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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산을 하되 산이 자신을 구속치 않도록 하라’ *-

paxlee 2009. 2. 1. 06:34

 

              [알프스에서 온 편지 / 헬브로너]

            

          ‘등산을 하되 산이 자신을 구속치 않도록 하라’

 
월터 보나티(Walter Bonatti·1930-), 그는 당대 가장 위대한 산악인이었을 뿐더러 아마도 알피니즘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 평해도 손색이 없을 알피니스트가 아니가 한다. 18세였던 1948년부터 35세였던 1965년까지 그가 남긴 발자취는 알프스에, 특히 몽블랑 산군 곳곳에 남아 있다. 이탈리아 태생의 보나티가 등반활동의 본거지로 삼은 몽블랑 남측의 쿠르마예(Courmayeur)를 기점으로 한 이태리-프랑스 국경의 헬브로너(Helbronner·3,462m) 주변은 그의 활약상을 쉽게 엿볼 수 있는 곳이다.
 
▲ 제앙 빙하 북사면에서 본 그랑 카퓨셍. 오전에 통과한 크레바스 지대가 보인다.

     

보나티의 위대성이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면, 음악의 신동 모차르트와 비교해보면 어떨까. 바로 이 몽블랑 산군을 위시해 알프스에서 행한 그의 등반만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뛰어난 등반가였는지 상상하고도 남는다. 평범한 필자가 등반을 시작한 나이와 비슷했던 18세에 고향땅 그리냐(Grigna)의 작은 암장에서 등반을 시작해 1년도 되지 않아 그랑 조라스 북벽의 워커스퍼(4등)나 바딜레 북벽을 오른 것만 보아도 보나티의 천재성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의 천재성은 자발성에 의해 30대 중반까지만 발휘되었으니 필자와 같은 평범한 산악인들은 이해하기 힘들 뿐더러 아쉽고 안타까울 따름이다. 산을 떠난 이유가 K2 초등사건이나 그 후에 몽블랑에서 있었던 두 번의 조난사고에 얽힌 논란들로 인해 산악계에 환멸을 느껴서든, 또 다른 차원의 모험을 갈구한 개인적인 이유에서든, 산에서 더 이상 그의 활약상을 접하지 못하게 됨은 아쉽기만 하다.


모래 섞인 눈까지 먹으며 이룬 그랑 카퓨셍 초등
 
▲ 보나티의 책 <내 인생의 산들(The Mountains Of My Life)>

보나티의 책 <내 인생의 산들(The Mountains Of My Life)>을 펼쳐든 지 며칠 지나지 않은 3월 말이었다. 그를 좀 더 느껴보기 위해 몽블랑 산군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이태리-프랑스 국경의 헬브로너쪽으로 향했다. 이른 아침 샤모니 계곡에는 잔뜩 구름이 머물러 있었지만, 3,800m 고지의 미디(Aig. du Midi) 전망대에 오르니 태양이 쨍하게 빛난다. 단숨에 구름 위로 솟아올라 만년설을 손쉽게 대면할 수 있음은 오늘날의 산악인들에겐 행운이 아닐 수 없다.

▲ 이태리-프랑스 국경인 헬브로너 전망대.

스키를 들고 북동 설릉을 내려간다. 저 멀리 동쪽에 그랑 조라스가 구름 위에 솟아 있다. 등반을 시작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19세의 보나티가 친구들 3명과 겁 없이 덤벼들어 성공한 워커스퍼가 하늘을 배경으로 버티고 섰다. 그가 오른 후 40년 후 필자 또한 올라보았던 워커스퍼는 지금도 많은 알피니스트들의 도전의 대상이 되고 있는 거벽임에 분명하다.

 

스키를 신고 드넓은 발레 블랑쉬 설원의 상단을 가로지른다. 쏜살같이 타고 내리며 여전히 남아 있는 겨울 찬바람을 가슴속 깊이 들이킨다. 이제 몽블랑 뒤 타퀼(Mont Blanc du Tacul·4,48m) 동벽쪽으로 방향을 튼다. 몇몇 쿨와르 아래에선 클라이머들이 등반을 준비하고 있다. 눈밭에 꽂은 스키에 스키화를 걸어둔 풍경은 요즘 같은 삼사월에나 볼 수 있다.

