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끝없는 열정으로 알프스 마터호른을 오른 사나이들 *-

paxlee 2011. 1. 18. 17:25

 

              끝없는 열정으로  알프스 마터호른을 오른 사나이들


 

르마트(Zermatt)는 스위스 알프스의 다른 마을처럼 조그마한 산간 마을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주위의 밋밋하고 푸른 초지로 이루어진 산등성이 너머로 완벽한 이등변 삼각형의 뾰족한 봉우리가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다는 것이다. 에드워드 윔퍼는 이 봉우리를 등정하기 위해 여덟 번이나 이곳을 찾았다. 몬테 로자 호텔 앞에서 보이는 마터호른(Matterhorn, 4478m)은 수줍은 처녀처럼 정상 부근을 얇은 구름으로 덮고 있었다.

 

에드워드 윔퍼의 마터호른 초등정

 

윔퍼는 이탈리아의 유명한 산악가이드 장 앙뜨안느 카렐에게 마터호른 등반을 제안하고 함께 등반하기 위해 발뚜르낭쉬로 그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는 다른 등반을 이유로 윔퍼와의 약속을 취소하고 바로 전날 떠나고 없었다. 당시 영국의 산악인들이 이탈리아 피에드몽의 첨봉인 몬테 비소를 초등하자, 이탈리아 산악회는 마터호른 초등반의 영예를 차지하기 위해 카렐을 앞장 세워 마터호른으로 떠난 것이다.

그들의 출발을 알게 된 윔퍼는 초조해진 나머지 유능한 가이드를 고용하기 위해 떼오뒤르를 넘어 쩨르마트로 갔다. 마침 그곳에는 가벨호른을 재등한 프란시스 더글라스 역시 카렐을 고용하기 위해 왔다가 허탕을 치고 윔퍼와 같은 처지가 되었다.

 

 

그들은 페터 타그발더가 마터호른 동벽을 조사하고 왔다는 말을 듣고 쩨르마트에서 그를 고용했다. 몬테 로자 호텔로 돌아오는 도중 윔퍼는 호텔 벽에 기대앉아 있는 그의 옛 가이드 미쉘 크로를 보고 무척이나 반가웠다. 크로는 찰스 허드슨 목사에게 고용되어 마터호른을 등반하기 위해 방금 그곳에 도착한 것이었다. 허드슨은 가이드 없이 새로운 루트를 통해 몽블랑을 등정한 당대의 가장 위대한 아마추어 산악인 중 한 사람이었다. 허드슨을 따라온 더글라스 해도우는 19살의 젊은이로 몽블랑을 최단시간에 등정한 사람이었다. 그는 체력은 좋았지만 산악인으로서의 경험은 별로 없는 풋내기에 불과했다. 윔퍼와 더글라스, 그리고 허드슨은 우연하게도 이곳 쩨르마트의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마터호른 초등이라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만나게 된 것이다.

 

1865년 7월 13일 새벽 5시 30분, 윔퍼와 허드슨, 더글라스, 해도우, 크로, 타그발더, 그리고 짐꾼으로 고용된 타그발더의 두 아들을 포함한 8명은 쩨르마트를 출발했다. 오전 11시 30분, 마터호른 산밑에 도착한 그들은 등반을 시작하면서 푸르겐 빙하나 다른 쪽에서 바라볼 때 등반이 전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곳들이 의외로 뛰어다닐 수 있을 정도로 쉽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3355미터 지점에 텐트를 친 후 크로와 타그발더가 루트 정찰을 나갔다. 세 시간 뒤에 돌아온 그들의 입에서 전해진 말은 등반하는데 전혀 장애가 없다는 기쁜 소식이었다.

 

다음날 아침 날이 밝자 타그발더의 막내아들은 다시 쩨르마트로 돌아가고 그들은 곧바로 출발했다. 등반에는 이상할 정도로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간혹 장애물이 나타났을 때 오른쪽 또는 왼쪽으로 돌아가면 천국의 계단처럼 신기하게도 올라가는 길이 보였다. 대부분의 루트에는 로프가 필요 없었으며, 윔퍼가 앞서 가거나 허드슨이 앞서 갔을 뿐이다.

 

들은 오전 9시 55분에 4270미터 지점에 도달해 50분 정도 휴식을 취한 다음 눈에 덮인 능선을 오르기 시작했다. 오늘날 이 능선 끝의 가파른 벽에는 고정로프가 설치되어 있지만, 당시 윔퍼 등반대는 북벽쪽을 오르기 위해 모든 힘을 쏟았다. 크로는 앞장서서 출발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상당히 조심스럽게 올라야 했으며, 몇 군데는 손잡을 만한 곳이 별로 없었다. 경사는 그리 가파르지 않았지만 울퉁불퉁 튀어나온 바위틈에는 눈이 가득 차 있는 데다 추위로 결빙되어 있었다. 특히 경험이 없는 해도우는 등반에 익숙치 않아 계속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그들은 한시간 반 동안 어려운 지점을 돌파하고 한참 걸으니 눈 덮인 평이한 능선이 나타났다.

