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 오름 기행 *-

paxlee 2011. 12. 23. 22:35

                                 오름 기행


 남제주군 대정읍 절우리·바굼지오름 답사

한라산 북동쪽 동부산업도로를 따라 북제주에 진입하자 무겁게 흐려있던 하늘에서 후드득 빗방울이 듣기 시작한다. 절물오름 가는 길. 김순이(54세) 시인은 절물오름은 제주아낙들이 물맞이 가는 곳이라며 물맞이에 대한 사연을 설명해준다.

“물맞이는 음력 칠월 보름 백중일이면 결혼한 해녀들이 대여섯명 짝지어 해수에 절은 몸을 닦고 맑게 해주기 위해 계곡을 찾아가던 풍습이지요. 몸이 시원찮아 신경질을 부리며 물 맞으러 가야 한다면 이때만큼은 남편도 시부모도 절대 잡지 않았어요. 여자가 경제권을 쥐고 있던 때였으니까요. 사실 물맞이란 핑계고 하루쯤 그렇게 해서 시집살이에 시달린 마음을 해소토록 마련된 인간적인 장치였죠.”

 

절물자연휴양림 진입로를 지나쳐 얼마를 가서 차가 멈춰선다. 골짜기로 김순이시인을 따라 걷던 일행은 갑자기 발을 어디에 내려놓을지 몰라 공중에 둔 어정쩡한 자세가 되고 말았다. 며칠전 내린 진눈깨비를 뒤집어쓴 복수초 군락. 햇빛이 들지 않아 몸을 바짝 오그린 복수초는 그렇게 노오란 꽃잎을 수줍게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꽃구경을 기대하고 따라왔다는 유혜리씨(40세)의 입가에도 함박 웃음이 노랗게 피어난다.

 

“제주를 여행할 때 비를 만나도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동쪽에 비가 오더라도 서쪽이나 남쪽은 그렇지 않기가 쉽거든요.” 차를 돌렸다. 오름이야 제주도 전역에 퍼져 있으니 저 한라산 너머 남쪽으로 가자. 바람이 불든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오름산행이야 제각각의 맛이 있다지만 촬영을 해야하는 취재진에게 비는 좀 곤란했다. 하지만 이 또한 제주도에서만 겪어볼 오름 산행의 독특함이지 않은가. 옷이 그득한 옷장에서 마치 그날의 날씨와 기분에 따라 원하는 것을 골라잡을 수 있는 것처럼. 산록도로를 타고 한라산 북사면을 횡단한다. 거기서 차는 서부산업도로로 바꿔 달리는 동안 일행들은 제주도에서도 송전탑이 가장 많이 설치되어 훼손이 심한 서부 오름군 한가운데를 지나갈 것이다.

 

물결 울음 들리는 오름 ‘절우리’

 

이틀전 아부오름으로 촬영 갔다온 서기자가 ‘도대체 그럴 수 있느냐’며 얘기를 꺼낸다. ‘이재수의 난’ 영화 촬영이 한창인 아부오름에는 세트장 설치는 물론이고 분화구 안으로 차가 들락거리도록 길까지 낸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오름은 여러 사람이 오래오래 볼 수 있도록 해야지 한 가지 이유로 그렇게 파괴시켜서 되겠느냐”며 차안에선 오름 훼손자들에 대한 성토가 잠시 벌어진다. 어느덧 길 오른쪽으로 ‘산방산 10km’란 표지판이 다가선다. 첫산행지는 제주도 대정읍 최남단 벼랑에 위치한 절우리(松岳山·104m)였다. ‘절’은 ‘물결’이란 뜻이라 했다. 물결이 우는 오름이라니….

'추사적거지' 지나 바굼지오름(簞山·158m)의 도드라진 실루엣을 비껴보며 해안으로 달린다. 엷은 구름막이 드리워져 날은 밝지도 어둡지도 않아 멀리 산방산의 옹골찬 산세가 희끄무레하게 보인다. 마라도행 여객선이 막 출발하고 산이수동 선착장에 선 김순이시인이 절우리로 오르는 해안도로와 파도를 향해 시커먼 입을 벌린 벼랑의 굴들을 가리킨다.

“절우리는 일제 강점기의 뼈아픈 상처를 고스란히 간직한 오름입니다. 해안 벼랑에 파 놓은 저 굴들이 그렇고 산록의 포진지와 알뜨르 일대의 20개 가량 되는 콘크리트 격납고 등이 그 흔적들이지요.” 주차장에는 사람들로 붐볐다. 정상이 올려다뵈는 너른 평원에 서자 티셔츠를 보색으로 나란히 맞춰 입거나 카메라 멘 택시 기사를 대동한 쌍쌍의 청춘남녀들이 유채밭과 절벽 가장자리에 둘러친 담장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그제서야 이곳이 으레 신혼여행의 증거물로 신혼집 안방 한 켠에 방문객을 위해 준비되어 있던 앨범 속의 단골배경임을 알아차렸다. 일행은 출입금지 구역인 담장 너머 바다 쪽으로 길게 튀어나간 바위에 자리를 잡았다. 참으로 고요한 날이다. 바다는 거대한 절벽에 애교를 부리듯 찰싹거릴 뿐 흰거품은 금새 사라지고 바다는 또 와서 찰싹거리는 반복되는 모습을 여유롭게 바라본다. 아마도 '절우리'란 집채만한 파도가 저 절벽과 맞부딪칠 때의 소리쯤 되지 않을까. 어쩌면 더 나아가 일제가 중국 대륙 침략을 위한 최후 거점 기지로 이곳에 뿌려놓은 슬픈 역사의 울음이기도 할 것이고.

