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캉첸중가] 김창호·서성호 대원의 무산소 등정 *-
[캉첸중가] 김창호·서성호 대원 C3 출발 후 17시간25분 만에 무산소 등정
-
지구상의 용마루 히말라야에는 8,000m가 넘는 봉우리 14개가 있다. 그 중 아침 태양이 가장 먼저 정수리에 비치는 산을 현지 원주민들은 예로부터 ‘캉첸중가(8,586m/Kangchenjunga)’라 불렀다. 티베트어로 ‘Kang’-‘Chen’-‘Ju’-‘Nga’ 네 단어의 합성어다. ‘Kang’은 ‘눈(雪)’, ‘Chen’은 ‘크다(大)’, ‘Ju’는 ‘보석(寶石)’, ‘Nga’는 ‘다섯(五)’을 의미한다. 즉 ‘5개 큰 눈의 보석’이란 뜻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오대보장(五大寶藏)이다.
-
-
해발 8,586m의 캉첸중가는 때로 킹친중가(Kingchinjunga) 또는 쿵찬장가(Kungcanjangha)라고도 했었다. 캉첸중가라 불려진 것은 다섯 개의 봉이 연이어 솟아 있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그 봉우리가 바로 캉첸중가 주봉(8,586m), 중앙봉(8,482m), 남봉(8,476m), 서봉(8,505m·얄룽캉), 캉바첸(7,903m)이다. 이 산군은 네팔의 최동단과 인도의 시킴(Sikkim)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등반 시작 열흘 만에 해발 7,550m에 마지막 캠프 설치
캉첸중가(8,586m)는 지구상에서 세 번째로 높은 산이지만 세 번째로 많이 등반하는 산은 아니다. 지난 2003년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초등 50주년에는 무려 74개 팀이 몰렸다. 그러나 캉첸중가 초등 50주년인 2005년에는 단 두 팀만이 이 산을 찾았다. 지난해 봄 시즌에는 세계 여성 산악인 최초로 8,000m급 14좌 완등 레이스의 열기 속에서 한국 2개 팀을 포함해 총 8개 팀이 등반했다. 그러나 올해는 우리 원정대가 유일했다.
- ▲ 해발 8,500m 지대 횡단등반 중이다. 뒤에 캉첸중가 서봉(8,505m·얄룽캉)이 보인다.
-
많은 산악인은 캉첸중가를 외로운 산이라고 평한다. 이 산의 위험한 루트를 오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심지어 8,000m급 봉우리를 즐겨 등반하는 등반가들도 이 봉에 오르기 전에 몇 번이고 생각한다고 한다.
그러면 왜 대부분의 산악인이 이 산을 외면하는 것일까? 에베레스트보다 명성이 떨어지고 K2보다는 난이도가 낮다. 베이스캠프까지 15일이라는 길고도 험한 캐러밴이 필요하며, 어떤 루트를 선택하든 비교적 쉬운 노멀루트가 없다. 선등한 팀의 고정로프를 사용하기보다 자신이 첫 고정로프를 깔 확률이 높으며 정상에 오르지 못할 확률이 너무 높은 데 반해 정상에 도달했더라도 안전하게 돌아올 확률이 매우 낮다. 이것이 캉첸중가를 많이 찾지 않는 이유다.
하지만 이런 수많은 걸림돌에도 불구하고 많은 히말라얀 클라이머가 이곳을 찾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등반가의 추억이다. 세계 등반사의 아름다운 몇 페이지는 이 산에서 쓰여졌다. 바로 그것이 명성이나 영광을 위해서만 등반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다.
우리 팀이 카트만두를 출발한 지 10일 만에 입성한 캉첸중가 남면 얄룽빙하 베이스캠프는 최적의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파키스탄의 K2나, 네팔 에베레스트의 베이스캠프와 같이 얼음과 모레인 빙하 위도 아니고, 마칼루와 같이 삭막하기 그지없는 딱딱한 바위섬 위도 아니다. 높은 고도와 낮은 기온에 적응하려는 이끼류의 식물이 큰 둔덕 위를 융단처럼 뒤덮고 있는 포근하고 아늑한 곳이다.
