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이야기

-* 서울의 산 [49] *-

paxlee 2009. 6. 12. 21:53

24. 개화산(開花山/128.4m)


...   1. 명칭과 연혁

 

 - 개화산의 한적한 등산로 -

 

 - 개화산 정상에서 바라본 행주산성이 있는 덕양산과 방화대교 -


개화산은 서울의 서쪽 끝 강서구 개화동에 위치한 표고 128.4m의 잔구성 구릉산지이다. 『양천읍지』를 보면 개화산의 산경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동해의 산경은 백두산을 조종(祖宗)으로 하여 태백산에 이르고, 서쪽으로 굽이쳐 속리산이 된 다음, 북행하여 청계산이 된다. 여기서 맥을 나누어 일맥은 북쪽으로 관악산을 이루고, 다시 북쪽으로 떨어져 양화도 선유봉이 되며, 일맥은 서북을 향하여 안산의 수리산, 인천의 소래산으로 이루어져 북행해 와서 본현에 이르러서는 증산(甑山)이 된다.

 

증산은 산 모습이 예뻐서 군자봉이라고도 하니, 이것이 한 고을의 조봉(祖峰)이 되며, 일맥이 북향하여 주룡산(駐龍山)이 된다. 일명 개화산이라고도 하는데, 코끼리 형상으로 사자 형상인 행주산과 더불어 한강 하류의 양쪽 대안에 포진하여 서로를 바라보며 서해안을 통해 들어오는 액운을 막고, 한성에서 흘러나오는 재물을 걸러서 막아주는 사상지형(獅象之形)이라고 한다.

개화산은 일명 ‘주룡산’이라고도 했다. 신라 때 한 도인이 주룡선생(駐龍先生)이라 자칭하며 이 산에 숨어 살면서 도를 닦고 세상에 나오지 않다가 이곳에서 늙어 죽었다. 그가 이 곳에 살 때 매년 9월 9일에는 동자 두 세명과 더불어 높은 곳에 올라가 술을 마시며 구일용산음(九日龍山飮)이라 하였으므로 주룡산이라 이름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그 자리에는 이상한 꽃 한송이가 피어났다. 이를 두고 사람들이 이 산을 개화산이라 일컬었다. 지금의 개화사가 주룡선생이 살던 옛 터라고 한다. 


그런데 이 곳에 봉수대가 동, 서 두 곳에 설치되어 있고, 봉수군과 봉대별장(烽臺別將)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봉수진이 있었던 산이라는 의미로 ‘開火山’이라 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 두개의 봉수대 중 동쪽은 방화동의 치현(雉峴)에서, 서쪽은 개화산에서 봉수를 받아 연락하였던 것이다. 개화산봉수는 여수 돌산도에서 시작하여 전라도, 충청도 방면의 해로를 통한 봉수로, 회현동쪽 산마루의 남산 제5봉으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치현의 동쪽 봉수대는 현재 통신대가 주둔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봉화를 들었던 곳을 ‘봉화뚝‘이라 한다. 이렇듯 임진왜란, 병자호란 전까지는 봉화불을 올렸다 하여 ‘開火山’이라 하였는데, 그후에 ‘開花山’으로 이름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개화산은 한강을 사이에 두고 행주산성과 마주 본다. 산정에 서면 삼각산과 도봉산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고, 한강과 임진강이 마주치는 조강(祖江)의 광활한 풍광과 바닷물이 들어오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또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인왕산, 낙산, 북악, 남산을 비롯해서 멀리 관악산과 그 사이를 굽이쳐 오는 한강의 물길도 한눈에 즐길 수 있는 명소 중의 명소이다. 그래서인지 조선 후기 화가로 이름 높은 겸재 정선(鄭敾)은 양천현감으로 있으면서 「열수팔경도」의 하나로 「개화사」라는 제목으로 개화산과 절, 오솔길의 소나무숲과 그 아래 버들숲이 우거져 있고 전답이 있는 모습을 그렸다. 지금은 개발제한구역과 군사시설이 위치하고 있어 자연 그대로의 숲이 제법 울창한 것도 개화산의 자랑이다. 그리고 개화산에서는 매년 음력 10월 1일에 산신제를 지낸다.

