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이야기

-* 서울의 산 [6] *-

paxlee 2009. 3. 28. 21:33

 

2. 북악산 숙정문과 창의문 (3)

 

   서울성곽의 4대문과 4소문   

 

조선의 태조는  1395년 9월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정도전에게 명하여 성터를 측정하게 하였다.
정도전은 한양을 둘러싸고 있는 네 개의 산, 남산과 북악산, 인왕산과 낙산에 올라 실측하여 이를 연결하는
5만 9천5백 척의 성터를 결정하였으며, 그해 가을 서울 성곽을 개축하고 4대문과 4소문을 완성하였다.
 
4대문은 유교의 덕목인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의 5상(五常)을
방향에 따라서 아래와 같이 명칭 하였다.
 
東의    동대문인 興仁之門 (仁) : 동쪽의 낮은 낙산의 비포를 위해 지(之)를 넣음
西의    서대문인 敦義門    (義)
南의    남대문인 崇禮門    (禮) : 숭례문은 현판을 세워 남쪽의 화기가  궁궐쪽으로  
                                                          번지는 것을 차단키 위해서임.
北은    북대문인 肅正門    (智) :지(智)자가 아닌 정(正)자를 쓴 것은 북쪽은 음기가  
                                                         많아 닫아두고  홍지문(弘智門)으로 대신했다.
中央엔              普信閣    (信)을  4대문 복판에 세웠다.
 
 4대문 사이에는  4소문을 만들었다.
 
 동북의 동소문(홍화문/혜화문)
 서남의 서소문(소의문/소덕문)
 서북의 북소문(창의문/자하문)
 동남의 남소문(광희문)
 
                                               <한양 도성의 4대문과 4소문의 위치>

 

                                

숭례문(崇禮門)

 

 
 
숭례문은 옛 한양 도성의 남대문이며 정문이기도 했다. (국보 제1호)
 
숭례문(崇禮門)은 한양 도성의 남대문이다.
'예(禮)'는 남쪽에 해당되므로 문의 이름에 '예(禮)' 자가 붙었다.
 
현재 남아있는 우리나라 성문 건물로서는 가장 규모가 크다.
숭례문의 현판은 태종의 큰아들 양녕대군의 글씨로도 유명하다.
물론 세종의 셋째아들이자 조선의 명필로 이름을 떨쳤던 안평대군의 글씨라는 주장도 있다.
 
숭례문의 현판은 다른 대문들과는 달리 세로로 서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렇게 만든 이유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숭례문의 이름에 들어있는 '예(禮)'는 오행 중에서 '화(火)'에 해당되는데,
서울의 남쪽 관악산(서울의 외사산(外四山) 중 남산에 해당된다.)의 모습이 불꽃 모양이 아닌가?
거기에 가까이 있는 목멱산(남산의 옛 이름)에는 불에 잘 타는 나무(木)이 들어 있으니....
이에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막기 위해서 글씨를 세로로 길게 늘어뜨려 성문 밑을 막고 누르면
화기가 들어오지 못할 것이란 믿음 때문이었다고 한다.
얼마전 방화로 인해 우리 국민들을 가슴아프게 했던 일이 있어
이래저래 불과는 특별한 인연이 있는 대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임진왜란 때엔 이 현판을 잃어버린 일도 있었다.

몇년 뒤인 광해군시대 어느날 밤,

지금의 서울 청파동 한 도랑에서 서광이 비치기에 파보았더니

숭례문 현판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숭례문이 국보 1호가 된 것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가 많았다.
'훈민정음'과 같은 자랑스런 문화재가 있음에도 성문을 국보 1호로 지정한 이유 때문이었다.
어떤 이들은 우리 나라의 국보가 처음 지정된 것이 일제 때인데, 일제가 과거 임진왜란 때
고니시 군이 한양에 처음 입성한 것이 숭례문이었기 때문에 이것을 1호로 지정했다는 설도 있으나,
옛 한양의 대문 중에서도 남대문인 숭례문이 정문이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설이 더 힘을 얻고 있다.
 
석축의 양측에는 원래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으나 1908년 일본의 황태자가 조선을 방문할 때,

성문의 아래쪽을 지나치기 싫다고 하여, 길을 내기 위하여 헐어내 없어졌다.

숭례문은 2008년 불행하게도 화재로 소실되었다. 현재 재 건축을 계획하고 건축자재를 준비중이다.  

 
                           조선시대 후기 1900년대 모습
 

                    

            개화기 숭례문 모습(당시에는 숭례문과 성벽이 연결 돼어 있었다.)

