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계(市界) 걸으면 역사가 보인다 [1] *-
시계(市界) 걸으면 역사가 보인다 [1]
- 1구간, 워키힐~아차산~태릉까지…삼국시대 고분·보루, 공원묘지 등 거쳐
서울시가 언제 지금의 행정구역 경계를 갖췄을까? 서울시계를 잇는 경계는 그 길이가 모두 얼마나 될까? 몇 개의 산을 넘을까? 또한 강이나 하천은 얼마나 될까? 그 경계를 따라 어떤 유적이 있으며, 무슨 역사를 말하고 있을까? 1000만 인구가 매일 생활하는 서울이지만 이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지 않을까 싶다. 이에 월간산 취재팀은 거인산악회와 54트레킹동호회 회원들과 함께 총 138㎞에 달하는 서울시 경계를 10구간으로 나눠 매월 둘째, 넷째 주 화요일에, 즉 한 달에 두 번씩 끊어 종주한 기록을 다섯 달간 연재할 예정이다. 다섯 달 연재하는 동안 구간 소개뿐만 아니라 그 구간에 포함된 서울의 모든 역사도 아울러 소개할 계획이다. 서울의 역사와 함께할 서울시계종주 연재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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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의 행정구역이 지금 모습을 갖춘 건 불과 30년도 채 안 된다. 조선시대까지는 4대문 안이 서울이었다. 즉 서울 내사산(內四山:북악산, 인왕산, 낙산, 남산)을 따라 축성된 서울 성곽이 서울의 경계였다. 그러던 서울이 해방 전후로 점차 비대해지기 시작했다.
- ▲ 한북정맥 수락지맥으로 서울과 경기도의 자연경계를 이루고 있는 지형을 불암산 정상에서 한눈에 볼 수 있다. 도시를 가린 운무는 마치 산을 바다에 우뚝 솟은 섬으로 보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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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구(區)의 개념이 도입된 건 일제 말기인 1943년 3월 19일 공포된 조선총독부의 부령 제163호에 따라 종로, 중, 동대문, 용산, 성동, 영등포, 서대문 등 7개 구로 나뉜 때부터였다. 해방 직전인 1944년 11월에 마포구가 신설돼 8개 구로 해방을 맞았으나 1949년엔 시·도 관할구역의 명칭, 위치, 변경에 의해 경기도 고양시 숭인면, 은평면 등 45개 리를 서울로 편입시킴과 동시에 성북구를 신설하면서 총 면적 268㎢로 광복 당시의 2배로 커졌다.
1943년 처음 구(區) 개념 도입
1975년엔 강남구를 신설하면서 다시 경계가 대폭 늘어났고, 1995년엔 강북·금천·광진구를 신설하면서 지금의 25개 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현재 서울의 행정구역과 인구는 총 25개 구, 522개 동, 605㎢에 약 1000만 명이 살고 있다. 해방 당시보다 두 배로 커진 1949년보다 면적만 약 3배 늘어난 규모다. 시청을 중심으로 직경은 약 40㎞ 내외이며, 둘레 길이는 총 138㎞에 달한다.
이 둘레 길이를 10구간으로 나누면 평균 14㎞ 정도 된다. 산과 강을 넘고 도로를 따라 때로는 평지로, 때로는 산길을 따라 간다. 1구간을 마치고 경상도 친구들을 만났다. “서울시계종주를 하고 왔다”고 하니 “서울에 씨게 종주할 산이 어디 있냐”고 대꾸해 한바탕 웃었다. ‘씨게’는 경상도 사투리로 ‘세게’ 혹은 ‘강하게’를 뜻하는 말이다.
- ▲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를 이룬 수락산 능선으로 일행이 종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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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계종주는 구간에 따라 ‘씨게’도, 약하게도 걷는다. 1구간은 GPS로 측정한 거리가 18.3㎞에 달했지만 야트막한 산과 평지로 걸어 그렇게 힘들지 않은 코스였다. 하지만 2구간은 15,6㎞로 1구간보다 거리는 짧았지만 하루 종일 비가 내리는 불암산, 수락산을 넘어서 도봉산 입구까지 걸어야 했기에 상대적으로 더 지쳤다. 1, 2구간별로 서울시계종주길을 따라가 보자. <원색부록지도 참조>
[1구간] 광나루~아차산~용마산~망우산~구릉산(검암산)~태릉 담터고개 18.3㎞
지하철 광나루역에서 서울시계종주 출발이다. 거인산악회 이구 대장과 54트레킹동회 회원 20여 명이 모였다. 인원을 체크한 뒤 각오를 다지며 일제히 “파이팅”을 외쳤다.
출발지인 광나루는 아차산 남쪽에 있는 나루터로, 한강을 건너 충청·강원·경상도로 향하는 주요 교통로였다. 조선 태종 때 별감을 파견할 정도로 요충지로 발전했다. 지하철 광나루역에서 한강 광나루까지는 복잡한 도로를 몇 개 건너야 하는 관계로 그냥 멀찌감치 보기만 하고 지나쳤다.
