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프스의 4,000m 명봉] (13) 에크랑·돔 데 네지 *-
[알프스의 4,000m 명봉] (13) 에크랑·돔 데 네지
물론 도피네 산군에는 4,000m가 채 되지 않지만 빼어난 봉우리들이 많다.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젊은 알피니스트’ 장 코스트(Jean Coste·1904~1926년)가 숨진 라 메이주(La Meije· 3,983m)가 에크랑 바로 북쪽에 위치해 있다.
- ▲ 로리 안부에서 서릉에 올라선 일행. 오른편 저 멀리 눈 덮인 봉우리가 돔 데 네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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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알프스 등산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 에드워드 윔퍼(Edward Whymper·1840~1911년)가 이 산군에서도 여러 초등반을 했는데, 바로 이 산군의 최고봉 에크랑을 비롯해 남쪽에 위치한 몽 펠부(Mont Pelvoux·3,943m)도 그 중 하나다. 이렇듯 도피네 산군은 알프스 산맥의 남서 끄트머리에 위치해 있어 한국 산악인들에게는 낯선 지역이지만 여전히 도전해볼 만한 벽등반 대상지들이 많을 뿐 아니라 알파인 등반의 초·중급자들이 즐기기에 좋은 멋진 봉우리들이 산재해 있다.
몽블랑 산군에서 남쪽으로 약 100km 거리에 위치한 도피네 산군으로 떠난 건 여름시즌이 막 시작된 6월 말이었다. 이른 아침, 샤모니를 떠난 승용차에 동승한 이들은 백승기 선배와 이진기씨였다. 가는 길은 두 갈래다. 그레노블까지 고속도로를 이용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산길을 따라가며 알프스의 산간마을을 둘러보고 싶었다.
그래서 프랑스 알프스의 주요 산악도시 메제브(Megeve), 알베르빌(Albertville), 브리앙송(Brianconnais) 등과 갈리비에고개(Col du Galibier·2,646m)와 라우타레고개(Col du Lautaret·2,058m) 등을 넘어 다섯 시간 이상 운전한 끝에 산행기점인 프레 데 마담 칼레(Pre de Madame Carle·1,874m)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레스토랑 하나와 산행안내소가 있다.
- ▲ 정상에 다가갈수록 바람이 심했으며 십자가만이 우리를 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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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등반객들 오르내려
잠시 우리가 오를 루트를 검토하고 산행을 시작한다. 보다 남쪽에 위치해 있어 그런지 몽블랑 산군에서와는 다른 남국의 정취가 느껴지는 숲길을 빠져나온다. 이후 길은 계속해서 지그재그 오르막길로 이어진다. 에크랑 등반을 마치고 뒤늦게 하산하는 알피니스트들뿐 아니라 빙하 아래쪽에 위치한 산장까지 트레킹을 다녀오는 트레커들이 꽤나 많이 내려오고 있다. 간혹 스키를 짊어진 이들도 있는데, 6월 말이지만 에크랑 북동 사면에서는 여전히 산악스키 산행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가파른 오르막을 한 시간 즈음 오르자 블랑 빙하(Glacier Blanc) 하단에 이른다. 곧이어 빙하에서 흘러내리는 개울을 건넌다. 위에서 산들바람이 불어와 이제부터 더위를 피할 수 있어 좋다. 돌길을 따라 등 뒤로 몽 펠부를 두고 걷는다. 이윽고 그레셔 블랑 산장(Glacier Blanc Hut·2,542m)이다. 두 시간 조금 더 걸렸다. 많은 산악인들이 산장 밖으로 나와 오후의 따뜻한 햇살을 즐기고 있다. 알프스의 산장들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풍경이다. 배낭을 내려놓고 잠시 쉰 우리는 수통에 물을 보충한다. 우리가 묵을 곳은 이곳에서 또다시 두 시간 더 올라야 하는 에크랑 산장(Ecrins Hut·3,175m)이다.
