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이야기

-* 한 강 과 문 화 [12] *-

paxlee 2009. 3. 11. 21:27

 

                           한강철교는 알고 있다  [ 2 ]

 

침탈의 도구로 시작된 불행한 출발

 

총연장 1,110.25m 인 한강철교 A교는 개통당시에는 노량철교로 불렸는데, 근대식 토목공사에 의한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대형교량이었습니다.  비록 외세에 의해 건립되었지만 수많은 인부들이 동원되어 근대식 공사기법에 따라 작업을 하였고 이때부터 용산과 노량진 일대가 서울의 부도심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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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의 모든 교량 중 제일 먼저 완공된 한강철교 A교 ]

 

당시 경인철도 합작회사 팜플렛에 " 노량철교는 미국이 제작한 최신공법으로 제작되었고, 하늘에 걸린 무지개처럼 천하에 보기 드문 비경이다." 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하였을 만큼 완공과 동시에 서울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되어 명소로 떠올랐는데, 최초 교각과 상판을 포함한 교량의 모습과 구조가 지금과 그리 차이가 나지 않을 만큼 상당히 튼튼하게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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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철교가 개통된 1900년 당시의 남대문로/그때는 서울도 초가집이네요]

 

한강철교와 더불어 경인선이 개통되자마자 일본은 조선 침탈을 더욱 가속화하고 한반도를 거쳐 만주로 진공하기 위해서 서울을 중심으로 한반도를 북에서 남으로 종단하는 간선 철도망을 만들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 결과 1901년에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 경부선을 기공하고 불과 4년만인 1904년 12월 27일 완공시켜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운송에 효과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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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부선 개통식이 열린 남대문역 ( 현재의 서울역 인근으로 추정 ) ]

 

또한 1904년에는 한반도 북부의 주요 축선인 경의가도를 따라 서울과 의주를 연결하는 경의선을 착공하여 불과 2년만인 1906년에 완공시켰습니다.  특히 경의선은 군용철도감부 臨時軍用鐵道監部 라는 특수목적 기관을 설치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우리의 의사와 상관없이 불법적으로 철도 부설에 착수하였을 만큼 처음 설치 목적부터가 대륙침략을 위한 군사용 성격이 농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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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용철도감부의 주도로 철도를 시공 중인 모습 ]

 

물론 현재와 비교하기 곤란한 부분도 있지만 각각 400Km가 넘는 경부선, 경의선을 불과 2년 ~ 4년 사이에 만들어 개통시켰다는 사실은 그 만큼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과 대륙 침탈을 위한 교통망 확보에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자 건설을 위해 동원되었을 조선민중에 대한 수탈이 어떠하였을지 충분히 짐작케 하는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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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도를 통해 집하된 수탈 곡물이 항구를 통해 실려 나가는 모습 ]

 

특히 러일전쟁 발발직후 군사철도라는 이름으로 착공된 경의선의 경우는 일본군이 총칼을 앞세워 철도용지를 무상으로 강탈하고 조선인 노무자들을 노역에 강제 동원시켜 완성한 제국주의 침략의 상징물로 우리역사에 자리 잡게 되었고 이렇게 만들어진 경의선은 경부선, 경인선과 서울에서 하나로 연결되어 조선을 침탈하는 일본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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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일전쟁 당시 남대문을 통과하는 일본군의 모습 ( 전차선로가 인상적입니다 ) ]

 

철도망의 확충과 더불어 운송량이 증가하자 얼마가지 않아 단선인 한강철교 A교만으로 수송량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1905년 A교 옆 상류 방향에 단선철교인 B교의 공사에 착수하여 1912년 9월 준공되었는데, 이로써 운행의 효율성을 급격히 높일 수 있게 되었지만 이 또한 엄밀히 말하자면 제국주의자들의 이익을 극대화 시키기 위하여 이루어진 결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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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2년 B교의 완공으로 복선화된 한강철교 ]

 

만일 조선이 자의에 의해 철도를 부설하여야 되는 처지였다면 당시 여건을 고려하면 그와 같이 시급히 철도를 부설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조선은 그 정도의 급격한 물동량 이동이 요구되지 않았던 후진국이었고 당연히 자력으로 이러한 인프라를 구축할만한 기반도 없었으며 더구나 대륙을 침략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강점기에 벌어진 질곡의 역사

