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유럽 최고봉 고커서스 산맥 엘브러즈 등정기 [2] *-

paxlee 2008. 7. 21. 22:54

 

                             유럽 최고봉 고커서스 산맥 엘브러즈(5642m) 등정기

 

3. 둘째 날(8월 1일)

   오늘은 엘브러즈 쪽으로 고소 적응하는 날이다. 9시에 버스를 타고 아자우(2,000m)로 이동하였다. 여기서 케이블카를 타고 가라바시(3,750m)로 올라가, 다시 스키리프트를 타고 바벨롯지(3,900m)까지 올라간다.

 

 

엘브러즈는 만년설이 있고, 경사면이 완만한 곳이 많아 사철 스키를 탈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케이블카와 스키리프트가 여러 곳에 설치되어 있다. 바벨롯지는 정상공격을 시작하는 전진기지이다. 여기서부터는 만년설이 계속된다. 안전벨트를 매는 연습과 열두발 아이젠을 착용하는 연습을 한다. 지금까지 등산하면서 안전벨트와 열두발 아이젠을 착용한 경험이 전혀 없다.

 

열두발 아이젠을 차고 걷는 것이 처음에는 어색하였으나, 곧 적응이 잘 되었다. 서서히 설면을 찍는 기분으로 착지하면서 걸었다. 엘브러즈의 서봉과 동봉이 눈앞에 있다. 마음속으로 정상 오름은 그렇게 어렵지 않겠다고 생각하면서 서서히 올라갔다. 일행 중 몇 사람은 고소를 느낀다면서 아주 천천히 걷고 있다. 행동식으로 점심을 때우고 물도 충분히 마시면서 올라갔다. 올라가다가 뒤돌아보면 카프카스산맥의 눈 덮인 연봉들이 하늘 끝까지 늘어져 펼쳐져 있다. 눈이 닿는 곳은 모두가 산이고 눈이다. 장관이다.

 

사진 샷타를 쉴새 없이 눌렀다. 사진 몇 장 못 찍고 또 방전이 되었다. 밧데리 세 개만 믿고 충전할 전선을 가지고 오지 않았는 것을 후회하였으나 소용이 없다. 앞으로는 준비를 더욱 철저히 하여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디젤롯지(4,200m)를 조금 더 올라 가다가 뒤돌아 내려 왔다. 오늘 고소 적응 훈련은 여기까지라고 현지인 가이드가 말한다. 바렐롯지를 거쳐서 스키리프트와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와서 뻐스를 타고 이트콜 호텔로 돌아 왔다.

 

3. 셋째 날(8월 2일)

   오늘은 숙소를 바렐롯지로 옮기고, 또 고소 적응 훈련을 하는 날이다. 바렐롯지에서 자고 내일 대망의 정상을 오르는 날이다. 고산 등산에는 일기의 변화가 절대적인 영향을 준다. 지금 몇 일간 날씨가 좋은 것을 보면 내일도 괜찮겠지 라고 일행 중의 한 사람이 말하니, 한국에서 간 가이드(이필윤실장)가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여기는 일기가 조석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시시로 변한다고 말한다.

 

일기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케이블카 타고, 스키리프트를 갈아타면서 바렐롯지에 도착하였다. 여기에는 짐을 날라주는 포터가 없어서 각자 자기 짊을 옮겨야 하는데 여간 힘이 드는 일이 아니다. 힘주다가 삐꺽 잘 못하여 몸을 다칠까, 고소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다.컨테이너 비슷한 롯지가 여러 개 있다.

 

한 롯지에 여섯 명이 잘 수 있게 되어 있다. 짐을 롯지 안에 내려놓고 간단한 중식을 하였다. 식욕이 좋은 나도 고산 탓인지 입맛이 별로 없다. 그러나 식사를 충분히 하는 것은 등산에 필수적이다. 집에서 가지고 온 고추김치로 입맛을 돋구고, 여기서 나오는 생 파를 고추장에 찍어서 먹으니 입맛이 돌아오는 것 같다. 메뉴는 계란후라이, 감자튀김, 빵, 치즈 등 다양하다. 가능한 많이 마시고 먹고, 많이 배설하여 신진대사를 활발히 하는 것이 좋다.

