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의 산 [45] *-
20. 응 봉산(應峰山/175m)
1. 명칭과 연혁
- 응봉산의 개나리 꽃 -
- 응봉산은 개나리꽃 동산이다. -
- 서울의 숲쪽에서 바라본 응봉산 -
한강가에 우뚝 솟은 응봉은 그 정상이 중구 신당동, 용산구 한남동, 성동구 옥수동의 경계를 이룬다. 응봉을 정점으로 동쪽 방향으로 무학봉·큰매봉·작은매봉·달맞이봉 등이 이어져있다. 이 응봉을 매봉산이라고도 한다. 응봉은 산이 높지는 않으나 빼어난 산세를 자랑한다. 옛날 임금이 사냥할 때 이곳에서 매를 놓아 꿩을 잡았으므로 매봉 또는 한자명으로 응봉(鷹峰)이라 하였다.
그리고 무학봉은 학이 이곳에 와서 춤을 추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런데 무학봉은 조선의 도읍지 결정의 설화와 관련 있다. 태조의 왕사인 무학(無學)이 태조의 명으로 도읍지를 물색하던 중 왕십리에 와서 지세를 살피고 있을 때, 소를 타고 지나던 노인이 무학에게 서북쪽으로 10리를 더 가라고 알려 주었다. 바로 그 노인이 신라 말기의 도선(道詵)으로 그가 혼령으로 나타나 무학에게 가르쳐 주었다는 것이다.
이 설화와 관련하여 ‘無學‘이 ‘舞鶴’으로 바뀌어 표현된 것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큰매봉·작은매봉은 모두 응봉 줄기의 봉우리로 한강과 중랑천이 만나는 지역 북쪽에 서로 남북으로 마주 보고 있는데, 응봉동 북서쪽에 높이 솟아 있다. 따라서 넓은 산역(山域)을 일반적으로 응봉이라 부르면서, 봉우리의 높이에 따라 큰매봉·작은매봉으로 부르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달맞이봉은 옥수동 미타사와 현대아파트가 있는 뒷산으로 예전부터 정월 보름에 주민들이 이곳에 올라가 달을 맞이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무학봉 전경
응봉 기슭은 일찍이 빗살무늬토기의 산포지로 밝혀져 신석기문화가 이 땅에 전개될 때부터 우리 조상들의 생활터전이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또한 1930년에는 문화동 뒷산 응봉 기슭에서 기원 전 700년경의 청동기시대 주거지와 유물이 발견되었다. 응봉을 매봉이라고 이름하였듯이 응봉 일대는 조선왕조 개창 후 한양에 천도하여 왕궁이 채 이루어지기 전부터 임금의 매 사냥터였다.
태조는 3년(1394) 10월에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기에 앞서 지리를 살필 때, 동교(뚝섬 일대)에 나아가 매를 놓아 사냥을 즐겼다. 이때에 응봉에서 활을 쏘았는데 화살을 맞은 새가 중랑포(中浪浦) 도요연(桃夭淵)에 떨어졌으므로 이 자리를 살곶이, 즉 전관(箭串)이라 하였다고 한다. 태조는 1395년 3월에 한강 위 지금의 매봉 기슭에 매사냥을 관장하는 응방을 설치하였다.
그후로 태종도 이곳 살곶이벌에 나아가 매사냥을 하였고, 선위한 후에도 세종과 더불어 자주 매사냥을 하였다. 이것이 전례가 되어 동교에서는 태조부터 제9대 성종에 이르는 100년 사이에 151회에 걸친 수렵이 있었다.
옥수동 244번지 동쪽에는 조선시대 국가의 주요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 젊은 학자들을 사가독서(賜暇讀書)케 하던 독서당이 있었다. 일명 호당(湖堂)이라고도 하는데, 이전에는 용산의 청암동에 있어 이를 용호독서당(龍湖讀書堂)이라 하였고, 중종 12년(1517)에 이곳에 있던 정자를 고쳐 지어 동호독서당이라 하였다. 조선시대 일본의 사신들은 응봉 남쪽의 두뭇개에서 배를 내려, 응봉의 동북 능선 고개를 넘어 약수동을 지나 광희문을 통과하여 인현동의 동평관(東平館)에 머물렀다.
