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한국 히말라야 등정 의혹 약사 정리 [2] *-

paxlee 2011. 2. 25. 10:36

등정 의혹 쏠린 허영호의 1989년 로체 등반


1989년 가을 허영호(35) 대장은 단독으로 로체 등정에 성공했다고 발표한다. 당시 국내 최초로 8,000m급 봉우리에서 야간 단독등반을 감행했다는 점에서 크게 평가됐다. 부인과 아들(5)을 데리고 가족원정대를 꾸린 허영호 대장은 사진작가 성동규(40)와 합류해 등반에 나섰다.


몇 번의 고소적응 등반 끝에 10월 13일 오전 9시 단신으로 캠프2(6,500m)를 출발한 허 대장은 로체 페이스에 설치된 캠프3(7,300m)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수면을 취한 후 오후 8시경 출발해 야간등반을 감행, 7,600m 록 밴드부터 산소를 사용하며 다음날 새벽 4시경 정상에 섰다. 정상에서는 날이 밝지 않아 사진 촬영을 하지 못하고 곧바로 하산, 오전 8시경 캠프3를 거쳐 오후 2시경 캠프1로 내려왔다.

▲ 1989년 가을 해발 7,300m 지점의 캠프3에 오른 허영호. 그는 한밤중의 등정으로 정상사진을 찍지 못한 채 아들의 장난감만 정상에 묻고 하산했다고 주장했다.

1987년 에베레스트 동계 등정에 이후 2년 만에 이루어진 그의 로체 등정은 좀더 진보된 등반방식을 택했다는 점에서 산악계의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이 등정은 이듬해에 몇 가지 의문이 공개적으로 제시되면서 시비에 휘말린다. 당시 대한산악연맹 김병준 이사는 ‘야간에 7,300m 제3캠프에서 8,516m 높이의 정상에 이르기까지 표고차 1,216m 높이를, 그것도 7,800m 이후 러셀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고산을 8시간 만에 올랐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허영호의 로체 등반에 이의를 제기하는 글을 대산련 계간지 ‘산악인’(1990년 봄호)에 기고했다.


이에 허영호는 ‘등반 당일 날씨가 좋았고 루트가 어렵지 않아 야간등반에 전혀 문제가 없었으며, 등반시간에 대한 의혹부분에 대해서도 그 루트로는 너무나 당연한 시간임’을 강조하고, ‘고산에서의 경험이 많은 사람은 눈의 상태를 이용해서 등반시간을 얼마든지 단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근래 대부분의 국내 로체 등정자들은 허영호의 로체 등반에 대해 고개를 가로젓는다. 보통 러셀이 잘 돼 있고 고정로프가 설치된 상태에서 캠프3(7,300m)~캠프4(7,800m) 구간에서 3~4시간, 캠프4~정상 구간은 7~8시간 이상이 걸리므로 아무리 체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캠프3에서 정상까지는 10~12시간 이상이 소요된다는 주장이다.


이미 2007년 에베레스트 남서벽에서 고인이 된 고 오희준(30)의 등반능력은 가히 허영호와 버금간다는 것이 국내 산악계의 평이다. 그는 2001년 박영석팀의 대원으로 로체 등정에 성공했다. 당시 오전 1시15분 캠프3(7300m)을 출발, 14시간30분 만인 오후 3시45분 정상에 섰다. 그도 산소를 사용했고 시즌 초등으로, 허영호와 똑 같은 조건이었다.


그리고 고 오희준과 등반능력이 버금간다는 부산연맹팀의 김창호(38), 서성호(28)의 경우, 허영호의 출발지점보다 500m 높은 7,800m의 캠프4에서 정상까지 7시간45분이 걸렸다. 이들은 전날 한국의 4개 팀이 시즌 초등하면서 러셀과 고정로프 설치를 마쳐둔 덕분으로 수월하게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고 한다. 단지 무산소로 올랐다. 이들은 정상에서 1시간가량 머문 뒤 캠프4, 캠프3을 거쳐 4시간 만에 캠프2(6,500m)까지 하산할 정도로 당시 컨디션은 최고였다.


그런데 자기 주장대로라면 부산연맹팀보다 약 1.5배의 속도로 정상에 올랐다는 허영호는 캠프3(7,300m)까지 하산하는 데 4시간 소요됐다(부산연맹팀은 2시간 15분 소요). 등정 당시 왼쪽 눈의 이상으로 하산이 늦었는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있지만 대부분 그의 등정을 믿을 수 없다는 분위기다.


