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은선, 모암 인수봉에 오르다 *-
오은선, 모암 인수봉에 오르다
인수봉 바위 해본 지 정말 오래됐어요. 너무 좋네요.”
-
8,000m 14좌 중 하나만 남겨두고 있는 오은선에게 지금 발목은 황금처럼 귀중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은선은 인수봉 암벽등반 제의에 선뜻 “좋지요” 하고 응했다.
의도했던 바는 아니지만, 그 말 한 마디로 오은선은 내면의 비밀 한 가지를 알려준 셈이다. 14좌 완등에 열중하고는 있으나 집착하고 있지 않다는 것. 집착하고 있다면 오은선은 아마도 “지금 암벽은 절대 안 된다”며 거절했을 것이다.
-
- ▲ 1 인수봉 대슬랩 중간에서 로프를 정리하고 있는 오은선(우)과 후배 이성재. 2 인수봉 대슬랩을 오르는 오은선. 3 인수 A코스 상단에서 선등자 빌레이를 보고 있는 오은선.
-
암벽등반 중 가장 잘 다치게 되는 부위가 바로 발목이다. 게다가 알고 보니 오은선은 이번 안나푸르나 등반 중 실족해 오른 발목이 편치 않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약속을 취소하지 않고 모습을 나타냈다. 천생 오은선은 인수봉 바위꾼 출신이었던 셈이다.
오은선은 실은 인수봉 등반 중에 발목을 다친 적이 있다.
“산천지 길에서예요. 4학년 때 선등을 서고 나서 너무 기뻐했었던 길인데, 몇 년 지나서 다시 자신만만하게 붙었다가 그만 추락했지 뭐예요. 그때 하산길에 발을 잘 딛지 못할 정도로 오른 발목을 다쳤는데, 그 발목이 지금까지도 말썽이에요.”
또한 바로 달포 전, 안나푸르나 등정 시도 후 하산길에 모레인 지대를 내려오다가 오은선은 다시 오른 발목을 접질리고 말았다.
“그럼 오늘 바위 그만 두지 뭐” 하자 오은선은 “그래도 기왕 여기까지 왔는데요” 하면서 등반을 고집했다. 바위에 대한 갈증이 그만큼 깊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 ▲ 인수 A코스 우측의 레이백 크랙을 등반하고 있는 오은선.
-
한 번 바위맛을 깊이 들인 꾼들은 암벽등반에 간혹 갈증 같은 것을 느낀다. 이따금씩이라도 오르지 않으면 결코 해소될 수 없는 그런 갈증이다. ‘바위 탄다’고 하지 않고 ‘바위 한다’고 하는 바위꾼들의 표현은 암벽등반이 단순한 오름짓이 아님을 암시한다. 다람쥐는 바위를 타지만 사람은 바위를 한다고 하는 그 표현의 이면에는 바위가 저쪽에 있는 객체가 아니라 서로 교감하는 대상이라는 뜻이 숨어 있다. 더불어 바위뿐만 아니라 바위에 함께 오르는 파트너와도 깊은 교감을 나눈다. 시정거리에선 불가능한 그런 깊은 교감의 체험은 문득문득 가슴속 깊은 곳을 자극한다. 오은선은 필경 그런 갈증을 느꼈기 십상이다.
“14좌 한다고 정신없는 3년이었어요. 이 인수봉 정말 진작에 한 번 와봤어야 했어요. 아유, 너무 좋네요.”
청정한 가을 대슬랩으로 올라선 오은선은 너무 좋다며 마치 인수봉의 기운을 가슴 깊이 받아들이기라도 하는 듯 심호흡을 거듭한다.
“제 모든 오름짓은 인수봉에 뿌리내리고 있죠”
인수봉은 오은선에게 모암(母岩), 곧 바위꾼으로 거듭나게 한 어머니바위다. 수원대 산악부 시절 오은선은 주말마다 이 모암의 품을 찾았다. 아버지가 “따뜻하게 자야 한다”며 사준 미군용 침낭을 메고 인수야영장에서 동료들과 야영하며 만년설을 향한 꿈을 키웠다.
- ▲ 1 확보용 슬링을 매만지고 있는 오은선. 3년 만의 바위라, 모든 것이 새삼스럽다고 말한다. 2 변형A 쪽으로 넘어가고 있는 오은선. 프리등반 방식으로 넘어갈 경우 매우 까다로운 구간으로, 앞서 지나간 유학재 선배가 “실수하면 혹 발목을 다칠 수 있다”며 긴 슬링을 위의 볼트에 걸어주었다. 3 변형A루트를 선등하고 있는 이성재를 확보 중인 오은선.