응봉에서 남쪽으로 뻗은 산줄기일대는 한강을 끼고 높은 산들이 병풍 같이 둘러싸고 있어서 서울 근교에서는 드물게 산자수명하고 한적한 곳이었다. 따라서 많은 유적과 일화가 남아 있다. 이곳에는 앞에서 언급한 동빙고·사한단·독서당 외에 보락당·황화정·유하정 등의 정자와 미타사·옥정수·두모포약수·사정·쌍호정·조대비생가 등의 유적이 있다.
광희문(시구문) 밖에 해당하는 응봉 기슭은 조선시대 도성 안의 시신이 나아가는 길목으로 많은 묘지가 있었다. 일제 때에는 신당동 일대에 공동묘지가 운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광복과 6·25전쟁 이후 서울지역에의 인구집중에 따라 응봉 일대는 서민들의 무허가 주택이 밀집되었다. 나아가 1980년대 이후에는 주택재개발사업으로 고층아파트가 들어서 산의 전망을 가리고 있는 실정이다.
응봉산은 서울의 숲과 마주보고 있으며, 봄이면 산 전체가 개나리꽃으로 화사하게 단장을 하는 산이다. 개나리의 학명은 포시티아 코레아나(Forsythia koreana )이다. 개나리 종류를 모두 통칭하는 속명 Forsythia는 1908년 네덜란드의 식물학자가 영국의 유명한 원예학자 윌리엄 포시스 (William A. Forsyth)를 기념하여 붙인 이름이며 종속명 Koreana는 수많은 개나리 종류 가운데 이 나무가 한국을 대표하는 특산 식물임을 알려 주고 있다. 개나리꽃은 옛날 과거에 급제해서 고향으로 금의환향할 때 어사화(개나리)을 머리에 꽂은 꽃이라고 한다.
- 응봉산과 중앙선 전철 -
- 응봉산 정상의 팔각정 -
- 응봉산 인공암벽공원 -
- 응봉산을 오르는 계단길 -
- 중량천 좌측이 응봉산, 우측이 서울의 숲이다. -
- 응봉산에서 바라본 서울의 야경 -
- 서울의 야경 조망장소로 유명한 응봉산에서 -
2. 자연생태
응봉은 남산 동남지맥에 우뚝 솟은 봉우리로, 남산의 동봉에서 장충동과 한남동을 잇는 옛 남소문 고개를 거쳐 타워호텔 뒤에서 약수동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이어져 동남쪽으로 산줄기를 형성한다. 여기서 한남직업훈련원과 단국대 뒷산으로, 또 옥수동 극동아파트 뒷산으로 표고 175m의 봉우리를 이룬다. 응봉에서 산줄기는 남쪽과 동쪽의 두 방향으로 갈라진다.
남쪽 방향 줄기는 다시 둘로 나뉘어 한 줄기는 단국대 뒷봉우리인 109m고지에서 옥수동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화경대(하경대)고개를 거쳐 힐탑아파트와 유엔빌리지 구릉에서 한강으로 뻗어 있다. 또 한 줄기는 극동아파트를 끼고 독서당길을 따라 옥수터널 위를 지나 옥수 전철역 동쪽 83m의 달맞이봉으로 이어져 옥수동과 금호동의 경계를 이루며 한강으로 뻗어 있다.
동쪽 방향으로 뻗은 줄기는 응봉 정상에서 바로 북쪽의 171m 고지로 이어져 동쪽으로 137m 고지와 그 앞의 110m 고지, 다시 115m 고지에서 85m의 안부를 거쳐 140m 고지를 만들고 금호터널 위를 지나 북동으로 92m의 무학봉을 이루고, 남쪽으로 123m의 큰매봉과 95.3m의 작은매봉을 만들었다. 여기서 경도십영(京都十詠)의 하나인 ‘입석조어(立石釣魚)’의 위치인 선바위에서 한강과 만난다.