1989년 정상용의 에베레스트 서릉 등정은 믿기 어려워


허영호의 로체 등정과 함께 1989년의 등정 중 가장 관심을 끌었던 원정대는 에베레스트 서릉 등반대다. 한국산악회 소속 이석우(36) 대장을 비롯한 11명의 대원들로 구성된 전국 합동대는 1989년 10월 23일 오후 2시30분 정상용(26) 대원과 두 명의 고소포터가 서릉 직등 루트를 통해 정상을 밟고 다시 서릉을 통해 하산했다고 네팔 관광성에 보고함으로써 이 경이적인 등정소식이 세상에 알려졌다.


한국대의 서릉 직등루트 등정이 사실이라면 놀랄 만한 기록이었다. 에베레스트 최난의 루트로 등정한 것도 그렇지만, 그 길로 하산했다는 보고가 산악계를 더욱 놀라게 했다. 이때까지 등정에 성공한 외국대도 그 루트의 어려움으로 인해 하산 도중 실족했거나 아예 정상에서 노멀루트인 남동릉으로 우회해 하산했기 때문이다.


등정 소식을 가지고 카트만두에 먼저 도착한 이석우 대장은 홀리 여사를 만났다. 한국 원정대에 대해 부정적인 선입관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그의 성공담을 믿지 않고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녀의 상식으로는 한국대가 서릉 루트로의 성공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본대가 카트만두로 나온 후 고소포터들로부터 등정 소식을 전해 듣고서야 ‘금세기 최고의 등반’이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국내 산악계도 원정대장을 제외한 모든 대원들이 히말라야 초행자이기에 그들의 쾌거에 찬사를 아끼지 않으면서도 이 엄청난 결과에 대한 의구심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귀국 후 원정대가 제시한 사진에 나온 정상은 이미 여러 팀의 수많은 산악인이 올라 너무나도 낯익은 세계 최고봉의 정상은 아니었다. 에베레스트 정상은 두 사람이 서고도 평평한 설면이 많이 남아 있는 사진 속의 그곳이 아니라는 것이 앞서 등정한 사람들의 증언이었다. 무엇보다 최고 난이도 5급 정도의 서릉 상단부를 어떻게 올라갔으며 어떻게 내려 왔는가에 대한 원정대의 구체적인 정황 설명이 없자 이 등정에 강한 의혹이 쏠리게 된다.


이에 대해 이석우 대장은 정상 파노라마 사진을 갖고 있으며 마땅한 기회가 있다면 공개하겠다고 말했으나 그 사진은 공개되지 않았다. 국내외 산악계는 이 팀의 등정은 여러 정황증거로 보아 미등정으로 보인다고 결론 내렸다.


1991년 낭가파르바트, 동료 대원들이 등정 의혹 제기


1991년 여름 서울 은정산악회가 주축이 된 한국-홍콩 합동대가 낭가파르바트(8,125m) 서면(디아미르벽) 킨스호퍼 루트에 도전한다. 최초로 홍콩 산악인과 합동으로 꾸린 한국-홍콩 합동대는 김형주(35) 대장 등 8명의 한국 대원과 곽감홍(31) 부대장을 비롯한 4명의 홍콩 산악인이 참가했다.


폭설과 이상기온으로 40일 이상을 고전한 끝에 1,000m에 이르는 급경사의 설벽과 대암벽 지대를 돌파, 마지막 캠프(7,500m)를 설치하면서 정상 공략을 위한 준비를 모두 마친 원정대의 김형주 대장과 홍콩인 곽감홍 부대장, 창푸이룬 대원이 8월 6일 새벽 4시 정상공격에 나섰다. 이들은 무릎까지 빠지는 심설을 러셀하느라 체력을 많이 소모한 데다가 정상에 이르는 루트를 찾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바람에 7,900m 지점에서 되돌아섰다. 캠프4로 돌아온 이들은 알파미 한 봉지를 나누어 먹으며 악천후 속에서 3일간을 버틴 끝에 9일 오후 7시30분경 두 번째 정상 등정을 시도, 밤새 등반한 끝에 정상에 올랐다고 발표했다.

▲ 한국-홍콩 합동대가 눈내리는 새벽에 올라 촬영했다고 자랑하며 공개한 낭가파르바트 등정 사진. / 낭가파르바트 서면 디아미르벽 전경.

1988년이래 한국인에게 여섯 차례나 패배를 안겨주었던 낭가파르바트의 등정소식은 1991년도 히말라야 등반 중에서 가장 뛰어난 성과로 꼽혔다. 그러나 놀랄 만한 등정에 대한 의혹이 함께 등반에 참여했던 대원들이 등정을 부인하고 나섰다.


