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재식의 사진여행] 한강 아리수 이야기 *-
때론 유유자적하게, 때론 격렬하게 담아라
- 남한강 아라리…가수리~영월 덕포까지 아름다운 산수 펼쳐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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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가 지기도 전에 무서리가 내렸다. 푸른 빛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 힘 쓰는 나뭇잎과 햇빛은 점점 더 멀어질 뿐. 온기가 점차 사라진다는 것은 참 허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지난날의 화려했던 모습을 떠나면서 계절은 다시 또 새로운 시작을 알린다.
두터운 구름 사이로 한 줄기 빛을 기다리는 동안 남한강의 새들이 서쪽 하늘로 날아올랐다. 카메라의 초점이 그곳에 멎는다. 붉은 기운이 남아있는 허공에 실루엣이 되어주길 바라며 셔터 버튼을 눌렀다.
일상의 풍경들은 특별한 모습이 아니어서 오히려 정겹다. 햇빛을 삼킨 구름과 날아가는 새들이 그렇다. 만일 하늘에 새들이 없다면 심심한 빈 하늘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럴 때의 별것 없는 풍경이란 종종 역발상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진부함에 빠지지 않고 새로운 시각을 갈구하는 것이 사진가의 고민이며, 또한 사진 찍는 재미가 아닐까 한다.
- ▲ 황금빛 이삭 위로 떠오른 남한강의 정겨운 나무들./크고 넓은 품을 지닌 남한강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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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가 사라지니 남한강의 물빛은 희미해졌다. 할 일 없이 숲을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있는 듯. 터벅터벅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다. 귀가 솔깃해진다. 그러나 바람소리에 다름 아니다. 어느새 길은 하늘에 닿아있고 듬성듬성 자라난 풀섶 넘어 몽환의 세상이 나타났다. 잊고 지낸 기억들이 불현듯 떠오른다. 저녁 하늘에 꼬리 올리는 연기가 적막한 풍경을 일깨우고 어스름이 짙어가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못한다. 바짝 말라가는 10월의 남한강은 허허롭기 그지없는데, 그 길에서 자라난 잡초는 참 기운차다. 잡초 무성한 남한강이 바로 세상에서 제일 낮은 현장이다.
어린 시절의 한강은 마치 바다와 같았다. 마포에는 새우젓 배가 드나들었고, 인적 드문 강 건너 세상은 호기심과 상상력의 원천이었다. 정비되지 않은 불규칙한 강의 자연스러움을 알게 된 것은 어른이 되고 한참을 지나서였다. 민족의 삶과 애환을 고스란히 품어 온 한강. 서울 사람들은 누구나 한강에 관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산이 신성을 차지하며 지내오는 동안 강은 삶을 이끌어 왔으며 내리사랑처럼 아래로만 흘렀다.
- ▲ 마지막 가는 빛을 쬐고 있는 고추잠자리./무성한 숲을 이루고 있는 남한강.
- 민족의 삶과 애환 고스란히 품어
우리 민족이 한강에 기대어 살기 시작한 때는 기원전 5,000년 이전의 석기시대를 꼽는다. 하지만 불과 100년 전의 역사만 해도 감당키 어려울 만큼 다사다난하다. 한강에서 멱 감고 물놀이하던 과거도 그 안에 작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한강은 ‘한가람’에서 비롯되었다. ‘한’은 크고 넓다는 뜻이며, ‘가람’은 강의 옛말이다. 크다는 뜻을 지닌 우리말엔 아리라는 말이 있다. 고구려 시절엔 한강을 아리수라 했으며, 광개토대왕비에도 그렇게 적고 있다.
남한강은 백두대간 상의 오대산, 태백산, 함백산, 대덕산 등지에 그 수원을 대고 있다. 인적 드문 산골 소년이 도시로 가면서 성장하는 과정처럼 남한강도 그 같이 흘러 우리 곁에 존재한다.대덕산 검룡소의 샘과 오대산 우통수가 발원을 이루어 흐르던 물은 정선에 이를 때까지 오대천, 옥동천, 지장천 등 정겨운 이름을 지닌다.
- 새벽안개부터 노을까지 풍경도 다양
정선 아우라지를 떠난 떼꾼들은 가수리에서 점재나루, 나리소, 소동, 제장나루, 소사, 연포, 가정나루, 절매, 문희, 황새여울, 진탄나루, 문산나루, 어라연, 만지 등의 동강을 떠내려가며 영월의 덕포에 이를 때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아름다운 산수에 취하기도 했다. 그때 삿대질에 흥얼거리던 타령이 바로 아라리였다.
단양 꽃거리, 제천 청풍, 충주 목계·달천, 여주 이포, 양평, 양수리, 팔당, 광나루, 뚝섬, 서빙고, 노량진, 마포까지 보름에 걸친 여정을 끝내면 돌아가는 길엔 또다시 주막을 거쳐야 했다. 술판을 벌이며 부르던 소리 역시 정선아리랑이었다. 그 당시 어라연 만지나루에서 구성진 가락으로 떼꾼들을 울고 울렸던 주모 전산옥 이야기는 이제 하나의 전설이 되어간다.
