한다. 안산의 식생을 보면 5월의 진한 아까시 향기가 진동하듯이 아까시나무가 절대 다수의 숲을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의 기록인 『용재총화』에 보면 무악재에서 남으로 모화관 사이는 도로의 좌우에 밤나무·소나무의 수목이 무성하였고 활쏘기 놀이터로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무악의 서남 사면인 봉원동 2-1번지 봉원사 경내를 중심으로 커다란 느티나무 군락이 있고, 벚나무군이 자리하고 있다. 이 느티나무 군락은 찾아오는 사람들의 마음의 안식처를 제공하였고, 일명 장군나무라 불리우기도 한다. 느티나무는 낙엽활엽수로서 산기슭이나 골짜기 혹은 흙이 깊은 진 땅에서 잘 자라며, 수형이 좋고 오래 살며 재질이 좋은 나무이다

 

3. 산책로

 

무악에 오르는 길은 북아현동·홍제동·홍은동·영천동·연희동·대신동 창천동·현저동 들머리 등 그 코스가 다양하다. 산은 작지만 시냇물이 흐르는가 하면 곳곳에 약수터가 있고 바위를 오르는 코스 등 아기자기한 맛을 느낄 수 있어 대표적인 서울의 산책로로 꼽힌다. 무악의 7부 능선을 따라 일주하는 산책로는 40여분만에 천천히 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부담이 없어 노약자들의 산책코스로 적당하다.

 

총 22개의 약수터 중 일주 산책로에는 5개의 약수터가 있다. 가장 큰 약수터인 안산천약수터를 기점으로 2층 정자로 꾸며진 무악정을 지나면 옥천약수가 있다. 이곳에서 7분 거리에 맥천약수가 있으며, 계속해 봉화약수·백암약수 등이 산책 나온 사람들의 시원함을 더해 준다.

 


무악 정상에는 무악 동봉수대가 1994년에 복원되어 설치되어 있다. 봉수대를 오르는 데는 세 코스가 있다. 그 중 금화터널 위 능선을 따라 연결되는 코스는 바위에 설치된 난간 로프를 잡고 오르게 되어 있다. 무악정에서 능선을 따라 오르는 코스와 맥천약수와 봉화약수 중간에서 오르는 길이 있다. 일주산책로에서 정상까지는 10여분 거리다. 정상에 오르면 뒤로 일산 신도시가 보이고, 무악재 건너편으로 인왕산과 북한산이 눈앞에 전개된다. 오른편으로는 한강의 아름다운 모습이 발 아래 펼쳐진다.

 

4. 사적과 문화재

 

1) 무악봉수대(毋岳烽燧臺)
무악 정상에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된 봉수대가 있다. 봉수는 높은 봉우리 위에서 횃불을 들어 경보(警報)를 전달하는 시설로 이미 고려시대부터 실시되어 오던 것을 조선시대에도 계승하였다. 봉수는 대개 수십리의 거리를 두고 적당한 산 정상에 봉수대를 설치하고, 밤에는 횃불을 들고 낮에는 연기를 피워서 신호하였다. 평상시에는 언제나 한 홰를 들어 무사한 것을 알리지만, 적이 나타나면 두 홰, 적이 국경에 가까이 오면 세 홰, 접전하게 되면 네 홰를 들어서 상황을 알렸다. 구름·안개·비바람이 심하여 연기나 불로 신호가 되지 않는 경우에는 봉수군(熢燧軍)이 차례로 달려서 급히 보고하게 하였다.

 

                    - 복원된 무악봉수대 -

 

무악 상봉 2개의 봉우리에 각각 동봉수·서봉수가 설치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의 전국 5군데 봉화로 가운데 제3봉수로인 무악 동봉수는 평안도 강계에서 시작하여 육로를 따라 고양시 봉현을 거쳐 이곳에 이르러 남산 세째 봉화로 최종 보고되었다. 제4봉수로인 무악 서봉수는 평안도 의주에서 시작하여 서해안을 따라 파주 교하를 거쳐 이곳에 이르러 남산 네째 봉화로 전달되었다. 현재 두개의 봉수대 중 동봉수대는 복원되었고, 서봉수대는 동봉수로부터 100m 떨어진 현 군부대의 통신탑이 자리하고 있는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2) 독 립 문(獨立門)

 


독립문은 무악 동남 기슭 현저동 941번지 독립문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32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독립문은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민족의 자주독립 의지를 보여준 기념물이다. 독립협회의 자주민권·자강운동의 산물로서 우리 민족의 자각을 표현한 문화유산이다. 19세기 말 청국·일본·러시아 등 외국 열강의 간섭으로 나라의 자주독립 유지가 어렵게 되자, 우리 민중들은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결의하였다. 이때 갑신정변 실패 후 미국에 망명하였다가 귀국한 서재필이 독립문을 세울 것을 당시 뜻있는 인사들에게 발의하였다.