그리고 큰매봉에서 다시 동쪽으로 뻗은 줄기는 행당동으로 나아가 한양대의 산세를 이루고 살곶이다리가 있는 중랑천에서 끝이 난다. 이러한 산세의 지형조건과 도로 개설에 따라 신당동과 금호동, 금호동과 행당동, 금호동과 응봉동, 금호동과 하왕십리동, 행당동과 사근동의 경계를 이루기도 한다. 이렇게 길게 뻗은 산세에 따라 그 안에 발달한 마을 마을을 잇는 고개길과 약수터가 많이 있다.
먼저 응봉 정상 기슭 옥수동에는 ‘화경대고개’가 있다. 이는 옥수동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이다. 옥수동의 신랑과 신부는 이 고개로 다니지 못하고 신랑길과 신부길이 따로 있었다고 한다. 현재 한남아파트가 세워져 있는 곳을 ‘진동고개’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등이 매우 길기 때문에 긴등이라 하다가 변하여 불려진 것이다.
또 옥수동에서 약수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독서당고개’라고 한다. 그 까닭은 고개 밑에 독서당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람맞은고개’는 옥수동 서쪽 즉 응봉 남쪽에 있는 고개이름이다. 예전부터 이곳이 산자수명하여 장사가 많이 나오므르 임진왜란 때 왜군이 이곳을 지나면서 산기운을 꺾기 위하여 흙을 한 줌씩 파가지고 갔기 때문에 고개가 끊어져 이와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옥수동의 동명이 된 ‘옥정수우물’은 339번지에 있었으나 4·19혁명 이후 ‘옥수로’가 개통되면서 매몰되고 말았다. 조선시대에는 이 우물물이 바위틈에서 나와 맛이 서울에서도 으뜸갔기 때문에 왕에게 바치는 물로 알려졌었다.
또 산 5번지에 있었던 ‘옥수동약수’와 267번지 숲속에 있던 ‘두모리약수’는 위장병에 특효가 있었다고 하는데 세월이 흘러 주택이 들어서면서 수질이 변해 버렸고, 현재 그 자리에는 목욕탕이 들어서 있다. 산기슭 곳곳에는 유명한 바위도 많이 있었다.
거북모양의 ‘거북바위’가 달맞이봉 중턱에 있었는데, 현재는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미타사 뒤쪽에 크고 작은 바위 2개가 나란히 있어 ‘형제바위’라고 부른다. 옥수동에서 약수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밑에는 투구모양으로 생긴 ‘투구바위’가 지금도 있는데 부근은 주택지가 되었다. 이 바위 밑에는 ‘양산바위’가 있었다. 또 바위 옆에는 큰 바위가 비스듬히 누워서 널어 놓은 것 같이 생겼기 때문에 ‘너럭바위’라고 부른다.
응봉 마루턱에는 칼을 뉘어 놓은 것과 같은 바위가 있어 ‘칼바위’라고 부른다. 이 산에는 감투처럼 생겼기 때문에 ‘감투바위’로 부르는 바위도 있다. 이외에도 ‘마루바위’ ‘버섯바위’ ‘토시바위’등이 있었다. 한편 응봉 일대의 지질은 쥬라기의 대보화강암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보화강암은 쥬라기 말에 생성된 것으로 서울의 중심부에 넓게 분포하고 있어 ‘서울화강암’이라고도 한다.
대보화강암은 지하 깊은 곳에서 생성되었으나 지표로 노출되는 과정에서 하중의 제거에 의한 기계적 풍화작용이 활발히 일어나 곳곳에서 박리돔(exfoliation dome) 등 화강암지대 특유의 지형을 형성한다. 구릉지에는 두터운 새프롤라이트층이 발달한다. 대보화강암의 조직을 보면 조립질 내지 중립질이며 등립상조직을 나타내고, 색은 홍담색을 띤다. 옥수동 응봉 부근의 토양은 산악성 산성암 암쇄토로 이루어져 있다.
