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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도대체 뭐냐? *-

paxlee 2008. 12. 31. 13:13

  사진기자가 내리는 사진의 정의


"시각적으로 머리에 담을 경우 사진이 기억의 기본 단위가 된다. 인간이 기억하는 역사적 사건들도 비디오 화면이 아니라 스틸 사진이다. 프레임에 고정된 기억, 그 기억의 기본적인 단위는 어디까지나 단 하나의 이미지인 것이다." 하버드 대학 철학과 출신으로 작가이며 예술평론가인 미국의 수전 손택(71)이 그의 저서 '타인의 고통'(Regarding the Pain of Others)을 통해 한 말이다. 사진이 사람들의 시각에 관한 기억체계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최근 과학이 '사람들이 기억하는 영상의 최소단위는 사진이다' 것을 증명한 데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진이 기억의 단위라는 손택의 주장이나 최근의 과학은 언어 논리상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이들에 의하면 인간의 시각적 기억은 그 단위가 사진이므로, 기억은 사진의 발명이후에야 가능한 것이 된다. 하지만 사진이 존재하지도 않았던 옛날 사람들도 사진으로 기억했을 것이다.(사실 이는 사진이 아니라 ‘정지된 이미지’가 더 정확한 표현이다) 그러므로 사진의 발명은 표현할 수 없었던 막연한 기억의 단위를 실재적으로 구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손택은 기억의 시각적 단위를 사진이란 존재를 이용해 표현했을 따름이지 사진 이전의 사람들에게는 적용되지 못할 논리적 허점을 방치한 것은 아닐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의 말처럼 사진은 시각적 기억의 단위임이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나아가 상상력과 사유의 단위이기도 한 것 같다. 사진은 기억의 시각적 구현을 위해 태어난 인류의 숙원이었는지 모르겠다.

 

사진은 19C 탄생한 수많은 발명품과 함께 인류에게 다가왔다. 1839년 프랑스의 학자 다게르(Louis Daguerre, 1787-1861:프랑스의 화가이자 사진발명가. 은판을 이용한 '다게레오타입'이라는 현상법 발명)에 의해 발명된 은판사진(銀板寫眞 : daguerreotype)이 과학 아카데미인 프랑스 학술원에서 인정받은 것이 사진의 시원이다. 빛의 원리와 암상자를 이용한 기술이었다.

 

당시 그림만을 보아왔던 사람들에게 정밀한 세부묘사를 보여주는 사진은  그야말로 신기한 발명품이었다. 당시의 사진발명은 인류가 이전에 불을 발견한 일이나 이후 달을 정복한 일에 비견될 수 있을 만큼 위대한 것이었다. 또한 현재 일어나고 있는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의 혁명적 변화도 따지고 보면 이 사진의 탄생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맨 처음 사진 소재는 풍경이었다. 그 후 인물을 찍는 초상사진이 유행하기 시작한다. 초기에는 사진을 찍으려면 오랜  노출 시간이 필요했으므로, 포즈를 요청받은 사람은 부동자세로 몇 분 정도나 견뎌야 했다.

사진은 이후 사람들의 생활이나 일상을 담더니 점차 사회적 현상을 기록하고 인간의 심리까지도 표현하기 시작하면서 사진을 보는 대중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시각적 미디어로 등장한 사진을 전문적으로 찍는 사진가들이 생기면서 사진은 저널리즘의 성격을 갖기에 이른다.

 

사진이 신문에 처음 등장한 것은 1880년이다. 미국의 <뉴욕 데일리 그래픽>지에 헨리 J. 뉴톤이 뉴욕의 불법 판자촌을 찍은 사진이 바로 최초의 신문사 사진으로 알려져 있다. 이전에는 사진을 보고 그린 그림이 신문사진 역할을 했다. 하지만 망판 인쇄술의 탄생으로 그림보다 더 정확한 사진이 신문에 인쇄됨으로써 신문사진은 언론의 총아로 각광받기 시작했고 신문은 사진을 등장시킴으로 인해 신뢰성을 한층 제고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미국인 H.G.언더우드가 1887년 4월 1일 창간한 순한문 주간지 '그리스도 신문'이 최초의 신문사진을 실었다. 고종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바로 그것인데, 이는 목판으로 인쇄됐다고 한다. 신문에 사진이 등장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사진은 보는 사람을 믿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진은 시간과 공간을 정지시키므로 사진 속의 광경은 분석 가능한 하나의 이미지가 된다. 1세기 전 프랑스에서 나온 최초의 고속카메라는 말이 뛸 때의 모습을 고속으로 여러 장 촬영하는 데 성공한다.

 

이 사진으로 말발굽은 어느 순간 모두 땅에서 떨어진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사람의 눈으로 확인하지 못하는 '순간'속의 진실이 사진으로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어떤 것이든 사진을 통해 확인하기 전에는 진정으로 그것을 보았다고 주장할 수 없다"고 말한 사람은 프랑스의 에밀 졸라(1840-1902, 목로주점 등을 발표한 프랑스 사실주의 소설가)다.

 

고속카메라는 발전을 거듭해, MIT공대 해롤드 에버튼 박사는 셔터스피드 300만분의 1초로 총알이 트럼프 카드를 관통하는 순간을 잡는 데 성공했다. 이후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최근 디지털 사진이 등장한 것은 여러분도 잘 아실 것이다. 원래 사진(Photography)의 어원은 빛(photo)과 그림(graphy)이 합쳐져 만들 어진 말이다. 말하자면 '빛 그림'이다. 물감이나 연필로 그린 그림이 아니라 빛으로 그린 그림을 사진(寫眞)이라 한다.