 

이때 독립문 건립을 추진한 인사들은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사대외교의 상징인 영은문 옛터에 독립문을 세움으로써, 사대의 잔재를 제거하고 자주독립을 주창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애국심을 갖게 하고자 하였다. 1896년 6월에는 독립문 건립계획이 구체화되었고, 국왕의 동의를 얻게 됨과 아울러 문의 이름과 한글로의 표기까지 제안되었다. 이에 따라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를 창립하였다.

 

독립협회는 독립문을 세우고, 중국사신을 맞이하던 모화관을 개수하여 독립관과 독립공원을 건설할 것을 사업목적으로 명시하였다. 독립문 정초식(定礎式)은 1896년 11월 21일에, 그 완공은 1897년 11월에 이루어졌다. 독립문의 재료는 우리나라에서 산출되는 견고한 백색 화강암이다. 그 홍예문의 이맛돌에는 조선왕실를 상징하는 이화문장(李花紋章)이 새겨져 있고, 남쪽 서울을 향한 쪽으로 한글로 '독립문'이라 새겼다.

 

북쪽 중국을 향한 쪽으로는 ‘獨立門’이라 새겨 넣었으며, 그 좌우에 태극기가 새겨져 있다. 이 역시 한글을 높이는 자주독립정신의 한 표현이라 하겠다. 그 후 수차례의 보수공사를 거쳐 1979년에는 성산대로 건설공사로 인하여 이전이 불가피하게 되어, 그 자리에 ‘독립문지. 이전일자 1979. 7. 13 서울특별시장’이라고 새겨진 기념동판을 묻고, 원래 위치에서 북서쪽으로 70m 지점에 새로 조성한 독립문공원에 원형 그대로 옮기는 이전 공사를 1980년 1월에 완공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3) 봉 원 사(奉元寺)

 


무악의 서남쪽 봉원동 23번지에 있는 봉원사는 태고종의 총본산으로 일명 ‘새절’이라고 하는데, 연세대 터에 있던 것을 이곳에 옮겨 지었기 때문에 불리어진 것이다. 봉원사는 신라 31대 진성여왕 3년(889)에 도선선사(道詵禪師)가 연희궁 터의 어느 저택을 절로 만들어 반야사(般若寺)로 부르게 된데서 유래되었다. 이후 고려말에 오늘날 태고종의 종조로 모시는 보우(普愚)가 반야사를 증축하였는데, 이때 절이름을 금화사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태조 5년(1396)에 삼존불상을 봉안하고 후에 태조의 진영을 모시는 원찰이 되었다가, 임진왜란 때에 타버렸다. 그후 여러 차례 중건되었고 영조 24년(1748)에 찬집대사(讚什大師)와 증암선사(證巖禪師)가 현재 위치에 옮겨 지었다. 이듬해에 영조는 친필로 쓴 봉원사 현판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이는 유경원의 원찰로서 새절이 지어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정조 때 이곳에 규정소(糾正所)를 두어 전국 승려의 풍기를 바로잡는 기관이 되었다.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의 스승이던 이동인(李東仁)이 이곳에 있었으며, 광복 후 46칸 짜리 광복기념관을 세웠다 한다. 그런데 1991년 10월 9일 새벽에 원인 모를 화재로 대웅전과 보물급에 해당하는 탱화 8점, 목조 삼존불 등이 소실되었다. 대웅전은 조선 영조 때 건조한 것으로 서울시 지방유형문화재 제68호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소실되어 1993년에 중건되었다. 이 절에는 조선말 흥선대원군의 별장이던 아소정(我笑亭)이 이전되어 염불당 대방으로 사용되고 있다.

 

아소정은 마포구 공덕동(현재 동도공업고등학교)에 있었던 건물로 흥선대원군이 정권 다툼에 밀려 유폐생활을 하던 곳이다. 봉원사에는 정도전의 글씨로 전하는 명부전 편액이 소장되어 있다. 또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쓰기 위해 불태운 덕산 가야사에 있던 범종이 봉원사 대웅전에 옮겨져 있다. 그리고 이 절 입구에는 바위에 돌을 붙이면 소원을 이룬다는 부침바위와 서울특별시 지정보호수 제67호인 느티나무가 있다.