갈 길이 멀어 다시 배낭을 짊어진다. 우선 블랑 빙하 하단부의 우측 바위 사면 사이에 난 돌길을 오른다. 빙하에서 불어오는 찬바람 덕에 어렵지 않게 오르막길을 걷는다. 한 시간 즈음 오르자 빙하에 접어들어 아이젠을 신는다. 이때 앞서 간 이진기씨가 웃으며 한 팔을 번쩍 든다. 그의 손에는 낯선 피켈이 들려져 있었는데, 누군가가 떨어트린 것이었다.
이제 길은 한낮의 열기에 잔뜩 축축해진 눈 밭 사이로 이어져 있어 쉼 없이 걷고 또 걷는다. 북쪽으로 이어지던 빙하가 서쪽으로 급회전하며 방향을 바꾸는 시점부터 빙하는 완사면이다. 드넓은 설원 끄트머리에 위치한 에크랑이 한눈에 들어온다. 블랑 빙하에는 이미 그늘이 드리워졌지만 에크랑 정상부는 햇살로 빛나고 있었다. 빠르게 흩어지는 구름에 에워싸인 정상부는 첫 대면에 만만치 않아 보였다. 다음날 등반을 조금이라도 수월히 하기 위해서라도 에크랑과 친숙해질 필요가 있는지라 종종 발길을 멈추고 쳐다본다.
이제 빙하 우측, 바위 사면 위에 위치한 에크랑 산장이 보일 때였다. 저 멀리 위에서 한 사람이 내려왔다. 20대의 아가씨였다. 바로 이진기씨가 주운 피켈의 주인이었다. 그에게 고맙다는 키스 인사를 보낸 그녀와 함께 우리는 산장에 오른다. 4시간 반 소요되었다.
- ▲ 블랑 빙하 하단에 위치한 그레셔 블랑 산장. 에크랑 산장은 여기서 두 시간 더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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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풍에 가루눈이 쉼없이 흘러내려 산장에는 많은 산악인들이 와 있었지만 시즌 초반이라 예약하지 않은 우리에게도 자리는 있었다. 친절한 산장지기의 안내로 편하게 저녁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든다. 밤새 바람이 심하게 불었으며 에크랑 쪽에는 짙은 구름이 머물러 있어 등반이 걱정되었다. 그래도 새벽 3시에 기상한다. 먼 길을 달려온 우리에게 이 정도의 난관은 대수롭지 않다.
간단히 요기를 하며 등반준비를 하고 산장을 나서니 새벽 4시다. 헤드랜턴을 밝히며 산장에서 내려와 빙하에 닿는다. 한동안 완사면의 빙하를 따라 걷고 또 걷는다. 우리 앞뒤로 헤드랜턴의 불빛이 드문드문 이어져 있다. 이날 약 이삼십 명의 산악인이 에크랑에 도전하고 있었다. 헤드랜턴이 더 이상 필요 없을 정도로 날이 밝아올 무렵부터 날씨가 좋아지는 듯했다. 그 즈음 이제껏 완사면이던 빙하가 급사면을 이루면서 에크랑 정상부의 북동면 아래로 곧장 이어져 있다. 이제부터 급경사면을 올라야 하기에 우리는 가져간 설피며 등반에 불필요한 물건들을 길 옆 눈구덩이에 내려놓는다.
이제부터 안자일렌을 하고 오른다. 동쪽 하늘에 태양이 솟나 싶더니 이내 먹구름에 가려 버린다. 그리고 바람이 심하게 분다. 가루눈이 휘몰아쳐 종종 발걸음을 멈추고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릴 정도다. 북동 사면에 이미 먼저 오른 이들의 러셀 자국이 있건만 분설에 덮여 오르는 길이 쉽지 않다. 그래도 간혹 단단한 설사면을 찾아 길에서 벗어나 오른다.
마침 우리와 함께 오르는 자일 파티가 있다. 50대 초반의 동네 아줌마와 마을 총각인 듯한 젊은이가 우리 뒤를 바짝 따라오고 있다. 안자일렌을 한 모습이나 피켈을 짚으며 빙사면을 오르는 자세로 보아 알파인 등반 경험이 많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반면 가이드를 동반한 손님 하나는 추위와 체력 저하로 몇 번이나 멈춰서더니 결국 포기하고 아래로 내려갔다.