 

  

 날씨가 너무 쾌청하다. 우리가 오를 서봉이 눈앞에 있다. 내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게 정상에 오를 수 있을 같아 기분이 좋았다. 오늘은 정식 예행연습 날이다. 가능하면 파투코푸 바위(4,800m)까지 갔다 돌아올 계획이다. 안전벨트를 하고, 아인젠을 착용하고 서서히 심호흡하면서 올라갔다. 파투코푸 바위는 멀리서 보니 기역자 모양을 하고 있다. 쉽게 갔다 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걸어도 파투코푸 바위 모양은 가까워지지 않는다. 현지인 가이드도 지쳤는지 4,300m 지점에서 뒤돌아 가자고 한다.

 

예정한 지점을 도달하지 못하였으나, 뒤돌아 가자는 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마 모두 지쳐 있기 때문에 계속 올라가자고 주장하지 않고 가이드 의견에 순순히 따르는 것 같다. 내려오면서 바라보는 카프카스산맥의 조망은 어제와 같이 장관이다. 오후 4시경에 바렐롯지로 돌아 와서 휴식하면서 내일 산행에 대비하였다. 6시에 닭죽으로 저녁식사를 하였다. 죽 맛이 입에 맞는다. 한 그릇 먹고 닭다리를 하나 더 먹었다. 먹어야 힘을 비축할 수 있다. 내일을 위해 일찍 잠을 자야 한다.

 

그러나 잠이 잘 오지 않는다. 잠이 오지 않는다고 신경을 쓰면 더 잠이 오지 않는다. 옆 사람이 코를 골던지 하여 다소 신경을 쓰게 하는 일이 있어도 관심 두지 않고 눈을 감고 심호흡하면서 누워 있으면 대개 30분 이내 잠에 빠져들게 된다. 산장에서 자주 자 본 사람은 이러한 환경에 익숙해져 있다. 1998년 7월 30일 후지산을 오를 때 경험한 것인데, 새벽 등산을 위해 초저녁잠을 청하는 것을 가면(假眠)이라 하여 등산 스케쥴에 들어 있다. 내일을 위해 잠을 자자.

 

4. 넷째 날(8월 3일)

   일찍 일어난 대원들의 떠드는 소리에 잠이 깨었다. 밖에 눈이 펑펑 내린다. 2시에 출발 할 수 없고, 출발은 5시로 연기되었다. 4시에 아침을 먹고 눈이 많이 내리지 않아 5시에 출발하였다. 바렐롯지에서 스노우 카를 타고 파투코푸 바위까지 올라갔다. 여기서부터 걷기 시작한다. 눈이 많이 내리기 시작하고 바람도 점점 세게 불고 있다. 얼마 못 가서 두 사람이 고산증세로 못 가겠다며 내려갔다. 그 후 바로 세 사람이 또 내려가겠다고 한다.

 

한국인 가이드 이필윤실장이 내려갈 생각이 있으면 지금 의사결정을 하여야 한다고 한다. 지금 내려가지 않으면 현지인 가이드가 한 사람만 남았기 때문에 하산 안내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남은 일곱 사람은 정상까지 가야한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또 얼마 못 가서 박진순 선생이 못 가겠다고 말하면서 돌아가겠다고 한다. 그러나 가이드는 혼자서 뒤돌아 갈 수 없다고 말한다. 가이드 없이는 하산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숨이 가빠지기 시작한다.

 

킬리만자로 등정시 재미를 본 호흡법을 사용하여도 소용이 없다. 서서히 아주 서서히 한 발짝 한 발짝 앞으로 내디디면서 올라갔다. 그래도 숨이 가빠진다. 현지인 가이드가 한발에 한 호흡 식으로 하지 말고 한발에 호흡을 들이키고 내쉬라고 일러준다. 눈은 더 많이 내리고, 바람은 점점 세게 불고 있다. 바람이라기보다는 선풍기를 바로 앞에 놓고 강하게 불어대는 것 같다. 브라컬라(안면보호대)와 고글을 썼는데, 고글에 문제가 생겼다. 입김에 의해 고글에 성애가 끼여 앞이 아주 희미하게 보인다.