-
암벽등반은 생명의 근원을 자극하는 몸짓이다. 생명의 안위를 추구하는 본능과 정반대되는 위태로운 오름짓을 의도적으로 이어가는 과정에서 생명력은 강해지고 이성은 숫돌로 벼린 듯 날카로워진다. 오은선이 암벽을 오르는 모습에서는 그런 오랜 내공이 느껴졌다. 3년여 만의 암벽임에도 걸음마다 마디게, 결코 서두르는 법 없이 침착한 자세로 올랐다. 다만 오른발의 혈액순환이 잘 안 되는지 아프다며 종종 암벽화를 벗고는 발을 주물렀다.
오래도록 만년설에 빛나는 햇볕에 시달렸기 때문인지 오은선은 강렬한 가을 햇살이 비추는 흰 암벽면을 못 견뎌했다.
“아, 고글을 가져왔어야 하는데” 하고 오은선이 안타까워하자 함께 오르던 유학재(48·산비둘기산악회·한국산악회이사)씨가 “자, 이것 써라” 하면서 선뜻 오클리 황색 고글을 벗어주었다.
- ▲ 1 변형A 상단을 오르는 오은선과 그녀를 확보 중인 이성재. 2 인수봉 슬랩을 오르는 오은선. 침착하고 차분한 동작으로 시종일관했다. 3 선등자 확보를 보고 있는 오은선. 오랜 바위꾼의 자세가 몸에 배어 있다.
-
오늘 같이 암벽을 오르는 자일 파트너이자 선배인 유학재씨에게 오은선은 오래전에도 신세를 한 번 졌다. 의대길 중간의 고빗사위에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위의 유학재 선배에게 로프를 좀 내려 달라고 간청한 적이 있었다. 키가 155cm로 작은 오은선에게 볼트 간 간격이 너무 컸던 것. “그때 학재 형이 안 도와 주셨으면 정말 애 많이 먹었을 것”이라며 오은선은 유학재씨에게 새삼 고마워한다.
오은선의 한국대학산악연맹 후배로 오늘 선등을 맡은 이성재(27·인하대 재료공학과)씨는 대슬랩을 지나 오아시스로 올라섰다. 평일인데도 왁자지껄하다. 이기범 클라이밍센터 일행이다. 인수봉 전 루트 라운딩의 마무리 등반 중으로 팀원 중엔 코오롱등산학교 동문들이 다수 있어 이용대 교장과 윤재학 강사 등 노장 선배도 여럿 보였다. 이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서로 로프를 엇갈려가며 암벽에 올랐다. 기존 A루트 오른쪽 바로 옆 중간엔 5.10급의 짭짤한 고빗사위가 있다. 오랫동안 쉬었던 몸인지라 역시 오은선은 쩔쩔맸고, 곧 위에서 확보 보던 힘 좋은 후배 이성재가 로프를 팽팽하게 당겨주었다. 자칫 슬립하면서 접질린 발목에 충격이라도 가면 큰일이다 싶은 모양이었다.
-
크랙 이후는 A코스 왼쪽으로 건너가 가파른 실크랙 레이백 등반을 즐겼다. 그늘로 들자 손이 시릴 만큼 추위가 매서웠다. 오은선은 곧 두건과 장갑을 꺼내서 착용했다. 그러고 보니 남은 로프 한 동까지 넣어서 배낭이 다소 무거울 텐데 오은선은 별 어려움 없이 잘 오르고 있다.
A루트 바로 옆의 궁형 크랙을 등반하던 어느 선등자가 어헉 하며 추락했다. 다행히 추락 거리가 그리 길지 않아 별 부상은 입지 않았다. 그 클라이머는 이내 다시 크랙에 붙는다.
“그러고 보니 은선 누나랑 저 궁형 크랙도 같이 했잖아요. 기억 안 나세요?”
이성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그렇게 묻자 오은선은 “그래, 맞다. 그게 벌써 언제니!” 하며 맞장구를 쳤다.
- ▲ 인수봉 암벽 중간의 테라스에서 편안히 확보하고 저 위의 등반자를 바라보고 있는 오은선(좌)과 후배 이성재.
-
수원에는 높은 산이 없다. 그래서 수원대 산악부는 1985년 창립 초기부터 북한산 인수봉이나 선인봉으로 암벽등반을 하러 갔다. 대학 산악부들의 연맹체인 한국대학산악연맹에도 가입해 서울·경기 지역 대학 산악부원들과도 자연스레 어울렸다. 이성재와의 등반 경험도 그렇게 해서 갖게 된 것. 그러나 오은선은 누구보다 수원대 산악부 창립 멤버이자 1년 선배인 신동석(44)씨와의 인연이 각별하다. 이미 중학시절부터 암벽등반을 했고 오랜 전통의 전문산악회인 어센트 회원이기도 했던 신동석씨는 물론 암벽에 출중했다. 그 신동석 선배로부터 특히 아낌을 받았고 많이 배웠다고 오은선은 말한다.