 

계속해서 스키를 타고 내린다. 혼자 이렇게 설원을 가로지르는 홀가분함이 좋다. 이제 제앙(Geant) 빙하의 가장 낮은 지대에 이른다. 여기서 스키를 벗고 바닥에 실을 붙인다. 이때 대여섯의 산악스키어들이 뒤따라 도착하고 있다. 이들도 스키를 벗어 실을 단다. 독일에서 왔다는 이들은 가이드 한 명에 손님 다섯이다. 자신들도 이태리로 넘어갈 거란다. 동행이 있어 적적하지 않을 거라 여기며 먼저 크레바스 지대에 들어선다.

 

몽블랑 국경능선에서 월터 보나티를 생각한다

 

▲ 발레 블랑쉬 설원을 지나 제앙 빙하에 접어들고 있는 산악스키어들. 뒤의 침봉이 그랑 카퓨셍이다.

 

한동안 크레바스 지대를 오르내리다 주변에 펼쳐진 경치를 놓치기 아쉬워 뒤따르는 그들을 기다린다. 사진기에 담기는 그들 또한 즐거워한다. 마침 그들 뒤로 그랑 카퓨셍(Grand Capucin·3,838m) 동벽의 붉은 화강암이 시야에 들어온다. 수도승의 고깔모자를 닮아 이름 붙은 그랑 카퓨셍. 보나티는 이 벽을 세 번째 시도만에 초등한다. 그의 나이 21세에 이룬 위대한 등반이었다. 첫 시도에서 날씨가 나빠 후퇴한 보나티와 그의 친구는 3주 후 두 번째 시도에서 세 번이나 비박하며 화강암 직벽을 오른다.

 

갈증에 시달린 이들은 내리는 눈까지 받아먹고, 심지어 모래가 섞인 눈을 집어먹으면서까지 등반해 벽을 거의 다 오른 상태였지만, 역시 악천후로 단념한다. 1년 후인 1951년 여름, 보나티는 동료 지고(Ghigo)와의 약속을 지키며 드디어 세 번째 시도에서 한 번의 비박 후 정상에 선다. 몇 년 후 또 다른 불세출의 알피니스트인 오스트리아의 헤르만 불(Hermann Buhl·1924-1957)은 이 루트를 오르고서 알프스에서 행해진 가장 어려운 화강암 등반이라 극찬하였다. 

 

이 등반 후 보나티는 약관의 나이에 등반계에 더욱 이름을 떨치게 된다. 그리고 25년 후 이 루트를 다시 찾은 보나티는 초등시보다 엄청 많이 박혀 있는 하켄들을 목격하고서 불확실성과 불가능성은 전통적인 알파인 등반의 필수요소로서, 인위적인 요소들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등반은 그저 육체적인 노동일 뿐이라 설파하였다.

 

▲ 제앙 빙하 상부 투르 롱드 앞 크레바스 지대를 가로지르고 있다.

 

한편 그는 등산은 산을 오르는 것뿐 아니라 자기극복의 길로 보았다. 그에게 알피니즘은 자기인식에 이르는 길이었으며, 대자연과의 접촉을 통해 성장하고 부활하는 수단이었다.

 
▲ 엄한 아버지처럼 보나티에게 많은 매질을 한 몽블랑이 동벽을 펼쳐 보이고 있다. 남면의 프레니 필라가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제앙 빙하의 크레바스 지대에서 한동안 그랑 카퓨셍쪽으로 향하던 독일 산악스키어들은 이제 투르 롱드(Tour Ronde·3,792m) 앞에서 방향을 튼다. 프랑스와 이태리의 국경쪽으로 가기 위해서다. 앞서 걷고 있던 젊은 산악가이드 슈테판은 뒤따르는 일행의 속도에 맞춰 일정한 속도로 러셀을 한다. 직업가이드로서의 면모가 엿보인다. 줄지어가는 그들을 가로지르며 앞뒤에서 사진을 찍으니 일행 중 한 명이 사진을 보내줄 수 없냐며 자신의 명함을 건넨다.

