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몽블랑 산군 *-

paxlee 2008. 8. 8. 19:48

 

                      X-Dreams 원정대 ③ 몽블랑 산군

 

샤모니 지역…아르장티에르·투르·몽블랑
알피니즘 역사 숨쉬는 ‘산악인의 에덴동산’

 

우리나라 산악인들은 샤모니에서의 등반 하면 대부분 몽블랑에 주력하고 있다. 그러나 몽블랑 산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바로 아르장티에르 지역이다. 샤모니에서 버스로 약 20여분 거리에 위치한 아르장티에르 산군은 아르장티에르 마을에서 그랑몽테(Grands Montets·3295m)까지 케이블카를 이용해 약 2시간 정도 빙하지대를 내려가면 등반기점인 아르장티에르 산장(Ref. d’Argentiere·2771m)에 도착할 수 있다.

 

알프스 황금기에 선구자들이 초등을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에귀 드 아르장티에르(Aiguille du Argentiere·3902m), 에귀 베르트 북벽(Aiguille du Verte·4122m), 레 드로와트 북벽(Les Droites·4000m), 레쿠르트(Les Courtes·3856m), 에귀 드 샤도넹(Aiguille du Chardonnet·3824m) 등의 무대에서 알피니즘의 역사를 느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곳이 ‘알피니스트의 파라다이스’, ‘클라이머들의 에덴동산’이라 불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공감하기 때문이다.

루트 선택이 힘든 아르장티에르 산군

아르장티에르 산군은 이곳을 찾은 등반가들로 하여금 오르고 싶은 유혹에 빠져들게 한다. 에귀 드 아르장티에르는 1864년 7월 15일 영국의 에드워드 윔퍼 일행과 가이드 미셀 크로즈 등 5명에 의해 서면 플랭크와 북서릉으로 초등된 곳이다.

 


연이은 날씨의 악화로 샤모니 숙소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일기가 좋아진다는 기상예보에 서둘러 간단한 장비만을 가지고 나섰다. 아르장티에르 행 버스에 탑승 후 아르장티에르 스키장 입구에서 하차한 다음 그랑몽테로 오르는 케이블카에 탑승했다. 필자와 김흥준·조창권 선배 등 소수인원으로 등반을 하자니 모든 것이 신속하다. 케이블카 중간역인 로그농 역에서 케이블카를 갈아타고 그랑몽테 역에 내리니 프티 베르트가 바로 눈앞에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거의 마지막 케이블카를 탑승한 늦은 시간이라 몇몇 팀만이 등반준비를 하고 있었다. 크램폰을 신고 아르장티에르 빙하로 내려가기 위해 장비를 착용하니 어느덧 4시 정도가 되었다. 이내 일행은 안자일렌을 하고 가파른 설원지대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초입부터 눈이 허벅지까지 빠지더니 어느덧 단단하게 크러스트 된 눈으로 바뀌고 중간 중간에 크레바스가 산재되어 있어 각별한 주의를 요했다.

 

약 2시간에 걸쳐 바위섬(Island of Rock·3000m)에 도달, 잡석과 빙하가 어우러져 있는 로낭 모레인(Rognons Morain)지대를 지나 맞은편에 위치한 산장을 향해 분주하게 횡단을 하였다. 산장에 도착하니 수많은 등반가들이 가이드를 대동한 채 내일 등반을 위해 모여 있다. 간신히 숙박할 방을 배정 받고 다음날 올라갈 루트를 위해 지도정치를 해보지만 시작기점의 접근로조차 오리무중이다.

 

결국 노멀루트인 밀레우 빙하(Gl.du Milieu)의 설벽을 오르기로 결정하고 자리에 누웠다. 새벽 3시, 장비를 준비하는 다른 산악인들 때문에 잠에서 깨어 서두른다. 일행 중 조창권 선배는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아 산장에서 기다리기로 하고 필자와 김흥준 선배 2명이서 등반준비를 했다. 새벽 4시경 산장 밖을 나가니 그 많던 산악인들이 그새 어디론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산장 우측상단에 희미한 헤드랜턴 불빛이 관측되어 부리나케 그곳을 뒤따른다.