이 토양은 주로 암쇄토이고 적황색토·암석노출지·퇴적토 및 산성갈색 산림토 등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산성암의 산악지에 분포하며 토양배수는 매우 양호하고 토성은 사양질 내지 식양질이다. 응봉 일대의 식생은 이미 산봉우리 정상 부분을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이 주택지로 개발되고 봉우리 사이에도 도로가 개설되어 그 천이가 중단되었다. 또한 마을버스의 운행 등으로 정상적인 식생을 볼 수 없는 실정이다. 다만 봉우리 정상 일대를 응봉공원·달맞이공원·하왕십리공원으로 지정하여 아까시 등 잡목으로 이루어진 임야를 보호하고 있을 따름이다
3. 경승과 명소
1) 정 자(亭子)
응봉의 남쪽 기슭은 한강으로 뻗어 있다. 그 앞에 펼쳐진 두 물줄기가 만나는 넓은 강물은 동호(東湖)라 하여 안쪽으로 물결이 잔잔하며 주위 산록의 풍경이 조용하고 아름다워 유명하였다. 따라서 동호 북안에는 몽뢰정(夢賚亭)·유하정(流霞亭)·황화정(皇華亭)·보락당(保樂堂)·쌍호정(雙虎亭) 등 많은 누정이 있어 왕공·귀인들이 수시로 찾아 풍류를 즐기던 곳이기도 하였다.
유하정은 두모포 북쪽에 있었으며 예종의 둘째 아들인 제안대군의 별장이었다고 한다. 정조 5년(1781) 규장각에 하사되었다.
쌍호정은 옥수동 295번지에 있었으며 풍은부원군(豊恩府院君) 조만영의 집터였다. 순조 8년(1808) 조대비가 이곳에서 출생하였는데, 출생하던 날 밤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정자 앞에 와 있었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쌍호정’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조대비 생가는 독서당 터 북쪽 뒤 높은 곳에 1958년까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생가 동쪽에 울창한 노송들이 있었고 그 옆에 쌍호정이 있었다. 현재는 그 자리에 연립주택이 들어서 있다.
황화정은 연산군이 놀이와 잔치를 즐기려고 1506년 옥수동 강변인 두모포와 한강리(한남동) 경계 언덕에 세운 정자이다. 중종이 즉위하여 이 정자를 제안대군에게 하사하였다. 앞의 유하정과 연관하여, 제안대군의 소유인 점과 같은 위치 등으로 미루어 황화정을 유하정으로 개명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몽구정(夢九亭)은 지금은 강변도로가 개통된 옥수동 108∼110번지에 9개의 정자가 세워져 있었기 때문에 이름이 붙여졌다.
이곳은 동호의 풍경이 한강변에서도 가장 수려하던 곳인 만큼 일찍부터 왕가·고관들이 수시로 찾아 즐기던 누정이 많기로 유명하였다. 중종 때의 간신 김안로는 부근 백성들의 삶의 터를 빼앗아 보락당이라는 호화스러운 집을 지어 동호의 아름다운 풍경과 맑고 한가로운 놀이에 끼어들어 승경청유(勝景淸遊)에 누를 끼쳤다. 얼마 안가서 김안로가 흉적으로 몰려 사약을 받으니 좋은 정자도 자연 황폐해져, 폐허가 된 보락당을 본 선비들이 권력의 무상함을 느껴 이곳에서 지은 시도 적지 않다.
2) 입석조어(立石釣魚)
금호동과 응봉동의 경계를 이루는 작은매봉의 남쪽 기슭 한강 연변은 전부터 경도십영의 하나로 손꼽히는 ?입석조어?의 대상지인 입석포(立石浦)였다. 현재는 경원선 철도 등으로 옛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작은매봉 아래 쪽에는 암석이 강을 향해 깎아 지른 듯하여 절경인데다가, 한강과 중랑천이 합류하는 곳으로 큰 돌이 우뚝우뚝 서 있어 천연의 낚시터가 되었다. 이곳 주민들은 입석을 선돌 또는 선바위라고 칭하였다. 바위 크기는 어른 키의 3∼4길이 되었다.
