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강 과 문 화 [11] *-
한강철교는 알고있다.[1]
안습 한강대교 ?
오래전 미국의 인기 TV시리즈였던 로스트 Lost 에서 서울을 배경으로 하는 씬이 나왔었는데, 네티즌사이에서 화제가 된 장면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 안습 한강대교 ' 라고 불리던 내용이었는데 아래 사진처럼 청계천 정도의 개천에 놓인 작은 교량에다가 한강대교 이름표를 달아 놓고 마치 서울인 것처럼 촬영한 컷 때문이었습니다.
[ 화제가 되었던 안습 한강대교 ]
사실 지금까지 외국에서 촬영된 수많은 영화나 TV 연속극에서 묘사된 한국이나 우리역사와 관련된 모습이 어처구니없었던 것은 일일이 손을 꼽기 힘들 정도입니다만, 사실 국내에서 제작하는 극화에 등장하는 외국이나 외국인의 모습이 제대로 묘사되었는지는 우리 또한 장담하기 힘듭니다.
[ 우리 드라마에 묘사 된 당나라의 모습인데 과연 제대로 묘사되었을까요 ]
그 만큼 특별한 고증이나 확인 없이 타인의 시각으로 남을 묘사하기는 매우 힘든 일입니다. 때문에 강이나 교량이라고 한다면 일단 제작자나 시청자들이 관념적으로 알고 있는 하천이나 다리를 기준으로 촬영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안습 한강대교는 한편으로 외국에서 도시를 가로지르는 많은 강들이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 파리의 세느강은 한강에 비하면 개울입니다. / 그러나 멋은 있다.]
의외로 세계적인 대도시 중심을 가로지르는 강중에서 한강만큼 거대한 강은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런던의 테임즈강, 파리의 세느강, 로마의 테베레강 등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수많은 유명 강들은 사실 직접 보면 우리의 청계천 정도이거나 그 보다 조금 큰 규모인데, 한강처럼 강폭이 1Km 넘는 커다란 강을 도심에서 찾기는 어렵습니다.
[ 런던의 테임즈강도 강 하구이지만 한강에 비교하면 그리 넓지는 않습니다. /
차량이 다니는 다리가 아니고 인도교이다.]
때문에 로스트의 제작자들이 한강하면 자신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 규모의 강이라 막연히 판단하고 거기를 가로지르는 다리라면 당연히 안습 한강대교 수준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어 세트장을 대충 꾸몄을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한강이 그 만큼 한국 또는 서울을 의미하는 자연 상징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 우리는 간과하지만 한강은 그 자체로도 훌륭한 상징물입니다 ]
우리는 주변에서 항상 보기 때문에 한강이라고 해 보았자 주변의 아파트단지 밖에 더 보이냐 하면서 비하하지만, 막상 한국을 처음 방문한 외국인들 중 한강을 서울에 대표하는 가장 강렬한 첫인상으로 많이 손꼽는 사람이 많습니다. 거대한 규모에 우선 압도되고 거기를 가로지르는 수많은 다리와 잘 정리된 도로와 강변의 모습 그리고 야경이 멋있다고 합니다.
[ 외국의 어느 도시와도 견주어도 한강과 다리의 멋있는 풍경임니다 ]
특히 각양각색의 거대한 다리들은 한강을 인상적으로 꾸미는 또 하나의 랜드마크가 되고 있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필요에 따라 계속 건설되겠지만 현재 한강에는 수많은 다리나 하저터널이 놓여있고 그중 많은 수가 개발시대라 불리는 70 ~ 80년대에 집중적으로 세워졌습니다. 특히 전철 5호선의 천호역과 강나루역, 마포역과 여의나루역을 연결하는 철로는 다리가 아닌 하저터널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 한강철교와 관련하여 숨겨진 역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
현재 20여개가 넘는 한강다리들 중 제일먼저 생긴 것은 용산과 노량진 사이를 연결한 한강철교인데 1900년 개통되었으니, 나이가 이미 100살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이시기는 우리역사에서 가장 큰 격변기에 해당하는 질곡과 고통 그리고 도전과 성취의 시기였습니다. 격동의 시기였던 지난 100년간 한강철교에 숨어있던 이러한 역사를 밀리터리와 관련하여 살펴 보고자합니다.
근대화를 위한 시도 ?
시중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보통 지도를 보면 한강철교도 여타 한강의 교량들처럼 줄 하나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직접 보면 한강철교는 하나가 아닌 여러 개의 교량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는데, 현재 한강철교는 총 4개의 개별철교로 구성되어 있고 강 상류에서 하류방향 순서대로 B교, A교, D교, C교로 불립니다.
