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이야기

-* 서울의 산 [10] *-

paxlee 2009. 4. 6. 21:46

 

                                    3. 인왕산 (3)

 

 

인왕산은 백악산의 서쪽에 있어 서봉(西峰), 서산(西山)이라 부르기도 하였는데, 이 산에 옛날 인왕사(仁王寺)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 한다. 인왕은 불법의 수호신으로 사문(寺門) 또는 수미단 전면의 좌우에 안치하는 한 쌍의 금강역사로서 둘다 용맹하고 험악한 얼굴을 가지며, 일명 이왕(二王) 또는 금강신(金剛神)이라 한다. 인왕산은 불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던 산으로 세종의 내불당이 이곳에 있었고, 인왕사 서쪽에 금강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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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왕산 소나무가 생긴 그대로입니다. -

 

인왕산은 일명 필운산(弼雲山) 이라 하는데, 필운은 서산을 뜻하는 이름이다. 인왕산은 사울 내사산의 서쪽 호랑이산에 해당된다. 경복궁의 주산 북악이 뾰족하고, 남산은 능선이 매우 부드럽고, 좌청룡인 동쪽의 낙산은 밋밋하고 얕은 지세인데 비해, 인왕산의 주봉은 둥글넓적하면서도 남산같이 부드럽거나 단조옵지 않다. 또한 뾰족한 북악처럼 유달리 뛰어나지는 않으나 늠름한 남성적이 산세이다. 인왕산은 곳에 따라 매우 험준하지만 멀리서 바라다 보면 매우 평범한 듯 하다. 그러나 계속 올라가다 보면 결코 단조롭지 않음을 곧 알 수 있으며, 다체로운 풍치와 함께 위압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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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가 개성에서 도읍을 옮기기로 하고 무학에게 물으니  도읍을 한양으로 정하고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백악과 남산으로 좌청룡, 우백호를 삼으라 하였다. 그러나 정도전이 이를 마땅치 않게 생각하고 이르기를 옛적부터 제왕이 모두 남족을 향하고 다스렀지, 동쪽으로 향하였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무학은 '지금 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200년 뒤에 가서 내 말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고 한다. [주/ 車天輅의 五山說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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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가  정도전의 건의에 따라 백악아래 경복궁을 지어 천도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한경지략"에 의하면 무학이 200년 뒤라 한 것은 곧 임진년(1592)을 가리킨 것이다. 임진왜란으로 도성이 무너지고 깨지고 불탔으니 참으로 용케 맞는 말이었다고 한다. 도읍을 건설할때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제도에 따라 인왕산 기슭 서부 인달방에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여 사직단을 건설하니 나라의 상징이 인왕산의 품안에 자리잡게 되었다.

 

1968년 북한 무장공비의 청와대 습격사건을 계기로 안보상 인왕산의 방위체제가 문제되어 인왕산의 출입이 통제되었다. 정부에서는 가능한 범위내에서 1975년부터 서울성곽복원사업을 시작하여 인왕산지역을 청운지구로 정해져 공사가 진행되었다. 1993년에 이르러 20여년간 안보상의 이유로 출입이 통제외었던 인왕산이 문민정부의 출범과 더불어 시민에게 개방되어 자유로운 등산과 암벽등반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인왕산에는 선바위를 비롯하여 바위의 형상이 실제의 사물과 유사한 기암괴석들이 많다.

 

 

선바위 /  남쪽능선 하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인왕산의 바위 중 으뜸으로 꼽히는 바위이다. 스님이 장삼을 입고 서 있는 것 같다하여 선(禪)자를 따서 선바우리 불렀다. 

 


달팽이바위/ 남릉 정상에 이르는 능선에 위치하고 있는 인왕산의 대표적인 바위중의 하나로서 형상이 달팽이가 기어가는 형상을 하고 있다. 또 두 손가락을 펼친 모습으로도 보여 손가락바위하고 불리어 진다.

 

                   

 


치마바위 / 정상 바로 밑 동면에 매우 넓게 펼쳐진 바위로서 여인의 주름치마를 펼쳐놀어 놓은 듯한 바위 사면이다. 중종과 페비 단경황후 신씨의애틋한 전설이 있는 바위이기도 하다.

 

 


기차바위 / 정상에서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바위이름 그대로 기관차가 객차를 끌고가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바위는 북악산에서 보면 더 실감이 난다.


이 외에도 모자바위, 돼지바위, 말안장바위, 두꺼비바위, 코끼리바위, 자라바위, 범바위, 매부리바위, 쉼바위, 삿갓바위,팽귄바위, 해골바위, 장승바위, 부처님바위, 책바위, 매바위 등 여러가지 모양의 바위들이 산재해 있다.