 

마침내 등정에 대한 회의와 의심은 사라져 버렸지만 또 다른 두려움이 앞서기 시작했다. 그들보다 이틀 전에 출발한 이탈리아 등반대가 마터호른 정상에 도달했는지는 아직 확실치 않았다. “우리는 정상으로 올라가는 루트에 관해 이야기를 하면서 정상에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는 갖가지 헛된 상상 때문에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가 정상에 접근할수록 흥분은 더욱 심해졌다. 경사는 점점 쉬워졌으며, 마침내 우리는 서로 로프를 풀고 정상을 향해 돌진했다. 오후 1시 40분, 온 세상이 우리 발 밑에 놓였다. 드디어 마터호른을 정복한 것이다. 정상에는 아무런 발자국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 초등정의 보장은 없었다. 정상은 약 100미터 가량 길게 뻗은 평평한 능선이기 때문에 이탈리아 등반대가 다른 쪽 끝에 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윔퍼는 남쪽 끝으로 가서 열심히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의심과 기대감으로 절벽을 내려다보았다. 순간 200미터 아래쪽으로 여러 개의 점들이 보였다. 그는 목이 쉴 정도로 그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으며, 크로는 가지고 온 텐트의 지주 한 개에 셔츠를 벗어 매달았다.

 

“쩨르마트와 뚜르낭쉬, 브레이유에 있는 사람들은 마터호른 정상에 펄럭이는 깃발을 보았다. 브레이유의 사람들은 카렐을 위해 브라보를, 이탈리아를 위해 비바를 외치며 잔치소동을 벌였다. 그러나 다음날 모든 것은 바뀌었으며, 이탈리아 등반대는 슬픔과 좌절 속에 침울한 마음으로 되돌아왔다.”

 

슬픔과 좌절 속의 하산길

 

윔퍼 등반대는 한 시간 동안 정상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승리에 도취했기 때문에 하산시의 안전에 관해 충분한 고려를 하지 못한 듯 했다. 윔퍼는 등반자들의 이름을 병속에 담아 정상에 남기고 타그발더와 로프를 연결한 다음 사람들의 뒤를 따라 내려갔다. 하강 지점에서 그들은 나머지 사람들과 서로 로프를 연결했다. “크로가 먼저 하강한 다음 해도우의 다리를 잡아 주기 위해 피켈을 옆에 놓았다. 그러나 해도우가 미끄러지면서 크로의 비명소리와 함께 둘이 밑으로 떨어졌다. 다음 순간 허드슨이 그들의 발자국을 따라 질질 끌려갔고, 곧 이어 더글라스가 허드슨의 뒤를 따라 끌려 내려갔다.

 

이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크로의 처절한 비명소리를 들은 타그발더와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바위에 몸을 끼웠다. 그들을 연결하는 로프가 팽팽해졌으며 근육의 긴장 속에서 바위를 꽉 잡고 버티었다. 그러나 타그발더와 다글라스를 연결하고 있던 로프의 한 가운데가 갑자기 툭 끊어졌다. 불과 몇 초 동안 우리는 친구들이 미끄러지면서 손을 뻗으며 살아나려고 애쓰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하나씩 하나씩 절벽에서 절벽으로 굴러 내려가며, 1200여 미터나 아래의 마터호른 빙하에 떨어졌다. 로프가 끊어지는 순간 그들을 구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30분 동안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하고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윔퍼가 끊어진 로프를 살펴보다가 등골이 오싹해졌다. 다른 예비 로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타그발더와 더글라스를 연결하고 있던 로프는 그 중에서 가장 약한 것이었다.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난 그들은 오후 6시 기진맥진한 상태로 산밑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들은 그날 밤 어둠 속에서 참담한 심경으로 밤을 지샜으며, 동틀 무렵 마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로써 마터호른 초등과 더불어 알프스의 황금시대가 끝나고 은의 시대가 도래했지만, 그 후로도 정상 등정의 대가는 흔히 피로 얼룩진 경우가 많았다.