 

간신히 그들과 합류해 아르장티에르로 올라갈 루트를 물어보니 잘 모른다고 한다. 그들은 이 부근의 암벽을 등반하기위해 오르는 중이라 한다. 우리는 정반대 방향으로 올라 온 것이었다. 황급히 오던 길을 다시 내려와 좌측상단의 암벽너덜지대를 횡단한다. 저 멀리 희미한 랜턴에서 발하는 빛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가니 이태리의 젊은 산악인들이 등반을 위해 크램폰을 착용하고 있었다. 바로 이곳이 등반을 위한 기점이었다.


어느덧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등반 후 늦어도 12시전에 산장을 도착하지 못하면 그랑몽테 역에서 케이블카를 탑승하지 못할 것이다. 김흥준 선배와 나는 안자일렌을 하고 설원지대를 오르기 시작하였다. 아주 지루한 설원지대를 오르니 이내 가파른 설벽이 나타난다. 상단에 등반하고 있는 등반가들이 이동할 때마다 떨어트리는 낙빙과 낙석이 신경 쓰인다.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어려운 구간이 나오면 로프를 고정시켜 후등자는 어센더를 사용하는 시스템으로 올라간다. 부분적으로 바위지대가 돌출된 곳으로 믹스등반하는 것이 위에서 떨어트리는 낙석을 피하는 최상의 방법이었다. 12시나 되어서 이윽고 정상에 도착했다. 에귀 드 베르트, 드로와트, 레 쿠르트의 침봉들이 한눈에 조망된다. 예상보다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되어 결국 오늘 하루를 산장에서 더 머무를 수밖에 없다고 판단, 하산길을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간단한 사진촬영 후 설벽을 내려가기 시작해 산장에 도착한 시간이 3시. 나중에 안 일지만 우리가 오른 루트는 등반루트와 하산루트가 별도로 있으며 대부분 내려올 때는 북서릉으로 내려오는 것이 안전하다고 한다.


에귀 드 아르장티에르의 등반 루트
1. 남서면 : 경사도 50°, 알파인 난이도 PD+, 등반고도 400m, 등반거리 1200m, 4~5시간(산장 기점)
2. 서면&북서릉 : 암설빙벽 혼합등반, 빙벽구간 경사도 45°, 난이도 PD, 소요시간 5~6시간 
3. 북벽 : 평균경사도 50° 난이도 D, 등반고도 600m  소요시간 3~6시간
4. 북동벽 : 평균경사도 49°, 최대경사 55°, 난이도 III~IV, D, 등반고도 700m, 소요시간 4~6시간
5. 동벽 : 평균경사도 45°, 최대경사도 50°, 난이도 AD,  등반고도 600m, 소요시간 5~6시간
6. 동남동릉 : 경사도 50°, 난이도 AD III, 등반고도 350m, 등반거리 1000m, 소요시간 5시간
7. Y-쿨르와르 : 설벽등반 AD급, 경사도 45° 등반고도 550m, 소요시간 4~5시간
8. 자뎅 리지 : 난이도 III~IV+, 등반고도 900m, 등반거리 1500m, 소요시간 9시간

 

 

홀로 등반한 투르 북봉

에귀 드 투르(Aiguille du Tour·3544m)는 샤모니 산군의 북쪽부분에 위치한 프랑스와 스위스 경계에 솟아 있다. 이곳은 남봉과 북봉으로 정상이 나뉘어져 있는데 북봉이 2m 더 높다. 프랑스 쪽에서는 라 투르 마을에서 약 1시간 30분 정도 오르면 등반기점인 알베르 프레미어 산장(Albert premier·2702m)에 도착할 수 있다. 북봉 정상 하단부에는 평평한 책상을 연상케 하는 특이한 바위가 걸쳐져 있는데 이것이 유명한 테이블 록(Table rock)이다.


김형주, 윤재학, 김흥준, 조창권 등 4명과 현지에서 만난 프랑스 외인부대 산악부대원 5명이 샤모니에서 버스를 이용해 라 투르 마을에 도착했다. 이후 스키리프트를 타고 8부 능선쯤 도착하여 본격적인 등반기점인 알베르 프레미어 산장을 향해 걷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이곳을 찾는다. 옷차림을 보니 대부분 등반하러 온 것 같지는 않고 하이킹을 즐기며 산장까지만 갔다가 되돌아오는 것 같다. 산장에 도착하니 등산객들로 만원이다. 간신히 우리가 오늘 묵을 방을 배정 받고 오랜만에 일광욕을 즐겨 본다.