이 입석에는 가끔 여인들이 와서 아기를 갖게 해달라는 치성을 드리며 절을 하였고, 동네 아이들의 놀이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입석포는 동남쪽으로는 뚝섬·광나루를 연결하는 넓은 살곶이벌의 평야지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또 강 가운데의 저자도와 강 건너 압구정 부근의 경치도 바라볼 수 있어서 조선시대부터 문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경도십영을 처음 읊은 월산대군을 비롯하여 당대의 문장가인 강희맹·이승소·성임·서거정 등도 입석조어를 읊었다. 이들의 시는 괴석이 우뚝 선 풀숲 위에 앉아 봄 기운을 만끽하는 모습을 느낄 수 있는 명시들이다. 그러나 예전의 입석 승경은 이미 사라졌고, 멀리 강 건너에는 압구정 경치 대신 고층 아파트들이 세워져 있다.
4. 사적과 문화재
1) 동빙고(東氷庫)와 사한단(司寒壇)
응봉의 동남 기슭으로 달맞이봉 서쪽에 해당하는 옥수동 8번지 바위굴은 일찍이 동빙고가 있던 터이다. 태조 5년에 예조(禮曹)의 속아문(屬衙門)으로 동빙고와 서빙고가 설치되었다. 조선시대 얼음을 저장하고 지급하던 업무를 수행한 빙고는 처음 두모포에 동빙고 1동만 세우고, 그후 용산 둔지산에 서빙고 8동을 설치하였으며 1898년에 폐지되었다. 동빙고에는 제향(祭享)·공불(供佛) 등에 사용할 얼음을 저장하였다.
서빙고에는 궁중음식과 백관에게 나누어 줄 얼음을 보관하였다. 동빙고가 이곳 옥수동에서 서빙고 동쪽으로 옮기게 된 것은 연산군 10년(1504)으로 이곳 일대가 사냥터로 되었기 때문이었다. 동빙고 북쪽 현 옥수동 산 1번지에는 사한단이 있었다. 그 터는 달맞이봉 아래쪽이다. 사한단에서는 1년에 두 번 수우신인 현명씨에게 얼음이 잘 얼게 해달라고 사한제를 지냈다.
2)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
세종은 1426년 집현전의 젊은 학사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도록 사가독서제를 실시하였다. 여기서 독서당이 기원하였으며 조선시대 문예진흥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처음에는 독서를 할 수 있는 장소를 자택으로 한정하였다. 1442년 제2차 사가독서를 시행할 때 집현전 학사들을 진관사(津寬寺)에서 독서하게 하는 상사독서(上寺讀書)를 실시하였다.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여 집현전을 폐지함으로써 사가독서제는 운영되지 않았다.
성종이 왕위에 올라 예문관을 개방하고 집현전제도를 부활하여 다시 사가독서제를 실시하였다. 성종 23년(1495) 용산 한강변에 남호(南湖)독서당을 개설하였다. 남호독서당에서 연산군 1년(1495)부터 4년까지 매년 5·6인이 독서하였으나 1504년 갑자사화의 여파로 폐지되었다. 이후 중종은 1507년에 독서당 제도를 부활하여 지금의 동대문구 숭인동에 있던 정업원을 임시 독서당으로 활용하였다. 중종 12년(1517)에 응봉 남쪽 기슭 옥수동 244번지 일대에 있던 두모포 정자를 고쳐 지어 독서당을 설치하고 동호독서당이라 하였다.