 

한강철교 설치이후 지금은 한강대교라고 불리는 한강인도교가 1916년 3월 착공되어 이듬해인 1917년 10월에 준공됨으로써 한강을 횡단하는 방법이 기존의 나룻배와 새롭게 등장한 철도 외에도 도보나 우마차도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인도교는 철교 바로 인근의 상류 측에 들어섰는데 이로써 용산과 노량진간은 서울의 최고 교통요지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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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8년 준공 직후 한강인도교의 모습 ]

 

1936년 서울의 동쪽 끝에 완공된 광진교를 제외한다면 연이어 붙어있던 한강철교와 인도교외에 이후 한강에 새로운 다리가 놓여 진 것이 1965년 개통한 제2한강교 (양화대교 )가 처음이었으니 한강철교와 인도교가 서울은 물론 우리의 근대사에서 차지하였던 비중이 얼마나 큰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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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한강교 ( 양화대교 ) 의 건설당시 (上) 와 준공직후의 모습
광진교를 제외한다면 양화대교는 인도교이후 무려 57년 만에 설치된 한강다리였습니다 ] 

 

한강철교와 인도교가 탄생당시의 모습에서 조금 벗어나 현재와 같은 모양으로 변경되었던 것은 이른바 을축대홍수라 불리던 1925년 7월의 기록적인 물난리 때 많은 손상을 입은 후 복구되면서부터입니다.  이 홍수를 기화로 교각의 높이가 좀 더 높아졌고 상판과 트러스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재건설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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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측대홍수로 파괴된 한강철교 ]

 

여담으로 한강교량의 붕괴사고가 이외에도 4번이 더 있었는데 최초가 1950년 6월 28일에 있었던 한강철교 인도교 폭파사건이었고, 나머지는 1992년에 건설 중에 있었던 연쇄적으로 발생한 팔당대교와 신행주대교 붕괴와 1994년에 있었던 기억에도 생생한 성수대교 사고입니다.  1950년의 사고는 고의에 의한 붕괴였고, 1992년은 건설 중의 사고로 1994년은 관리 부실에 의한 사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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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2년 신행주대교 붕괴 (上) 와 망신이 되었던 1994년 성수대교사건 ]

 

여담으로 1925년 대홍수에 의해 한반도에서 발생한 총 피해액이 당시 조선총독부 1년 예산의 55 % 에 달할 정도였다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을축대홍수에 의한 교량 유실은 변변한 치수용 댐 하나 없었던 당시 여건으로는 피할 수 없었던 불가항력적인 천재였지만 나머지의 붕괴사고는 고의 또는 인재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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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5년 을측대홍수 당시의 노량진 (上) 과 용산 ]

 

다시 이야기를 원위치로 돌려 조선을 강점하여 대륙진출을 위한 군수기지화에 혈안이 된 일제는 193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중국침략을 본격화하기 시작하였고 따라서 경부-경의선에 의한 물자 수송량이 급격히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중일전쟁이 본격화되자 일제는 1936년 경부선, 1938년 경의선의 복선 공사에 착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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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대륙 진출이 격화되자 경부선과 경의선이 복선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서대문 부근에서 행진 중인 일본군의 모습인데 그 옆의 철도가 경의선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로써 이 철도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복선철도들로 확장되었는데 역시 제국주의자들의 대외팽창요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결과였고 건설과정에서 당연히 많은 수탈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한강철교도 기존의 A, B교와는 별개로 오늘날 가장 하류에 있는 복선의 C교가 건설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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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재난에도 불구하고 한강철교 C교가 완공됩니다 ( 앞이 D교 뒤가 C교 )]

 

그런데 이시기는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벌여 엄청난 자재난이 발생한 때였는데 당시 집에 있던 숟가락까지 공출하고 장호원선이나 경북선처럼 일부 지선 철도를 폐쇄하여 철재를 전시용으로 돌렸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1944년 이들 철도의 확장이 모두 완공되었는데 이것은 그 만큼 대륙침략에 대한 일제의 굳건한 의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 출처 / [ august 의 軍史世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