새벽 2시 30분 기상. 벌써 많은 산악인들이 등반을 위해 분주하다. 간단히 조식을 먹은 후 외국 등반대들과 함께 산장을 나선다. 산장 우측의 바위 너덜지대를 지나 설원에 들어서니 여명이 움트기 시작한다. 지루한 설릉을 넘어 암벽과 설빙벽이 혼합된 쿨르와르에 이르면 등반 기점이다.
장비를 착용하고 혼자 먼저 오르면서 루트 파인딩을 하면 윤재학 선배가 나머지 대원들을 인솔해 오르기로 했다.

 

앞서가는 팀들이 간간히 떨어트리는 낙석과 낙빙들이 온 신경을 곤두서게 한다. 아주 좁은 걸리를 오르는데 모든 돌들이 마치 세락 지대처럼 암벽에 걸려 있어서 낙석의 위험이 너무 크다. 약 100여m 올라 일행을 기다리는데 도무지 나타나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단독으로 등반을 시작해 그들이 보일 수 있는 곳까지 오른다. 밑에 오르는 대원들을 찾아보니 한 대원이 쏜살처럼 뛰어 내려가고 나머지 대원들도 내려가는 것이 아닌가? 사고가 난 것이라 생각하여 소리를 질러보았지만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는다.

 

여러 번 소리를 질러 대충 한 대원이 낙석에 맞아 모두 하산한다는 걸 알아냈다. 먼저 올라온 나로서는 매우 난감한 것이 로프도 없이 꽤 올라왔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다운 클라이밍하기도 힘들지만, 특히 상단에 오르고 있는 다른 팀들이 떨어트리고 있는 낙석과 낙빙 때문에 하강하기에는 위험했다. 그래서 일단 정상에 올라 다른 루트로 하산하기로 정했다. 아주 불안정한 암벽으로 이어진 암릉을 100여m 오르니 이윽고 정상에 도달한다.

 

하산길을 살펴보니 불안정한 리지를 횡단해야 안전하게 하산할 수 있고 올라온 설벽으로 내려가자니 얼어붙은 빙벽과 가파른 설벽이 위험해 보인다. 고민하던 중에 3명의 프랑스 산악인들이 정상에 올라오기에 그들에게 정보를 요청하니 리지를 따라 내려가는 것이 안전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하산루트에 동행을 시킬 눈치인데 그들의 호의에는 고맙지만 아래에 있는 대원들을 생각해봤을 때 가능한 한 빨리 하산해야 할 것 같아 설벽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다행히 다른 팀들은 모두 리지 루트로 하산하는 관계로 일단 인위적인 낙석과 낙빙은 없으리라 생각하며 급경사에서는 클라이밍다운으로 웬만한 경사에서는 클라우칭 글리세이딩(무릎을 완전히 구부린 자세로 미끄러져 내려오는 하산법)으로 쏜살처럼 내려왔다. 산장에 도착하니 낙석을 맞은 김흥준 선배와 다른 대원 1명만 먼저 내려가고 나머지 일행들은 내려가려고 준비 중이었다.

 

아침에 출발했던 다른 외국팀들 역시 아직까지 내려오지 않은 걸 보니 암릉으로의 하산이 비교적 안전하기는 하지만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낙석사고는 우려한 것과는 달리 그다지 심한 것 같지 않아 천만다행으로 느껴졌다.

 

몽블랑을 향한 38시간의 노력


등산장비나 루트가 좋아진 지금도 선택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접근을 허락지 않고 있는 몽블랑. 그곳에 꼭 오르고 싶었다. 가이앙에서 암벽등반도 해보고, 설상훈련도 받고, 다른 여러 곳을 오르기도 했지만 그래도 궁극적인 목표는 처음부터 몽블랑이었다. 남은 3일의 일정을 어떻게 하면 알차게 마무리할 수 있을까 하는 주제로 전체회의가 열렸다. 몽블랑 등정은 너무 촉박해서 불가능해보였지만 태수형님이 몽블랑 행을 선택했다.

 

아무도 동참하는 분이 없어 내가 고민하는 찰나 태수형이 “범훈아! 너도 가야지!”라고 말했다. 결국 갈 수 있는 데까지라도 가보자는 생각으로 짐을 꾸렸다. 10시 40분, 몽블랑 구테 구트의 출발점이 되는 르 우쉬 행 버스에 올랐다. 11시경 르 우쉬 마을에 도착해 바로 케이블카를 타고 벨뷔(1785m)에 도착하니 시원하게 전망이 트였다. 이곳부터는 산악열차를 타고 니데글(2372m)까지 가야한다. 그런데 매표소에 가보니 열차운행을 중단했다고 한다.

