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마이크로 소사이어티로 간다 *-
우리는 마이크로 소사이어티로 간다
♣미래를 내다보는 일곱 개의 신석, 팔란티리
1990년대 초반 인터넷이 상용화되면서 사람들은 새로운 기술이 펼쳐 낼 미래를 경탄의 눈으로 지켜봤다. 숨겨진 금맥을 발견한 것처럼 새로운 부(富)를 찾아냈다는 흥분에 휩싸였다. 변변한 이익조차 내지 못하는 기업들이 단지 인터넷 기업이라는 이유 하나로 수십 년 이상의 전통을 자랑하는 굴뚝 기업들보다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 일도 생겨났다. 자본이 없어도 아이디어와 기술만 있으면 하루아침에 대박을 터트릴 수 있다는 생각에 수많은 인재들이 인터넷의 광맥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 그리고 자원의 제약에서 벗어나 끝없는 성장을 구가하는 신경제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기대는 결국 실현되지 않았다. 인터넷 광풍이 지나간 후 버블이 붕괴되며 수많은 기업들이 스러져 갔다. 경제가 돌아가는 방식은 적어도 외양에 있어서는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정작 인터넷이 크게 변화를 불러일으킨 영역은 경제 분야가 아니라 사회와 문화 분야였다. 인터넷이라는 매체 환경이 바뀌면서 각 개인의 삶은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된 것이다.
인터넷의 기본적 속성은 연결이다. 정보를 교환하고 지식을 나누는 데 필요한 거래 비용이 획기적으로 감소됨에 따라 사람들이 관계를 맺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인터넷이라는 그물망에 접속된 개인들은 이제 고립되고 원자화된 개체가 아니라 관계를 맺고 서로 소통하는 존재로 탈바꿈했다.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는 방식이 달라지고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바라보는 시각도 변모하게 되었다.
서양 근대 사회의 출발이 ‘신(神)에 예속되지 않은 주체적 실존으로서의 개인“의 자각에서 시작되었다면, 인터넷이 열어 주는 탈(脫)근대는 ”다양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파악하고 자아를 발현하는 그물망 속 개인“의 인식에서 출발한다. '팔란티리 2020'이라는 연구조직이 펴 낸 “우리는 마이크로 소사이어티로 간다”는 이같은 인터넷이 초래한 사회 문화 트렌드의 근저를 심층적으로 파고 든다. 팔란티리라는 이름 자체가 흥미롭다. 팔란티리는 판타지 소설 ‘반지의 제왕’에서 따온 말로 미래를 내다보는 돌이라는 뜻을 가진 고대의 신석이다.
신석에는 일곱 개가 있다고 하는 데, 그 때문인지 이 책에서 소개하는 변화의 주제는 일곱 개의 갈래로 되어 있다. 정체성과 프라이버시, 지식, 경제, 놀이, 권력, 예술문화가 그것이다.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은 어느 한 개인의 독창적인 머리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협업과 토론을 통해 집단의 지혜에서도 나온다는 새로운 조류를 반영하듯, 이 책은 어느 한 둘의 저자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언론학, 사회학, 경영학, 심리학 등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의 토론과 공동 저술을 거쳐 나오게 되었다.
그만큼 다양한 시각에서 다양한 분야의 변화를 조망할 수 있게 된다. 책 제목으로 택한 ‘마이크로 소사이어티’란 개념도 대중 매체를 기반으로 새롭게 떠오르는 ‘마이크로 미디어’가 빚어내는 마이크로 트렌드’를 통해 사회 변화를 탐색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기존의 미래 관련 책자들이 거대 담론에 치중하고 세상 변화의 디테일한 모습은 제대로 파헤치지 못하고 있는 반면 이 책은 우리 주변에 쉽게 접할 수 있는 변화 트렌드의 세세한 모습을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나는 몇 개인가 ? 나를 바라보는 새로운 눈
이 책은 "나는 몇 개인가?"라는 도발적인 물음을 시작으로 신문명 세상의 변화 흐름을 찾아 떠난다. 16세기 프랑스의 위대한 사상가 몽테뉴는 “크세쥬(Que Sais-Je),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라는 화두를 내던지며 근대의 출발을 선포했다. 나는 누구이며, 내가 진정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진지한 성찰은 인식의 주체이자 행동의 주체인 근대인의 탄생을 예고했다.
그러나 산업화와 도시화를 거치면서 개인은 고립되고 원자화된 익명의 대중으로 전락해 버렸다. 익명적 공동체에 속한 개인은 봉건 사회가 갖고 있던 혈연이나 계급, 신분, 종교와 같은 사회규범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지만 현대 사회 속의 인간상은 독특한 특성과 개성을 지닌 구체적 존재로서의 개인을 상실하고 ‘특질없는 비인간“ 혹은 조직 사회의 한 구성원이라는 추상화된 익명적 존재로 전락해 버렸다.
