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최고의 지리학자 김정호의 생애 [2] *-
[150주년 기념 특집] 김정호의 생애
김정호는 잔반이거나 중인계층 가능성
그럼, 김정호는 어떤 사상을 지니고 있었을까. 김정호는 3대지지를 편찬했지만 자기의 생애나 사상을 나타내는 글을 남기지 않았다. <지도유설> 등은 김정호가 여러 사람의 의견을 나름대로 인용하면서 정리한 것이다. 그러나 <동여도지>에는 다음과 같은 그의 자서문(自序文)이 있어 김정호의 사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대개 여지학에는 지도와 지지가 있는 것은 오래 되었다. 지도는 직방씨가 있고 지지는 한서가 있다. 지도로 천하의 형세를 살필 수 있고 지지로 역대의 제작(制作)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실로 나라를 다스리는 큰 틀이다. 우리나라는 단군 이래로 도적(圖籍)이 없는데 삼국사기나 고려사부터 지지가 실리게 된다. 신라 통합 이전에는 군현이 설치된 경우 이름은 있으나 가리키는 곳이 없으며, 강역의 진퇴도 역시 기록은 있으나 준거할 만한 것이 없다. 아무리 훌륭한 역사가라 하더라도 확실하게 가려 낼 수 없다. 다만 중국이나 우리나라 여러 역사책에 실려 있는 사실을 근거로 혹은 옳다고 하나 잘못됨이 없지 않아 후에 논변자들이 갖다 맞추나 확실히 질정할 수 없다.’
- ▲ 김정호가 사용한 동여도 지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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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동여도지> 서문은 김정호가 지지나 지도를 제작하면서 <지도유설> 등에서처럼 다른 사람의 견해를 인용한 것과 달리, 지지나 지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개진한 유일한 사료다. 이 자서문에 나타난 김정호의 역사지리 인식은 다음과 같다.
첫째, 김정호는 도(圖)와 지(志)를 불가분의 관계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역사가 있으면 반드시 지리지(地理志)가 있어야만 하고, 그래야만 주현의 설치와 나누어짐 그리고 합쳐짐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또 지리지가 있으면 반드시 지도가 있어야 높은 산과 큰 바다에 가로막혀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이라도 지도의 분율(分率)을 이용해 원근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고, 또 준망(準望)을 통해 피차의 실체를 바르게 파악할 수 있으며, 경위(經緯)와 도리(道里)를 잘 살펴 진상을 충분히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김정호는 지도로써 천하의 형세를 살필 수 있고 지리지로써 역대의 제도와 문물을 헤아려 볼 수 있으므로 도(圖)와 지(志)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위국(爲國), 곧 치국(治國)의 근본이라고 하여 도와 지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젊은 날부터 죽는 그 날까지 지도를 제작하고 지리지를 편찬했던 것이다.
둘째, 지도와 지리지는 이렇게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단군조선 이래 지도가 없고 지리지는 <삼국사기>에 이르러 비로소 만들어졌기 때문에,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이전의 군현 설치와 강역의 변동을 알 수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단군 이래 고려시대까지의 국도·강역·풍속·관제 및 제국과의 전쟁 상황을 별도로 편찬해 <동여도지>의 첫머리에 둔다고 했다.
셋째, 조선 초기에 <동국여지승람>이 만들어져 비로소 도적(圖籍)이 환연해졌지만 자신이 살던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동국여지승람>이 만들어진 지 300여 년이 지났기 때문에 주현 진보(鎭堡)의 혁치(革置)나 호구·전부(田賦)의 증감 등이 차이가 많아졌으므로 이를 바로잡기 위해 <동여도지>를 만든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제가(諸家)의 지도를 고열해 경위선식으로 지도를 작성하고 전해 오는 사서들을 모두 모아 <동국여지승람>의 예에 따라 문목을 더하고 빼서 42문 85편의 <동여도지>를 만들었다. 42문은 각 주현의 연혁·방면 등을 42개 항목으로 나누어 편찬했음을 말한다.