 
▲ 제앙 빙하 상단의 크레바스 지대를 지나고 있는 산악스키어들.

 

멋진 모델이 되어주는 그들 뒤로 저 멀리 몽블랑 동벽과 그 너머 남벽의 상단부가 펼쳐져 있다. 보나티는 몽블랑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고 고백하였다. 1956년 크리스마스 때 찾은 동벽의 브렌바 스퍼를 모진 눈보라 속에 올라 생환하지만, 우연찮게 함께 오른 다른 자일파티의 조난사에 대한 논란이나, 너무도 유명한 1961년 몽블랑 남벽의 프레니(Freney) 중앙벽의 참사에 대한, 이상하게도 유독 자신의 동포 이태리인들이 제기한 그들의 죽음을 막기 위해 좀 더 노력하지 않았다는 비난은 그를 더욱 혹독하게 단련시켰다고. 하여 몽블랑은 자신을 심하게 채찍질한 친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물론 보나티는 동벽 옆에 위치한 그랑 필리에 당글(Grand Pilier d'Angle)이나 프레니 옆의 레드 필라(Red Pillar)를 역시 초등으로 오르며 즐거운 시간을 가진 적이 있기에 몽블랑은 그에게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안겨준 셈이다. 몽블랑 동벽이나 레드 필라는 10여년 전에 필자 또한 오른 적이 있기에 그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만도 하다. 

 

양심선언하며 보나티에게 사죄한 K2 초등자

한동안 오르막이 이어지더니 넓은 사면이 펼쳐진다. 곧 툴 안부(Col de Toule·3,444m)다. 그 너머는 이태리 땅이다. 한데 이 국경능선 너머엔 구름바다가 펼쳐져 있어 그 아래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몽블랑에서 동서로 길게 뻗어내린 3,000m 이상의 거대한 알파인 능선을 사이에 두고 이렇게 날씨가 다르리라곤 생각지 못했기에 필자나 독일인들이나 망설인다. 어차피 구름 때문에 몽블랑 남면을 볼 수 없을 테니 굳이 툴 빙하(Glacier de Toule)를 따라 스키를 타고 내려갈 필요성이 없던 필자였지만, 여기까지 온 마당에 또한 가이드를 앞세운 독일인들이 먼저 내려가는 것을 보고 마음이 동한다.

 

가파른 사면에서 스키를 들고 조심해서 내려가는데, 그들이 먼저 가라며 길을 내준다. 그러지 못할 이유가 없다며 먼저 내려와 스키를 신는다. 한데 뒤따르던 그들은 구름이 흩어지길 기다리는 눈치다. 이런 짙은 구름이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터라 그냥 혼자 빙하를 타고 내린다. 한데, 내려갈수록 구름은 짙어 1~2m 앞도 보이지 않는다. 눈을 감고 스키를 타는 것과 같다.

 

몽블랑 남측의 이 빙하를 타고 내리며 보나티가 살던 쿠르마예 계곡과 몽블랑 남면을 지켜보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된 셈이다. 무엇보다 이 짙은 구름층을 뚫고 무사히 몽 프레티(Mont Frety·2,174m)까지 내려가는 게 급하다. 두세 번 이곳을 타고 내린 경험을 최대한 살려 직감으로 내려간다. 최대한 빙하 왼편으로 바짝 붙어 내려선다. 급사면이 이어진다. 특히 남면이라 녹았다 언 사면이 짙은 구름에 녹지 않아 스키 타기가 여간 불편하지 않다. 무릎에 심한 충격이 가해질 정도다.

 
▲ 앞에 솟은 그랑 카퓨셍쪽으로 빙하를 가로지르는 산악스키어들.

 

그랑 카퓨셍을 초등하고서 18개월간 군복무를 마친 보나티는 트레 치메 디 라바레도(Tre Cime di Lavaredo)를 동계에 초등한다. 곧이어 그에게 1954년 K2 원정대원에 뽑히는 행운이 찾아든다. 하지만 8,000m 이상에서 죽음의 비박까지 하며 정상캠프 가까이 산소통을 옮겨 초등반에 공헌한 그가 많은 이들로부터 받은 비난과 소외, 갈등은 평생 따라다니게 된다. 