위에서는 계속해서 강풍에 날린 가루눈이 흘러내렸다. 얼굴로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피해 걸음을 멈추는 외에는 쉬지 않는다. 산장을 떠난 지 3시간 이상 되어 마침내 정상부 급사면 아래에 닿는다. 여기서 곧장 직상해도 정상에 이를 수 있지만 우리는 서릉으로 오를 예정이었기에 서쪽으로 길게 설사면을 횡단한다. 에크랑과 돔 데 네지 사이에 위치한 로리 안부(Breche Lory)로 향한다.
- ▲ 시즌 초반이라 붐비지 않는 에크랑 산장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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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3,000m급 봉우리들이 발아래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안부에 닿기 전, 작은 베르그슈른트를 지나 급경사의 설사면을 약 100m 올라 서릉에 이르게 되어 있다. 프런트 포인팅을 하며 조심해서 능선에 올라서니 바람은 더욱 매섭다. 정면에서 불어오는 강풍에 맞서 고개를 숙이다 보니 등반속도가 나질 않는다. 그래도 계속해서 전진이다.
바람이 심한 반면 다행히 바위능선에는 신설이 덮여 있지 않다. 덕분에 몇몇 까다로운 바위구간을 오르내리는 순간에도 충분히 양호한 홀드를 찾을 수 있었다. 백 수십 년 전에 에드워드 윔퍼 일행이 이 봉우리를 초등하면서 바로 이 서릉을 지날 때 디디고 잡은 홀드마다 불량해 고생했었다지만 그 이후 수많은 등정자들에 의해 부실한 홀드나 돌들은 이미 다 치워진 셈이다. 곧 4,086m 지점의 픽 로리(Pic Lory)에 도착했다.
서릉 중간에 솟아오른 작은 돌출지점이지만 어떤 이들은 이곳도 4,000m 봉우리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물론 UIAA (국제산악연맹) 목록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후 등반은 계속해서 암릉을 오르내리며 동쪽으로 난 리지를 오른다. 저만치 앞에서 3명의 산악인이 정상에 다녀오고 있다. 좁은 바위능선 위라 조심해서 길을 비켜주고 계속해서 전진이다.
태양이 어느 정도 떠올랐건만 바람은 여전했으며 추웠다. 6월 말의 날씨 치고는 혹독했다. 시즌 초반의 추위였다. 그래도 차츰 정상에 다가감으로써 더욱 넓게 시야에 들어오는 에크랑 산군의 풍광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이윽고 정상이다. 산장에서 다섯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좁은 정상에는 아무도 없었으며 금속으로 만든 십자가만이 우리들을 반겼다. 동쪽 하늘에 머물고 있는 짙은 구름 외에는 사방이 시야에 들어왔다. 모두 우리 발아래에 있다. 라 메이주나 몽펠부뿐 아니라 수많은 3,000m급 봉우리들이 도열해 있다. 저들 봉우리들도 언젠가는 오를 수 있길 희망하며 기념사진을 몇 장 찍고 하산을 서두른다. 도피네 산군 최고지점에서 느긋하게 등정의 기쁨을 즐기고 싶었지만 바람이 심해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 ▲ 바람이 심하게 부는 가운데 픽 로리를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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돔 데 네지 정상에선 여유만만, 등정의 기쁨 즐겨 하산 역시 서릉으로 길을 잡는다. 로리 안부로 내려가 또 다른 4,000m 봉우리 돔 데 네지를 올라야 하기 때문이다. 아는 길이었지만 좁은 바위능선을 하산하는 터라 오를 때에 비해 더 위험해 보였다. 모두 바짝 긴장하며 암릉을 오르내린다. 조그마한 실수라도 용납되지 않는 게 바로 이런 상황인지라 말없이 자신의 등반동작에만 집중한다. 잠시 후 픽 로리를 지나 한 숨을 돌린 다음, 마침내 로리 안부로 모두 무사히 내려왔다.