넷째, 김정호가 도와 지를 제작한 것은 치국경제에 유용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그는 <동여도지>에서 문교무비(文敎武備)에 해당하는 관방과 역참, 학교와 사원 등 42개 편목을 상술하거나 표기해 도와 지가 서로 체용(體用)하여 나라의 다스리는 도(道)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는 간절한 소원을 표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평생에 걸쳐서 지리지를 편찬하고 지도를 제작하기 위해 일신상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일로매진한 그의 뜨거운 마음씨를 알 수 있다.
다섯째, <동여도지>는 그가 동관 시절부터 뜻을 두고 편찬하기 시작해 철종 2년(1851)에 〈여도비지>로 1차 완성했고 철종 12년(1861)에는 <대동여지도> 편찬의 기초 자료가 되었으며 그 후 <대동지지>로 종합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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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기는 계급·신분 초월 친구로 교류
김정호의 후원자들 최한기는 순조 3년(1803)에 태어나서 고종16년(1877)에 죽었다. 본관은 삭령(朔寧)이고, 자는 지로(芝老)이며, 호는 혜강(惠岡)·패동(浿東)이고, 명남루(明南樓)·기화당(氣和堂)·태연재(泰然齋) 등의 당호도 있다. 여러 대를 개성에서 살아 온 점으로 미루어 최한기의 출생지도 개성인 것 같다. 최한기는 어려서 매우 총명했다고 하며 어릴 때의 이름은 성득이었다.
최한기의 가문은 고조부 최문징(崔文徵)대에 이르러 가세가 나아졌다. 최문징은 효행과 학행으로 동몽교관에 증직되었다. 그는 슬하에 2남4녀를 두었는데 장자 최지숭(崔之嵩, 1710~1765)이 최한기의 증조부이고, 그가 무과에 급제함으로써 비로소 최한기 가문은 양반의 반열에 속하게 되었다.
혜강 최한기(崔漢綺)는 김정호와 비슷한 시기에 살았으며 평생의 동지였다. 최한기는 양반 출신이고 김정호는 평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계급과 신분을 초월해 친구로서 교류했다. 최한기는 이규경·최성환 등과 알고 지냈는데, 이들을 김정호에게 소개시켜 준 중개인 역할도 한 듯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최한기의 방대한 저서들이 대부분 상실되었기 때문에 최한기가 김정호에 대해서 직접 언급한 기록은 없고 다만 〈추측록(推測錄)> 제6권 지지학(地志學) 항목을 통해 최한기의 지리지와 지도에 대한 견해와 김정호가 제작한 청구도 서문에 의해 두 사람의 관계를 짐작할 뿐이다.
최한기는 ‘지리지는 풍토와 생산물 및 고금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고 ‘지도라는 것은 한 나라의 경계와 크고 작은 면적을 본 따서 그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지도와 지리지는 정치·경제·군사 면에 절대 필요하고 수령이 백성을 다스리거나 심지어는 서민이 명승지를 단장하고 농사를 짓거나 물산을 교역하여 유무를 상통하는 것도 지도와 지리지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세상의 이른바 경륜과 사업은 토지를 떠나서 손 쓸 곳이 없고 지도와 지리지를 버리고서는 지리를 알 수 없으며 지리지를 읽어 익숙하게 궁구하면 이해의 근원을 증험할 수 있고, 지도를 상고해 지시하면 심신이 멀리서도 밝게 통찰할 수 있으며 일을 착수할 때의 완급이나 때에 맞는 취사도 모두 지도와 지리지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각국의 총명하고 뜻있는 사람이 각각 그 나라의 지도와 지리지를 밝히되 허망한 것은 제거하고 실적만을 보존했다가 후일에 종합해 대성하기를 기다리면 어찌 아름다운 혜택을 후대에 베푸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이와 같이 지도와 지리지를 중시하는 최한기는 자신이 <지구전요(地球典要)>라는 세계지리서를 편찬했으며 중국 청(淸)나라 장정빙이 제작한 <만국경위지구도>를 김정호의 도움으로 순조 34년(1834)에 판각 출판하기도 했다. 이규경의 기록에 의하면 최한기는 상당한 서적을 갖고 있었으며, 특히 중국을 통해 수입한 서양서적도 많이 갖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최한기는 안목과 시야가 상당히 넓었다.