[ 한강철교를 구성하는 B, A, D, C 교 ( 左에서 右방향 ) ]
자료마다 통칭하는 방법이 조금씩 차이가 나지만 다리의 개통 순서대로 부호를 정하면 위와 같이 정의될 수 있고 사용용도가 각각 다릅니다. 현재 단선의 철도가 놓여있는 A교와 B교는 용산역 착발 수도권 급행 전철이 사용하고, 복선인 D교는 지하철 1호선과 연결된 수도권 일반 전철이 역시 복선인 C교는 KTX를 비롯한 장거리 철도가 이용 중 입니다.
[ 교각 밑에서 바라본 A, B교로 각각 단선 철도가 통과합니다 ]
A교는 한강에 가설된 모든 다리 중 최초의 교량으로 1896년 3월 미국인 모스 ( James R. Morse ?~? ) 가 조선정부로부터 경인철도부설권을 얻어냄으로 1897년 3월에 착공되었습니다. 1899년 노량진과 인천사이에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 우선 개통되었으나 한강철교는 자금난으로 여러 차례의 공사가 중단된 이후 일본이 경인철도부설권을 인수한 후인 1900년 7월에 준공되었습니다. ( 관련글 참조 )
[ 경인선 철도 부설권을 얻었던 모스 (左) 와 후에 이를 인수받아 완성한 에이치 ]
[ 경인선 철도 기공식 모습으로 현재의 도원역 인근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
A교의 완성으로 경인선은 한강을 건너 현재의 서울역 인근으로 추정되는 남대문역까지 연결되었는데 이것은 도성과 외곽을 연결하는 최초의 현대적 교통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새로운 교통망의 등장이 조선 정부의 적극적인 근대화노력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던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 열강들의 조선침탈로 시작되었다는 점이 비극이었습니다.
[ 서울의 랜드마크가 된 한강철교 A교의 건설 (上) 및 준공 직후 모습 ]
자본과 기술이 없던 당시 조선정부는 경인선 부설 이권을 모스에게 주면서 철교에 보행자를 위한 인도를 시설할 것을 조건으로 내세웠으나 철도부설권을 가로챈 일본이 공사비절감 등의 이유를 내세워 이를 무시하고 서둘러 교량을 개통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일본이 강화도조약으로 제일먼저 개항시킨 인천과 서울을 하루라도 빨리 연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청일전쟁 당시 조선의 전근대적인 교통망으로 인하여 작전에 어려움을 겪었던 일본은
조선 침탈을 가속화하기위한 수단으로 철도망 구축을 고려합니다 ( 청일전쟁 당시의 일본군 ) ]
[ 위에서 아래로 경인선 개통 당시의 귀빈석, 2등석, 3등석 객실의 모습
초라한 3등실 마저 조선민중이 쉽게 이용할 수 없었을 만큼
철도는 제국주의자들이 약소국을 침탈하는 도구로써의 목적이 컸습니다 ]
제국주의자들은 원래부터 조선민중의 편리와 복리 증진이 목적이 아닌 그들의 침탈을 가속화 시킬 도구로 철도를 이용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자료를 찾아보면 개통당시 최하 등급인 여객 3등실 요금이 40전이었는데 이것은 당시 물가 시세로 닭 두 마리 값어치에 해당되는 고가로 일반 조선민중들이 이 철도를 편리하게 이용하기는 매우 어려웠습니다.
[ 현재 인천 숭의동 107번지 인근에 있었던 미국 공사 알렌의 별장 ]
[ 허허벌판위에 세워진 외국인 공사의 별장 (上) 이용 편의를 위해
철도노선과 역사마저 위치가 변경되었습니다 ( 계획노선과 변경노선도 ) ]
여담으로 최초 경인선이 놓여 졌을 때 노선이 지금과는 조금 달랐는데, 현재 제물포역 북쪽 숭의3동쪽으로 크게 반원을 도는 형태로 철도가 놓이면서 우각역 ( 현재의 도원역 인근이라 추정 됨 ) 이 설치되었는데, 목적은 이곳에 별장이 있던 미국공사 겸 선교사인 알렌 ( Herace Newton Allen 1858~1932 ) 의 교통편의를 위해서였습니다. 그만큼 최초 철도는 우리의 삶과는 관련이 적었습니다.
- 출처 / [ august 의 軍史世界 ] -
=> / 한강과 문화를 10회 정도에서 마치려고 하였는데, "한강철교는 알고있다."라는 자료가 한강과 한강의 다리에 얽힌 역사와 문화의 가치가 공유해도 무방할 것 같아 앞으로 4회에 걸처 더 계속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