 

경승과 명소

 

1) 청풍계(淸風溪) / 인왕산 동쪽 기슭은 현재 백운동과 청하동이 합쳐서 청운동이 되어 있지만, 예전에는 백운동아래 곧 청운초등학교 뒷길 일대를 청하동이라 했다. 그 중에서도 지금의 청운도 52번지 일대를 청풍계라 하였다. 지금은 복개가 되어 길이 되어 있지만, 복개되기 전에는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었다. 청풀계는 인조때 재상 김상용의 집터로 그 집 이름을 늠연당(늠연당)이라 하고, 와유암(와유암)은 그가 순국하기 이전  취미로 그림과 서적을 좌우에 펴놓고 즐기던 서재였다. 이곳 바위에 백세청풍이란 우암 송시열의 글로 암각 되어있다. 서울 성안의 5대 경승지로 유명하였다.

 

2) 송석원(松石園) / 인왕산 동쪽 기슭 지금의 옥인동 47번지 일대는 서울 장안의 5대 겅승지 가운데 하나인 인왕동 부근으로 광복이후 집들이 들어서서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지만 일찍이 옥류동이라 하였다. 송석원은 소나무와 바위가 어울어져 있다는 뜻이며 바위에 김정희의 글씨로 송석원과 송시열의 글씨로 옥류동이 새겨져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이 없다. 한편 송석원은 조선 순종의 비 순정효왕후의 숙부로 조선왕조 옥새를 강탈하여 일제에게 넘긴 윤덕영의 별장으로도 유명하였다.

 

3) 필운대(弼雲臺) / 필운대는 인왕산 남쪽기슭 배화여고가 있는 곳으로 선조 때 정승인 이항복의 집터이다. 지금도 배화여고 아래 벼랑바위 벽에 필운대라 새긴 암각글자가 뚜렷이 남아있다. 이곳에서 바위를 타고 오르면 인왕산을 등지고 왼편으로 누 앞 가까이 우뚝솟은 북악이 보이고, 그 뒤로 북한산의 비봉, 문수봉, 보현봉과 백운대까지 훤히 보인다. 몸을 돌리면 서울시내 남산이 발 아리이고 다시 남으로는 동서로 굽이쳐 흐르는 한강이 전망된다. 방자호의 필운대 산수화를 보면 선비 셋이서 인근 풍경을 완상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4) 백호정약수(白虎亭藥水)터 / 인왕산 남동쪽 기슭 누상동의 백호정은 누각골의 막바지에 있었던 서촌 5사정의 한 곳이다. 이곳에 있는 백호정이라는 각자는 숙종 때 명필가 엄한명이 바위에 새긴 글씨다. 백호정약수터는 인왕산 호랑이가 많던 시절에 병든 흰 호랑이가 수풀 속에서 풀을 마신 후 곧 병이 나아서 활동하는 것을 보고 주민들이 그 자리에 가보니   조그마한 샘이 있어 이 곳을 약수터로 이용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현재는 百虎亭이라 새긴 돌기둥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사적 문화재

 

1) 사직단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21호로 지정되었다. 면적 9,075㎡이다. 한양(漢陽)에 도읍을 정한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고려의 제도를 따라 경복궁 동쪽에 종묘(宗廟), 서쪽에는 사직단을 설치하였다. 1395년(태조 4) 공사를 착수하여 설단(設壇)이 완성되자 담장을 두르고 그 안에 신실(神室)과 신문(神門)을 세웠다. 사직단은 사단(社壇)과 직단(稷壇)의 동·서 양단(東西兩壇)을 설치하였는데 동단에는 국사(國社:正位土神), 서단에는 국직(國稷:正位穀神)을 모셨으며, 단에는 주척(周尺)으로 높이 2.5자, 너비 1자의 석주(石柱)를 각기 세워 후토씨(后土氏)와 후직씨(后稷氏)를 배향하였다.

 

단은 네모반듯하며 세벌장대석을 높이 3자가 되게 하고 한 변이 2장 5척(주척)의 크기로 평면을 설정하였다. 단의 4면에는 3층의 돌계단을 설치하였으며 단상 네 귀퉁이에는 구멍난 돌이 박혀 있고 큰 쇠고리가 꽂혔는데, 이는 기둥을 세우고 차일을 치도록 설비하였던 것이다. 사직단에는 1년에 네 차례의 대사(大祀)와 선농(先農)·선잠(先蠶)·우단(雩壇)을 제사지내는 중사(中祀), 그 밖에 기곡제(祈穀祭)와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기도 하였다. 이 사직단의 설치와 함께 사직서(社稷署)가 생겨 제사의 수발을 맡았다.


2) 인왕산의 서울설곽

 

 

 


3) 무계정사(武溪精舍)

무계정사(武溪精舍)는 세종의 셋째 왕자인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의 별장으로,창의문(彰義門) 밖 무계동(武溪洞)에 있었으며, 무이정사(武夷精舍)라고도 하였다. 세종 29년(1447) 4월 20일 안평대군이 꿈에 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노닐었던 도원(桃源)을 당대 최고의 화가인 안견(安堅)에게 그리게 하여 완성된 작품이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이다.