김 대장 일행의 등정을 믿지 않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함께 등정한 홍콩인들의 체력과 고소적응 상태가 다른 한국대원들보다 못했는데도 1차 등정에 실패한 후 하산하지 않고 7,500m 고도에서 3일간이나 머물고도 다시 정상 등정을 했다는 점, 둘째 정상 200m 전부터 정상을 다녀올 때까지 전혀 무선교신을 하지 않은 점, 셋째 굳이 야간등반을 택해 확실한 등정 사진을 촬영하지 않은 점 등이 그 이유였다.


이에 대해 김 대장은 “등반에 불만을 품은 몇몇 대원이 퍼트린 소문에 불과하다”며 “홍콩 산악인들이 기술적으로는 한국 대원보다 뒤졌지만 끈기가 있고 등반에 대한 열의가 더 강해 등정에 성공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후 여러 정황과 증거미비로 등정 의혹을 불러일으키다가 이듬해 등정한 한국 팀들에 의해 거짓으로 밝혀져 한국 산악인들의 안타까움을 샀다.

 

논리적 대응 않고 등정 주장만 되풀이하는 무모함 여전


1992년 가을 조선대산악회는 1972년 봄 마나슬루 원정에 참가했다가 눈사태로 사망한 오세근 대원의 20주기를 맞아 그의 추모등반으로 마나슬루에 도전한다. 원정대는 9월 25일 오후 6시 이영출 대원과 고소포터 나왕 푸르바 셰르파가 북동벽 루트로 마나슬루 등정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한국대가 등정한 3일 후 폴란드-이탈리아 합동대(대장 크리스토프 비엘리스키)가 북동릉 변형루트로 등정에 성공한 후 한국대의 등정 의혹을 제기한다. 등정자 중의 한 사람인 이탈리아인 마르코 비안치(Marco Bianchi)는 홀리 여사와의 인터뷰에서 “한국팀이 오른 봉우리는 주봉에서 북쪽으로 약 500m 못 미치는 곳으로 그 주위에는 주봉보다 50~80m 낮은 봉우리가 많으며 그 중 한 봉우리를 올랐다”고 주장하면서 발걸음이 멈춰진 곳의 사진을 공개했다.


원정대는 귀국 후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만한 증거자료나 정황증거를 수집해 공식루트를 통해 신속하고 논리적으로 대응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등반보고서에서만 등정을 주장하는 무모함을 드러냈다. 이후 조선대팀은 국제적으로 정상 등정을 인정받지 못하고 8,125m 지점까지 도달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 2001년 봄 로체에 재도전해 정상에 올라 손을 흔드는 박영석(오른쪽).

 

박영석이 로체 재등정을 하게 된 이유


국내 8000m급 14좌 완등자 중의 한 사람으로 현재 ‘8000m급 신루트 프로젝트’를 수립, 왕성한 등반활동을 펼치고 있는 박영석 역시 한순간의 판단 착오로 오점을 남겼다.


1997년 한왕용과 한 팀을 이룬 박영석은 로체에 도전, 정상에 올랐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후 동료 대원에 의해 의혹이 제기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1997년 그에 의해 로체 등정의혹이 제기됐던 이탈리아 등반가 마르티니와 스테파니와 같은 처지가 된다. 당시 박영석은 정상 40m 전에서 “이 정도면 다 올라간 것이나 다름없지 않겠는가” 하는 동료의 격려에 정상을 밟지 않고 돌아섰던 것이 화근이었다. 뒤늦게 박영석의 로체 등정의혹의 소문을 접한 동국대학교 산악부 선배들의 설득으로 4년의 세월이 흐른 후인 2001년 봄 14좌 완등을 목전에 두고 로체 재도전에 나선 그는 등정에 성공해 명예를 회복했다.


당시 홀리 여사가 왜 로체에 재도전하느냐는 질문에 박영석은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왜 로체 등정사진이 없느냐고 물었다. 이번에는 좋은 카메라와 비디오를 가지고 왔다. 카메라맨과 함께 정상에 올라 등정사진을 촬영하겠다”라는 조크로 프로 산악인답게 즉답을 피했다.


로체와 함께 안나푸르나1봉(1996년 등정), 마나슬루(1998년 등정) 등정 의혹도 네티즌들에 의해 제기됐다. 마나슬루의 경우, “정상에 섰을 때는 너무 춥고 강한 바람이 몰아치는 상황으로, 만약 사진을 찍으려고 장갑을 벗었다가는 곧바로 동상이 걸려 손가락을 잘라내는 불상사가 생겼을 것”이라며 “때문에 정상에서 조금 내려와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장소에서 사진을 찍은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리고 안나푸르나는 베이스캠프에서 정상까지 등반하는 모습이 한눈에 보이기 때문에 거짓말을 할 수 없다고 밝혔다.