 
                                                   구한말 숭례문의 모습
 

                                               100년전 숭례문안쪽 난장의 모습
 
동대문 ; 흥인지문( (興仁之門)


흥인지문은 서울성곽 동쪽 문으로, 조선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가 단종 원년(1453)에 고쳐 지었고,

고종 6년(1869)에 새로 지은 것이 지금에 이르렀다.

석축 중앙에는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重層) 문루를 세웠으며,

지붕은 숭례문과 마찬가지로 우진각으로 되어 있다. 공포 또한 다포 양식이나, 그 형태가 가늘고 약하며

 지나치게 장식한 부분이 많아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도성의 8개 성문 가운데 유일하게 옹성을 갖추었는데,

바깥쪽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반원 모양으로 옹성(甕城)을 쌓았다.

이는 낙산의 지세가 낮아 방어에 취약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숭례문과 비교해 보면 건물의 규모나 형태는 비슷하나, 숭례문에 없는 옹성을 갖추고 있는 점이

특징이며, 세부 기법이 연약하고 장식 위주로 되어 전형적인 조선 후기 양식의 건축물임을 알 수 있다.

보물 제1호이다.

 

동대문만 유일하게 흥인지문이라 하여 之자가 첨가되어 4자가 된 것은, 옛부터 동쪽이 낮아
왜구의 침입을 많이 받으므로 동쪽의 기운을 높이는 뜻에서 산맥을 뜻하는 之자를 첨가 하였다.


                  네쇼날그래픽 1910년 11호에 소개된 동대문안쪽의 모습
 
서대문 ; 돈의문(敦義門)
 
                                         1915년 철거 당하기 전의 돈의문 모습...
 
 
서울 신문로2가에 있던 조선시대 서울의 4대문 중 하나. 경희궁터에서 독립문 쪽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1915년 일제가 도시계획에 따른 도로 확장을 이유로 철거해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100년전의 돈의문 모습
 
◇의(義)는 서방에 속한다. 오행에 따라 돈의문(敦義門)을 서쪽에 세웠으나 1915년 일인들이 강제로 철거해 버렸다.
 
돈의문 성벽
 
                                                 돈의문밖 모습 
 
 
북대문 ; 숙정문(肅靖門)
 

도성의 북대문인 숙정문, 음기가 강한 북쪽에 있다고 해서 항상 닫아두었다고 전한다.
 

숙정문도 많은 사연을 가진 문이었다. 태조 4년(1395)에 처음 건립되었으나,

태종 13년(1413)에 최양선이 주장한 '백악산 동령과 서령은 경복궁의 양팔에 해당하므로

여기에 문을 내어서는 안되다'는 의견에 따라, 창의문(자하문)과 함께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사람들의 통행을 금하였다고 한다.

 
원래 이 문은 높은 산 중턱에 있어 길이 매우 험하며 문을 나서면 북한산이 앞을 가로막아
동쪽으로 성북동 골짜기로 내려와 동소문(혜화문) 밖 경원가도로 나오는 길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어

서울에 들어오는 데에는 동소문(혜화문)을 거치는 것이 더욱 빠르고 편리하므로 이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이 문을 폐쇄하여도 아무런 지장이 없어서 영구히 닫아두었다.
   
다만 가뭄이 심할 때에 이 문을 열고 숭례문을 닫는 풍속이 있었다.
이것은 북은 음이고, 남은 양인 까닭에 가뭄 때 양을 억제하고 음을 돋우는 음양오행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숙정문을 열어놓으면 장안의 여자가 음란해지므로 항상 문을 닫았다는 속설도 전하는데,
그것은 숙정문이 여자의 방위인 북쪽에 있기 때문이다.(북쪽은 음의 기운이 강한 곳이다.)
 
숙정문은 다른 대문들과는 규모 면에 있어 그 크기가 현저히 작다.
항상 닫혀 있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숙정문을 대신하여 창의문을 북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1976년 대통령의 명으로 북악산 일대의 성곽을 복원할 때 함께 복원되었다.
 
                                            북대문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모습...
 

                                       1976년 복원된 숙정문 입구

숙정문(혹은 숙청문)은 사적 제10호인 서울성곽 중 지금까지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던 북대문으로
청와대 뒤쪽 북악산 동쪽 산마루의 성북구 성북동 계곡 끄트머리에 위치해 있다.

1968년 1·21 사태 이후 군사시설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일반인의 발길이 차단되었다가

2006년 4월에 개방되었다.

 
 
 
                                                             숙정문 안쪽
 

숙정문은 경복궁의 주산인 백악산의 동쪽 마루턱에 위치하고 있는 도성의 북문으로

삼청터널 위에 자리하고 있다. 숙정문은 처음에는 숙청문(肅淸門)이었는데,

숙정문(肅靖門)으로 개칭되어 중종(中宗) 이후의

실록에는 모두 숙정문으로 기록되고 있다.
 