 

고글을 벗었다 썼다 가를 되풀이 하니 걷는데 이만저만 불편한 것이 아니다. 박진순 선생은 뒤에서 따라 오는지 아무 말이 없다. 일행 일곱 명중 어느 누구도 남을 생각할 겨를이 없는 것 같다. 5,200m라고 짐작되는 지점에 도달했을 때 눈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 도저히 전진할 수가 없다. 아무도 뒤돌아가자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 박진순 선생은 더 이상 말이 없고, 나머지 여섯 사람 중 아무도 내려가자는 사람이 없다.

 

더 전진하기 어려워 눈과 바람이 자기를 기다렸으나, 자기는커녕 점점 세게 불고 있다. 내 앞에 이원섭 변호사가 있고, 그 앞에 인천에서 온 두 사람이 있다. 내 뒤에는 세 사람이 저 멀리 서 있는 것 같다. 내가 이와 같이 눈과 바람이 심한데 더 전진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아콩쿠아를 다녀온 수원의 한만수 사장이 더 이상 전진하는 것은 무리라고 말한다. 하산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대부분이다. 한국인 가이드가 현지 가이드와 상의하여 하산결정을 내렸다.

  

 정상을 오르지 못하는 아쉬움과 하산하는 안도감이 겹쳐서 감정이 묘한 기분이다. 목사님의 등정성공 축복기도가 생각이 난다. 교인들 모르게 살짝 갔다와야 하는데…. 내 사랑하는 손녀와 손자들과 친구들에게 등정 성공담을 들려주어야 하는데…. 내려가는 길도 조심조심 하여야 한다. 경사면을 내려가는데도 자세히 내려보지 않으면 모두 평면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러한 현상을 화이트아�(white out)현상이라고 한다.

 

그래도 내려가는 것이 올라가는 것보다는 쉬운 편이다. 그러나 운무가 가득히 낀 경우에는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앞사람을 보고 가야하는데 조금만 쉬면 앞사람을 놓치기 쉽다. 앞사람의 모습을 놓치면 길을 찾기가 어렵다. 앞사람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피곤하여 쉬고 싶어도 쉴 수 가 없다. 오후 2시경에 파투코푸 바위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스노우카를 타고 오후 3시경에 바렐롯지에 뒤돌아 왔다.

 

첫 번째 정상 오름에 실패할 경우 예비하여 둔 예비 일이 있으나 내일은 너무 피곤하여 날씨가 좋아도 정상 오름을 포기해야 할 것 같다. 이번 등정은 소문이 너무 많이 나서 실패하고 돌아갈 경우 실패 이유를 댈 일이 마음에 거슬린다. 안전벨트와 아인젠을 풀고 저녁 때가지 휴식을 취하였다. 내일이 예비 일이기는 하나 모두 올라갈 계획은 없는 것 같다.

 

인천에서 온 이경희 아주머니만 안달이다. 이경희 아주머니는 40대 초반인 것 같은데 등산 경험도 많고, 우리 일행 중 가장 잘 걷는 분이다. 저녁을 먹고 자기는 이르고 이런 저런 등산 경험, 등산장비 등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정보를 교환하였다. 이러한 정보교환은 대단히 유용한 정보가 된다. 등산정보뿐만 아니라 기능성 등산장비에 대한 정보는 참으로 유용하다. 고글, 침낭, 장갑, 스틱, 고소내의 등 기능성 장비는 등산구점의 설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5. 다섯째 날(8월 4일)    

 어제 정상을 못 올랐기 때문에 오늘 정상을 다시 올라야 하나 이경희 아주머니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오를 용기를 못 내고 있다. 너무 피곤하여 날씨가 좋아도 못 오르겠는데 새벽에는 날씨마저 좋지 않다. 아침 먹고 짐을 꾸려 오후에 이트콜까지 내려가야 한다. 내려가는 길은 스키리프트와 케이블카를 이용하기 때문에 별 어려움이 없다. 정상 오름을 포기하고 내려가야 하니 아쉽기 짝이 없다.