 

일행이 앉은자리는 바다에 무방비로 노출된 곳이라 거센 바람이라도 몰아치는 날이라면 몸은 종잇장처럼 힘없이 이내 파도 속으로 날려들고 말 것이었다. 잠깐의 상상에 진저리가 쳐져 컵에 남은 따뜻한 차를 얼른 들이킨다. 유채밭 사잇길로 오르다 꽃밭을 유심히 살펴보던 김순이시인은 이것은 유채가 아니라 갈아내지 않은 배추에서 올라온 꽃대라고 알려준다. 갈색의 다소 퇴색한 황금색의 새밭을 지난다. 일행의 몸이 새와 맞닿자 새가 속삭이듯 서걱인다. “오름에는 새, 땔감, 묘지 등 세 가지의 공동체 문화가 존재하지요. 마을 사람들은 저 새를 잘라 두세 해마다 한번씩 초가지붕을 갈아줬지요. 또 땔감을 구하고 조상의 묘를 모신 곳이 오름입니다. 오름은 제주 사람들의 삶터였지요.”

 

그로테스크한 절우리의 굼부리(분화구)

 

굼부리는 얼마전 폭발이 끝난 것처럼 시커멓고 붉은 현무암이 뒤덮인 가마창이었다. 특히 가장자리의 검붉은 현무암들은 손으로 건드리면 그대로 툭! 하고 떨어져나갈 것처럼 위태로워 보이기도 했다. 김순이시인의 남편인 고 김종철선생의 오름답사안내서 「오름나그네」에는 굼부리에 대한 인상이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깊숙이 팬 거무충충한 분화구가 막 분화를 그쳐 지열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듯이 느껴졌음은 찌는 듯한 더위 탓만은 아니었다. 깔때기 모양으로 움쑥한 데다 검붉은 화산토로 하여, 소가 이 속에 빠져들어가면 미끄러워 올라오지 못하고 결국 죽어서 나온다는 이야기가 떠올라 더욱 그로테스크해 보였다.

 

이 글귀를 읽고나면 도무지 이 굼부리 안으로 내려가보지 않고서는 못배기게 되어 있는 것이다. 불을 닮은 여자들이 굼부리 속으로 내려간다. 굼부리 바닥에 앉으니 시계가 좁아져 더욱 심연한 곳에 든 느낌이다. 오름 산행때마다 꼭 굼부리에 들어가본다는 김순이 시인은 “지열이 있어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덥다”며 바위에 다닥다닥 붙은 콩짜개란을 가리킨다. 굼부리에도 봄의 생명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10여분 머문 일행은 내려온 반대편 사면으로 덜컹거리는 현무암을 밟고 오른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분화구 가장자리에 올라서자 그새 일행을 내려다보며 이곳에 섰던 30여마리의 염소떼는 바다 가까운 쪽으로 이동중이다. 굼부리 최고점에 세워진 한시비(漢詩碑)로 이동하는데 갑자기 ‘농댕이’가 뜀박질을 시작한다. 농댕이는 김순이시인이 데리고온 7개월 된 마르치스종 수놈 강아지 이름이다. 강아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죽을 힘을 다해 염소떼를 향해 내달린다. 쫓아오는 강아지의 기세에 눌린 염소떼들이 오히려 도망가느라 일대 경주가 벌어진다.

“농댕아∼! 농댕아∼!” 주인의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몸집이나 수적으로도 저보다 우세한 저 염소떼를 위협하는 강아지의 자신만만함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건 사랑이라 짐작해본다. 사랑을 듬뿍 받을 때 자연스레 생겨나는 겁없이 맑은 자신감. ‘松岳山(송악산)’이라 새겨진 비석 앞 바위틈에는 쑥부쟁이가 보라색 손을 활짝 펴고 일행을 맞는다.

 

“이 꽃을 두고 서정주식 표현을 빌면 ‘미친년’이라 하지요.” 여인들의 웃음이 굼부리 위로 퍼진다. 정상에는 우리 일행 밖에 없다. 그냥 돌아가는 이들은 오름이 지닌 매력을 몰라서이기도 하겠지만 독특한 암질구조를 보여주는 해안절벽과 가파도와 마라도의 원경, 그리고 동쪽 해안선을 달려가 산방산과 형제섬을 뛰어넘고 시선이 가 닿는 한라산 그림자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흡족할 만한 곳이 이 절우리이기 때문이리라. 이중분화를 지닌 복합화산인 이 산자락에는 올록볼록 무덤 같은 작은 봉우리들이 널려 있는데 그 수는 ‘절우리 안 아흔아홉 봉우리’로 표현된다.