 
* 현재 탐방은 인터넷에서 예약접수 후 신원확인 절차를 거쳐 관람하는 순으로 진행되고있다.
삼청터널을 지나 숙정문 입구에서 숙정문을 거쳐 촛대바위까지 오르게 되면 북악산의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서울의 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 예약문의 02-747-2152~3

홍지문((弘智門)

 

 
한북문의 원래 이름은 홍지문(弘智門)인데, 대동여지도엔 한북문으로 표기돼있다.
수문 아래 흐르는 물은 세검천...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것이 비봉능선이다.
인왕산 뒷 편 끝자락에 있는 탕춘대성의 성문이다. 홍지문 문루와 오른쪽의 오간수문은 1921년
허물어져 있었는데, 1976년부터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과거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 


                                                     홍지문 정면
 
숙종 4년 1715년 지금의 세검정 길가 홍제천 위 (상명대학교 앞쪽)에 세운 수문인 한북문(漢北門)을
숙종이
친필로 홍지문(弘智門)이라고 이름을 써붙여서

홍지문이 새로 생기게 되어 북대문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본래 북대문인 숙정문 은 석문만 있던 것을 1976년 북악산 일대의 성곽을 복원하면서
문루를 짓고  숙정문 肅靖門)’이란 편액을 달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홍제천에 세워져 있는 오간대수문
 
1715년(숙종 41)에 서울의 도성과 북한산성의 방어시설을 보완하기 위해 홍지문(弘智門), 
오간수문(五間水門),  탕춘대성(蕩春臺城)을 건립하였다.

                              복원된 탕춘대성
 
이 성의 명칭을 탕춘대성이라 한 것은 현재 세 검정이 있는 동쪽으로 약 100 여m가 되는 산봉우리에

연산군의 놀이터였던 탕춘대가 있었으 므로 그 이름을 딴 것이다.

또한, 도성의 서쪽 에 있다 하여 서성이라 하였으며, 겹성으로도 불려졌다.

탕춘대성 능선길은 완만하며 쉽게 오를 수 있는 오솔길로 등산을 겸한 역사탐방로가 된다.

탕춘대성에 오르려면 세검정 상명대학교와 구기 터널·홍은동에서 시작하면 성관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출구 - 상명대 방면 시내버스 이용 - 상명대학교앞에서 하차
 
서소문 ; 소의문 [昭義門]

 

      한양 도성의 서소문이었던 소의문,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지금의 서소문동 큰 길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광희문(光熙門)과 함께 시신을 성 밖으로 운반하던 통로로 사용되었고,
궁궐에서 죄를 지은 사람들이 이 문을 통해 도성 밖으로 쫓겨났다고 한다.

1914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의해 부근의 성곽과 함께 완전히 철거되었고
지금은 사진을 통해서만 그 모습을 대강 알 수 있을 뿐이다.
 
북소문 ; 창의문(彰義門)
 


                         ▲ <조선고적도보>에 수록된 창의문 전면이다.
 
창의문(彰義門)은 한양 도성의 북소문이다.
고양군, 양주군 방면으로 통하는 문이었으며, '자하문(紫霞門)'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1416년(태종 16) 풍수지리설을 주장하는 자들이 이 곳의 통행이 왕조에 불리하다 하여
폐문(閉門)한 채 일반의 통행이 금지되었다가 1506(중종 1)에 다시 열어놓았다.
1623인조반정(仁祖反正) 때는 능양군(陵陽君:인조)을 비롯한 의군(義軍)들이 이 문을 부수고

궁 안에 들어가 반정에 성공한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창의문(彰義門)은 한양 도성(都城) 4소문 중 하나인 서북문으로 백악(=북악)과 인왕산이
만나는 잿마루에 있다. 문을 내려가 홍제원(지금 홍제동) 쪽으로 가면 옛 의주대로와 통한다.
의주대로는 옛  6대로 또는 8대로 중 중국에
이르는 길이라 가장 중요했다.
 
                                                    창의문과 성곽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창의문.
종이에 엷은 채색, 29.5 x 33.0cm, (장동팔경첩) 국립중앙박물관소장
 
 
동소문 ; 혜화문 [惠化門]
 
 

동소문(東小門)이라고도 한다. 도성에는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小門)이 설치되었는데,
이 문은 동문과 북문 사이에 세워졌다. 처음에는 문 이름을 홍화문(弘化門)이라 하였다가
1483(성종 4) 새로 창건한 창경궁의 동문을 홍화(弘化)라고 정함에 따라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1511(중종 6) 혜화문으로 고쳤다.
 