무악지도
 
4) 서대문형무소와 독립공원

 


무악 동남 기슭 현저동 101번지에 위치한 옛 서대문형무소는 1988년 2월 27일 사적 제324호로 지정되어 서울특별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서대문형무소를 처음 설치한 시기는 1907년이며, 경성감옥이라고 칭하였다. 그후 1912년에 서대문감옥으로 개칭하고, 1918년에 와서는 형무관(刑務官)을 양성하는 곳도 겸하게 되었으며, 1923년 5월에 서대문형무소로 바뀌었다. 광복 후 1946년에는 다시 서울형무소로 되었다가, 1961년에 서울교도소로 개칭되었으며, 1967년 7월에는 서울구치소로 되었다. 1987년 11월 15일에 서울구치소를 경기도 의왕시로 옮기고, 이곳은 사적지로 지정되었다.

 

일제는 우리나라의 국권을 강탈하고 제국주의의 침략을 본격화하기 위하여 무악 기슭에 근대적인 감옥을 건축하였다. 서대문형무소는 처음 일본인의 설계로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560여평의 목조건물로 지어졌다. 그리고는 500년간 종로에 위치하고 있었던 전옥서(典獄署)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기결수를 옮겨왔다. 그후 감옥의 부족을 절감하여 마포구 공덕동에 새로 감옥을 짓고 경성감옥이라 하고, 이곳을 서대문감옥으로 고쳤다. 이로부터 1945년 광복이 될 때까지 이 곳은 수많은 애국지사가 감금되고 모진 고문과 박해로 죽어간 곳이다. 광복 이후에는 반민족행위자와 친일파들이 대거 수용되었다.

 

그후 4·19혁명, 5·16군사정변 등 정치적 변동을 겪으면서는 많은 시국사범들이 수감되기도 하였다. 현재 제10·11·12사(舍)의 감옥건물과 사형장은 보존되고 있다. 김구·강우규·유관순 열사 등이 옥고를 치루고, 강우규·이인영·송학선·김동삼 등 많은 애국지사들이 순국한 곳이기 때문에 후손들에게 민족의 자존과 자주정신을 일깨워 주는 산 교육장으로 삼기 위해서이다. 이와 더불어 무악 동남 기슭 현저동 101번지 일대 서울구치소 이적지에 1992년 8월 15일 광복 47주년을 맞아 독립공원을 조성 개원하여 역사교육의 장과 시민 휴식공간으로 활용하게 되었다.

 

서울특별시에서는 1988년 12월부터 1992년까지 97,377㎡(29,000평)의 공원부지에 시설공사를 하여 이해 광복절에 개원하였다. 감옥 7동, 사형장, 지하 여자감옥 등을 복원하고 탑골공원에서 3·1운동기념탑도 이전하였다. 또한 전시실, 순국선열 추념탑, 벽천, 녹지대 등과 주차장 등 편의시설을 건립하였고 독립문과 영은문 기둥돌과 연계하여 서대문독립공원으로 조성 개장하였다. 이러한 공원 시설물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은 사형장과 옥사(獄舍)이다. 교수형이 집행되던 사형장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희생한 수많은 선열들의 숭고한 넋이 서려 있는 곳이다.

 

- 독립공원 - 

 

1923년에 지은 일본식 목조 건물로 내부에는 사형 집행에 사용했던 기구 등이 진열되어 있고, 사형장 후문에는 공동묘지까지 이어져 있었던 지하통로가 약 40m에 이르고 있다. 서대문구에서는 1994년부터 현재까지 서대문독립공원 성역화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 내용으로 유관순 열사의 밀랍인형과 선열들의 각종 유품들이 수집 전시되며, 그 동안 일반인 출입이 금지되었던 사형장과 지하감옥 등이 공개된다. 서대문형무소 제9∼13옥사, 지하 옥사, 중앙사, 나병사, 사형장, 보안과 청사, 망루 2개 등에 대한 개보수 공사가 실시되고 있다.

 

형무소의 망루가 원형대로 복원되고 간이휴게소 등 편의시설이 마련될 예정이다. 현재 전시관으로 일부 사용중인 보안과 청사는 전시공간을 대폭 확충해 물고문 등 고문 장면 등을 담은 사진물과 각종 유품들을 전시하게 된다. 서대문구는 이를 위해 1995년부터 범국민적으로 독립운동 사료 발굴 및 수집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와 함께 조선시대 봉수대가 있는 무악과 연계하여 역사탐방로를 개설하고 청소년들의 교육장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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