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의 산 [6] *-
2. 북악산 숙정문과 창의문 (3) 서울성곽의 4대문과 4소문
숭례문(崇禮門)

'예(禮)'는 남쪽에 해당되므로 문의 이름에 '예(禮)' 자가 붙었다.
숭례문의 현판은 태종의 큰아들 양녕대군의 글씨로도 유명하다.
물론 세종의 셋째아들이자 조선의 명필로 이름을 떨쳤던 안평대군의 글씨라는 주장도 있다.
이렇게 만든 이유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숭례문의 이름에 들어있는 '예(禮)'는 오행 중에서 '화(火)'에 해당되는데,
서울의 남쪽 관악산(서울의 외사산(外四山) 중 남산에 해당된다.)의 모습이 불꽃 모양이 아닌가?
거기에 가까이 있는 목멱산(남산의 옛 이름)에는 불에 잘 타는 나무(木)이 들어 있으니....
이에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막기 위해서 글씨를 세로로 길게 늘어뜨려 성문 밑을 막고 누르면
화기가 들어오지 못할 것이란 믿음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래저래 불과는 특별한 인연이 있는 대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몇년 뒤인 광해군시대 어느날 밤,
지금의 서울 청파동 한 도랑에서 서광이 비치기에 파보았더니
'훈민정음'과 같은 자랑스런 문화재가 있음에도 성문을 국보 1호로 지정한 이유 때문이었다.
옛 한양의 대문 중에서도 남대문인 숭례문이 정문이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설이 더 힘을 얻고 있다.
성문의 아래쪽을 지나치기 싫다고 하여, 길을 내기 위하여 헐어내 없어졌다.
숭례문은 2008년 불행하게도 화재로 소실되었다. 현재 재 건축을 계획하고 건축자재를 준비중이다.
개화기 숭례문 모습(당시에는 숭례문과 성벽이 연결 돼어 있었다.)


100년전 숭례문안쪽 난장의 모습

흥인지문은 서울성곽 동쪽 문으로, 조선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가 단종 원년(1453)에 고쳐 지었고,
고종 6년(1869)에 새로 지은 것이 지금에 이르렀다.
석축 중앙에는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重層) 문루를 세웠으며,
지붕은 숭례문과 마찬가지로 우진각으로 되어 있다. 공포 또한 다포 양식이나, 그 형태가 가늘고 약하며
지나치게 장식한 부분이 많아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도성의 8개 성문 가운데 유일하게 옹성을 갖추었는데,
바깥쪽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반원 모양으로 옹성(甕城)을 쌓았다.
이는 낙산의 지세가 낮아 방어에 취약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숭례문과 비교해 보면 건물의 규모나 형태는 비슷하나, 숭례문에 없는 옹성을 갖추고 있는 점이
보물 제1호이다.

100년전의 돈의문 모습
![]() |
◇의(義)는 서방에 속한다. 오행에 따라 돈의문(敦義門)을 서쪽에 세웠으나 1915년 일인들이 강제로 철거해 버렸다. |

숙정문도 많은 사연을 가진 문이었다. 태조 4년(1395)에 처음 건립되었으나,
태종 13년(1413)에
최양선이 주장한 '백악산 동령과 서령은 경복궁의 양팔에 해당하므로여기에 문을 내어서는 안되다'는 의견에 따라, 창의문(자하문)과 함께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사람들의 통행을 금하였다고 한다.
동쪽으로 성북동 골짜기로 내려와 동소문(혜화문) 밖 경원가도로 나오는 길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어
서울에 들어오는 데에는 동소문(혜화문)을 거치는 것이 더욱 빠르고 편리하므로 이용하는
이것은 북은 음이고, 남은 양인 까닭에 가뭄 때 양을 억제하고 음을 돋우는 음양오행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숙정문이 여자의 방위인 북쪽에 있기 때문이다.(북쪽은 음의 기운이 강한 곳이다.)
항상 닫혀 있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숙정문을 대신하여 창의문을 북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1976년 복원된 숙정문 입구
숙정문(혹은 숙청문)은 사적 제10호인 서울성곽 중 지금까지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던 북대문으로
청와대 뒤쪽 북악산 동쪽 산마루의 성북구 성북동 계곡 끄트머리에 위치해 있다.
1968년 1·21 사태 이후 군사시설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일반인의 발길이 차단되었다가
2006년 4월에 개방되었다.
숙정문은 경복궁의 주산인 백악산의 동쪽 마루턱에 위치하고 있는 도성의 북문으로
삼청터널 위에 자리하고 있다.
숙정문은 처음에는 숙청문(肅淸門)이었는데,숙정문(肅靖門)으로 개칭되어 중종(中宗) 이후의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서울의 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 예약문의 02-747-2152~3
홍지문((弘智門)
![]() |
인왕산 뒷 편 끝자락에 있는 탕춘대성의 성문이다. 홍지문 문루와 오른쪽의 오간수문은 1921년