                        <조선고적도보>에 수록된 혜화문 전경(1904년)

                          <조선고적도보>에 수록된 혜화문 정면이다.

1684년(숙종 10) 문루(門樓)를 새로 지은 후 한말까지 보존되어 오다가 1928년 문루가 퇴락
하였으므로 이를 헐어버리고 홍예(虹霓)만 남겨 두었는데, 일제는 혜화동돈암동 사이의
전차길을 내면서 이마저 헐어버려 그 형태도 찾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당시 북문(북대문)은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이 문은 양주·포천 방면으로
통하는 중요한 출입구 구실을 하였다. 1975년부터 시작되어 1980년에 완공된 서울성곽
일부로 1992년에 복원하였다.
 
남소문 ; 광희문 [光熙門]
 
 
시구문(屍軀門)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하였으며 서소문(西小門)과 함께 시신(屍身)
내보내던 문이다.1396(태조 5) 도성을 축조할 때 창건되었으며, 1422(세종 4) 개축된
것으로 추측된다. 숙종실록(肅宗實錄)》에 1711(숙종 37) 민진후(閔鎭厚)의 건의로
금위영(禁衛營)으로 하여금 개축하게 하고, 문루(門樓)는 목재를 구하기가 어려우므로 후에
개축하기로 하였다는 기사가 있으며, 1719년 문루를 세워서 광희문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그 후 1975년 도성복원공사의 일환으로 석문을 수리하고 문루를 재건하였다.
 
                          사진: 19세기 말 이사벨라 비숍이 찍은 광희문
  
보신각(普信閣)
 


보신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2가에 있는 종각 이름이다.
조선시대 한양에 종을 처음 건 것은 1398년(태조 7)으로, 경기도 광주에서 주조한 종을 청운교
서쪽 종루에 걸었다. 1413년(태종 13)에 종루를 통운교(종로 네거리)로 옮기고 1458년(세조 4)에는 새로 대종을 주조하여 달았으나 임진왜란으로 종루는 소실되고 종도 파괴 되었다.

그후 1619년(광해군 11)에 종각을 다시 짓고 종을 걸었는데 이때 세운 종각은 임진왜란 전의
2층 종루가 아니고 1층 종각이었으며 여기에 건 종은 명례동 고개에 있었던 것을 옮겨왔다고 한다.
이 종은 본래 원각사종으로 세조 때에 주조한 것인데 1536년(중종 31)에 남대문 안으로 옮겨놓았다가 1597년(선조 30) 명례동 고개로 옮겼던 것을 광해군 때 종각을 복구하면서 이전한 것이다.

그후 조선 후기까지 4차례나 화재와 중건이 있다가 1895년(고종 32)에 종각에 '보신각'이란
현액이 걸린 이후 종도 보신각종이라 부르게 되었다. 6·25전쟁으로 종각이 파손된 것을
1953년 중건하였다가 1980년 다시 2층 종루로 복원 하였다.
 

종각은 도성의 문을 열고 닫기 위해 치는 종을 달아두는 곳이다. 원래의 종루는 여러 번의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중건되었다. 종각은 고종이 1895년에 ‘보신각(普信閣)’ 이라는 현판을 사액하여
이 때부터 보신각으로 불려졌다. 
 
보신각종 33번 타종이유..
 

이는 '28계 33천' 우주관에서 유래한 것으로 새벽이 열리는 인시(寅時; 오전 4시경)에

33번 타종해 4대문을 열고, 유시(酉時; 오후 10시경)에는 28번 타종해 성문을 닫았다고 한다.
도성주민들에게 시간을 알려주는 도구였던 것이다.

특히 파루에 타종하는 횟수 33은 도솔천을 중심으로 하늘이 횡으로 33천으로 벌여져 있다는
사상에서 온것이다. 33천에 사는 사람들은 무병장수하기 때문에 새해를 맞는 사람들도 그들처럼
건강하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33번 타종했다고 한다. 그리고 인정에 타종하는 횟수 28은
동양에서 생각하는 하늘의 별자리 28수(宿)를 상징한다고 한다.
 
                  보신각(1890년대)

보신각 안에 들어 있는 보신각종은 도성의 문을 여닫는데 쓰였다.

곧 새벽 4시경에 33번의 종을 쳐서 도성의 문을 열고(파루), 저녁 10시경에 28번의 종을 쳐서 도성의 문을 닫았다(인정).

현재 보신각종은 보물 제2호로 지정되어 있다. 

                 - 출처 / 蒼村 함지박 / blog.chosun.com/doldol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