 

그런데 점심을 먹고 나니 이필윤실장이 내일 정상 오를 생각이 있는 분은 안내하겠다고 말한다. 이경희 아주머니, 인천에서 온 박형식씨, 이원섭변호사, 수원에서 온 한만수사장 그리고 나 모두 다섯 사람이 가겠다고 신청하였다. 추가되는 가이드비용, 롯지방값 등 190달라를 더 부담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내일 새벽 1시에 출발하고, 내일 당일 이트콜까지 하산하여야 여행스케줄이 맞아떨어진다는 것이다.

 

오후 3시 30분까지는 바렐롯지까지 돌아와야 스키리프트와 케이블카를 이용할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걸어서 내려가야 한다는 것이다. 날씨가 좋기만 바랄 뿐이다. 날씨만이 정상 오름의 성공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저녁 12시에 일어나 아침 먹고 1시에 출발한다. 9시에 침낭에 들어가 잠을 청하였으나 잘 오지 않는다. 9시 50분경에 잠들었는 것 같은데 12시에 주위가 소란스러워 잠이 깨었다. 2시간 정도 숙면을 하였는지 머리가 맑고 몸이 가뿐하다.

 

6. 여섯째 날(8월 5일)

   새벽 1시에 스노우카를 타고 파투코푸바위까지 올라갔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고 별이 총총하다. 바람도 세게 불지 않는다. 오늘은 정상 오름에 성공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파투코푸바위에서 2시경부터 걷기 시작하였다. 눈이 낮에는 녹고 밤에는 얼고, 전날 등산객의 발자국 때문에 눈길에 요철이 심하다. 이러한 눈길을 열두발 아이젠으로 찍는 기분으로 걸으니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오르고 또 올라, 동봉의 허리쯤 되는 지점부터 오르는 길이 아니고 평탄한 길이 시작되었다. 평탄한 길이라고 하나, 산허리를 굽어 돌기 때문에 길 아래로는 경사가 심하여 조심하여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 때가 오전 7시경이라고 짐작이 간다. 파투코푸바위에서 여섯시간 동안 쉬지 않고 걸어온 셈이다. 시장끼를 느끼나 주머니에 있는 초코렛이나 초코파이를 꺼내 먹기가 싫다.

 

장갑을 벗어야 꺼낼 수 있는데 너무 추워서 장갑을 벗기가 귀찮다. 평탄한 길을 걷는데도 숨이 차다. 킬리만자로 등정시는 숨차는 것을 못 느겼는데 여기서는 숨이 너무 가쁘다. 조금 걷다가 밑으로 미끄러지고 말았다. 미끄러질 때는 등으로 미끄러지면 계속 미끄러지기 때문에 몸을 돌려 엎어서 미끄러지면서 아이젠이나 피켈로 찍어서 미끄러짐을 정지시켜야 한다는 사전 교육을 받았다. 7,8메터 미끄러진 지점에서 아이젠과 스틱으로 미끄럼을 멈출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현지 가이드가 바로 내려와서 나를 붙잡아 주었다. 다시 길 쪽으로 오르면서 미끄러진 곳을 내려다보니 경사가 급하고 길이도 길다. 8시경에 안부(鞍部)에 도착하였다. 앞서 간 이경희 아주머니는 보이지 않고, 한만수사장과 박형식씨가 기다리고 있다. 이경희 아주머니는 이필윤가이드와 같이 앞서 올라 간 모양이다. 홍삼절편을 먹고, 초코렛을 먹으면서 시장끼를 때웠다. 안부의 건너편 서봉 오르는 경사면에 햇빛이 나기 시작한다.