 

    -  겸재 정선(鄭敾)은 양천현감으로 재직시 그린 그림 

     '개화산과 절, 오솔길의 소나무숲' - 

 

2. 실태와 관리

 

개화산은 1977년 7월 9일 건설부고시 제138호로 개화동 산 17번지 일대 386,500㎡를 미시설 개화근린공원으로, 방화동 산 97-1번지 일대 18만㎡를 미시설 방화제2근린공원인 꿩고개근린공원으로 지정하였다. 공원시설로 개화근린공원에는 3개 도로와 1개 산책로가 있다. 휴양시설로는 벤치 103개가 있고, 운동시설로 간이운동장 3개소와 성인 운동기구 5종 25개가 설치되어 있다. 편익시설로 4개소의 옹달샘과 10동의 간이화장실이 있다.

 

공원내 임야면적은 343,250㎡로 연인원 9만명이 이용하고 있다. 꿩고개근린공원에는 1개 도로와 산책로가 있으며, 평면운동장 1개소가 시설되어 있다. 그런데 개화산 인근 방화2동 주민들은 1994년 말부터 ‘개화산 되살리기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일제가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개화산의 밑부분부터 중턱과 정상에 이르기까지 세 곳에 걸쳐 대규모로 산허리를 파헤쳐 개화산을 흉물스럽게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주민들은 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전국 곳곳에 일제가 박은 쇠말뚝을 제거하는 운동과 더불어 개화산의 복원운동을 전개하고자 보존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당시에는 개화산 정상에서 김포공항 방향으로 20m, 70m, 90m쯤 내려오는 방향으로 등산로 3곳에 각각 100여평 정도의 면적에 높이 5∼20m, 폭 20∼40m 정도 파헤쳐져 있는 상태였다. 이에 주민들 스스로 성금을 모아 파헤쳐져 있는 곳을 흙으로 메우고 나무를 심어 개화산의 정기를 되살리고자 하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3. 사적과 문화재

 

1) 개화산봉수(開花山烽燧)

 

개화산봉수는 개화산 북쪽 상봉에 있으며, 속칭 봉화뚝이라 한다. 조선시대에 통신수단으로 설치한 이 봉수는 전라도 순천군 돌산도로부터 충청도·경기도 등의 해로를 거쳐 김포군 냉정산에 다다라, 이 봉수가 서쪽으로 냉정에 연결되고, 동쪽으로 서울 목멱산 제5봉에 전달된다. 조선 말기에 봉수제는 폐지되고 그 남은 터도 6·25전쟁으로 미군부대가 주둔하면서 군사시설을 닦느라 흔적마저 없어졌다. 이 곳은 옛 양천지역의 이름인 파릉(巴陵) 8경의 하나로 「개화석봉(開花夕烽)」에 해당하여 개화산의 저녁 봉화가 평화로운 한강변 경치를 한층 아름답게 꾸몄던 것이다.

 

2) 개화사(開花寺,藥師寺)

 

 

 개화산 북쪽 기슭 중턱 강서구 개화동 332-2번지에 위치한 약사사는 조선 순조 이전까지는 개화사라 불리다가, 그 이후 약사사로 바뀌었다. 순조 27년(1827) 송숙왕(宋叔王)이 쓴 「개화산약사암중건기」에 의하면 ‘약사암’이라고 하여 삼한고찰(三韓古刹)로 표기하였다. 조선후기에 쓰여진 『양천읍지』 고적조에는 창건설화와 함께 신라시대 사찰이라고 하였으나 구체적인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행주산성이 마주보이는 강안에서 동쪽으로 향한 사찰로서 오늘날까지 법등을 이어오고 있는 오랜 사찰이다. 옛기록에는 절의 위치를 개화산봉대하(開花山烽臺下)라고 말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일찍부터 국방과도 관련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개화사는 조선 초기에 쓰여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이고 있고, 이 절의 삼층석탑과 관음보살상이 고려 후기 양식을 지녔으므로, 늦어도 고려시대부터는 법등이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그후 영조 13년(1737)에 송인명(宋寅明)이 일찍이 개화사에서 독서한 끝에 좌의정에 오른 것을 보답하기 위해 절을 크게 고쳐 지었고, 그 후손 교리 송백옥이 「사찰중수기」를 지었다고 한다. 다시 1827년에 퇴락한 절을 옛 절터에서 약간 떨어진 곳으로 옮기고 약사여래를 모시니, 이때부터 약사암으로 불리게 되었다. 대대적인 불사가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현존하는 건물들은 근대 이후의 것이다. 법당 안에 고려 말기 불상인 약사여래석불(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0호)이 모셔져 있다.

