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의 다양한 문화

-* [만병통치 등산 | 질병극복 체험사례 [2]] *-

paxlee 2011. 1. 25. 10:41

                   [만병통치 등산 | 질병극복 험사례 [2]]

허리 디스크와 위궤양·시력저하를 등산으로 이겨낸 변동주

 

해군 대령 퇴임 후 찾아온 위기, 산에서 해법을 찾다

“지방에서 33년간 직업군인 생활을 마감하고 서울 본가에 돌아와 사회생활을 하려니, 가정이나 사회에 적응하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15년 동안을 진해에서 혼자 살았지요. 합가하니 아내는 아내대로 자기 생활이 있어 익숙해지기가 어려웠어요. 사회는 군대와는 양상이 전혀 달라 적응하는 데 몇 년 걸렸지요.”

변동주(73)씨는 해군 대령으로 예편했다. 해군사관학교 축구부 주장을 했을 정도로 운동을 잘했고 열정도 컸다. 해군 출신이라 바다를 좋아할 것 같지만, 해상근무만 10년을 해서 “바다는 아예 지긋지긋하다”며 스스럼없이 말한다. 보통은 해상근무 5년 정도가 관례인데, 그는 소위 ‘빽’이 없어 10년을 근무했다고 한다. 덕택에 그 청렴함을 인정받아 해군감찰반에 근무하며 암행어사 같은 역할을 했었다고 한다. 1986년 퇴임 후에는 해군 정비창 공장장으로 부임해 1994년에 퇴직했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1,000여 개의 산을 올랐다고 한다.

고령에도 만능 스포츠맨에 꾸준한 운동으로 근육질의 몸을 유지하고 있었던 그였지만 퇴임 후 환경이 바뀌자 몸은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했다. 일상생활에 적응이 안 되다 보니 제일 먼저 고장 난 것은 눈과 위였다. 스트레스로 인해 시력이 떨어져 안경을 쓰게 되었고, 위궤양과 허리 디스크가 동시에 찾아왔다. MRI 촬영 결과 허리척추 3번과 5번 디스크 판정으로 수술을 예약했다.

“수술할 날짜까지 다 잡아뒀는데 친하게 지내던 신경외과 의사가 디스크는 수술을 하면 재발 가능성이 많다고 절대 수술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등산을 권하더라고요. 그때부터 산에 다니기 시작했어요.” 집에서 가까운 남한산성을 시작으로 그는 북한산, 도봉산 같은 근교산 위주로 부지런히 올랐다. 그렇게 1년이 지나자 “위장이 완치되고 안경 벗고 산행을 해서인지 눈도 맑아지고, 펴지도 못할 정도로 안 좋았던 허리의 통증이 싹 없어졌다”고 한다. 그는 이 모든 걸 등산의 효과로 여긴다.

“1995년부터 지금까지 거의 일주일에 3일은 산에 갑니다. 오랫동안 피우던 담배를 몇 년 전에 끊었어요. 산행 시작해서 몸이 풀리려면 60대에는 30분, 70대에는 1시간은 지나야 몸이 풀렸는데 담배 끊고 나서부터는 30분만 땀 흘리면 숨도 안 차고 오래 걸어도 지장이 없어요. 폐활량이 좋아져서 그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대령으로 예편한 군인 출신답게 변동주씨는 산행 시작 전에는 늘 준비운동을 하고 산에서 먹을 음식도 손수 준비한다. 꿀을 넣어 갈아 만든 생과일주스와 온갖 재료를 아낌없이 넣은 특제 샌드위치가 그것이다. 일행들의 도시락도 손수 준비하며 본인이 운전해 일행들을 산에 태워주기까지 한다. 이에 대해 그는 “나이 들어, 베풀고 사는 게 낙”이라며 “산에 가면 잡념이 없어지고, 그렇게 좋을 수 없기 때문”이라 한다. 그는 나이에 걸맞지 않는 장거리 산행도 무리 없이 소화해 왔다.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시작한 등산이 벌써 15년이 넘었네요. 그동안 1,000개 산을 돌파했으니 산이 내 인생을 바꿔놓은 셈입니다. ‘재산을 잃으면 작게 잃은 것이요, 명예를 잃으면 많이 잃은 것이고, 건강을 잃으면 전부를 잃은 것이다’라는 말처럼 건강하게 사는 게 제일 행복한 겁니다. 나이 들어서 열심히 산에 가는 게 오래 살려는 게 아니에요. 건강하게 살고 싶어서 그런 겁니다.”