대학 산악부 시절 인수봉 오르며 흰산 꿈 키워
“동석이 형이 제가 동계등반 가는데 옷이 없다고 하니까 자기가 애지중지하던 고어텍스 재킷이랑 바지를 빌려줬어요. 그런데 동석이 형이 남자들 군시절 버릇 때문인지 옷 여기저기 신동석, 신동석을 잔뜩 써뒀는데 그걸 입고 사방 돌아다녔더니 오은선은 신동석 여자다, 이러고들 놀리지 뭐예요, 나 참.”
지금도 다만 절친한 선후배 사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오은선은 잘라 말한다. 아쉽게도 오늘은 평일이라 신동석씨는 함께 바위에 나서지 못했다.
- ▲ 1 인수봉 암벽면에 오뚝 선 오은선. 2 하강 준비 중인 오은선을 선배 유학재가 살펴보고 있다. 3 등반 중 서로 엇갈린 다른 팀의 로프를 정리하고 있는 오은선.
-
-
바위꾼들은 여자도 남자 선배에겐 형이라고 부르는 게 관례다. 누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부르기를 시작했을까? 혹 자일 파트너의 관계가 남녀 관계로 깊어지는 것을 경계하고자 해서였을까. 암벽 등반에서 애절한 감정은 간혹 이성을 무너뜨리기 쉽고, 그러면 자칫 큰 사고로 이어질 지 모른다. 그런 경우를 저어해서였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간 많은 남녀 바위꾼들이 결국 부부의 연을 맺었지만, 오은선은 아직 그런 인연을 만나지 못했단다.
인수봉 정상 직전 귀바위 아래, 일명 영자크랙 밑에 다다르자 매서운 북새풍이 파고들었다. 오은선은 히말라야도 이렇게 춥지 않았다며 목을 움츠렸다.
“한반도 바람은 히말라야보다 더 매서운 것 같아요. 우리나라는 확실히 뭔가 특별한 데가 있어요.”
- ▲ 인수봉 오버행 하강 포인트에서 늦가을 오후 햇살을 즐기고 있는 오은선(좌)과 유학재.
-
정상은 뜻밖으로 바람도 없고 따스했다. 편안히 자리에 앉아 가져온 김밥으로 요기했다. “야, 서울 하늘이 이렇게 청명한 적 거의 없었죠” 하는 오은선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대기가 맑았다. 상계동 쪽 아파트촌이 속속들이 들여다보이고 멀리 서해까지 눈에 들었다. 좀 더 머물다 내려갔으면 좋으련만 오은선이 서둘렀다. “저녁 6시에 명동에서 한국네팔친선협회 창립총회가 있는데, 안 가볼 수가 없네요” 하며. 유명해지는 것과 행복해지는 것은 확실히 서로 무관하다. 무명 시절의 오은선 같았으면 이 맑디맑은 북한산릉 풍경을 오래도록 즐겼을 것이다.
유학재, 이성재 두 사람은 로프 두 동을 연결해 한 번에 바닥까지 내려갈 수 있게 하강 준비를 마쳤다. 히말라야 고산에서 하강 로프의 선택은 간혹 삶과 죽음을 가른다. 한왕용이 K2 등정 후 하산 때 그랬다던가. 안개 속에서 절벽 저 아래 안전지대까지 닿은 로프가 어느 것인지 알 수 없어 ‘어·느·것·을·할·까·요’로 골라잡은 뒤 그냥 하강했고, 내려가다 보니 저기 다른 한 가닥 로프는 중간이 툭 잘려 있더라는. 그런 긴박한 선택이 필요 없는 모암 인수봉에서, 든든한 로프 두 가닥을 함께 걸고 내려가는 오은선은 편안해 보였다.
- ▲ 1 영자크랙을 지난 뒤, 북새풍이 몹시 세차게 불고 있는 가운데 로프를 정리하고 있는 오은선과 이성재. 2 인수봉 오버행 하강 포인트를 향해 내려가고 있는 오은선. 3 인수봉 등반을 마치고 정상에 편안하게 앉은 세 사람(왼쪽부터 유학재, 오은선, 이성재).
-
-
“오늘 하루 너무 좋았어요. 존경하는 선배, 사랑하는 후배 더불어 인수봉 바위도 해보고….” 백운산장에 들러 뜨끈한 국수 한 그릇씩 든 후 우리는 북한산을 내려갔고, 내년에 14좌를 끝낸 뒤 인수봉 한 번 더 하자는 약속과 더불어 헤어졌다.
- 글 안중국 편집장 / 사진 허재성 기자 / 월간 산 12월호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