 

그리고 법당 뜰 앞에 13세기 고려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삼층석탑(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9호)이 서 있다. 약사사 앞 뜰 석탑 왼쪽에는 약수터가 있어 주민들의 발길이 끓이지지 않고 있다. 특이한 것은 산 이름이 개화산이라서 그런지 약수 역시 꽃물이 오르는 5∼6월이 되면 단맛을 내는데, 이때 약수의 효능이 가장 좋다고 알려져 있다.

 

3) 미타사(彌陀寺)

 

 

미타사는 개화산 정상에서 남북으로 뻗어내린 산등성이를 경계로 하여, 그 서남 기슭에 있는 내촌마을 뒷산의 개화동 산 81-13번지에 자리하고 있다. 절은 개화동 약사사와 같은 시기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절에 모셔져 있는 미륵불상과 지장보살상이 고려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아직 입증되지 않은 상태이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 8척의 돌부처가 땅 위로 우뚝 솟았는데, 돌부처가 마을 사람들의 꿈에 나타나 절을 세우라 하여 1924년 절을 지었다고 전한다. 그 사실 여부를 떠나 지금으로서는 1924년이 절의 실제 창건시기라는데 의심이 없다.

 

그후 1937년 미륵당을 다시 고쳐 지었고, 6·25전쟁 때 절의 위치가 전략상 중요한 곳이어서 절 전체가 모두 타 버렸다. 전쟁이 끝난 직후 원래의 위치에서 조금 이전한 지금의 자리에 절을 다시 지었다. 미타사 뒤편에는 근래에 마을 주민들이 세운 호국충혼위령비가 있다. 6·25전쟁 때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끝낸 연합군이 한강 도강작전을 펴면서 그 중심고지가 되었던 개화산지구에서 장렬히 전사한 920명의 무명용사 혼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김포(개화산)지구 전투위령비이다. 건립 당시 산림보호구역이라 건립허가가 나지 않자 주민들이 당국 몰래 세웠다고 하며, 얼마 후 당시 전투에 참가했던 전진부대에서 이 소식을 듣고 찾아와 위령비 옆에 비문을 세웠다고 한다.

 

4) 풍산심씨 묘역(豊山沈氏墓域)

 

 

 

풍산심씨 묘역(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77호)은 개화산 동쪽 기슭 강서구 방화동 산 152-5번지 일대에 자리잡고 있다. 방화삼거리에서 약사사로 오르는 개화산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다가 우측으로 조선 중종 때 우의정인 심정(沈貞)과 그 자손 심사손·심사순·청백리 심수경 등 풍산심씨 가문의 분묘 약 50여기가 있다. 이 중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위의 4인 분묘와 그에 딸린 묘비·상석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4. 등산로

 

 ‘능선길’ 개화산의 능선을 따라 이어진 능선길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산책로이다. 주변 3개의 약수터가 있으며 도처에 운동기구가 놓여있다.

‘숲길’ 개화산의 보다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는 산책로이다. 좁은 흙길을 걸으며, 작은 개울을 건너며 산림욕을 하다보면 탁 트인 전망과 함께 시원한 바람을 맞이하게 된다. 진달래과 계단길, 바위터는 나름대로의 맛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