-
-
베이스캠프에는 바람도 적다. 이는 캉첸중가 주봉을 중심으로 남쪽으로는 탈룽, 카브루Ⅰ~Ⅳ봉까지 7,000m급 봉우리가 연결되고 남서쪽으로는 얄룽캉·캉바첸·자누가 병렬해 항아리형의 내원 중앙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의 옥좌(玉座), 풍수지리의 안산(案山)에 보금자리가 있다.
-
- ▲ 통상적인 원정대의 C1(6,200m) 자리에 우리 팀도 임시캠프를 설치해 루트를 개설한 후, 빙하 플라토를 건너 6,300m에 새로운 C1을 세웠다.
-
사실 우리 팀은 예년에 비해 열흘 가량 일찍 출국했다. 봄 시즌 네팔 히말라야에 위치한 캉첸중가와 안나푸르나1봉을 연속등반하기 위해서다. 우리 팀이 오르는 루트는 1955년 영국대가 초등한 남서벽이다. 빙하와 세락이 변해 당시와 정확히 같지는 않다.
히말라야 8,000m급 거봉 등반이 9번째인 우리 다이내믹부산희망원정대(대장 홍보성)는 두 차례의 고소적응 등반 후 등정을 시도한다는 등반계획을 수립했다. 1차 고소적응 등반은 통상적인 캠프지 높이로 6,200m 지점의 C1까지, 2차는 7,100m 지점의 캠프3까지, 이후 날씨가 좋아지면 정상에 오른다는 계획으로 8,000m급 거봉에서 흔히 이루어지는 방식이다. 경험상 8,000m대의 정상에 오르려면 그것도 산소의 도움 없이 8,586m의 캉첸중가 정상에 서려면 5,000m대 이상의 고도에서 최소한 20여 일간 고소에 적응해야 가능하다.
1차 고소적응 등반을 성공리에 끝내고 짐 운반에 나섰다. 쾌청했던 날씨는 인간의 접근을 막으려는 듯 폭풍설을 몰고 왔다. 밤새 내린 30cm 정도의 심설이 무더위와 함께 우리를 괴롭혔다. 4월 1일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빙하 위 설원지대를 가로질러 6,300m 다른 팀의 C2 자리에 C1을 설치하고, 등반에 필요한 절반 가량의 짐을 옮기는 데 성공했다.
4월 3일. 2차 고소적응 등반에 나섰다. 대원 3명이 곧바로 C1으로 진출했다. 이튿날 C2로 진출을 위해 서둘렀다. 고산등반 능력이 탁월한 김창호 대원은 사다 상게 셰르파와 함께 루트 개척에 나서고, 김진태·서성호 대원과 니마 셰르파는 20kg이 넘는 짐을 지고 그 뒤를 따랐다. 김창호 대원은 전날 고소포터들이 잘못 설치한 고정로프를 수습하며 선등했다. 발달된 크레바스와 붕괴된 세락은 그동안 숙지했던 루트와는 달랐다. 2008년 인도 육군대에 참가했던 상게 푸리 셰르파도 정확한 루트를 알지 못했다.
- ▲ (왼쪽부터)단단한 빙벽을 올라 C2(6,900m)로 오른다. 이 구간에는 많은 세락과 크레바스, 빙벽이 가로막고 있다. / C3(7,550m)에서 바라본 캉첸중가 주봉.
-
눈의 복사열로 30도가 웃도는 무더위 속에서 악전고투하며 8시간 만인 오후 3시경 6,900m 지점에 도착해 임시캠프를 설치했다. 100여m 상단부에 텐트의 잔해들이 보였다. 하지만 굳이 고도를 높여 바람이 강하게 부는 설원으로 캠프를 옮길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곳을 캠프2로 정했다.
이날 우리 원정대가 준비한 고정로프 총 3,500m 중 1,800m가 소요됐다. 예년에 없던 크레바스와 붕괴된 세락을 이리저리 피하느라 루트가 길어져 예상보다 1,000m 이상의 고정로프가 더 소요된 것이다. 보통 8,000m급 1개 봉 등반을 할 수 있는 양이다.