그는 평생 김정호의 후원자였을 것이다. 김정호가 순조 34년(1834)에 끝마친 <청구도>에 그는 기꺼이 서문을 써주었다. 양반과 상민의 구분이 뚜렷한 봉건사회에서 평민 출신인 김정호에게 친우(親友)라는 표현을 쓰면서 서문을 써주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 ▲ 대동방여전도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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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기는 <청구도 제언(題言)>에 다음과 같이 썼다. ‘여지도를 통하여 초야의 선비들이 습득하여서는 한 지방을 헤아리고 조정의 관리들이 상고하여 사방을 경영하는데 산천의 험하고 평탄함과 풍토의 다르고 같음이 환하게 눈앞에 드러나게 할 것이니 어찌 단처이 교착하고 산천이 은영하여 황홀하게 잠시 마음을 즐겁게 함을 취하리요. 친우 김정호는 소년시절부터 깊이 지도와 지리지에 뜻을 두고 오랫동안 자료를 찾아서 지도 만드는 모든 방법의 장단점을 자세히 살피며 매양 한가한 때에 연구 토론하여 간편한 비랍식(比覽式)을 구해 얻어 줄을 그어 그렸으나 (중략) 차례로 따라 펴보면 완연한 한 폭의 전도요, 접어서 책을 만들매 문득 팔도의 진짜 모습이니 이는 실로 배수(裵秀)의 6체가 후대에 있어 더욱 분명하고 양천(楊泉)의 십형(十形)이 어찌 전세(前世)에서만 홀로 아름다우랴.’
여기서 최한기는 김정호를 친우라고 불렀으며 김정호가 전국을 두루 섭렵하고 실측에 의하여 청구도를 작성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여러 지도를 참고해 간편한 비람식을 찾아내어 배수의 6체에 의해 <청구도>를 그렸음을 밝히고 있다.
최한기는 이규경과도 교류했으며 이규경과 최성환, 이규경과 김정호, 최성환과 김정호 등을 연결하는 고리역할을 했다고 추정된다.
신헌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 신헌은 순조10년(1810)에 태어나서 고종21년(1884)에 죽었다. 신헌은 대원군 집정시기에 병조판서와 훈련대장 등을 역임하면서 국방력의 강화를 위해 노력했던 정치가이며 군인이었다. 그는 순조 10년(1810)에 태어났으므로 최한기나 김정호보다는 나이가 적었으나 최성환보다는 2년 먼저 태어났다. 그는 순조 28년(1828) 무과에 급제해 여러 무관직을 역임한 후 헌종 15년(1849)에 금위대장이 되었다. 그 후 철종 8년(1857)에는 병조참판을 역임했다.
그의 문집 『금당초고(琴堂草稿)』 속에 수록된 「대동방여도(大東方輿圖)」 서문에 의하면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나는 일찍이 우리나라 지도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비변사나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지도나 고가(古家)에 좀이 먹다 남은 지도 등을 광범위하게 수집하여 여러 지도를 서로 대조하고 여러 지리지 등을 참고하여 하나의 완벽한 지도를 만들려고 시도하였다. 나는 이 작업을 김군(金君) 백원(百源)에게 위촉하여 완성하였다.’
신헌은 무관이기 때문에 정확한 지도 제작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관심과 지도 제작에 남다른 열정을 갖고 있는 김정호와의 만남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현재에도 규장각에 상당량 남아 있는 비변사의 지도들, 이 지도들은 방안도법에 의한 경위선식 지도로서 당시에는 대단히 정확성을 기한 지도들이다.
이 지도들을 김정호에게 열람할 수 있도록 조처해 주고 또 지도 제작을 적극 후원해 준 인물이 바로 신헌이다. 김정호의 지도가 정확성을 기할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이 국가의 기밀지도까지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위 글에서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사실은 김정호가 8도를 두루 섭렵한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지도 등을 광범위하게 수집해 대조해 가면서 완벽한 지도인 대동여지도를 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최성환(崔煥)의 도움도 빼놓을 수 없다. 최성환의 본관은 충주이고, 자는 성옥(星玉)이며 호는 어시재(於是齋)이다. 그는 순조 13년(1813)에 첨지중추부사겸 오위장을 지낸 최광식(崔匡植)과 강릉 최씨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나 고종 28년(1891)에 79세로 일생을 마쳤다.