그러나 연결과 소통을 근간으로 하는 인터넷 세상은 다양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구축하고 교류의 폭, 내용, 다양성을 확대시킴으로써 주체적 존재이며 또한 관계적 존재인 개인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하게 해준다.‘나는 몇 개인가’라는 질문은 인터넷 미디어라는 수단을 통해 자아의 정체성을 확장하는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는 것이다. 무한한 인터넷 공간의 확장으로 개인은 과거에 비해 더 다양한 상황에서 더 다양한 사람들 앞에 놓이게 되었다. 물론 기본은 개인이다.
개인이 기본 구성단위가 되어 서로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바탕으로 신뢰를 교환하고 관계에 참여하는 즉 사회학자 배리 웰맨이 지칭하는 ‘네트워크화된 개인주의’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네트워크화된 개인주의에서는 다양한 소집단의 중요성이 커지게 되며 그러한 소집단에 자발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개인의 정체성과 자아 형성을 이루게 된다. 소집단 커뮤니케이션의 대표적인 예는 ‘카페’라고 불리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찾을 수 있다.
카페라는 소집단 안에서 네티즌들은 교류하고 소통하며 자신만의 개성을 직접 경험하게 된 것이다. 자아의 실현은 타자와의 관계 맺음을 통해 구체화된다. 전통사회에서는 소수의 대면 접촉만이 가능했기 때문에 다양한 관계 맺음이 불가능했고 이에 따라 자기 정체성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현대사회로 넘어오면 전통적인 인간관계는 소원해진 반면, 공식적 관계만 존재하기 때문에 자기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는 구체적 관계 맺음이 부족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인터넷 세상이 열리고 무수히 많은 소집단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면서 친밀하면서도 다양한 관계 맺음의 가능성이 열리게 되고, 나는 하나가 아니라 몇 개라도 될 수 있는 다양한 자아실현의 기회가 생기게 된 것이다. 이 책에서는 왜 한국이 인터넷과 정보통신에 강한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답을 제시한다. 우리 사회에 인터넷과 휴대전화가 빠른 속도로 확산된 것은 우리의 빼어난 기술력이나 ‘빨리 빨리’로 대변되는 민족성 때문이 아니라, 기존의 엄숙주의와 권위주의, 그리고 폐쇄적인 커뮤니케이션 구조에 대한 반작용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아 정체성에 대한 탐구에 이어 이 책은 바로 다음 주제인 정보화 시대의 개인의 프라이버시 문제를 짚고 있다. 커뮤니케이션의 핵심은 개인이 자기 자신의 정보를 노출하는 것이다. 자기 노출은 의소소통의 시발점이다. 진실성이 있는 자기 노출을 통해 대인 커뮤니케이션의 깊이는 더해진다. 이러한 자기 노출은 인터넷을 통해 과거에 비해 훨씬 용이해졌다. 그러나 문제는 이처럼 의도된 ‘자기 노출’이 아니라 의도되지 않는 ‘자기 노출’도 용이해졌다는 것이다.
인터넷의 구조상 본인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새로운 방식으로 개인의 정보를 구조화하기 때문에 자기 정보를 노출한 순간 자신의 의도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개인의 정보가 활용되는 결과가 초래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미니 홈피에 일촌 공개로 올려놓은 사진이라도 일촌이 사진을 스크랩해가면 일촌의 일촌이지만 나는 나는 모르는 사람에게 노출된다.