숙종이 친필로 홍지문(弘智門)이라고 이름을 써붙여서
홍지문이 새로 생기게 되어 북대문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오간수문(五間水門), 탕춘대성(蕩春臺城)을 건립하였다.
![]() |
복원된 탕춘대성
이 성의 명칭을 탕춘대성이라 한 것은 현재 세 검정이 있는 동쪽으로 약 100 여m가 되는 산봉우리에
연산군의 놀이터였던 탕춘대가 있었으 므로 그 이름을 딴 것이다. 또한, 도성의 서쪽 에 있다 하여 서성이라 하였으며, 겹성으로도 불려졌다. 탕춘대성 능선길은 완만하며 쉽게 오를 수 있는 오솔길로 등산을 겸한 역사탐방로가 된다. 탕춘대성에 오르려면 세검정 상명대학교와 구기 터널·홍은동에서 시작하면 성관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
|
지금의 서소문동 큰 길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광희문(光熙門)과 함께 시신을 성 밖으로 운반하던 통로로 사용되었고,
궁궐에서 죄를 지은 사람들이 이 문을 통해 도성 밖으로 쫓겨났다고 한다.
1914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의해 부근의 성곽과 함께 완전히 철거되었고
지금은 사진을 통해서만 그 모습을 대강 알 수 있을 뿐이다.

고양군, 양주군 방면으로 통하는 문이었으며, '자하문(紫霞門)'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궁 안에 들어가 반정에 성공한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의주대로는 옛 6대로 또는 8대로 중 중국에 이르는 길이라 가장 중요했다.
![]() |


▲ <조선고적도보>에 수록된 혜화문 전경(1904년)

▲ <조선고적도보>에 수록된 혜화문 정면이다.
1684년(숙종 10) 문루(門樓)를 새로 지은 후 한말까지 보존되어 오다가 1928년 문루가 퇴락

보신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2가에 있는 종각 이름이다.
조선시대 한양에 종을 처음 건 것은 1398년(태조 7)으로, 경기도 광주에서 주조한 종을 청운교
서쪽 종루에 걸었다. 1413년(태종 13)에 종루를 통운교(종로 네거리)로 옮기고 1458년(세조 4)에는 새로 대종을 주조하여 달았으나 임진왜란으로 종루는 소실되고 종도 파괴 되었다.
그후 1619년(광해군 11)에 종각을 다시 짓고 종을 걸었는데 이때 세운 종각은 임진왜란 전의
2층 종루가 아니고 1층 종각이었으며 여기에 건 종은 명례동 고개에 있었던 것을 옮겨왔다고 한다.
그후 조선 후기까지 4차례나 화재와 중건이 있다가 1895년(고종 32)에 종각에 '보신각'이란
현액이 걸린 이후 종도 보신각종이라 부르게 되었다. 6·25전쟁으로 종각이 파손된 것을
1953년 중건하였다가 1980년 다시 2층 종루로 복원 하였다.
![]() |
종각은 도성의 문을 열고 닫기 위해 치는 종을 달아두는 곳이다. 원래의 종루는 여러 번의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중건되었다. 종각은 고종이 1895년에 ‘보신각(普信閣)’ 이라는 현판을 사액하여
이 때부터 보신각으로 불려졌다.
이는 '28계 33천' 우주관에서 유래한 것으로 새벽이 열리는 인시(寅時; 오전 4시경)에
33번 타종해
4대문을 열고, 유시(酉時; 오후 10시경)에는 28번 타종해 성문을 닫았다고 한다.도성주민들에게 시간을 알려주는 도구였던 것이다.
사상에서 온것이다. 33천에 사는 사람들은 무병장수하기 때문에 새해를 맞는 사람들도 그들처럼
건강하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33번 타종했다고 한다. 그리고 인정에 타종하는 횟수 28은
동양에서 생각하는 하늘의 별자리 28수(宿)를 상징한다고 한다.
![]() |
보신각 안에 들어 있는 보신각종은 도성의 문을 여닫는데 쓰였다.
곧 새벽 4시경에 33번의 종을 쳐서 도성의 문을 열고(파루), 저녁 10시경에 28번의 종을 쳐서 도성의 문을 닫았다(인정).
현재 보신각종은 보물 제2호로 지정되어 있다.
- 출처 / 蒼村 함지박 / blog.chosun.com/doldol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