 

‘등로주의’ 주창자 알프레드 머메리의 머메리즘

 

‘길이 끝난 곳에서 등반은 시작된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모든 산악인들이 오르고자 열망하는 유명한 봉우리에서는 초등이 끝나는 시점부터 진정한 등반은 시작된다. 그런 면에서 윔퍼에 비해 반 세대 차이가 나는 알프레드 머메리는 같은 시기에 활동한 대표적인 인물이었지만, 등반의 성격은 전혀 달랐다. 윔퍼는 마터호른 초등을 제외하고는 뚜렷한 업적을 보여주지 못했지만 머메리는 등반기술의 개척자인 동시에 현대적인 등반 사상에 한 획을 그은 ‘등로주의’의 주창자였다. 그의 저서 <알프스와 코카서스 등반기>를 통해 영감을 받은 후배 산악인들은 암벽과 빙벽에서 보다 전위적인 등반을 불사르며 등반사에 굵직한 기록들을 추가할 수 있었다.

 

머메리는 그의 나이 17세인 1873년, 몬테 로자를 등반하고 다음 해 마터호른을 등반했다. 1879년 티펜요흐에서 하산하며 쯔무트릉을 자세하게 관찰한 다음 쩨르마트에서 산악 가이드 알렉산더 부르게너에게 마터호른 등반을 제의했다. 그러나 부르게너가 경험 없는 등산가에 대해 불신감을 나타내자, 그는 4일 동안 프레취호른에서 중요한 새 루트를 개척하여 신뢰를 보여주었다.

 

9월 3일 새벽, 그들은 요한 페트루스, 아우구스틴 젠티네타와 함께 쯔무트능의 이빨처럼 생긴 바위까지 올라갔는데, 이곳은 쩨르마트에서 볼 때 하늘 위로 우뚝 솟아 매우 뚜렷하게 보이는 곳이다. 등반 중 가장 까다로운 곳은 쯔무트릉이 끝나는 곳의 횡단 구간으로, 비록 가파르긴 하지만 홀드가 풍부했다. 마침내 오후 1시 45분, 머메리 일행은 안전하게 정상에 도달했다.

 

[마터호른 개요]

높이 4,477미터의 마터호른은 프랑스어로 몽 세르뱅, 이탈리아어로 몬테 체르비노라 부른다. 마르셀 쿠르츠가 일찍이 이 봉우리를 알프스의 오벨리스크라 비유할 만큼 신비롭고 아름답다.

이 신비로움은 쩨르마트에서 보이는 완벽한 이등변 삼각형의 대칭성과 수직·수평의 단순성에 있다. 주 능선은 회른리릉, 츠무트릉, 리온릉, 푸르겐릉의 4개 루트가 있다. 이중에서 프르겐릉은 어려운 편이며 나머지는 비교적 쉬운 편이다.

그 중에서 회른리릉으로 알려져 있는 북동릉이 제일 쉬우며, 윔퍼 일행이 초등한 코스이기도 하다. 반대쪽의 남서릉인 리온릉도 회른리릉과 난이도가 비슷하여 많은 사람이 찾는다. 난이도가 조금 높은 루트는 북서릉의 쯔무트릉으로 길이는 3킬로미터, 평균 경사도는 37도이며 마터호른에서 유일한 만년설의 설릉이다.

이 능선을 초등한 사람이 등로주의를 주창하며 등산사에 하나의 획을 그었던 머메리다. 남동릉인 푸르겐릉은 길이가 1.7킬로미터에 불과하지만 평균 경사도는 43도이며 직등 부분은 난이도 Ⅵ급의 기술을 요구한다.

 

그에 앞서 윌리엄 펜홀과 그의 가이드들이 먼저 쯔무트릉을 시도했지만 폭풍으로 하산하는 도중 등반을 위해 올라오는 머메리 일행을 만났다. 마을로 돌아온 펜홀은 날씨가 좋아질 것이라는 예상으로 급하게 식량을 꾸려 밤 10시, 다시 쯔무트릉을 향해 떠났다.

펜홀이 시도한 곳은 머메리 루트보다 직선적인 루트였지만 한 시간 늦게 정상에 도달해 초등의 영광은 머메리에게 돌아갔다. 3일 후 바우만이 두 명의 가이드를 대동하고 매우 빠른 속도로 머메리 루트를 재등했다. 이로써 3일 동안 3명의 아마추어 산악인과 6명의 가이드가 마터호른 쯔무트릉을 등반했는데, 그들 중 7명은 후에 각기 다른 산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다음 해인 1880년 머메리는 마터호른의 콜 뒤 리온을 처음으로 횡단하고 에귀 뒤 샤르모즈를 초등했다. 1881년에는 수직의 화강암벽인 그레뽕을 초등하며, 암벽등반의 새로운 기준을 확립하는 동시에 ‘머메리즘’을 추구하여 같은 시대의 산악인들보다 한 발 앞서 나갔다.

그는 1888년 코카서스를 방문하여 디치타우(5198m)를 초등했으며, 1895년 파키스탄 히말라야의 낭가파르밧을 시도하던 중 행방불명되었다.

