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의 산 [50] *-
25. 개운산(開運山/134m)
북한산에서 서쪽으로 뻗은 한북정맥의 끝자락은 보현봉에서 형제봉과 북악터널의 위쪽인 보토현을 거쳐, 328m 봉우리에서 다시 서남방의 북악 지맥과 동남방의 미아리고개 지맥으로 갈린다. 이 동남방 지맥은 정릉(貞陵)을 서쪽으로 끼고 돌아 아리랑고개와 미아리고개로 이어지며, 다시 높이 134m의 개운산 봉우리를 형성한다. 개운산 산세는 남북 방향으로 발달되어 동쪽으로 정릉천, 서쪽으로 성북천을 나누며, 두 물줄기는 용두동에서 만나 청계천에 합류된다.
개운산은 나라의 운명을 새롭게 열었다는 뜻의 개운사 절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또 안암동에 있어 ‘안암산’으로, 종암1동의 진씨(陳氏) 성을 가진 사람의 채석장이 있어 ‘진석산(陳石山)’으로도 불리운다. 개운산 남쪽 기슭, 안암동사거리에서 북쪽으로 큰 길을 따라 올라가 안암동5가 157번지 뒷산의 이어진 봉우리가 높이 둘러 선 아래에는 개운사가 있다. 개운사는 태조 5년(1396) 왕사 무학이 창건하였는데, 처음에는 지금의 고려대 이공대 부근에 짓고 이름을 영도사(永導寺)라 하였다.
- 개운산 개운사 일주문 -
- 개운산 개운사 -
- 개운사 대웅전 -
그런데 정조 3년(1779)에 원빈(元嬪) 홍씨가 세상을 떠나자, 그 부근에 묘소를 정하고 영명원(永明園)이라고 하였다. 절이 영명원 묘에서 가깝다 하여 북쪽으로 옮겨 짓고 이름도 개운사라 고쳤다. 그런데 『동사열전(東師列傳)』에 보면 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영도사의 도문(道文) 스님 처소에서 주로 양육되었는데, 언젠가 영도사에서 노닐다가 절의 한 모퉁이에 이름을 써놓았고, 왕위에 오른 다음 절 이름을 나라의 운명을 새롭게 열었다는 뜻으로 개운사라 고쳤다고 한다.
이렇듯 개운사는 조선왕조 말기에 중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절 뒤쪽만 남기고 모두 인가가 들어섰지만, 옛날에는 길이 산중으로 깊이 들어가고 주위에 송림이 무성하여 경내가 아늑하였다. 그러나 개운사는 20세기 이후 한국 교육불사와 진보적 불교운동을 주도해 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26년부터 근대 불교의 대석학이었던 박한영 스님이 머물면서 강원을 이끌어 나갔던 일이 그 시초이다.
1970년대 부속암자인 대원암(大圓庵)에 탄허(呑虛) 스님이 머물면서 역경사업에 종사하였던 일이 그 전통을 계승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1981년부터 중앙승가대학이 이 곳을 교육도량으로 사용하면서 젊은 학인스님들이 불교진보운동의 핵심을 담당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개운사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칠성전(단하각), 지장전, 독성전, 종무소(기숙사), 일주문, 정진관(승가대 건물), 선방(다각루), 신축 대웅전, 그리고 자비관(학교 행정부서) 등의 전각이 있다.
또한 개운산 기슭은 조선왕실의 주거공간과 묘역으로 주목되었다. 현재의 안암동3가에 있는 궁리(宮里), 원리(園里) 등에는 세종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과 그 아들 영순군이 대를 이어 살았고, 정조의 후궁인 원빈 홍씨의 묘소인 영명원이 위치하였다. 특히 궁말은 제1차 왕자의 난 때 희생된 태조의 제7자 무안대군 방번(芳蕃)과 부인 왕씨를 비롯하여 광평대군과 부인 신씨, 그리고 영순군과 부인 최씨 등 3세를 제사하는 광평대군 일가의 사당이 있어 ‘사당말’로도 불렸다.
또 개운산 남쪽 기슭 북바위 근처에는 조선 태종 때 재상 박은(朴 )이 살았다. 그는 평소 검소한 생활을 하고 가산을 생각하지 않아, 태종이 특별히 명하여 동대문 밖의 북바위논(鼓岩田) 몇 마지기를 주게 하였다고 한다. 한편 개운산 동쪽 기슭 종암1동 종암아파트가 위치한 뒷산의 이름은 진석산이다. 진석산의 돌은 질은 물론 색깔도 좋아 부자나 세도가 당당한 사람들이 집을 지을 때 반드시 이 돌을 이용했다고 한다.
옛 중앙청을 지을 때에도 일부 사용하였다고 한다. 1960년 전후까지 채석을 허가했으나, 그후 창신동에 소재한 역청공장이 면목동 용마산 기슭으로 옮겨가고, 이 일대가 주택지화 함에 따라 진석산의 채석작업도 중지되었다. 개운산 일대는 1936년 경성부로 편입되어 신흥 주택가로 각광받으면서, 서쪽 기슭인 돈암동과 동선동 일대에 전차가 가설되고, 인구 집중도가 높은 주거지로 변하였다.
- 개운산 산책로1. -
- 개운산 산책로2. -
- 개운산 산책로3. -
- 개운산 산책로4. -
- 개운산 산책로 소나무 숲길 -
따라서 1940년에 개운산 일대는 공원지역으로 고시되었다. 이에 앞서 1934년에는 오늘날 고려대학교 전신인 보성전문학교의 안암동 건물이 신축되어 민족교육기관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개운산 주위에는 남쪽으로 고려대학교, 서쪽으로 성신여자대학교, 북쪽으로 서라벌중·고교를 비롯한 많은 초·중·고등학교가 위치하여, 인재를 양성하는 땅의 기운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현재 개운산의 표고 75m 이상 지역은 임야지역을 이루고 있으며, 그 이하는 주택가와 학교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어, 공원지역은 대체로 다른 지역보다 맑은 공기를 느낄 수 있다. 광복 이전만 하더라도 이 일대의 야산은 울창한 산림으로 되어 있어, 인근 마을 사람들의 휴식처가 되기도 하고, 낙엽이나 나무의 잔가지들은 땔감으로도 이용되어 왔다.
그러나 광복과 함께 많은 월남민들이 산비탈에 정착하면서부터 나무를 마구 베어냈고, 6·25전쟁 때 미아리∼종암동을 잇는 국군의 서울 방어 저지선이 바로 이 능선이었으므로, 포격전에 의해 많은 나무가 불타서 한 때는 민둥산이 되었다. 그후 1960년대말부터 시작된 조림과 식목사업으로 지금은 수령 20∼25년 된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아울러 1982년 근린공원으로 지정되어 인근 주민의 휴식공간으로 기능하며, 산 중턱 이상까지 도로가 놓여져 접근하기 쉽다.
개운산은 돈암동과 안암동 일대 552필지 332,759㎡를 대상으로 1982년 5월 3일 건설부고시 제141호로 미시설 근린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1983년 9월 1일 서울특별시고시 제449호로 최종 지적고시 되었다. 그런데 이 지역은 이미 1940년 3월 12일 총독부(일제시)고시 제208호로 공원지역으로 고시되어 있었다. 개운산공원에는 33종 697개의 공원시설이 있으며 공원내 존치불가건물 233동이 있다. 5개 도로가 놓여져 있고, 휴양시설로 벤치 51개, 운동시설로 평면운동장 1개소, 간이운동장 1개소, 성인 운동기구 26종 629개가 있다. 그 외에 화장실 등 편익시설과 관리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 연인원 7만명이 이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