- ▲ 운무 속으로 솟은 북한산 인수봉과 백운대가 저 멀리 보인다. 도시는 운무 속에 완전히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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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커힐을 왼쪽에 두고 구리로 가는 46번 국도 옆 조그만 길로 아차산으로 접근하기 위해 걸었다. 바로 옆으로 차들이 쌩쌩 지나쳤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정확히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를 찾아가는 길이지만 여러 명이 걷기엔 길이 좁아 다소 위험했다.
모두들 걷는 내공이 예사롭지 않다. 특히 1954년생으로 구성된 54트레킹동호회 회원들은 대부분 중년의 아주머니들인데도 걷는 품새가 가볍고 빠르다. 그 틈에서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워커힐은 지금은 호텔로 바뀌었지만 한국전쟁 때 국군과 인민군의 격전이 벌어진 아차산 일대에서 전사한 미8군사령관 워커 장군의 이름을 따서 휴양지를 지은 데서 출발했다. 광나루를 통해 한강을 건너기 위한 많은 피란민이 큰 희생을 치렀던 곳이기도 하다.
- ▲ 일행이 수락산 하강바위를 넘어 정상으로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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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구리로 접어들었다. 왼(서)쪽 아차산으로 가는 비포장도로로 들어섰다. 200m 남짓 갔을까. ‘고구려대장간마을’이라는 커다란 이정표가 나왔다. 드라마 ‘태왕사신기’ ‘바람의 나라’ ‘자명고’와 영화 ‘쌍화점’ 등을 촬영했던 곳으로, 요즘 관광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철기문화를 일찌감치 받아들인 고구려 문화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대장간’이란 이름을 붙였으며, 옆에 있는 유적전시관엔 고구려 유물이 전시돼 있다. 입장료를 성인 3,000원, 청소년 2,000원씩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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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커힐은 전사한 美 장군 이름 딴 휴양지
잠시 대장간마을로 들어가 취재하는 사이 일행이 전부 사라지고 없다. 아직 녹지 않은 길을 부리나케 뛰어올라갔다. 겨우 뒤꽁무니를 찾았다.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팀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54트레킹동호회는 백두대간을 두 번씩이나 종주한 아주머니들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그 정도 내공인데, 어찌 감히 따라갈 수 있겠나. ‘오늘 고생 좀 하겠다’ 싶었다.
이젠 아차산 올라가는 길이다. 갈림길에 이정표가 있었다. ‘←아차산성·1보루, 큰바위얼굴·전망대→’로 나뉜다. 우린 아차산성 방향이다. 시경계는 위커힐로 올라가야 하나 워커힐 주변은 철조망으로 둘러쳐져 구리 쪽으로 둘러온 셈이다.
아차산(峨嵯山·286.8m)은 백두대간에서 갈라진 한북정맥이 한강을 앞두고 끝나기 직전에 일으킨 마지막 봉우리다. 이 산줄기는 양주군 광릉의 죽엽산(801m)에서 남하해 천보산, 수락산(水落山·637.7m), 불암산(佛岩山·507m)을 거쳐 그 주맥이 구릉산(검암산)에서 망우리고개를 넘어 망우산, 용마산(龍馬山·348m), 아차산에 이르며 아차산성이 있는 봉우리를 정점으로 한강으로 빠져든다.
- ▲ 눈이 채 녹지 않은 등산로로 일행이 불암산 정상을 향해 발길을 옮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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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선으로 올라서니 아차산성은 문화재보호 및 산불예방으로 입산금지 푯말이 붙어 있고, 살벌한 철조망으로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뒤쪽으로 한강이 시원하게 펼쳐졌다.
이제 한북정맥 수락지맥의 끝지점에서 능선을 타고 간다. 한강이 바라보이는 동쪽은 남양주이고, 안개인지 스모그인지 자욱하게 낀 서쪽이 서울이다. 이 수락지맥이 경기도와 자연적인 경계를 이룬다.
능선 위로 잘 조성된 등산로엔 평일인데도 등산객들로 북적거렸다. 경기도 구리시와 서울 광진구를 가리키는 이정표는 180도 양방향으로 서 있다. 길을 따라 가면 된다.
아차산은 삼국시대 전략적 요충지
아차산은 높지는 않지만 삼국시대 전략적 요충지로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이곳을 점령하기 위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아차산성과 아차산 일대 보루군이 사적 제455호로 지정돼 보호를 받고 있다. 보루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돌이나 흙 등으로 쌓은 축성물을 말한다.
- ▲ 서울시계종주팀이 안개가 자욱한 제명호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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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선길의 전망은 동서남북이 확 트여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남으로는 유려히 흐르는 한강, 북으로는 빌딩 숲속 뒤로 보이는 북한산과 도봉산의 전경이 펼쳐진다. 어느 곳에서나 쉽게 볼 수 없는 장면이다. 그러니 평일에도 등산객이 많이 붐비나 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차산 명품 소나무 제1호가 그 좋은 전망대 바로 옆에 떡하니 자리잡고 있다. ‘아차산의 바위틈에서 광진구와 한강을 바라보며 오랜 세월 광진구민과 함께한 소나무입니다’라고 이정표에 쓰여 있다. 10m도 못 가서 2호가 모진 세월을 견뎌낸 듯 함께 있다.