 그가 느꼈을 답답하고 어두운 마음을 생각하며 계속해서 안개 속을 타고 내린다. 어떤 구간에선 사이드 스텝으로 미끄러져 내리기까지 한다. 이렇게 1,000m 이상 내려오니 마침내 두터운 구름층 아래다. 저 아래에 중간 케이블카 역인 몽 프레티가 보인다.


 

▲ 몽 프레티로 오르는 케이블카. 뒤로 쿠르마예 계곡이 펼쳐져 있다.

 

짙은 구름 아래지만 시야가 트여 수월하게 케이블카 역에 이른다. 보통 때 같으면 몽블랑터널쪽 차도까지 스키를 타고 내려가겠지만 여기서 단념하고 헬브로너로 오르기로 한다. 휴게소 주인에게 케이블카 표를 말하니 아래에 전화하여 다음 케이블카로 표를 올려 보내겠다고 한다. 잠시 쉬며 쿠르마예쪽으로 시선을 던진다. 잔뜩 흐려있는 하늘 아래에 보나티 산장(Refuge de Bonati·2,022m)이 있는 곳도 보인다. 7년 전 보나티의 세 친구들이 그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현대식 산장이 페레 계곡 너머의 알파인 트레킹 루트에 세워져 있다. 물론 겨울인 지금은 문이 닫혀 있다.


얼마 후 밑에서 올라온 케이블카 직원이 건네준 표를 가지고 헬브로너로 오른다. 대여섯 명밖에 탈 수 없는 작은 곤돌라를 두 번 갈아타고 다시 프랑스 땅에 발을 들여놓는다. 구름 위로 올라서며 전망대에 이른다. 10대 후반의 여학생 10여 명이 쌀쌀한 날씨에도 전망대의 나무바닥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이제 한낮의 열기로 남쪽에 머물던 구름이 한껏 솟아올라 몽블랑쪽은 아예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동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구름바다 위에 솟은 그랑 조라스 남면 너머에 마터호른이 자그마하게 보인다.


1965년 겨울에 단독으로 마터호른 북벽에 직등루트를 낸 보나티는 그 후 알피니즘과 영원히 결별하고 만다. 왜? 이 문제는 그가 한때 고향처럼 머물던 쿠르마예 위에 드리운 먹구름처럼 파헤치기 힘들 것 같다. 지면상 K2 초등사건의 전말을 논하지 못하는 아쉬움 외에도 몽블랑에서 일어난 두 조난사고 후의 논란이나, 심지어 그의 고별등반이었던 마터호른 북벽에서 새 루트로 동계 단독초등을 이루고서도 그는 고운 시선을 받지 못했다. 천재에 대한 범부들의 질투 때문이었을까.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듯 지난해에 K2 초등자 중 한 명이 양심선언을 하며 보나티에게 사죄했다.

 

지금도 도전받는 드류 보나티필라


전망대의 수정전시관을 둘러본 다음 곧바로 스키를 들고 계단을 내려온다. 한데 북쪽 설사면 위로 한둘씩 오르는 이들이 있다. 가만히 보니 오전에 함께 제앙 빙하를 가로질렀던 독일인들이다. 결국 그들은 짙은 구름 때문에 이태리쪽으로 활강하지 않고 되올라와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그들이 도착하길 기다리려면 적어도 10분 이상 소요될 것 같아 어차피 저녁에 만나기로 약속했기에 그냥 사면을 타고 내린다.


북향인 설사면의 설질은 최상의 분설 상태라 신나게 미끄러져 내린다. 아무도 긋지 않은 백지상태의 사면에 멋진 굴곡을 그으며 메르데 빙하를 따라 내린다. 이윽고 크레바스 지대 옆으로 하여 르켕 산장(Refuge du Requin·2,516m)을 지난다. 계속해서 드넓은 빙하 위를 타고 내리니 일반 스키어들이 지나가는 슬로프가 나온다. 곧 메르데 빙하가 레쇼(Leschaux) 빙하와 만나는 모레인 지대다.