 

안평대군은 꿈에서 본 무릉도원을 잊지 못하던 차에 현재 서울 종로구 부암동의 무계정사 인근을 지나치다 꿈에서 본 정경과 흡사함을 느끼고 여기에 두어 칸 집을 짓고 무릉계(武陵溪)란 뜻을 취해 무계정사라는 편액을 내걸고 글을 읊고 풍류를 즐기고 활을 쏘며 심신을 단련하였다고 한다.

 

4) 석파정 

석파정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6호이다. 조선시대 말기인 중신 김홍근의 별장이었는데 흥선대원군이 집권후 자신의 별장으로 사용하였다. 경내 안양각 건물 두 바위앞면에 삼계동(三溪洞)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어 삼계동정자라 불렀다. 흥선대원군이 소유하면서 앞산이 모두 바위인 것을 고려하여 그의 아호를 석파라하고 건물의 이름도 석파정이라 하였다. 전문을 통과하여 정원에 들어서면 인왕산의 자연암석을 이용한 수로가 조성되어 있다. 

 

인왕산의 계곡 물이 흘러들어 연못을 이룬 곳에 소수운렴암 (巢水雲簾菴,물을 품고 구름이 발을 치는 암자) 이란 권상하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마당끝에 수백년 된 소나무가 차일을 친 듯 드리워져 있으며 그 아래 그늘 넓이만도 67재곱미터나 된다. 이곳은 1950년 6.25전쟁 후 천주교가 콜룸바고아원이 되기도 하였으며 사랑채로 사용하던 별채 한 동은 1958년 손재형에 의해 홍지동 125번지로 이전되어 별도의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석파정내에는 안채, 사랑채, 별당채가 자리하고 잇다.

 

5) 선바위 (서울민속자료 제4호)

선바위는 마치 중이 장삼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이므로 '禪'자를 따서 이름하였다. 사람들은 석불님ㆍ관세음보살님, 또 이 두 개의 바위를 양주(兩主)라고 부르기도 한다. 임신을 원하는 부인들이 이 바위에 빌면 효험이 있다고 하여 정성을 드리는데 작은 돌을 붙이면 효험이 크다고 하여 돌을 문질러서 붙인 자국이 남아있다. 이를 붙임바위라고 한다. 선바위는 높이가 7∼8m, 가로 11m 내외, 앞뒤의 폭이 3m 내외로 두 개의 큰 바위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형상이다. 바위 아래에는 가로 약 10m, 높이 70∼80cm의 제단이 시멘트로 단장되어 있다.

 

이 바위는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상이라는 전설과 이성계 부부의 상이라는 전설이 있다. 또 무학대사가 태조의 명을 받고 천도할 곳을 찾다가 현재의 서울을 찾아냈으나 국운이 500년밖에 유지 못 할 것을 알게 되자 이 선바위에서 천일기도를 하였다고 하며 그 뒤부터 이 바위가 유명하게 되었다고 한다. 선바위는 암석숭배(岩石崇拜)의 일종으로 이것이 전설화되고 또 불교와 무속신앙(巫俗信仰)이 밀착되면서 무속신앙의 중요지가 되어 있다.


6) 국사당  (중요민속자료 제28호)

 
인왕산 기슭에 위치한 국사당은 무속신앙에서 섬겨지는 여러 신을 모신 당집으로 요란한 굿판을 벌이기 쉽도록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산 속에 세운 ‘굿당’에 속한다. 원래 남산 꼭대기에 있었던 것을 일본인들이 남산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지으면서 이전을 강요하여 지금의 위치로 해체, 복원한 것이다. 인왕산을 택한 이유는 풍수지리설에서 명당에 속하고 현재 무속신으로 모셔지는 조선 태조와 무학대사가 기도하던 자리이기 때문이다.

국사당은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양끝의 2칸은 새로 지은 것이다. 1칸은 4쪽의 여닫이문으로 되어 있고 옆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내부의 3면에는 무신도가 걸려있고 마루에는 제상을 차리고 굿을 하는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반 건물보다 구조는 간단한 편이나 그 규모는 더 크다. 1925년경에 새로 지어진 국사당은 영·정조때의 건축기법을 바탕으로 한 원래의 국사당을 그대로 복원한 것이다.

내부의 대들보가 대들보가 아치형으로 된 것이 특이한 이 건물은 전체적으로 구조가 간결하면서도 목재의 짜임새가 튼튼한 것이 목공의 솜씨가 돋보인다. 인왕산 국사당은 다른 당집에 비해 건물이 견고하고 많은 무신도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