용마산 정상으로 가는 갈림길인 헬기장에 도착했다. 왼쪽으로 100여m 가면 용마산 정상이다. 그곳에 신라의 보루 흔적이 남아 있다. 용마산은 서울시 구역이고, 시경계는 망우산 방향이다. 그쪽으로 직진이다.
아차산 전역엔 150여 기의 고분이 산재해 있다. 확인된 파괴 고분만 해도 70여 기에 이른다. 이곳 용마산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은 항아리, 석제, 병 등으로 전형적인 신라 토기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들이다.
아차산에서 이어지는 능선은 망우산으로 연결된다. 자연히 망우산으로 넘어왔다. 망우산은 서울의 유일한 공동묘지다. 1933년 공동묘지로 지정된 이래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이곳에는 우리나라 어린이운동의 효시인 방정환 선생을 비롯해 독립운동가이며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오세창·한용운 선생 등이 안장돼 있다.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 선생, 도산 안창호 선생 등 많은 애국지사들의 묘역도 있었으나 국립묘지 독립유공자 묘역으로 이장했다. 시경계길은 능선 위로 걷지만 공원묘지 순환길을 따라 가면 이들의 묘지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망우묘지엔 한용운 선생 등 안장
망우리묘소 입구 주차장에는 13도참의군탑이 세워져 있다. 1907년 일제에 의한 조선군의 강제해산에 저항하는 의병이 전국에서 봉기했다. 그 해 11월엔 경기도 양주에 13도 의병이 모여 서울 진격작전을 벌였다. 비록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그들을 기리기 위해 지난 1993년 건립한 것이다.
길이 이어지듯 시경계도 계속된다. 망우리 고개를 지나 망우산 밑으로 뚫린 중앙선 전철을 발아래 밟고 건넜다. 걷는 사람은 모르지만 지도엔 나타나 있다.
갑자기 급경사가 나왔다. 위에서 보니 경사가 80도 이상은 족히 될 것 같다. 그 아래로 태릉-구리 간 고속화도로가 지나고 있다. 오금이 저려 발걸음을 조심조심 옮겼다. 도로 관리하는 직원들이 사용하는 듯한 거의 수직에 가까운 계단이 눈 아래 세워져 있다. 거기로 내려가야 한다. 양 팔을 뻗어 양쪽을 꽉 잡고 천천히 한 걸음씩 옮겼다. 백 수십 개 되는 계단을 내려오는 데 5분 이상은 걸린 것 같다. 초심자들은 이 길을 찾기 쉽지 않아 보였다. 이 길을 사람들이 어떻게 찾았는지 신기하기만 했다.
내려서니 서울 신내동과 경기도 구리의 경계다. 해치상이 일행을 맞았다. 고속화도로를 건너기 위해 구리 방향으로 조금 올라가서 횡단도로를 건넜다. 다시 서울 방향으로 내려와 오른쪽 이정표가 있는 망우산 극락사 방향으로 진입했다. 시경계가 계속되는 길이다.
- ▲ 망우산 공원묘지에서 종주팀이 유려히 흐르는 한강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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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구간 마지막 산인 구릉산으로 들어섰다. 조선시대 아홉 왕의 능이 동쪽에 있다 하여 동구릉이라 불렸다. 이곳은 원래 검암산이었으나 조선 왕실에서 이름에 ‘칼’을 연상케 하는 ‘검’자가 있어 역대 왕의 영혼이 잠들어 있는 곳에 불길하다 하여 이름을 못 쓰게 해서 구릉산으로 불리게 됐다고 한다. 구릉은 조선 건국 초기부터 왕릉터로 주목을 받은 곳이며, 가장 많은 왕이 안장돼 있다. 태조의 건원릉, 5대 문종과 왕비 현덕왕후의 헌릉, 14대 선조와 왕비 자인왕후 및 계비 인목왕후의 목릉 등 조선 왕조의 17위가 모셔져 있어 사적 제199호로 지정돼 있다. 동구릉은 시경계에서 구리 쪽으로 조금 내려가야 한다. 잠시 들렀다 가려니 준족의 일행을 놓칠까 싶어 멀찌감치 쳐다만 보고 지나쳤다.
구릉을 내려서면서부터는 평지다. 47번 국도를 따라 계속 걷다가 갈매주유소에서 왼쪽으로 꺾어 육군사관학교를 구리 방향으로 우회해서 간다. 이어 경춘선 철로를 건너 삼육대 앞을 지나 태릉 담터사거리까지 가면 1구간 끝이다. 오전 10시5분에 출발해서 오후 4시40분쯤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