그후 임진왜란으로 불에 탄 이후 복구되지 못하다가 광해군 즉위년(1608) 한강별영(漢江別營)을 독서당으로 삼았다.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 등으로 사가독서제가 정지됨에 따라 독서당의 기능도 크게 위축되었다. 독서당은 영조 때까지 존립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정조 때 규장각이 세워짐에 따라 완전히 그 기능이 소멸되었다. 16세기 후반에 심수경이 지은 『유한잡록(遺閑雜錄)』에 실린 '독서당기(讀書堂記)'를 통하여 독서당의 규모와 운영 모습을 살필 수 있다. 독서당이 폐지된 후에는 부군당이 세워져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앞에 ‘孔夫子道統古今淵源記念碑’가 있었으나, 현재는 주택이 들어서 있다. 즉 응봉 아래 정남향 언덕 위인 월송암(月松庵) 서쪽이 독서당 위치이다.
3) 미타사(彌陀寺)
동빙고가 있던 달맞이봉 서쪽 기슭 옥수동 395번지에 두뭇개 승방인 미타사가 있다. 미타사는 888년 신라 때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데, 그 창건에 관해서는 몇 가지 다른 전설이 있다. 1943년에 편찬된 『종남산미타사약지(終南山彌陀寺略誌)』에 의하면 19세기 초반에 무량수전을 처음 지은 사실이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이와는 달리 미타사는 고려말 조선초부터 종남산 동쪽 기슭 현 금호동에 있었다.
이 부근에 있던 왕실 경영의 메주가마를 자하문 밖으로 옮김에 따라 이곳에 도적이 들끓었으므로, 지금의 자리로 절을 옮겨 종남산 미타사로 하였다고 한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신라·고려 이래로 이곳에는 조그만 암자들이 있었는데 절 뒤의 산봉우리가 백명의 과부가 나타날 상이라는 풍수설에 따라, 비구니 사찰을 확장할 적절한 곳이라 여기고 조선 중기에 암자들을 합쳐 미타사라 했다고도 한다. 종남산은 남산 줄기의 끝이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이 절에는 이승만대통령이 자주 다녔다고 한다.
4) 안정사(安定寺, 安靜寺)
성동구 하왕십리동 998번지 무학봉 중앙에 위치한 안정사는 신라 흥덕왕 2년(827)에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그후 여러 번의 중창을 거쳐 6·25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1965년 복원되었다. 조선 초 한양 정도와 밀접한 인물인 무학대사가 주관하며 사찰을 중창하였다. 사찰을 중창할 당시 푸른 연꽃에 상서로운 기운이 나타났다 해서 청련사(靑蓮寺)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무학대사는 왕궁터 선정의 왕명을 받고 이 절 석벽 아래서 7일 동안 등을 밝히고 기도를 드림으로 해서 관세음보살의 화신을 접하고 지금의 경복궁터를 선정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또 무학대사가 중창할 때 절터를 병화불침지(兵禍不侵地)인 이곳에 정하면서 예언하기를 “무학봉 산 위에 큰 물이 고이면 이곳이 크게 번성하리라” 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주민들은 현재 대현산배수지가 설치되었음은 그 예언이 적중한 것이라고 한다. 안정사는 1923년 사상범 체포로 악명을 떨치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터뜨린 김상옥의사가 도피하여 일시 은거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5) 부군당(府君堂)
응봉 기슭은 한강과 연해 있어 마을의 수해나 재해를 막고 어로의 풍요와 뱃길의 안녕을 비는 부군당과 당집들이 산재해 있었다. 금호동4가 412번지에 위치한 금호동 부군당은 약 500년 전에 지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왜군 대장이 지나가다가 말발굽이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아 당황하여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말에서 내려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 오고 있다.
큰매봉 동남 기슭 응봉동 100번지 대림 1차아파트 단지내에 있는 응봉동 부군당은 언제 세워졌는지 알 수 없지만 6·25전쟁 때 전소되어 다시 건립하였다. 이곳은 조선시대 각처에서 날래고 힘센 장사들을 모집하여 대기시켰다가 왕명이나 공문을 각 지방으로 전달하게 하였다고 한다. 일제는 이곳에서 장사가 출현하는 것을 막기 위해 큰매봉 정상에 쇠말뚝을 박았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