변동주씨는 지금도 허리 디스크가 완치된 건 아니다. 그러나 나름의 허리근육 강화 운동을 개발해 끊임없이 땀방울을 흘린 끝에 고통을 극복할 수 있었고, 지금도 산행과 허리운동으로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1년에 두 번씩 건강검진을 하고 있는데 73세라는 나이에도 혈압이나 당뇨가 전혀 없고 등산을 시작한 이래 감기에 걸린 적이 없을 정도라고 한다.

<월간산>을 비롯한 여러 등산잡지를 10년 넘게 정기구독할 정도로 등산마니아인 그는 “전에는 책에 나온 좋다는 산은 전부 다니고 무명산 개척산행도 하고 장거리 종주도 했다”고 한다. 지금은 나이가 있어 서울 근교산행 위주로 하고 있다. “이젠 산에 안 가면 몸이 아프니, 산에 갈 수밖에 없다”는 변동주씨다.

바위의 기운으로 말기암 극복한 이만방 숙명여대 교수

“바위에 매달려 있을 때의 집중력과 땅의 기운이 저를 살렸습니다

이만방(李萬芳·65·숙명여대 작곡과) 교수는 대한민국 국제음악제는 물론 타 국제음악제에서 여러 차례 입상한 바 있고,‘세계음악사’에 기록될 만큼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작곡가다. 정년을 몇 달 앞두고도 국내외 음악 강좌 때문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는 한때 건강 때문에 좌절할 뻔한 적이 있다. 독일 국가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독일에서 음악 공부를 마친 뒤 1983년부터 숙명여대 음대에 재학해 온 이만방 교수는 음악계에서 승승장구하던 1995년 여름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석 달간의 연주여행 스케줄에 맞춰 미국 샌프란시스코 음악제에 참가한 그는 짬을 내어 미국에서 사는 누나 집을 방문했다. 혈색이 좋지 않은 동생의 건강을 걱정한 누나의 권유로 받은 건강검진에서 위암 진단이 나왔다. 내시경수술로 떼어낸 암세포로 조직검사를 한 결과 수술한다 해도 2년밖에 살 수 없고, 그것도 가능성이 20%밖에 안 된다는 진단이 나왔다.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요세미티에 갔어요. 엘캐피탄을 마주하는 순간 울컥해졌어요. 아내와 딸들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마음이 착잡해졌고요. 죽는다는 생각은 안 들었어요. 멀쩡해지면 엘캡이나 하프돔을 실컷 올라야겠다고 다짐했으니까요.”

1995년 9월 15일 수술을 마친 뒤 100일 되던 날 귀국한 이 교수가 거울 앞에 섰을 때 그의 모습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유태인 같았다. 하루하루 불안했다. 수술 부위가 터질까 염려스러워 볼펜을 집을 때에도 조심했다. 죽음에 대한 상상을 떠올릴 때면 괴로웠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이렇게 죽음을 기다리느니 좋아하던 산이라도 실컷 다녀야겠다고 마음을 바꿔 먹었다.

1996년 말 구기터널에서 비봉까지 올랐다. 1시간이면 오르던 비봉이 4시간이나 걸렸다. 온몸에서 시체 썩는 듯한 냄새가 났고, 지나가는 등산객이 걱정할 만큼 얼굴이 창백했다. 이듬해 2월에는 하산 길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119구조대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래도 그는 산행을 멈추지 않았다. 수술 당시 주치의가 예견한 생존기간을 반쯤 남겨놓은 1996년 봄 북한산 산길을 오르던 이 교수는 더 큰 결심을 했다.