마터호른 등반에 관해 이야기를 하자면 모두 초등자의 이름과 결부되어 있다. 즉 마터호른 초등은 윔퍼, 리온릉은 카렐, 쯔무트릉은 머메리, 북벽은 슈미트 형제가 각각 기억된다.

 

그러나 한 가지 예외가 있는데, 그것은 푸르겐릉으로 초등자인 마리오 피아첸자와는 별로 관계가 없고 오히려 정상 못미처 등반에 실패한 귀도 레이와 깊은 연관이 있다. 우리가 그를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의 저서 <일 몬테 체르비노> 때문일 것이다. 그 책은 산에 대한 사랑을 감동적으로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등반사적으로 귀중한 가치를 담고 있다. 그는 이탈리아인으로는 처음 메이제를 등반했으며, 당시 매우 어려운 등반으로 인식됐던 그레뽕과 드류를 비롯해 돌로미테의 수많은 봉우리들을 등반했다.

 

보나티의 북벽 동계 단독초등

 

마터호른에서 윔퍼의 초등에 못지 않은 위대한 등반을 꼽으라면 단연코 슈미트 형제의 북벽 초등과 발터 보나티의 북벽 동계 단독초등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1931년 7월 말경 토니 슈미츠와 프란츠 슈미츠 형제가 뮌헨에서 자전거를 타고 며칠을 걸려 쩨르마트에 도착했다. 그들은 쉬타펠알프에서 야영을 하고 마터호른 빙하의 세락을 거쳐 북벽으로 통하는 루트를 탐색했다. 7월 31일 새벽 2시, 회른리 산장에 도착한 그들은 이미 탐색한 루트를 따라 낙석으로 홈이 파인 사면을 올라갔다.

 

낙석의 위험을 피하고 가파른 경사의 빙벽을 빨리 오르기 위해 스텝을 만드는 대신 10발 짜리 크램폰을 사용했다. 오늘날의 아이젠과는 달리 완벽한 밸런스, 고도의 체력과 인내심을 요구하는 힘든 등반이었다. 7월의 철 이른 폭설에 시달리며 어려운 침니와 짧은 빙벽이 있는 걸리 상단부의 슬랩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하루종일 바위와 빙벽을 오르느라 그들의 손은 피투성이가 된데다 추위에 얼어 갔다. 저녁 8시 30분이 되서야 간신히 비박을 할 수 있는 렛지를 찾아냈는데, 그것은 사방 1미터 넓이의 연단 같은 작은 바위였다.

 

다음날 아침 7시 다시 등반을 계속하여 북벽 상단에 도달했다. 갑자기 날씨가 나빠지면서 차디찬 안개가 절벽으로 몰려왔다. 그들이 눈 덮인 크랙을 올라가는 동안 우박을 동반한 바람이 무섭게 얼굴을 때렸다. 8월 1일 오후 3시, 그들이 정상에 도달했을 때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폭풍은 절정에 이르렀지만 이제 그들은 고정로프를 따라 내려가기만 하면 되었다. 하강하는 동안 우박과 눈이 비오듯 쏟아졌으며, 그들은 완전히 탈진한 상태에서 솔베이 산장으로 대피했다. 손가락은 얼어서 오랜 시간이 걸려 겨우 로프를 풀 수 있을 정도였으며, 옷은 갑옷처럼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끝까지 살아 남은 위대한 산악인 월터 보나티

 

1953년 3월 20일, 월터 보나티와 로베르트 비그나니는 영하 25도의 혹한 속에서 마터호른 푸르겐에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며 동계 초등을 이루었다. 그리고 마터호른 초등 100주년이 되던 1965년 보나티는 북벽 다이렉트 루트를 따라 동계 단독등반을 감행했다. 배낭이 너무 무거웠기 때문에 그는 먼저 올라간 다음 로프를 고정시키고 내려와서 배낭을 가지고 다시 올라갔다. 그는 북벽을 두 번이나 등반한 셈이 되었다.

 

등반 3일 동안 기온은 때로 영하 30도까지 내려가서 추위로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는 총 94시간을 북벽에서 보낸 다음 2월 22일 오후 정상에 도달했다. 그는 이 등반을 끝으로 단독등반을 포기했는데, 그것은 어느 정도 운이 따라 한동안 등반을 계속할 수 있겠지만, 결국에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과 같다고 했다. 월터 보나티는 현대 등반사에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긴 훌륭한 산악인이지만, 다른 유명한 산악인들보다 더욱 위대한 점은 끝까지 살아 남았다는 점이다.

 

                        - [글 / 정갑수 편집위원 사진 / 사람과 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