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이야기

-* 서울의 산 [38] *-

paxlee 2009. 5. 27. 20:52

14. 검암산(儉岩山/177.9m,/구릉산九陵山)


...
1. 명칭과 연혁

 

검암산은 조선시대 왕릉인 동구릉이 있는 산으로 일반적으로 구릉산(九陵山)이라 부른다. 검암산은 조선 건국 초기부터 왕릉터로 주목을 받아 가장 많은 능이 안장되어 있다. 구릉산은 불암산과 망우산 사이에 솟아 있는 표고 177.9m의 잔구성 산지이다. 구릉산의 산세는 남북으로 향해 있으면서 동쪽으로 흐르는 계류는 왕숙천을 이루고, 서쪽으로 흐르는 계류는 묵동천을 거쳐 중랑천을 이루어 한강으로 합류된다


검암산의 동쪽 기슭에 왕릉군이 자리함에 따라서 산 서쪽 기슭에 능마을이 형성되었다. 또 능 뒤에 해당하는 안쪽 깊숙한 마을을 능후동·능내동 등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왕릉이 위치한 것에 관련하여 신내동 능마을에서 구릉산으로 넘어가려면 박수고개를 지나야 했다. 그다지 길지 않은 고개지만 이곳에 서낭당이 있어 무사하기를 빌고 넘었다고 한다.

 

특히 나무 베는 것이 금지된 지역에서 땔감을 구해야 했던 주민들로서 나무를 하러 갈 때는 반드시 서낭당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다. 그런 반면에 능마을에는 마을 동쪽 구릉산 기슭에 도당(都堂)이 있어서 주민들의 추렴에 의해 1년에 두 차례 도당제를 따로 지내고 있다. 그리고 능마을 사람들은 왕릉 안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역대 왕의 건원릉 행차가 끊임없이 이어진데다가 왕릉 주변에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마을사람들이 긍지를 갖는데 충분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능말 경주 임씨가 진사보다도 낫다’고 하는 말까지 생겨났다. 이는 진사 이후 벼슬길에 나아가 험난한 관직생활을 하는 것 보다, 참봉·훈도·오위장과 같은 종9품직에 제수되어 일생을 마쳐도 임금행차를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을 더 영광스럽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능행길은 궁궐에서 동대문 - 동묘(신설동) - 보제원(안암동) - 종암동 입구 - 안락현 또는 봉화산 뒷길(화랑로) - 신내동·망우동 박수고개 - 양원리 - 옛 망우리고개(중앙선 망우리터널) - 동구릉으로 이어졌다. 이 길은 한양에서 동해안에 이르는 간선도로로 망우리고개에서 왕상탄과 평구역을 지나 양수리로 나아갔다.


검암산에는 석기시대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특히 오석그릇·옥수석기(玉髓石器)·흑도 등은 빼어난 작품으로 손꼽힌다. 그리고 『대동지지』 에는 검암산 서쪽 봉우리 두 곳에 옛 망루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고언백(高彦伯)이 쌓았다고 전해진다. 검암산 일대는 6·25전쟁 때 전선을 형성했던 곳으로 식생이 바뀌면서 배나무밭과 복숭아밭은 과수원으로 변하였다. 

 

동쪽 기슭의 동구릉 일대와 북쪽의 육군사관학교 일대는 자연녹지가 잘 보존되어 있다. 남·서쪽은 주택지로 변하여 학교와 아파트들이 들어서 인구 밀집지역으로 변하였다. 이 일대는 서울의 외곽지역으로 동래정씨와 경주임씨 등 수백년을 이어오는 집성촌이 형성되어 있다. 아울러 그 생활유적을 간직하고 있어 동구릉과 더불어 문화유적 공간으로 활용될 가능성을 많이 가지고 있다.


현재 동구릉이 사적지로 관리되고 있는 것 이외에는 검암산에 대한 관리시설이나 공원화된 곳은 없으며 자연녹지공간으로 유지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검암산에는 능행길과 더불어 동해와 영남으로 가는 간선도로가 개통되어 있었다. 그 전통은 그대로 계승되어 중앙선이 검암산을 뚫고 지나고 춘천과 원주·충주·안동으로 이어지는 국도가 그 옆을 지나가고 있다.

 

2. 명소와 사적

 

1) 동구릉(東九陵)

동구릉은 구릉산의 이름을 낳은 유적이다. 구리시 동구동 산 2-1로서 일대 약 58만평이 사적 제19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의 왕릉으로 1408년 태조의 건원릉 이후 동오릉(東五陵)과 동칠릉(東七陵) 등으로 불리어 오다가, 철종 6년(1855) 익종의 유릉(綏陵)이 아홉 번째로 조성되면서 동구릉이라 불리게 되었다.