"눈물로 사귄 정은 오래 가지만
금전으로 사귄 정은 잠시 잠깐이네
돈 쓰던 사람이 돈 떨어지니
구시월 막바지에 서리 맞은 국화라
놀다가세요 자다가세요
그믐달 초승달이 뜨도록 놀다가세요
황새여울 된꼬까리에 떼를 띄워 놓았네
만지산에 전산옥이야 술상 차려 놓게나
오늘 갈지 내일 갈지 뜬 구름만 흘러도
팔당 주막 들병장수야 술판 벌여 놓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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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 넓어지면 마을이 커지고 사람들도 많아진다. 영월의 강폭은 계방산에서 흐르는 평창강과 태기산으로부터 흘러내리는 주천강이 합류하면서 넓은 폭을 지니게 된다. 여기서부터 동강과 대별되는 서강으로 불린다. 단양·충주땅을 거쳐 여주에 이르면 다시 섬강이란 물줄기 하나를 더 받아들인다. 섬강은 태기산이 서쪽으로 흘려보낸 물과 한강기맥 상의 봉복산의 물줄기가 합쳐진 아름다운 강이다.
모든 물을 규합하며 낮은 곳을 따라 흐르던 남한강은 양평을 지나 두물머리 양수리에 이르러야 그제서 기나긴 천리 여정을 접는다. 그리고 금강산에서부터 흘러온 북한강과 상봉하여 한강이란 이름을 얻게 된다.
풍경이란 사진가의 시각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려니 해도 이쯤 되면 한강을 보는 시선이 참 복잡해진다. 도시에 가까워지면서 모래가 아름다웠던 미사리부터 놓인 다리 이름을 다 외우기도 힘들다. 스스로 형태를 갖지 못하고 담겨지는 곳에 따라 모습을 갖는 게 강인데. 개울에서 폭포가 되고 강이 되며 종래에는 바다에 도달하는 자유로운 모습이 참 많은 생각을 일깨운다. 날이 어두워 더 이상 분간이 어려워졌고, 남한강의 흐름을 좇던 시선을 접는다. 강을 보는 사진가의 시각도 흐르는 물을 닮아 가면 좋겠다. 편안하고 유유자적하며, 때론 역동적이면서도 격렬한 모습처럼 한강은 흐른다.
- ▲ 하늘을 장식하는 잎 떨어진 나무. / 두터운 구름 사이로 빛을 발하는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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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강의 촬영요소들
백두대간의 대덕산과 오대산으로부터 흘러내리는 남한강은 길이도 길고 유역도 넓다. 천 리가 넘는 남한강을 소재로 사진 찍는 것은 어찌 보면 무의미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강가의 풍경들은 의외로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남한강은 정선 영월 지역에서 동강의 이름으로 흐르고 서강의 이름으로도 존재하며, 여러 물줄기와 합류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풍경을 낳는다. 동강 하나만 하더라도 많은 작업이 이루어져 왔고, 지금도 계속 사진가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남한강을 찍는다는 것은 지리적 풍경 또는 남한강 유역의 풍물이 될 수도 있다. 남한강의 촬영 대상이 자연스러운 풍경이라면 지리적 한계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미 수도권에 가까워진 한강은 인공적인 분위기를 배제하기 힘들다. 자연스런 모습은 여주 근방이 종점에 가깝다. 물론 사람에 따라 한계선은 다르다.
강의 풍경을 찍기 위해서는 새벽안개 끼는 이른 아침을 선택하거나 노을 지는 저녁 무렵의 광선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강의 풍경이란 딱 짚어 말하기 어렵기 때문에 쓰이는 렌즈의 종류 역시 제한이 없다. 광각렌즈에서 200mm 이상의 망원렌즈가 맑은 날엔 유효할 것이다.
남한강 가는 길
남한강은 강원도, 충청북도, 경기도에 걸쳐 있다. 이곳은 정선과 영월의 동강 가는 길이기도 하고, 섬강이 흐르는 여주와 양평에 이르는 길이기도 하다. 서울에서는 양평, 여주, 충주, 단양, 영월에 이르는 37번 국도와 36번 국도를 이용하여 간다. 내륙고속도로와 중앙고속도로가 북에서 남으로 부분적으로 연결되긴 하지만 , 영월에서 평창은 31번 국도, 평창에서 정선에 이르는 길은 42번 국도를 타고 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영월에서는 59번 국도로 신동을 거쳐 동강을 관통하여 정선으로 갈 수도 있다. 남한강의 원류가 되는 오대산은 영동고속도로가 진부까지 연결되며 대덕산은 영월에서 사북~고한으로 이어지는 38번 국도를 이용하여 간다.
- 글 : 사진 / 손재식 사진가 / 월간 산 [469호] 2008.11월호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