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2 & 브로드피크 [3] *-
K2 & 브로드피크] 성난 K2가 죽음의 거미줄을 쳐놓았다.
- 외국 팀의 기대 속에 브로드피크 등반 나서
- ▲ 브로드피크 등정 후 하산. 과거 한국대는 하산 중에 6명의 등반가가 목숨을 잃었다.왼쪽에 '죽음의 산' K2가 우뚝 솟구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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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K2에서는 하산 중에 더 많은 사고가 발생했다. 다행히 우린 2시간 반만에 C4로 뛰다시피 내려왔다. 밤부터 날씨는 바뀌었다. C3로 탈출이다. 피켈에 확보하지 않으면 몸을 날려버릴 듯 몰아치는 폭풍, 시야는 1m 앞을 분간하기 힘들고 더욱이 고글은 눈으로 얼어붙었다.
C3 직전에서 지우형과 여성대의 김선애 대원(홍익대 산악부)이 추락, 실종됐다. 또 다시 시련이 찾아왔다. 니마의 가호인가, 이들은 5시간 후 캠프에 돌아왔다. 다시 한 번 가슴을 쓸어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날 모든 팀의 협력으로 BC에 있던 대부분의 팀이 성공했다. 그러나 팀들은 축하 파티는커녕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이탈리아 팀 대원 한 명이 등정 후 하산 중에 실종됐다. 이 등반가는 몇 해 전에 남남동릉 바스크 루트로 K2를 등정한 경험이 있었다. 이탈리아 팀은 이 책임공방에 대원들끼리 주먹질하는 싸움을 벌였다.
남남동릉으로 등반한 체코팀 등정자 한 명은 탈진과 저체온증으로 죽음의 문턱에서 미국팀 도움 덕에 살아왔다. 도와준 미국팀의 던은 아이젠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하강 중 두 다리를 부러뜨렸다. 그 구조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헬기에 실려 나갔다. K2 서벽에서 신 루트를 등반하던 다른 러시아팀 2명도 손가락 동상으로 헬기에 실려 나갔다.
K2의 이번 여름도 그렇게 참혹하게 끝나가고 있었다. 우리는 브로드피크 입산신청을 하고 조용히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파상과 펨바는 네팔로 돌려보냈다.
7월28일 학술대원으로 원정에 참여한 신용우 대원(청봉산악회·44)을 제외한 5명의 대원은 이른 저녁을 먹고 브로드피크 출발지점(약 5,100m)으로 간다. 홍 대장은 등정 여부를 떠나 단 한 번의 시도 후 베이스캠프를 철수한다고 했다. 짐을 나누어도 배낭은 제법 무거웠다. 여성대도 동행한다. 29일 5시간30분의 운행으로 C1(5,800m)을 지나 C2(6,400m), 30일 3시간30분 운행 C3(7,100m)에 텐트 한 동을 쳤다.
올해 브로드피크는 등정 50주년으로 28개팀이 들어왔다. 그러나 그 숫자에 비해 루트 정비는 엉망이었다. 모든 팀들이 서로 다른 팀이 작업하겠지 하는 기대심리 때문인 것 같았다. C3에는 외국 여성들을 비롯하여 대여섯 팀이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우리 팀이 K2에서 엄청난 속도로 등반한 소식을 들었으므로 도착하자마자 내심 기대에 찬 목소리로 몇 시에 출발할 거냐고 묻었다. 12시경쯤. 자연스레 그들의 출발시간도 12시로 결정됐다.
밤 10시에 일어나 복장을 갖추고 대기했다. 바람이 너무 강했다. BC의 대장님도 대기하라는 주문이다. 옷을 입은 채로 잠이 들었다. 12시, 1시, 3시. 외국팀들은 우리 텐트에 와서 출발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 ▲ 낙석이 심한 브로드 피크의 C1(5800m)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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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의 바라사브(Barasahib·대장)가 대기하라는 명령이다.”
잠결에 대답한다. 그들은 새벽 4시에 캠프지를 떠났고 우리는 쉬었다. 31일 밤 9시10분에 영호, 지우, 주원, 여성대 오 대장이 출발하고, 10시10분에 진태형과 내가 정상으로 향했다. 오늘 새벽에 떠나 정상에 서고 내려오는 4명의 등반가들을 지나치면서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했다.