“인수봉 의대길을 오르는 클라이머가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어요. 그 때 결심했어요. 1년 뒤 죽을 확률이 2,000%가 넘는다 해도 꿈을 꼭 실현해야겠다고.”

항암치료가 막 끝난 1996년 6월 8일 북한산 수리봉 기슭에 다가섰다. 텐트 한 동을 쳐놓고 아침부터 해 질 때까지 바위에 매달려 살았다. 식량이 떨어질 때 외에는 집에 내려가는 일이 없었다. 너무 지독하게 바위에 집착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던지 ‘수리봉 한 대장’이라 불리는 고(故) 한중희씨가 다가와 “꾸준히 오래 할 건지 아니면 짧고 화끈하게 할 건지 알아서 잘 결정하라” 충고해 주었다.

“1980년대 중반 산에서 만난 노인한테서도 비슷한 말을 들었어요. 건강을 위해 막 산을 다니기 시작할 때였어요. 꼭 육상선수들 훈련하듯 산행하는 제 모습에 ‘산과 원수 졌느냐, 자연에 빠지기도 하고 산과 대화를 나눌 줄도 알아야 한다’고 충고를 해줬어요. 한 대장 말대로 마음가짐을 바꾸니까 암벽등반이 재미있어졌어요. 즐거운 마음으로 바위를 타니까 암 환자라는 사실도 잊게 됐고요. 의대길 꿈은 석 달 만에 이뤘어요. 하루에 세 코스를 등반할 수 있을 정도로 체력도 좋아졌고요. 모르실 거예요. 오줌이 찔끔찔끔 나오는 줄도 모르고 지내다가 아침에 일어났을 때 아랫배가 불끈해 오는 기분을 말이에요. 그때부터 삶에 희망과 용기를 갖게 되었죠.”

1998년 암벽등반을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에 코오롱등산학교를 나온 이만방 교수는 2003년 톱로핑 하강을 하다 확보자가 로프를 제대로 잡아주지 않는 바람에 무려 20m나 추락하는 사고를 당해 한 달간 치료를 받았고, 이후 2년간 음대학장으로 지내는 동안 업무에 바빠 흐트러진 몸을 다듬기 위해 실내암장에서 운동을 하다 어깨근육이 파열돼 6개월쯤 산을 다니지 못한 적을 제외하곤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암벽에 몰입하며 지내왔다. 단지 3년 전 또다시 확보 때문에 사고를 당한 이후 선등은 서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2년 전 아끼던 장비를 후배들한테 나눠주었어요. 장비를 가지고 있으면 자꾸 선등 서려고 욕심낼 것 같아서요. 지금도 암벽등반을 통해 암을 이겨냈다고 확신해요. 텐트에서 지내는 사이 땅에서 좋은 기운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집중을 통해 암을 이겨낸 것 같기도 하고요. 등반할 때 몇 센티미터 떨어진 홀드를 잡으려면 엄청 집중해야 하잖아요. 그런 몰입의 순간이 반복되는 사이 독한 암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키워졌던 것 같아요. 땀을 흘리는 사이 몸 안의 나쁜 기운을 밖으로 빼낸 것 같고요. 그래서 암으로 고생하는 분이 있다면 지금 당장 바위로 달려가라고 권하고 싶어요.”

이만방 교수는 “병을 앓고 나서부터 세상을 다시 보게 되었고, 음악뿐 아니라 가족과 아내, 나와 친지들 그리고 친구와 주위 환경 모든 것이 하늘의 은혜임을 알게 되었다”며 “이 또한 산을 통해 건강을 회복했기 때문에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허리 디스크와 신경성 두통 등산으로 치료한 정정선·이향순씨 부부

“울릉도에서 성인봉을 오르며 새로운 삶 찾아”

“약국을 차려도 될 정도로 여러 종류의 약으로 넘쳐났죠. 저는 허리 디스크 협착증 판정을 받았어요. 병원에서 물리치료를 해보고 차도가 없으면 수술을 받자고 해서 하루 걸러 허리와 무릎에 물리치료를 받았습니다. 아내는 신경성 두통과 위염으로 약을 달고 살았고요.”