 

'광화'(光畵)라면 딱 맞는 말이 될 걸 하필 사진이란 말이 됐을까? 이는 근대 일본의 외국어 번역 과정에 기인 한다. 현대 중국은 사진 대신에 '조상'(照像)이란 말을 쓴다.  그럼 최근에 폭발하고 있는 디지털 이미지를 사진이라 부를 수 있을까? 지금 대다수의 사람들이 사진이라 부르고 있지만 엄격하게 따지자면  빛그림이란 뜻의 포토그래피는 적절하게 어울리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전자그림이란 뜻의 전화(電畵)가 어떨까 싶다,

 

즉 디짓그래피(Digitgraphy. Digit + Graphy)정도의 합성어가 신조어로 쓰일 수 있다는 말이다. 혹은  ‘D-photo’나 ‘DIPI’(Digital Picture)라고 하는 편이 더 적합할 지도 모르겠다. 학식있는 외국인에게 자문을 구한 결과 무엇이든 괜찮다는 말을 들었다. 처음 만드는 사람이 단어의 아버지(The father of word)기 때문이란다.      

 

지금부터 디지털 사진을 이렇게 부르기로 하고 언중(言衆)에 단어를 소개하고 보급한다면 이 단어가 웹스터 사전에 등재될 날이 올 것이다. 함흥차사(咸興差使), 이전투구(泥田鬪狗), 두문불출(杜門不出) 같은 한자성어가 우리나라에서 생긴 것처럼 디짓그래피가 김치와 태권도처럼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영어단어가 된다면 이 또한 의미있는 일이 될지 모르겠다. 아마 세계 곳곳에서도 이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닐거다. 어쨌든 지금부턴 디짓그래피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 디지털 이미지의 출현으로 사람들은 이제 읽지 않고 본다. 신문이 비주얼화를 외치고 영화산업이 번창하고 광고가 시각적으로 첨예화되는 이 모든 현상이 그것을 웅변한다. 인류의 문명을 전수하는 데 가장 큰 도구였던 '읽기'(reading)는 그 자리를 '보기'(seeing)에게 내주는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이제 보는 것은 세상을 이해하는 기본이며, 이는 언어에 대한 불신으로마저 이어졌다. 이미지를 볼 줄 모르는 '이미지맹자'는 다가올 시대에 낙오자가 되기 쉽다는 애기도 공공연히 나오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한 가운데 바로 사진이 있는 것이다. 이쯤되면 '도대체 사진이란 무엇이길래?'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일단 사진이란 쉽게 말해 '시간과 공간'을 이미지로 남기는 데서 출발한다.

 

이유를 막론하고 모든 사진에는 시간과 공간이 정지된 채로 존재한다. 또한 사진을 소유함으로써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고 이를 유지하고 간직하고 싶은 심리를 보상하는 것도 사진 찍기에서 기본적인 또 하나의 출발이다. 아기 돌 사진, 가족들과 찍은 단란한 순간, 젊은 시절의 모습, 친구들과의 여행 등은 누구나 남기고 또 가지고 싶은 사진의 대상이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이런 사진을 이따금 꺼내 보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면 사진은  기록과 소유의 기능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최근에는 유희와 공유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의 기능까지 겸비하게  됐다. 디카가 만들어내는 갖가지 문화의 양상은 이를 잘 대변한다. 디카족들은 사진을 재미로 찍고 이를 인터넷에 올려 공유하고 토론까지 벌이는 '사진의 신인류'이다. 호모 에렉투스가 최초의 인간이라면 '호모 포토쿠스'는 최초의 디카족이다.

 

컴퓨터로 이미지를 주고받는 이들 사이에서 사진은 언어를 대체하는 새로운 언어다. 미국의 사진작가 앤드리어스 파이닝거(1906-  )는 "영상 언어의 가장 새롭고 완성된 형식은 사진이며 말과 문자와의 차이 때문에 생긴 간극을 연결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문자보다는 사진이 진실에 가깝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사진이 사실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사진가는 사물자체를 포착하는 카메라를 기계적으로 이용할 뿐 화가처럼 묘사과정에 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다양한 사진의 기능은 사진의 정의에 구체적인 개념을 제공한다. 돌아가신 어머님 사진은 그리움이며 군인들이 가지고 있는 여자친구 사진은 사랑이다. 교통사고를 기록한 경찰관의 사진은 증거가 되며, 사진기자가 찍은 신문사진은 진실이 된다. 사진의 정의는 사진을 보는 사람에게 달려있다. 사진의 의미는 보는 사람 몫이다.

 

사진은 발명 당시부터 60년대까지 사람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신문과 잡지를 중심으로 사진의 대량 생산과 소비가 진행되면서 사진은 우리  생활 곳곳에 매우 깊게 파고들었다. 광고와 예술 분야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60년대 이후 TV와 영화 등 동영상 위주의 산업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자 사진의 영역은 상당히 위축됐다.

 

하지만 디지털의 등장은 새로운 전기를 제시했다. 디지털 사진이 새로운 매체로 태어나면서 사진이 다시 각광받게 된 것이다. 누구나 순간순간을 포착하고 즐기고 공유할 수 있게 한 디지털 사진은, 이제 일반인들도 역사를 기록하고 가치판단을 내려 다수의 힘으로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수도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고 있다. 그러한 자신감의 표현이 앞으로 사진의 정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두고 볼 일이다.

 

- 글 / 정경열 blog.chosun.com/imag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