 

지도를 보니 걸어서 두 시간은 걸릴 거리였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가파른 길을 올라 마침내 니데글 산장이 보일 무렵은 벌써 오후 2시였다. 그곳에서 잠시 배낭을 벗고 허기진 배를 채우기로 했다. 앉을 자리도 없이 빽빽한 산장의 매점 앞으로 기다란 줄이 서 있었다. 사람들이 커다란 빵과 커피를 쟁반에 받아가는 것을 보고 우리도 줄을 섰다. 족히 한 시간을 기다려서야 차례가 왔는데 “피니시, 피니시”하며 끝났다는 것이다. 할 수 없이 핫초코 두 잔으로 허기를 때웠다. 아, 몽블랑을 향한 길이 이렇게 험난하다는 것인가?

 


온통 바위투성이로 가파른 길을 가다보니 달빛이 비치기 시작한다. 왼쪽으로 작은 무인산장이 보이긴 하지만 아직 두 개의 산장을 더 지나야 한다. 밤새 걷더라도 구테 산장까지는 가야했던 것이다. 두어 시간을 더 걸어 테테로제 산장(3167m)에 도착했다. 이제 고도 650m만 더 오르면 된다. 테테로제 산장에서 간단한 행동식을 먹고 곧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추위와 배고픔, 여러 가지 생각 끝에 4시간여를 올라 가까스로 구테 산장(3817m)에 도착했다.

 

새어나오는 불빛을 따라 문을 여니 사람들로 가득 차있다. 겨우 틈을 비집고 들어가 잠자리를 마련했다. 바람과 이슬만 피해도 이만하면 호텔이다. 자정쯤 잠이 들었는데 새벽 2시쯤 사람들의 시끌벅적한 소리에 깨어났다. 하지만 우리는 아침 7시까지 휴식을 취하고 올라가기로 했다. 얼마간 더 눈을 붙인 후 침낭을 정리해 배낭은 한쪽 구석에 두고 출발. 몸은 가벼웠지만 고도가 높아서인지 오를수록 힘이 들었다.

 

하얀 능선을 따라 두어 시간을 걸었을까? 드디어 마지막 산장인 발로 산장(4362m)이 보인다. 멀리 알프스의 이름 모를 봉우리들이 흰 모자를 쓰고 솟아있다. 정상은 바로 코앞인데도 계속 멀어지는 것 같았다. 마음속으로 발걸음을 헤아리기 시작했다. 50보를 오르고 숨을 고르기로 하며 얼마를 헤아렸을까? 12시가 조금 안된 시간에 드디어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은 너른 평원이었고 자그마한 비석도 없는 휑한 눈 봉우리였다.

 

남아있는 것은 사람들의 무수한 발자국 뿐. 10여분 동안 부지런히 기념사진을 찍고 360도를 빙빙 돌려가면서 셔터를 눌러댔다. 알프스의 모든 산군이 우리에게 잘 왔다고 박수를 보내는 기분이다. 때마침 정상을 올라온 3명의 외국인에게 사진을 부탁해 촬영하고는 곧바로 하산을 시작했다. 오늘 내에 샤모니로 돌아가야 했기에 거의 뛰다시피 구테 산장으로 내려오니 오후 3시, 남겨두었던 배낭을 둘러메고 니데글로 출발이다.

 

하산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체증이 일어난다. 사람들을 헤치고 니데글에 도착하니 오후 5시 30분. 6시에 벨뷔에서 출발하는 마지막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지만 결국 케이블카는 타지 못했다. 다행히 케이블카 역에 잠시 있으니 트럭 한 대가 올라왔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트럭에 오르기에 짐칸을 얻어 탔다.

 

그런데 덜컹거리며 비포장도로를 내려가던 트럭이 닿은 곳은 마을이 아니라 언덕 위의 호텔이었다. 자기네 호텔에서 1인당 100달러를 내고 밥 먹고 자고 가라는 것이었다. 결국 르 우쉬 마을까지 지친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오후 11시가 다 되어서야 어두운 숲길을 벗어났고, 샤모니 숙소에 도착한 시간은 자정이 되어서였다. 38시간 동안의 몽블랑 등정은 그렇게 마무리 되었다.

 

 /김형주 서울등산학교 대표강사·이범훈 원정대원·사진 원정대 / 월간 마운틴 20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