비석 뒷면에는 이런 절우리(송악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대정의 초대면장 우영하씨의 한시가 새겨져 있다. 정상에 오르니 부드러운 바람이 훑고 지나간다. 김순이시인은 오름에 바람이 없으면 오히려 불안하다 한다. 바람이 없는 제주를 제주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듯. 절우리의 매력에 공감한 여인들은 문득 서로의 나이가 궁금해진다.

"저는 3학년 5반이예요." "전 올해 불혹이예요." "그러고보니 3학년부터 5학년까지 차례로 모였군요." 여인들은 이제 점심을 먹고 박쥐가 날개를 펼친 모양으로 오름 가운데서도 최고령인 바굼지오름으로 갈 예정이다.

 

오름나라의 이단아 최고령 바굼지오름

 

바굼지오름의 첫인상은 “저것도 오름일까”였다. 바위가 툭툭 불거져 나와 그저 좀 기묘하게 생긴 바위산쯤으로 여겨졌다. 제주의 오름 가운데서도 연령이 가장 많은 이 오름은 사람으로 치자면 살은 죄다 빠져버리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흉칙한 몰골이었다. 김종철선생은 살이 통통하게 오른 오름의 일반적인 모양과는 전혀 딴판인 이 오름을 “오름나라의 이단아”라 불렀다.

또 “누워 있는 긴 괴물이 머리를 치켜들고 꿈틀거리기 시작할 듯한 인상”이라 표현했다. 산행을 하기 전 잠시 대정향교를 둘러보던 일행은 담장 위로 몸을 드러낸 소나무 한 그루에 시선이 가 머문다. 기품 있는 이 소나무는 사람들에게 종종 추사의 세한도에 비유되곤 한다.

추사적거지와 불과 10리 떨어져 있는 이 향교의 동재(강당)에는 추사의 친필로 ‘疑問堂(의문당)’이라 쓰인 편액이 한때 걸려있었으니 이래저래 추사와 관련된 유적지임에 틀림없다. 향교 뒤편 바굼지 서쪽 봉우리로 오른다. 등성이엔 스산한 날씨에 꽃잎을 완전히 접어버린 까치무릇 군락이 하얗다.

10분만에 척추쯤 될 바위지대가 나온다. 유혜리씨와 서기자가 바위지대로 성큼 다가선다. 바위를 딛는 유혜리씨의 몸 동작이 유연하다 싶었는데 알고보니 그것은 10년전쯤 클라이머였던 이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암릉을 타고 동쪽으로 가던 일행은 박쥐의 왼쪽 날개의 어느 바위 턱에 걸터앉았다. 내려다보이는 향교 주변으로는 온통 파아란 마늘밭이다. 이곳에서 생산된 마늘은 유난히 맛이 좋다 한다. 쉬는 틈을 타 유혜리씨의 산이력을 물어보았다.

 

“연대 고대 서강대 통합 산악부써클인 오씨씨(OCC)에 가입하면서 인수봉 선인봉 오르고 포대능선도 걸었지요. 지금 남편과 만나 89년에 결혼하며 제주로 내려오기 전까지 10년 정도 다녔네요. 그때 후배들에게 장비도 전부 물려주고 이 냅색만 하나 가지고 왔어요.” 그녀가 메고 있는 빛바랜 청색 냅색에는 산꾼이라면 누구나 한번 들어보았을 ‘설악산장’이란 흰 글자가 박혀있었다. 그녀는 제주 출신으로 제주대학교에서 지질학을 강의하는 남편과 살며 제주여자가 되어가는 동안 두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박쥐의 몸체에 해당할 거대한 바위지대를 조심조심 넘어 박쥐의 오른쪽 날개로 진입한다. 희뿌연 산방산이 성큼 눈앞에 다가오자 어느새 일행의 발걸음은 황금빛으로 일렁이는 억새밭으로 내려서고 있다. “바굼지는 선생님께 어떤 메시지를 주나요?”

“바굼지는 욕망과 허세를 모두 걸러버리고 올곧은 정신의 정수만을 간직한 오름이랄까요. 강직해보입니다. 그래서 이곳에 오면 힘을 얻게 돼요. 또 이 오름과 잘 어울리는 선비의 곧은 정신을 연마하던 대정향교가 옆에 있어서 좋기도 하고요.” 일행은 산행을 시작한 대정항교로 돌아가 날개죽지를 퍼득이며 막 날아오를 듯한 바굼지를 다시 한번 바라본다.

 

           - <글·이정숙 기자 사진·서준영 기자> / 사람과 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