 

햇빛이 나면 추위는 면할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안부에서 서봉 오르는 경사면은 급경사이기 때문에 안전벨트에 자일을 매고 올라가야 한다. 현지인 가이드가 맨 앞, 박형식, 나, 맨 뒤에는 한만수 사장이 자일로 연결하여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급경사라 미끄러지면 대단히 위험할 것 같다. 20보만 걸으면 숨이 차다. 숨 찬 것을 진정시키기 위해 20보만 걷고 서서 숨을 다스려야 한다. 현지인 가이드가 일러준 호흡법으로도 숨이 차기는 마찬가지이다. 조금 쉬면 현지인 가이드가 너무 늦다고 하면서 걸음을 재촉한다. 오후 3시 30분까지 바렐롯지까지 내려가야 스키리프트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금 더 천천히 걸으면 되겠는데 쉬면 계속 독촉이다. 너무 자주 쉬니 "go!" "go!" "Korean strong!"이라면서 격려 반 질책 반으로 계속 독촉이다. 천천히 걸으면 그렇게 어렵지 않게 올라 갈 수 있는데 걸음을 독촉하니 몸과 마음 이 더 바쁘다. 고군분투의 심정으로 앞으로 발을 내디디면서 서서히 전진하였다. 그 동안 연습을 착실히 하였는데, 나는 아무리 어려워도 올라 갈 수 있다고 스스로 자신감을 불어넣으면서 올라갔다.

 

그러면서도 왜 이런 어려움을 사서 고생하는지 자문해 보기도 하였다. 인내를 해야한다. 인내력을 키워야 한다. 이 나이에 인내력을 키워서 무엇에 쓸려고…. 아아! 요즈음 배우는 한문공부에 더 인내력을 가지고 매진하자!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듯이 한문도 극복해 보자! 왜,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하는지. 아마 고통스러워  별의 별 생각을 다 하게 되는 모양이다. 9시 30분에 드디어 급경사를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가이드가 자일을 풀고, 가방을 내려놓고 정상을 갔다 오라고 한다. 정상에 갔다오는 이경희 아주머니와 이필윤가이드를 만났다. 이필윤가이드는 켐코드를 촬영하기 위해 우리와 같이 다시 정상으로 갔다. 여기서 조금 오르니 눈도 적고 멀지 않는 곳에 정상이 보인다. 바람이 너무 심하여 눈이 붙어 있을 수 없다. 길은 좋은 편이나 대신에 바람이 너무 세차다. 날라 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전 10시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내 자신도 모르게 ‘대한민국 만세’를 불렀다.

 

너무 어려움에 대한 감정의 표현인 것 같다. 정상에는 돌이 하나 있고, 돌에는 알 수 없는 국기 같은 것이 둘러져 있다. 오늘 꼭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다. 올라오면서 오늘은 잊지 않아야 한다고 다짐한 것이 있다. 가족, 교회, 학교, 나라를 위한 중보(仲保)기도 다짐이다. 간단히 그러나 경건하게 기도를 드렸다. 후지산, 키나바루, 킬리만자로를 올랐을 때 기도한다는 것을 늘 잊어 먹었다. 기도를 하고 나니 마음이 깨운 하다. 정상 기념 사진 몇 장 촬영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서북쪽으로는 황량한 들판이 보이고 동남쪽으로는 눈 덮인 산뿐이다. 시간을 두고 감상할 여유가 없다. 바람이 너무 세차서 몸이 날라 갈 것 같다. 산은 정상에 오르고 나면 할 일을 다한 때문인지, 올랐다는 안도감도 잠시 뿐이고 다시 내려가야 하는 걱정이 앞선다. 산 오름의 만족은 오르지 못할 경우의 아쉬움을 대신하는 것으로 족한 것 같다. 그러나 정상 오름은 그 자체만으로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을 마음속에 간직하게 된다.  