레쇼 빙하 상부로 시선을 던진다. 정상부에 구름을 이고 있는 그랑 조라스 북벽이 살짝 고개만 내밀고 있다. 19세의 나이에 워커스퍼를 오른 보나티는 14년 후인 1963년 1월에 바로 이 워커스퍼를 겨울에 올라 동계초등을 이룬다. 혹독한 추위에 맞서 동료 자펠리(Zapelli)와 다섯 번 비박하며 오른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 여름에 그는 이 북벽을 다시 찾아 윔퍼봉으로 직상하는 새로운 루트를 4일만에 내며 또 한 번 자신을 확인한다.


▲ 헬브로너 개념도
 

과연 그가 계속해서 산행했다면 이 알프스에서만 남긴 발자취가 어디까지 뻗쳤을까 상상해 본다. 그는 파타고니아에도 수많은 초등을 이룩했으며, 필자 또한 가본 적이 있는 카라코람의 가셔브룸4봉을 초등하기도 했다. 그의 책에는 열악한 장비로도 혹독한 상황에 맞서는 그의 활약상들이 땀을 쥐게 할 정도로 가득 차 있기에 400페이지가 넘지만 결코 지루하지 않다.


작년에 발간된, 산을 떠나 극한의 오지 포토저널리스트로 활동했던 그의 사진집을 포함하여 그가 쓴 저서가 10권이나 되지만 단 한 권도 국내에 소개된 적이 없음은 국내 산악문학의 빈약함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이제 메르 데 글라스 빙하 아래로 발길을 돌린다. 이후 몽탕베르(Montenvers ·1,909m)까지 드류를 앞에 두고 달린다. 생애에 가장 큰 악영향을 끼친 K2 등반에 상심한 보나티는 단독 무산소 알파인스타일로 K2를 시도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다. 반 세기 전 당시 국가적인 차원의 행사로 꾸려져야 가능했던 8,000m급 거봉 원정이었기에 끝내 실현되지 못했으며, 오늘날의 최고 산악인들도 감히 생각지 못할 대담한 계획이다.


보나티는 혼자만의 힘으로 불가능의 등반선을 그으며 그전엔 어느 누구도 생각지 못한 등반을 바로 이 드류에서 감행하기로 한다. 1955년 여름이었다. 한 피치 등반에 두세 번씩 오르내리며 6일만에 오른 그를 기리기 위해 사람들은 드류 남서 필라를 보나티 필라라 명명했다. 몽탕베르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드류는 여전히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 물론 몇 년 전에 발생한 거대한 낙석사고로 보나티가 올랐던 필라는 많은 부분 사라지고 없다.

 

하지만 그 후에도 기라성 같은 후배 산악인들은 여전히 그의 길을 따르고 있다. 이후 틈틈이 보나티의 책을 펼쳐들며 거의 다 읽을 무렵이었다. 아침부터 그의 책에 빠져 지내다보니 점심 때가 되었다. 창밖의 뭉게구름이 손짓하듯 유혹했다. 몸이 근질거려 숙소에서만 보나티의 책을 읽을 게 아니라 또다시 그가 활동하던 무대로 가보고 싶었다. 이른 점심을 먹고 곧장 배낭을 꾸린다.


 

한데 3,800m 고지의 미디에 올라보니 남쪽 하늘엔 지난 번보다 더 짙은 구름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할 수 없이 헬브로너까지 가지 않고 그저 메르데 빙하를 따라 스키를 타고 내린다. 그의 위대함을 그저 곁눈질로만 느껴보려던 나의 시도가 가당찮음을 느끼며 빙하 위를 달린다. 훌륭한 산악인이 되기 위한 자질은 훌륭한 인간이 되기 위한 자질과 같으며, 등산을 하되 산이 자신을 구속치 않도록 해야 한다고 한 보나티의 말이 내내 귓전에 울렸다.


 - 글 / 허긍열 한국산악회 대구지부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