“정말 고맙다. 너희들이 러셀하고 루트를 만들었다.”
이들은 22시간 동안 추위에 노출되고 탈진으로 한 걸음 한 걸음이 불안할 정도로 위태롭다. 말하기도 힘든 모양이다. 얼마 전 김재수 대장과 고미영씨가 브로드피크를 등정하고 베이스캠프를 떠났다. 그들은 산소를 사용했음에도 마지막 캠프에서 정상에 서고 되돌아오는데 23시간40분이 걸렸다고 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브로드피크는 쉬운 산이 아니다. 하산하는 데 너무 위험했다.”
우리 대원을 지나치고 오 대장을 지나친다. 속도의 페달을 밟았다. 내일 해뜨기 직전까지 정상에 서지 못하면 다시 폭풍은 우리를 가둬버릴 것이다. 보름이 그제인지라 달빛이 좋았다. 바람도 없다. 혹시나 해서 준비한 25개의 표지기를 설치하며 나아간다.
뒤쫓아오던 모든 랜턴 불빛은 사라지고 진태형만이 100m 뒤에 따라오고 있다. 새벽 2시35분 브로드피크의 주봉과 중앙봉 사이의 안부에 올라섰다. 빠르다. 해 뜨기 전에 도착은 가능하다.
전위봉으로 오르는 암릉과 커니스 진 능선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그래 이 지점에서 95년 내 동기 박현재(순천대산악회)가 사라졌고, 96년 함께 훈련했던 경희대 산악회 3명도 실종됐다. 가끔 오래된 로프가 보이는데 너무 낡아 체중을 실을 수는 없다. 우리는 내가 로프 한 동, 진태형이 한 동을 가지고 있다.
새벽 4시, 일순간 얼굴을 들지 못할 정도로 폭풍이 휘몰아친다. 정상부의 버섯구름 안에 갇혔다. 되돌아선다는 건 있을 수 없다. 진태형은 약간 주저하는 듯 보이더니 말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내 뒤에 계속 따라왔다. 전위봉으로 착각을 일으키는 암봉을 셋 넘었다. 가스와 바람으로 5m 앞이 보이지 않는다. 바닥만 확인하고 나아간다. 때로 바닥의 바위와 커니스 진 얼음 사이로 빛이 올라온다. 왼쪽으로 한 발만 잘못 디디면 중국쪽으로 사라져 버린다. 파키스탄쪽으로 몸을 돌리고 전위봉에 섰다. 새벽 4시30분이다.
- 니마의 명복을 빌며 가혹한 카라코룸 떠나
- ▲ 브로드피크 전위봉에서 주봉까지 한 시간여 걸린다. 대원 뒤쪽에 가장 두드러지게 좌측으로 나온 곳이 실제 브로드피크 정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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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평해진 전위봉 능선에서 뛰었다. 급했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았다. 1시간여 거리. 40분만인 새벽 5시10분 정상에 섰다. 정상은 ‘정상’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았다. 중국쪽으로 커니스진 눈의 둔덕이었다. 스노바를 박고 내 스카프를 표식물로 남겼다. 디지털카메라 두 개는 주머니에서 커내자 얼어 촬영이 어려웠다.
진태형과 정상에서 도망친다. 정상에서 2시간30분 후 나는 C3에 되돌아 왔고 다시 1시간 후 진태형이 내려왔다. 이 날 바로 K2 BC로 돌아왔다. 함께 오르던 주원이는 7,300m, 영호형은 7,600m 지점에 되돌아섰고, 오은선 대장과 지우형은 안부 전에서 악천후가 휘몰아치자 되돌아섰다.
끝났다. 카라코룸의 여름도 끝났다. 하행 캐러밴을 하던 브랄두 계곡의 들판에는 노란 살구가 익고 밀을 베는 가을이 찾아오고 있었다. 잔인한 계절 봄에 이어 K2의 여름도 가혹했다. 오르기 쉬운 산은 없다. 니마는 K2 속으로 사라졌다. 우리들 가슴속은 겨울이었다. 옆 텐트에서 시끄러울 정도로 밝게 웃던 니마. 니마의 명복을 빌면서 우린 카라코룸을 떠났다.
/ 글·사진 김창호 서울시립대 OB / 월간 산 - [455호] 2007.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