정정선(62)씨는 직장 생활 38년을 출·퇴근하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단조로운 일상생활로 보냈다. 벗어나고픈 마음은 있었지만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랜 직장생활로 남은 건 디스크 협착증과 관절염이었고 그의 부인 이향순(50)씨도 신경성 두통과 위염으로 몸과 마음 모두 말이 아니었다. 이때 전화위복처럼 일상에서 탈출할 기회가 주어졌다. 교직에 몸담고 있었는데 울릉도로 발령을 받은 것이다.

울릉도는 경사가 심했다. 집에 올라가는 길도 20도는 충분히 되는 오르막이었다. 집에서 오르내리는 길도 힘들었기에 등산을 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용기를 내서 산에 나물을 캐러 가게 되었다. 막상 산에 가서는 흐드러진 나물에 취해 허리 아픈 줄도, 다리가 아픈 줄도 모르고 산을 헤집고 다녔다. 그날 저녁 통증이 심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편안하게 잠을 잤다. 이후 몇 번 나물을 캐러 다녔지만 아프다거나 병이 더 도진다는 기분을 느끼지 못했다. 이들은 부부가 늘 함께 산을 올랐다. 덕택에 부부 금실도 좋아졌다고 한다.

“우리 부부는 산행 할 때 서두르지 않아요. 오르막길은 힘 있게, 내리막길은 천천히, 평지는 한결같은 보조로 느긋하게 걷죠. 나무에 눈을 맞추어 대화도 나눠 보고 풀과 꽃의 향기에 취하면서 개울물이 있으면 발을 담그며 도란도란 살아온 날을 이야기하다 보면 부부의 정이 오롯이 살아납니다.”

자신감을 얻은 정정선씨는 이사한 지 몇 개월 지난 2007년 5월, 성인봉을 오른다. 성인봉의 시원한 경치와 걷는 맛에 빠진 정씨 부부는 악천후를 제외하고는 사계절 매주 성인봉을 올랐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3년째 접어들자 관절염이 심했던 무릎과 통증으로 제대로 펴기도 힘들었던 허리도 아프지 않게 되었다. 체중도 점차 줄어들어 지금은 10kg을 감량했다.

부인 이씨도 두통약과 위장약을 먹지 않는다고 한다. 무릎이 부은 상태로 울릉도에 들어왔는데 부기가 다 가라앉았다고 한다.

“산행에 매료되다 보니 우리 부부는 가지고 있던 병을 모르고 생활했습니다. 아픈 줄도 모르고 약 먹는 것도 잊어버렸지요. 더 이상 물리치료를 받거나 약을 복용하지 않아요. 공기 좋고 물 좋은 울릉도에서 한 등산이 바로 만병통치약이었어요.”

정정선씨 부부는 울릉도에서 생활한 지 4년이 되었다. 이미 정년퇴임을 했지만 울릉도가 좋아 그대로 눌러 살고 있다.

맨발 등산 6개월 만에 협심증 고친 정태륭씨

“일반 산행에 비해 두 배 이상 효과 있다!”

 
정태륭(鄭泰隆·66)씨는 지병이던 협심증을 등산을 통해 고쳤다. 특이한 것은 그가 선택한 산행 스타일이 맨발이라는 점이다. 맨발 보행이 건강에 좋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상식이다. 맨발로 흙길을 걷다 보면 병세가 호전되는 것은 물론 전체적인 신체의 컨디션까지 좋아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씨는 산책 수준 이상의 고강도 산행을 맨발로 즐기는 독특한 등산광이다.