이튿날 오전 7시경 김창호 대원과 상게 셰르파가 C3까지의 루트 개척에 나섰다. 50~60도 경사의 빙설벽을 돌파, 설원지대에 올라섰다. 정상부 쿨와르에서 뻗어 내린 설원지대 위로 우뚝 솟은 정상부가 설연에 휘날리고 있었다. 등반이 계속됐다. 지형이 많이 변해 있었다. 상단 대설원지대 그레이트 셸프(Great Shelf)에는 크레바스가 발달해 있다. 안자일렌으로 조심스레 C3를 향해 서서히 고도를 높이며 나아갔다. 강한 바람이 앞을 가로막았다. C3를 출발한 지 6시간 만에 ‘내일의 등반’을 위해 C2~C3 중간 7,300m 지점까지 진출한 후 발길을 돌렸다.
-
한편 김진태·서성호 대원과 니마 셰르파는 부족한 고정로프 회수작업에 나섰다. C2~C3~정상에 이르는 구간에 설치할 고정로프가 바닥이 난 것이다. C1까지 하산한 이들은 위험하지 않은 곳에 설치된 고정로프 300여m를 회수, 다시 C2로 올라왔다.
4월 6일 이른 아침 세락 붕괴의 굉음과 윙윙거리는 강풍 속에서 하룻밤을 보낸 대원들은 다시 등반에 나섰다. 구름 한 점 없는 쾌청한 날씨였으나 제트기류의 영향으로 7,000m대의 설원지대에는 초속 20~25m의 강풍이 휘몰아쳤고 기온은 영하 30도를 밑돌았다. 크레바스를 피해 고도를 높였다. 바람은 점차 강해졌다. 온몸은 얼어붙었고 손가락의 움직임도 둔해졌다.
하지만 물러설 수 없었다. 출발 5시간 만인 정오경 고도차 600m를 극복하고 C3(7,550m)에 당도했다. 고된 하루였지만 보람은 있었다. 통상적으로 캉첸중가 남서벽 루트는 4개의 캠프를 설치하고 마지막 캠프를 7,700~7,900m 대에 설치하는 데 반해 우리 팀은 원래의 C1을 없애고 3개의 캠프 가운데 마지막 캠프를 통상 C4에 비해 낮은 곳에 설치했다. 이제 정상 등정 시도를 위한 교두보가 구축된 셈이다. 베이스캠프 도착 13일 만, 등반을 시작한 지 불과 10일 만이었다.
-
- ▲ 4월 28일 저녁 8시경 마지막 캠프를 출발, 다음 날 새벽 4시경 중앙 쿨와르를 벗어나 8,250m에 위치한 첫 번째 대암벽에 오르는 서성호 대원.
-
-
베이스캠프를 떠난지 4일 만에 전원 무사히 보금자리로 돌아왔다. 캐러밴은 물론 루트 개척은 힘겨움의 연속이었다. 모든 대원은 최상의 컨디션으로 조용한 휴식의 시간을 가지고 있다. 정상 등정 시도만 남았다. 이제 마지막의 시작인 셈이다.
7,550m 고도에서 쉰다는 것은 서서히 죽어간다는 것
베이스캠프에 입성한 지 벌써 한 달이 지나갔다. 진눈깨비가 내리는 가운데 부족한 장비와 식량이 카트만두에서 도착했다. 천군만마를 얻은 셈이다. 그러나 기압골의 영향으로 오후가 되면 5,000~
-
6,000m대에 어김없이 눈이 내렸다. 제트기류의 가장자리에 들면서 그 영향으로 정상부에 순간 최대 풍속 초속 20m 이상의 강풍이 불어댔다.
마지막 캠프를 완성한 후 무려 세 번이나 정상 도전을 감행했지만 결코 세계 제3위 봉은 우리를 선뜻 받아주지 않았다. 처음에는 마지막 캠프(7,550m)에서 강풍에 밀려 등정의 꿈이 좌절됐다. 두 번째는 돌풍으로 C2(6,900m)의 텐트가 흔적 없이 사라져 대부분의 등반장비와 식량을 잃어버렸다. 세 번째는 8,150m까지 진출했으나 고소포터의 동상 증세로 다음을 기약하고 통한의 후퇴를 단행했다. 이런 과정에서 2007년 K2와 브로드피크 등정 후 3년 만에 원정대에 합류한 김진태 대원은 두 차례나 크레바스에 추락하는 위기를 모면한 충격으로 “후배 대원들에게 짐이 된다”며 캉첸중가 등정의 꿈을 접고 말았다.