정상에서 한 시간 걸렸다. 완경사의 설사면에 두 발을 놓자 추락에의 위협에서 벗어난 모두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이어 서로를 연결했던 자일마저 필요 없어 안자일렌을 하던 자일을 풀어 배낭에 집어넣는다. 로리 안부 건너편에 둥그스름하게 솟아 있는 돔 데 네지를 오르는 길은 에크랑에 비하면 너무 쉬웠다. 완사면의 설사면을 횡단한 후, 작은 베르그슈른트를 올라 40도 경사도의 설사면을 100m 즈음 오르자 정상부 설릉이 나타났다.
한동안 설릉을 따라 오르자 어디가 최정상인지 모를 정도로 넓은 눈 언덕만이 펼쳐져 있었다. 다만 누군가가 꽂아놓은 작은 대나무에 매달린 하얀 천이 강풍에 사정없이 휘날리고 있었다. 그곳이 정상임을 알 수 있었다. 정상에 선 우리 셋은 이제야 하루에 4,000m 봉우리 두 개를 오른 기쁨을 나누는 악수를 건넨다. 안전한 하산길이 확보된 다음이라 그만큼 등정의 기쁨을 만끽하고픈 심적인 여유가 생겼던 탓이다. 마침 두 명의 산악인이 올라오는데, 가만히 보니 스키를 메고 올라오고 있다.
얼마 후 그들은 하산하는 우리를 쏜살같이 지나 에크랑의 북동 사면을 여유 있게 활강해 내려갔다. 그러고 보면 에크랑과 돔 데 네지는 산악스키 등반에 적합한 4,000m 봉우리들 중 하나였다. 분명 다음에 이 봉우리를 찾을 때는 반드시 산악스키를 가져오리라 생각하며 긴긴 하산 길에 접어들었다. 에크랑 북동면을 걸어 내리는 데 한 시간 소요되었다. 곧 우리는 블랑 빙하 상단에 둔 짐을 찾아 긴긴 빙하를 따라 내렸다. 산행기점인 프레 데 마담 카레까지 또다시 두 시간 더 걸려 알프스 산맥 최남단에 위치한 4000m 봉우리 에크랑과 돔 데 네지 등반을 무사히 마쳤다.
- ▲ 돔 데 네지 정상에 모인 우리 셋은 마침내 안도의 기쁨을 나누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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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정보
도피네 산군의 최고봉 에크랑은 1864년 6월 25일에 에드워드 윔퍼와 미셀 크로, 크리스 알머 일행이 북동릉으로 올라 서릉으로 하산함으로써 초등되었다. 정상부 암릉을 제외한 전체적인 등반난이도는 PD~PD+급이기에 알파인 등반 초·중급자에게 멋진 4,000m 봉우리 등반을 제공한다. 알프스 산맥 끄트머리에 위치한 도피네 산군에서 가장 가까운 대도시는 프랑스의 그레노블이다.
샤모니에서 약 3시간, 제네바에서 약 한 시간 반 소요된다. 그레노블에서 에크랑 산행기점인 프레 데 마담 카레까지 승용차인 경우 두 시간 걸리며, 대중버스를 이용할 시에는 라 그라브를 경유, 라우타레 고개를 넘어 브리앙송으로 가야 한다. 거기서 버스를 타고 산행기점인 프레 데 마담 카레로 가면 된다. 한편 성수기인 7~8월에는 에크랑 산장 및 그레셔 블랑 산장이 붐비니 사전에 예약 후 찾는 편이 좋으며 산장 주변에 캠핑 또한 가능하다. 조·석식 포함 1박 산장비는 약 40유로이며 국제산악연맹(UIAA) 가입의 산악회원증이 있으면 할인혜택을 받을 수 있다.
- 글·사진 / 허긍열 한국산악회 대구지부 회원 - - 월간 산 10월호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