“건강한 체질인 데다 글을 쓰는 직업이라 젊었을 때는 술과 담배를 많이 했던 편입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습관적으로 지내다 보니 몸에 이상이 왔습니다. 비만은 기본이고 허리 디스크, 불면증 등 여러 가지 질병이 한꺼번에 닥쳤습니다. 가장 심각했던 부위가 심장으로, 협심증이 심해 잦은 통증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1995년, 그는 맨발 등산을 시작하며 오랫동안 고통받던 만성질병에서 빠져나오는 탈출구를 찾았다. 그가 맨발 보행을 시작한 계기는 의사의 권유 때문이었다. 발은 ‘제2의 심장’이라는 별명을 지닐 정도로 혈액을 심장에 되돌리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발바닥에는 인체의 모든 신경망이 집결돼 있어 발바닥을 자극하면 면역이 강화되어 자연치유력이 높아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정씨는 맨발 보행을 시작하며 지병이던 협심증이 완전히 치유됐고, 거의 동시에 위궤양, 디스크 수술 후유증에 의한 통증과 불면증, 변비 등 고질병들이 사라졌다. 망가졌던 몸이 건강했던 상태로 돌아온 것이다.

“처음에는 집 근처의 관악산산림욕장에서 맨발 걷기를 시작했어요. 몸이 온전치 않으니 산을 오르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죠. 무리하면 오히려 독이 된다는 말을 들었던 터라 조금씩 거리를 늘려갔습니다. 하지만 맨발로 산을 오르는 일은 쉽지 않았어요. 발바닥이 아파 조심스럽게 걷다 보니 쉽게 피로를 느꼈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적응이 됐고, 6개월 만에 협심증으로 인한 가슴 통증이 사라졌어요. 병원에서 검사를 해보니 거짓말처럼 병세가 좋아졌습니다.”

그는 맨발 보행의 효과에 고무되어 좀더 적극적인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산림욕장을 벗어나 관악산을 넘나드는 코스를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바위가 많은 험한 코스를 맨발로 걷는 일은 많은 위험이 따른다. 처음에는 돌출된 돌과 나무뿌리에 찍혀 상처를 입는 일도 잦았다. 엄지발톱이 성할 날이 없었고, 심지어 통째로 빠져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위험도 그를 막지 못했다. 건강을 되찾고 유지하는 비법으로 맨발 등산이 최고라는 굳건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산을 오르는 것 자체가 건강에 큰 도움이 되지만, 맨발 등산은 평범한 등산보다 운동효과가 두 배는 될 것입니다. 혈액 순환을 왕성하게 하고 오장육부의 건강을 돕습니다. 두통이나 변비로 고생하는 분들은 곧바로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남성의 경우 발기부전의 치료효과가 놀라울 정도로 두드러집니다. 맨발 등산이 주는 효과는 이처럼 무궁무진합니다.”

맨발 등산의 좋은 점은 이미 여러 사람의 체험을 통해 널리 확인됐다. 하지만 아무나 도전할 수 없는 것이 맨발 등산이다. 등산화를 착용할 때와 비교하면 같은 코스를 가도 산행강도는 1.5~2배에 달한다. 그만큼 힘이 든다. 걷는 동안 언제나 긴장해야 하고, 시간이 지나면 발바닥의 통증도 점점 심해진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도 맨발을 피하게 되는 원인이다.

“건강에는 큰 도움이 되지만, 맨발 등산은 발을 다치는 위험이 높은 것이 문제죠. 게다가 미친 사람 보듯 하는 사람들의 시선 역시 따갑습니다. 그래서 발바닥만 드러나게 만든 전용 등산화를 개발해 특허까지 출원했어요. 부상 방지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한 궁여지책이었습니다.”

요즘도 그는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일주일에 몇 번씩 관악산 등에서 맨발 등산을 즐기고 있다. 그는 “인간의 발은 흙길을 걷는 데 알맞게 진화된 신체 부위”라면서, “맨발로 걸으면 발과 흙이 자연스럽게 교감하며 누구나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고 말한다.

정태륭씨는 1944년 인천 출생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소설가다. 지금까지 그는 <인간면허>, <사냥시대> 등 7권의 소설집을 출간했다. 최근 그는 근대사에 기초한 작품을 집필 중이다.
                                   - 월간 산 1월호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