- ▲ 일명 촛대바위(손톱바위)를 바로 돌아 있는 해발 8,450m 지점의 설릉 구간. 사진 우측 상단부의 뾰족한 세 개의 피나클 중 중앙이 캉첸중가 주봉 정상이다.
-
-
운행계획은 전적으로 날씨에 따라 수립되고 변경된다. 캐러밴 때는 물론 베이스캠프 도착 이후 지금까지 캉첸중가 지역의 날씨는 좋았다. 이곳의 날씨 패턴을 어렴풋이 알아차린 우리는 기상예보를 토대로 또다시 등정을 위한 계획을 세웠다. 고산등반은 날씨가 성패를 좌우한다. 계절이 바뀌면서 날씨가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기상예보관은 제트기류는 예상할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한다. 하지만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
-
4월 28~29일 제트기류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정상부에 초속 11~13m 정도로 바람이 약해진다는 예보였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정상 도전을 앞둔 베이스캠프에 정적이 흐른다. 어느 누구도 선뜻 정상을 쉽게 얘기하지 않았다. 너무도 침착하고 별다른 준비도 필요 없었다. 우리는 정상 등정 예정일을 지난해 마나슬루(8,163m) 등정일이었던 4월 28일로 정했다.
4월 25일. 4일간 휴식을 취한 김창호·서성호 대원은 고소포터 2명과 함께 ‘마지막 도전’이라는 각오로 베이스캠프를 출발, 3일 만에 C3에 진출하여 휴식에 들어갔다. 오후 6시부터 등반준비가 시작됐다. 하지만 해발 7,500m에서 정상까지 구름으로 뒤덮여 눈이 내렸고, 저지대로부터 차 올라온 가스로 가시거리가 10m도 채 되지 않았다. ‘화이트아웃’이었다. 이곳에 도착한 이래 거의 매일 오전에는 쾌청한 날씨를 보이다가 오후가 되면 싸락눈을 뿌렸고 어둠이 밀려오면 캉첸중가의 검푸른 연봉들은 별빛을 품었다. 보기 드문 날씨 패턴이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다음 날 새벽 2시께 서북서풍이 북서풍으로 바뀌면서 구름과 가스가 말끔히 걷혔다. 그러나 정상을 향해 출발하기에는 이미 늦은 시각이었다. 정상 등정 후 하산할 때의 안전을 고려, 등정 시도를 하루 연기했다. 우리에게 또 한 번의 불행을 예고하는 듯했다. 대원들은 새벽까지 뜬눈으로 지새운 탓에 태양이 텐트를 비출 때까지 억지로 잠을 청했다. 갑자기 바람이 몰아치자 텐트는 푸르르 떨렸고 천장에 얼어붙었던 얼음가루가 침낭 사이로 노출된 코와 눈 주위에 떨어졌다. 몸서리를 치며 고개를 옆으로 살짝 돌릴 뿐 어떠한 행동으로 저항하기엔 고도가 너무 높고 모든 것이 귀찮았다. 심지어 숨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 ▲ 천장바위 위를 오르는 원정대.
-
-
우리는 내일의 등정을 위해 억지로 쉬고 있었다. 해발 7,550m 고도에서 쉰다는 것은 가만히 누워 있어도 인체가 서서히 죽어간다는 말이다. 그래서 히말라야 등반가들은 조소적인 말투로 7,300m 이상을 ‘죽음의 지대’라고 부른다. 높은 고도, 희박한 공기,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추위와 그에 따른 무기력증은 내면의 의지를 꺾기에 충분하다.
대원들은 4월 28일 저녁 각자 정상을 향할 짐을 챙겼다. 팀원들이 있다 한들 이곳에서는 자신 외에 누구도 도와줄 수 없다. 쉽게 이루어지는 꿈이었다면 그것은 더 이상 꿈이 아니다. 깊은 계곡을 품은 산이 높듯, 고통에 맞서 싸우고 자신을 이겨낸 자야말로 그 체험을 통해 인간 의식을 한 걸음 더 확장시킨 진정한 승리자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등산이다.