 

정상에서 조금 내려오니 이원섭변호사(65세)가 가이드와 같이 올라오고 있다. 이변호사는 몇 번 포기할 생각을 하다가 올라온다고 말한다. 이변호사는 위암수술도 하였고, 심장혈관 수술도 하였다는 분인데 참으로 대단한 분이다.  가방을 내려놓은 지점에 돌아왔다. 지금까지 귀찮아서 누지 않고 참았던 소변을 보았다. 너무 참은 탓인지 소변이 시원하게 나오지 않는다. 초코파이 한 개를 먹고 물도 마셨다. 다시 자일을 연결하고 경사면을 내려 왔다. 내려오는 길은 쉬운 편이다.

 

안부에서 자일을 풀고 천천히 내려갔다. 쉬지 않고 걸었기 때문에 다리가 너무 무겁다. 조금 쉬면 가이드의 독촉이 빗발친다. 오후 2시 반경 파투코푸바위에 도착하였다. 여기서부터는 스노우카를 타기 때문에 안도감의 숨을 쉴 수 있었다. 안도감은 잠시뿐이다. 스노우카가 올라 올 수 없다는 것이다. 이유는 뭐라고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다. 러시아라는 것이 이렇다는 것이다. 항의도 할 수 없고 걸어서 바렐산장까지 내려가서 다시 이트콜까지 내려 갈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하다. 가이드가 다시 자일을 매라고 한다.

 

운무가 자욱하여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자일을 매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힘을 내어 내려가야 한다. 그래도 내려가는 길은 숨이 차지 않아서 다행이다. 믿을 것은 내 다리밖에 없다. 마음을 그렇게 먹고 나니 다리 무거움도 덜한 것 같다. 이러한 것도 그 동안 청룡산을 오르내리면서 훈련한 덕택이라고 생각하였다. 3,40분 내려왔을까 하는 지점에서 스노우카가 다시 올라온다고 가이드가 말한다. 아이젠을 벗고 잠시 기다리라는 것이다. 아아! 이 고마움 무어라고 형용할 수 없다.

 

   오후 4시에 바렐롯지에 도착하였다. 새벽 1시에 출발하였으니 15시간 산행을 한 셈이다. 이필윤가이드가 차 한잔 마시고 내려갈 준비를 하라는 것이다. 너무 지쳐서 차 마실 생각이 나지 않는다. 스키리프트와 케이블카가 움직이는 지를 알 수 없다고 하면서, 움직이지 않으면 걸어서라도 내려가야 한다는 것이다. 바렐롯지와 이트콜과의 높이의 차이는 1,900m 정도이다. 이 사이는 눈길이 아니어서 걷는데는 어려움이 없을 것 같다.

 

스노우카의 경우와 같이 혹시 좋은 소식이 있지 않겠냐는 기대를 하면서 하산할 짐을 꾸렸다. 침낭 등 무거운 짐은 어제 내려보냈기 때문에 짐은 무겁지 않고 간편하다. 아니나 다를까, 스키리프트와 케이블카가 내려간다는 것이다. 오후 5시 반경에 이트콜의 호텔에 도착하였다. 어제 내려 온 분들이 등정성공을 축하하여 주었다. 오후 7시 30분경에 소고기 바비큐가 예정되어 있다. 식당에 소고기 바비큐는 준비가 되지 않아서 없고, 양고기 꼬치 구이만 있다는 것이다. 양고기 구이 맛이 소고기 못지 않다.

 

이원섭변호사가 맥주를 사고, 보드카가 나왔으나 나는 마실 수가 없었다. 나의 알레르기 기관지염이 도졌기 때문이다. 올 때 예방약을 지어오지 않았음을 후회하였으나 소용없는 일이다. 만사 준비를 잘 하여야 하는데 이 나이가 되어도 준비에는 소홀한 면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등정의 성공을 하나님에게 감사기도 드리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등산인에게는 오늘이 제일 행복한 날이다. 다음에는 어느 산을 오를까. 등산인에게는 항상 오를 산이 있어 행복하다.

 

          - 글 / 정기숙 / 동성주막(東城酒幕) / http://blog.naver.com/sudony 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