현재 약 58만평의 광대한 숲에 태조의 건원릉, 제5대 문종과 비 현덕왕후(顯德王后)의 현릉(顯陵), 제14대 선조와 비 자인왕후(恣仁王后) 및 계비 인목왕후(仁穆王后)의 목릉(穆陵), 제16대 인조의 계비 장열왕후(莊烈王后)의 휘릉(徽陵), 제18대 현종과 비 명성왕후(明聖王后)의 숭릉(崇陵), 제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端懿王后)의 혜릉(惠陵), 제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원릉(元陵), 순조의 세자 익종과 비 신정익왕후(神貞翼王后)의 유릉, 제24대 헌종과 비 효현왕후(孝顯王后) 및 계비 효정왕후(孝定王后)의 경릉(景陵) 등 9릉 17위가 안장되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태조가 세상을 떠난 후 하륜이 태종의 명을 받아 양주 검암산 아래 이곳을 왕릉지로 선택함으로써 조성되었다고 한다. 한편 태조가 생전에 무학대사에게 자신과 후손이 함께 묻힐 수 있는 왕실묘의 마땅한 곳을 찾도록 하여 얻은 것이라는 동구릉 상지(相地) 전설도 있다. 즉, 태조 이성계가 전국에 지관(地官)을 파견한 결과 건원릉(健元陵) 터를 만년유택으로 지정한 후 중신·지관들과 함께 검암산 밑의 능터를 다시 한번 살펴보고 명당임을 확인하였다.  

건원릉

 

태조는 흡족한 마음으로 환궁하는 길에 현재의 중앙선 망우리터널 위에 있는 고개 위에 이르러 잠시 쉬면서 주위의 산세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건원릉터를 바라보면서 주위 신하들에게 “오랫동안의 근심을 잊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하니 이후부터 이 고개를 망우리고개라 하였다고 한다.


능 하나 하나가 여러 곳의 길지를 물색하다가 선정되었다. 동구릉의 지세가 길했음은 풍수지리가 들이 여러 대에 걸쳐 9개의 왕릉지로 추천했던 점과 태종 때 명(明)의 사신들이 와서 건원릉을 둘러보고 “어찌 이와 같은 천작지장(天作地藏)이 있는가? 필시 인간이 만든 조산(造山)일 것이다”라고 찬탄했던 점 등을 통해서 알 수 있다.

  

2) 망우동 양원리(養源里) 동래정씨 집성촌

양원리는 구릉산 남서쪽 망우동의 한 자연촌으로 조선시대 역대 왕들이 태조의 건원릉에 행차할 때 지나는 마을이었다. 현재 중앙선 양원역 북쪽 너머 송곡여자중·고등학교 뒤쪽에 있는 마을로서 동래정씨가 600년 전부터 16대에 걸쳐 모여 살고 있는 집성촌 마을이다. 양원리라는 마을이름은 조선 태조가 건원릉을 정하고 돌아오는 길에 망우리고개를 넘다가 갈증이 생겨 이곳 우물물을 마셨는데, 물맛이 어찌나 좋은지 이 물을 ‘양원수(養源水)’라고 이름을 붙여준 뒤부터 마을이름도 양원리라 하였다고 한다.

 

현재 양원리우물은 주택이 늘어나면서 수질이 오염되어 식수로는 사용할 수 없게 되었고 우물의 자취만 남아있다. 양원리마을이 동래정씨의 집성촌으로 이루어진 것은 조선의 개국공신인 정구(鄭矩)가 태조로부터 토지를 분할받아 입주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현재까지 600여년에 이르는 동안 서울시역 내에서 최고·최대의 집성마을 이루고 있다. 지금도 30여호의 동래정씨들이 양원리 일대에 거주하고 있다. 현재 중앙선 전철 양원역 주변을 말한다.

 

그리고 정구의 행적을 기록한 『설학재실기(雪壑齋實記)』와 1820년 정구의 후손이 편찬한 『망우동지 (忘憂洞誌)』, 그리고 300년 가까운 전통주택들이 현존하고 있어 문화재로서 가치가 높다. 아울러 양원리에는 분토산(分土山)의 유래와 더불어 정구의 부인과 그 후손들의 묘역이 형성되어 있다. 구릉산의 줄기가 남으로 뻗어내려 가다가 동쪽의 양원리 근방에서는 막혀 있는데, 이 막힌 곳을 중심으로 하여 서쪽 지역을 분토산이라고 부른다.

 

정구와 이성계는 서로 친교가 있었으나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개창한 후 사이가 멀어졌다. 중앙의 정계를 떠난 정구는 경기도 광주군 용현동의 송산땅에서 은둔생활을 하였다. 이에 태조는 그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건원릉의 능터를 돌아보고 환궁하는 길에 정구를 위해 묘자리를 골라 이곳 일대를 직접 나눠주었다. 여기서 분토산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3) 신내동 능말 경주임씨 집성촌

  조선시대 역대 왕들이 동구릉으로 행차하던 길목에 있던 능마을에는 경주 임씨(林氏) 약 50호, 150세대 500여명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원래 경주에 살다 임진왜란 이후 현재의 신내동에 이주 정착하여 300여년 된 집성촌이다. 아울러 능말에 거주한 경주임씨의 문중묘가 있다. 그리고 능말의 신내동 98번지와 105번지에는 전통가옥이 남아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있으며, 교지·문건·우마차·여물통·옹기 등 생활사 자료가 보존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