등반준비가 끝난 이들은 텐트 문을 나서 먼저 하늘을 바라보았다. 차가운 별이 쏟아졌다. 오후 7시30분경 고소포터가 출발했고, 8시경 대원 2명이 C3를 나섰다. 말없이 들숨과 날숨, 오른발과 왼발에 리듬을 맞춰 설원을 올라 가파른 빙벽에 매달렸다. 얼어붙은 빙벽은 불타는 욕망에 녹아내렸다. 이들은 오르고 또 오르려는 네 마리의 짐승이 되어 어둠 속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수직으로 바짝 선 설빙벽을 기어올랐다.
음력으로 보름. 오후 9시경이 되자 캉첸중가 남봉을 돌아 떠오른 휘영청한 달이 얇은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캉첸중가 주봉과 서봉(얄룽캉) 사이에 난 쿨와르(홈통)로 루트가 연결돼 있었다. 세 번의 정상 도전 실패, 그것은 우리에게 부끄러움이 아니다. 단지 다시 도전해야 할 시간이 더 주어진 명제일 뿐이고, 네 번째 길을 나선 것이다.
-
오전 4시경. 8,150m 지점을 통과, 세 번째 시도에서 돌아섰던 지점부터 고정로프를 계속 연결해 나갔다. 8,000m대에서는 작은 동작 한 번으로도 숨을 몇 번이나 헐떡이게 한다. 긴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돌렸다. 얄룽빙하 아래로 희미한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입과 코에서 나온 입김으로 만들어진 하얀 성애로 앞가슴 옷자락이 버석거렸다. 코밑 수염에는 고드름이 여럿 매달렸다. 두 눈은 빛을 갈망하고 온몸은 따스한 햇볕을 희망했다.
출발 후 10시간의 운행으로 서쪽 안부로 이어지는 쿨와르를 벗어나 우측 바위지대에 올라섰다. 루트의 난이도는 예상보다 높았다. 한 구간은 90도 수직의 10m 암벽이 떡 버티고 있었다. 캉첸중가는 세계 제2위 봉 K2(8,611m)에 오를 때보다 더 많은 인내와 에너지를 요구했다.
서릉에서 뻗어내린 첫 번째 바위 지릉부터 등반 방식을 달리했다. 속도를 내기 위해서였다. 하나의 줄에 4명을 5m 간격으로 묶고 동시등반을 시작했다. 바람은 없었고 햇빛이 들기 시작했다. 자일로 서로의 몸을 연결해 가파른 바위지대로 진입, 한 발 한 발 고도를 높이며 나아갔다. 차가웠던 체온도 열기로 차올랐다. 걷는 속도에 힘을 더했다.
-
-
바위틈에 박힌 록 하켄(바위에 박는 쐐기)에 매달린, 근래 다른 등반대가 설치했던 로프를 찾아 확보에 사용하기도 했다. 중간 중간 추락을 방지할 새로운 로프를 설치하고 위험한 구간에서는 한 명씩 횡단하며 지나갔다. 오전 9시20분께 2000년 봄시즌 엄홍길·박무택이 정상을 향하다 불시에 비박했다는 8,450m 지점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보통 사용하는 것보다 색다른 노란색 빈 산소통이 하나 있었다.
- ▲ 정상 직전의 바위벽에는 두 개의 하켄과 보라색 코드슬링에 카라비너가 걸려 있다.
-
-
이들은? 출발 13시간여 만에 처음으로 일명 ‘촛대바위(손톱바위)’ 처마 밑에 멈춰 보온병의 뜨거운 물을 한 잔 마셨다. 당초 정상 등정으로 예상한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우리는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베이스캠프와 무전교신을 했다.
23시간30분 만에 안전지대인 마지막 캠프로 귀환
한국은 1987년 부산 대륙산악회를 시작으로 8개 팀이 캉첸중가에 도전, 9명이 정상에 오르고 3명이 사망했다. 팀의 규모로 보아서는 우리 팀이 가장 작다. 이전에 1명이 무산소로 등정한 기록이 있지만 대원 전원이 무산소로 오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산소를 사용하지 않고 오른다는 건 그만큼의 고통을 수반한다.