정보의 자유로운 소통을 보장하면서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해야 하는 난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이 책은 원칙적이지만 균형 잡힌 모범답안을 제시한다. 공공의 장은 원형의 탁자와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원형의 탁자에 둘러앉은 개인들은 서로 바라보고 함께 앉아 있는 동시에 각자의 공간을 점유 소유하고 있다. 즉 자기만의 고립과 타인의 침투를 예방하면서 개인성에 대한 존중과 공유의 가치를 균형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나눌수록 커지는 지식
그물망으로 연결되는 것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뿐만이 아니다. 지식도 그물망처럼 엮어지고 있다.‘지식의 그물망’이란 인터넷의 무수한 페이지들과 그 페이지의 연결을 찾아내어 새로운 페이지를 만들어내는 검색 엔진, 인터넷을 통해 누구나 접속 가능하고 활용할 수 있으며 심지어 기여할 수 있는 정보의 결합체를 지칭한다. 이러한 지식의 그물망은 결국 집단의 지성을 의미한다. 물론 집단의 지성이 집단의 무지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집단의 지식은 의도적인 거짓말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괴담이 떠돌면서 그것이 진실인양 포장되어지고 확대 재생산되는 예를 우리는 너무나 흔히 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단 지성, 다시 말해 대중의 지혜는 뛰어난 어느 한 고립된 천재의 지혜보다 뛰어난 경우가 많음을 이 책은 지적한다. 집단 지성, 혹은 대중의 지혜가 가치를 갖고 있는 까닭은 시장 경제의 장점을 따져 보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시장 경제는 무수히 많은 대중의 자발적인 참여 활동을 통해 그 어떤 중앙의 계획 경제자도 풀 수 없는 복잡한 경제 문제 - 즉 누가, 얼마나, 어떻게 경제적 재화를 생산하고 분배해야 하는가 -를 효율적으로 풀어 나간다. 지식을 누가,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생산하고 유통시키는 것이 효율적인가 하는 물음도 시장 원리를 적용해서 생각해 보면 쉽게 풀린다. 많은 수의 사람이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목적으로 활동하는 지식의 시장에서 새로운 지적 산물이 유기체적으로 생산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미국의 스페이스 셔틀 콜럼부스 호가 추락한 날, 주식 시장이 보인 반응을 살펴보면 이러한 대중 지혜의 우월성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추락의 원인이 밝혀지기 이전에 주식시장에서는 외부 연료 공급 장치를 공급하는 기업의 주식이 투매되는 현상이 빚어졌다. 결국 철저한 진상조사 결과 추락의 원인은 바로 외부 연료 공급 장치의 결함으로 밝혀졌다는 것이다. 소수 정예의 전문가들이 수개월동안 조사를 거쳐 밝혀낸 사실을 대중이 모인 주식시장은 단 하루 만에 알아낸 것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작고 사소한 변화
인터넷 세상이 열리며 가장 많이 변한 분야 중 하나가 놀이 문화의 변화이다. 노는 방식이 나를 규정한다고 할 때 인터넷 놀이 문화의 양식은 나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작지만 큰 변화의 동력이 된다. 인터넷이 창출한 놀이의 방식은 무궁무진하다. 가령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신문 읽기 사례를 보자. 신문을 읽는 것은 정보를 취득하기 위함이다. 물론 심심풀이나 시간 때우기로 신문 읽기를 할 수 있지만, 누구도 신문 읽기를 놀이로 취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터넷을 통해 신문을 읽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그 자체가 놀이화되고 있다. 댓글 놀이가 그것이다. 흥미를 끌만한 기사가 올라가면 수백 개에 달하는 댓글이 올라온다. 문법이나 규칙을 깨고 변형시키는 반란이 일어난다. 인터넷을 통해 집단 지성이 생겨났다면, 댓글은 인터넷이 만들어 낸 집단 유희인 것이다. 정보통신 기술이 만들어 낸 가장 대표적인 유희는 게임이라 할 수 있다.
중독성, 대인관계의 차단 등 게임의 해악에 대해 수많은 비판이 쏟아져 나오지만, 이 책은 게임이 갖는 순기능을 주목한다. 사실 게임이 갖는 장점도 많다. 게임을 즐기다 보면 멀티테스킹 능력, 시행착오를 통한 학습, 자유롭고 모험적인 성향들을 배울 수 있게 된다. 게임을 하며 자란 세대들은 기존 세대에 비해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는 데 두려움이 적고 더 진취적일 수 있다는 특징을 갖게 된다. 따라서 미래 세계의 많은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게임 세대의 문화 코드를 주목해야 한다고 이 책은 충고한다.
네트워크화된 시민 또는 개인의 힘이 부상함에 따라 기존의 권력 관계가 변화하고 예술의 영역에서도 작가와 향유자가 직접 소통함으로써 창작 행위가 이루어지는 등 이 책은 권력과 예술의 영역에서 발생하고 있는 세상 변화의 디테일 코드도 함께 제시하고 있다. 세상을 움직이는 큰 변화는 작고 사소한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미래를 읽는 혜안을 얻기 위해서는 ‘마크로트렌드(Macro Trend)'보다는 ’마이크로트렌드(Micro Trend)에 더욱 주목해야 한다.
더구나 미래는 현재에 숨겨져 있다. 이 책은 ‘단지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뿐, 미래는 현재에도 있다’고 주장한다. 옳은 지적이다. 우리가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고 눈을 돌리면 미래 변화의 씨앗을 발견할 수 있다. 인터넷의 검색 창을 뒤지는 마우스 클릭 하나에도 미래 세상 변화의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작고 사소한 것이 사람과 비즈니스를 움직이는 현실에서 미래 세상의 구체적이고 디테일한 변화를 추적하는 이 책은 ‘미래를 소유하고자’하는 독자들에게 큰 영감을 주리라고 기대한다.
리 뷰 / 전 영재 수석연구원(삼성경제연구소)
저 자 / 팔란티리 2020 / 발행일 2008 / 328P / 가 격 ₩ 13,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