박영석은 2001년 로체 등정에 이어 같은 해 여름 K2 등정에 성공하면서, 1993년 에베레스트 등정을 시작으로 8년 만에 통산 여덟 번째, 한국 최초로 8,000m급 14좌 완등자로 기록되는 영광을 안았다.


▲ 2001년 봄 로체에 재도전해 정상에 선 엄홍길.

 

엄홍길의 시샤팡마와 초오유 문제

8,000m급 16좌 완등(14좌+로체샤르+얄룽캉)으로 국내 산악인 중 최고의 영예를 누리며 엄홍길 휴먼재단을 설립해 국내외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엄홍길도 젊은 시절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무모함을 드러냈다.


엄홍길은 1993, 1994년 연속으로 시샤팡마(8,027m)에 도전하지만 중앙봉(7,998m)에 오르는 것으로 그쳤다. 당시 8,000m급 14좌 완등에 대한 국내의 관심도는 매우 낮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엄홍길은 시간이 되면 등정사진을 공개하겠다고 했으나 여러 해를 넘기면서 명백하게 결론지을 자료를 제공하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 그러나 당시 일본의 ‘산악연감’과 미국산악회의 연감인 ‘아메리칸 알파인저널’은 그의 시샤팡마 주봉 등정을 인정하지 않았다.


1996년 ‘엄홍길 8,000m 14좌 완등 추진위원회’가 탄생되면서 그의 8,000m급봉 등반은 계속돼, 1999년 안나푸르나1봉과 2000년 봄시즌 캉첸중가 등정 이후 14좌 완등을 눈앞에 둔 그의 태도는 돌변한다. 그는 모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시샤팡마 등정 의혹에 대해 관심이 없었고 또한 정신이 없어 주봉을 중앙봉으로 착각했다고 변명했다. 또한 등정을 입증하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으면서 “인맥과 학연에 의한 배타적인 파벌이 있다”고 5년 전의 주장을 되풀이하면서 등정시비를 엉뚱한 방향으로 몰고 가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시샤팡마 등정 의혹에 휩싸여 있을 때 또 다른 봉우리 초오유(1993년 등정)와 로체(1995년 등정) 등정 의혹이 제기되고 있었으나 시샤팡마 등정 의혹에 묻혀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고 잠재해 있었다. 당시 엄홍길은 스페인 대원 2명과 함께 로체 정상에 올랐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그러나 이듬해인 1996년 스페인팀은 유럽의 히말라야 기록전문가인 사비에르(Xavier Equeskitza)를 통해 “엄홍길이 정상에 섰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등정에 실패하면 스폰서를 잃는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이에 엄홍길은 홀리  여사 측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정상에 서지 못했다는 주장을 단호하게 부인했다.


당시 엄홍길은 “함께 등반한 바스크팀 대원들이 정상에 먼저 올랐고, 뒤이어 정상에 올랐을 때는 카메라가 없는 상황이었기에 등정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며 “만약 그때 로체를 등정하지 못했다면 우선 그들이 내가 등정했다는 주장에 대해 가만히 있었을 리 없을 것이고, 또한 만약 바스크 대원들이 나에 대해 그런 불신을 가졌더라면 어떻게 그후 가셔브룸1·2봉(1997년 등정)과 안나푸르나(1999년 등정)를 함께 등반할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했다.


그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12년이 지난 2007년에 이르러, 엄홍길은 당시 로체 정상을 오르지 못했음을 밝히는 강력한 증언이 나왔다. 1995년 가을 엄홍길과 함께 등반했던 후안 발레조(Juan Vallejo)와 후안 오이아르자발(Juan Oiarzabal)은 “로체 정상을 향하고 있을 때 우리는 같은 로프를 묶고 있었다. 그러나 약 8,300m 지점에서 엄홍길은 스스로 로프를 풀고 돌아섰다. 그곳은 정상이 아니었다”고 당시 스페인 등반가 이나키 오초아(Inaki Ochoa)에게 실토했다. 오초아는 이러한 사실을 홀리 여사 측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다(2007년 3월 28일).


초오유 등정 의혹 역시 등정사진이 없어 시비에 휘말렸으나 등정하지 못했다는 증거도 없는 상태에서 더 이상의 논란 없이 조용히 넘어갔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이들은 많다고 한다.


엄홍길은 2000년 K2 등정 후 14좌 완등을 공식 발표했으나 이후 국내외 여론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2001년 봄 로체와 그 해 가을 시샤팡마에 재도전, 등정에 성공한다. 그는 1988년 에베레스트 등정을 시작으로 12년 만인 2001년 시샤팡마 등정을 끝으로 박영석에 이어 통상 아홉 번째, 국내 두 번째 8,000m급 14좌 완등자로 기록됐다.

           

                    -   자료 제공 부산산악포럼 / 정리 한필석 '월간 산' 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