- ▲ 정상에 오른 서성호(맨앞) 대원과 고소포터들이 강풍이 몰아치자 쪼그리고 앉아 쉬고 있다. 맨 아래 고소포터 왼쪽으로 내려다보이는 봉은 네팔과 인도 시킴의 국경에 솟아 있는 탈룽(7,349m)이다.
-
-
‘촛대바위’부터 서성호 대원이 러셀을 하며 선등했다. 그 뒤로 고소포터 2명이, 그리고 김창호 대원이 후미에서 등반을 주도했다. 산소를 사용하는 고소포터보다 무산소인 서성호의 발걸음이 빠르다. 태양은 따뜻함을 제공하지만 온몸의 진을 쏙 빼앗아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발걸음은 천근만근이 되어갔다. 차츰 주위에 높았던 자누, 탈룽, 카브루 봉이 발치 아래로 머리를 숙인다. 서쪽으로 마칼루, 참랑이 잠깐 나타났다 사라진다.
정상을 향해 우측으로 횡단하자 가파른 암벽이 나타났다. 정상으로 가기 위해 빗겨 나갈 수 없게 생긴 바위 관문을 빠져나가 바로 4m 하강했다. 60여m 우측으로 더 횡단해 천장으로 된 바위 위를 지나자 눈이 흩날려 만들어진 움푹한 분지에 도달했다. 얼굴 높이의 바위에 록 하켄이 2개 박혀 있고 보라색 코드슬링에 카라비너가 하나 걸려 있다. 잠시 숨을 고르자 정신이 맑아왔다.
- ▲ 표고차 1,100여m의 고도를 극복하고 7,550m 마지막 캠프를 출발한 지 17시간25분 만에 김창호·서성호는 무산소로 정상에 섰다. 단단한 설면으로 형성된 정상부 모습. 우측 대원 뒤가 정상이다.
-
-
바위 모퉁이를 우측으로 돌아 오르고 평평한 설사면을 나아갔다. 코발트색 하늘이 스카이라인을 그리며 대원들을 맞았다. 정상이었다. 감격의 순간, 반대편 너머로 우리가 예전에 올랐던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로체·마칼루가, 그리고 부탄과 시킴의 경계를 이루는 6,000~7,000m급 봉우리들이 구름 위에 우뚝 솟아 눈앞에 나타나기를 기대했다.
-
-
하지만 휘날리는 설연과 뿌연 가스로 보이지 않았다. 캉첸중가 주위의 얄룽캉, 중앙봉, 남봉만이 눈앞에 펼쳐졌다. 지평선에 대원들이 선 곳보다 높은 봉우리는 없었다. 4월 29일 오후 1시25분(한국시각 오후 4시40분)이었다. 두 대원은 인공산소의 도움을 받지 않고 영하 30도를 밑도는 혹한 속에서 표고차 1,100여m의 고도를 극복하고 마지막 캠프를 출발한 지 17시간25분 만에 정상에 섰다.
너무 늦은 시각이었다. 이미 6,000m대는 가스로 가득했고 기온은 급강하하고 있었다. 바위지대의 하산은 오르는 것보다 힘들고 위험하다. 가파른 암벽과 설벽은 한 발 한 발에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4명 중 1명이라도 실수하는 순간 모두 어두워진 절벽 속으로 떨어진다. 등정보다 살아 돌아가는 것만이 등산의 미덕이다.
- ▲ 하산 중에 바위 홈통 관문을 다시 오르는 김창호 대원.
-
-
하산은 지루했다. 끝이 없는 미로 같았다. 그렇게 하산 시작 5시간15분 만인 오후 7시30분경 C3에 도착할 수 있었다. 벌써 날이 어두워진 후였다. 마지막 캠프를 출발한 지 23시간30분 만에 상대적 안전지대로 돌아온 것이다.
하행 캐러밴 후 카트만두에 돌아와서 안나푸르나 등반을 준비했다. 장기간의 일기예보와 정보를 수집한 결과 제트기류의 영향으로 강풍이 지속적으로 불고 여름 계절풍 몬순이 일찍 온다는 분석으로 안나푸르나는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 글·사진 2010 다이내믹부산희망원정대 / 월간 산 6월호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