그의 고향은 양주였으나 대부분의 생활을 서울에서 보냈으며, 서울 중부 허병문계(지금의 조흥(우리)은행 본점 부근)에서 살았다. 이곳은 주지하다시피 중인들이 주로 사는 곳이었고 개화의 선구자였던 유대치 등이 살았던 곳이다. 그가 벼슬을 그만 둔 뒤에는 한동안 고향인 양주로 낙향했으나, 말년에는 현재의 충북 청원군 강내면 다락리로 이주해 생활하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다락리에는 그의 무덤이 남아 있으며, 그의 직계후손들이 살고 있다.
최성환의 신분은 중인이다. 그것은 그의 형과 동생을 위시해 가까운 집안에 많은 잡과 급제자가 있다는 사실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최성환의 조부인 최윤상의 자손 중에는 잡과급제자가 15명이나 된다. 이러한 중인의 전통은 최성환의 7대조인 최예남대에 확립된 것 같다. 그 후에는 잡과 합격자보다 무과 합격자가 더 많았다. 6대조인 최준걸과 5대조인 최무백이 모두 무과 급제자이다.
최성환은 중인이었고 무관 출신인데 많은 책을 편집 출판했다. 그는 <태상감응편도설(太上感應篇圖說)> 5권과 <각세신편팔감상목(覺世新編八鑑常目)>, <성령집(性靈集)>, <사소절(士小節)>, <효경대의(孝經大義)> 등을 편집 출판했으며, <고문비략(顧問備略)>을 저술했다.
- ▲ 조선시대 지도에 나타난 한반도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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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로 천하 형세 살피고 지리지로 제도·문물 헤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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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환과 김정호의 관계를 알 수 있는 기록은 별로 없다. 최성환과 김정호의 만남은 최한기가 이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공동으로 편찬한 <여도비지(輿圖備志)>를 통해 살펴볼 때 두 사람은 상당한 교분관계를 가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여도비지>를 살펴보면 편찬자가 ‘예성 최성환 성옥보 휘집(蘂城 崔煥 星玉甫 彙輯), 오산 김정호 백원보 도편(鰲山 金正浩 伯元甫 圖編)’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이는 최성환이 충주 최씨이고 김정호가 청도 김씨라고 밝혀주는 귀중한 기록이다. 아마도 김정호가 편찬했던 <동여도지>를 근거로 최성환이 편집하고 김정호가 지도를 첨부해서 편찬한 듯하다.
<여도비지(輿圖備志)>는 20책으로 1책이 1권씩 20권으로 되어 있으며, <동여도지>에는 평안도편이 빠져 있는데 비해 <여도비지>에는 모두 갖추어져 있다. <여도비지>의 편찬은 최성환의 물심양면에 걸친 후원이 있었고, 김정호가 <청구도>를 완성한 후 계속 보완해 온 <동여도지>의 보완 부분을 정서(整書)한 지리지일 것이다.
최성환은 김정호와 함께 <여도비지>라는 지리지를 같이 편찬해 출간했다. 책을 많이 편찬하고 출간한 경험이 많은 최성환은 김정호에게 지리지 편찬의 방법과 지도 제작에 많은 조언을 해주고 협력했을 것이다.
김정호는 황해도 토산에서 출생해 1804~1866년까지 활동했으며 그는 당호(堂號)도 갖지 못한 한미한 평민 출신이었지만 정확한 지도를 만들어야겠다는 일념으로 지도와 지리지를 편찬하다 죽은 조선 후기의 위대한 지리학자였다. 물론 그는 정확한 지도를 제작했기 때문에 옥사(獄死)하지 않았으며 백두산을 등정했다거나 전국을 실지로 답사해 실제로 측량한 지도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믿기 어렵다. 최한기·최성환·신헌 등의 후원자의 도움으로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오는 여러 지도, 특히 비변사의 지도 등을 충분히 수집하고 면밀히 비교 검토해 우리의 고지도를 집대성한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위대한 지리학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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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 / 이상태·국제문화대학원 대학교 석좌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