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품 브랜드 루이비통의 역사 *-
루이비통의 역사
우리나라 여성들이 가장 사랑하는 명품브랜드 "루이비통"
루이비통은 과거 모노그램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루이비통의 역사를 써나가고 있는 명품브랜드이다.
그럼 루이비통을 사랑하시는 여러분 !
루이비통의 역사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알고 계신가요?
적어도 자기가 선호하는 브랜드 1~2개의
역사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겠기에~
루이비통은 프랑스 앙셰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목공소를 하고 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던 루이비통은 어린시절부터
나무다루는것에는 남다른 재주를 가지고 있었지요.
어느날 루이비통은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졌어요~
당시 나이 14살이였던 루이비통은 프랑스의 수도 "파리"로 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헌데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가 있던 앙셰 라는곳에서
프랑스 파리 까지는 너무나 먼길이었어요 .
루이비통이 어린시절인 1830~40년대에는 기차는 대중화되지 않은 시절이었지요~
오직 걸어서 400~500km를 가야지만 프랑스 파리로 갈수 있지만,
그것이 소년 루이비통의 꿈을 꺾을순 없었습니다.
루이비통의 여정은 시작되었습니다.
프랑스 니스에 있는 작은마을 "앙셰"에서 파리까지의 대장정 중에
돈이 떨어지면 근처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여비를 벌었습니다.
그렇게 1년쯤 걸어 걸어 루이비통은 꿈에 그리던
프랑스 파리에 도착할수 있었습니다.
파리에 도착한 소년 루이비통은 가방 전문점에 취직을 하였습니다.
당시 귀족들은 가방을 구입할뿐 아니라,
가방전문점에서 가방 짐을 꾸리는 것도 의뢰했었어요.
루이비통은 가방을 만들어 본적은 없으니,
짐을 꾸리는 패킹 역할을 맡았는데,
소년 루이비통의 짐싸는 실력은 소문이 났으며, 그 소문은
그 나폴레옹 3세 왕실에 까지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황실에서 외제니 황후의 전문 패커로 일하게된 루이비통은 ~
그는 30살이 넘도록 황실에서 패커로 일하면서,
꼼꼼한 솜씨를 늘 지켜보던
외제니 황후는 그의 솜씨를 무척 아까워하며,
그에게 여행용 가방가게을 차려주었습니다.
그 여행용 가방 가게 이름은 자신의 이름을 딴 루이비통 (Louis Vuitton)이였습니다.
루이비통이 만든 여행가방은 정말 날개돋힌듯 팔려나갔습니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한 아이디어로 가능했는데, 그것은 바로
트렁크 가방의 뚜껑 모양에 있습니다. 위에 보시는바와 같이 구식 트렁크는
윗면이 볼록하여, 상자를 쌓을수 없어 많은 양의 트렁크를 싣고 갈때에는
여간 불편한게 아니였지요~ 이것이 루이비통 성공신화의 키 포인트였습니다.
이렇게 여행용 가방의 뚜껑을 사각형으로 평평하게 만든 루이비통의 여행용가방은
소문의 소문을 타고, 금새 루이비통은 자신의 사업을 확장하게 되었습니다.
"작은 차이가 명품을 만듭니다"라는 광고 문구처럼,
루이비통의 이러한 아이디어는 지금의 루이비통이 되기까지의 밑거름이 되죠 ~
루이비통의 여행용 트렁크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트렁크를 열면 차를 마실수 있는 차셋트 트렁크 같은 기발한 아이디어가
귀족들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 잡았던 것이죠~
당시 귀족들은 집에서 누렸던 호사로운 생활을 여행을 가서도
누리고 싶어했고, 그런 귀족들의 마음을 루이비통은 놓치지 않았습니다.
참 기발하죠? 여행용 트렁크를 열면 침대로 쨔잔 변신하는
변신로봇 ~ 아니 변신 침대입니다 ㅎㅎㅎ
지금 현재도 루이비통의 여행용 트렁크는 주문형으로 제작되고 있는데,
음악을 들을수 있는 여행용트렁크 ,
컴퓨터를 할수있는 전원이 연결된 책상 트렁크 등등
루이비통의 여행용 트렁크의 변신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입니다 ♥
그렇게 번창하던 루이비통은 매장위치를 파리의 상젤리제 거리로 옮기게 되고,
그 위치가 지금 루이비통 본사 가 있는 자리입니다.
1914년에 루이비통 매장이 있던 자리가
지금 루이비통의 본사가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루이비통은 시대가 급변함을 감지했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더이상의 전쟁은 없다는 인식이 강해지면서,
사람들은 단순히 먹고 사는것 이상의 무엇인가를 요구하게 되었죠 ~
그런것 중 하나가 바로 여행인데, 자동차의 대량보급이 가능해지면서,
사람들은 크고 무거운 트렁크 대신 가볍고 편한 여행가방을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루이비통은 대대로 자신가문 대대로 이어져 오는 가방사업을 이어갔습니다.
루이비통의 후손들은
루이비통의 가방들을 더욱 획기적으로 변화시켜갔습니다.
무겁고 딱딱한 여행용 트렁크에서 손에 들수 있는 여행용가방을 만들고,
좀더 부드러운 캔버스 재질에 창업자이신 "루이비통"의 이니셜을 딴
모노그램을 넣어서, 짝퉁 방지와 함께 디자인면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잘나가던 루이비통에게 심상치 않은 변화가 일어났는데,
1980년대가 되면서, 사람들의 안목이 더욱 높아지면서,
루이비통의 디자인이 너무 올드하다는 이미지가 강해져버린것이지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것은 대대로 가업을 이어오던 형태의 루이비통이
사업을 확장하다 보니, 전문적으로 비지니스맨이 없던 루이비통은
심각한 경영난에 허덕이게 됩니다.
그런점을 눈여겨보고 있던 사업전문가가 한명 있었으니 ,
지금의 루이비통을 이끌고 있는 "아르노 회장"입니다.
그는 루이비통을 사들이면서, 전문경영기법을 도입했으며,
루이비통의 노쇠한 흐름에 새로운 물결을 일으켜줄
젊은 디자이너 한명을 영입하였습니다.
"마크 제이콥스"
아르노 회장이 젊은 루이비통을 만들기위해 혁명선봉에 세운 젊은 디자이너가
바로 현재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디자이너인 "마크 제이콥스"입니다.
이 젊은 디자이너는 노쇠해져가는 루이비통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지요~
기존 모노그램 디자인으로는 루이비통 고객의 다양성을 확보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마크제이콥스는 , 전통적인 모노그램 디자인은 가져가면서,
루이비통 모노그램 디자인 위에 새로운 시도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루이비통의 시그니처 아이템 네버풀 가방위에
장미 그라피티를 그려넣은 " 루이비통 로즈 네버풀 "
프랑스 젊은이들의 거리예술인 "그라피티"를
모노그램 디자인위에 새긴 루이비통 그라피티 라인은
단순히 하나의 디자인이 아니라 혁명에 가까웠으며,
그라피티 라인의 성공과 함께 마크제이콥스는
더욱 과감한 도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루이비통 그라피티 탄생에 대한 포스팅 <===== 클릭
루이비통의 수석디자이너인 마크제이콥스는
모노그램 디자인을 새롭게 탄생시키는데,
그 역할의 선봉장으로 바다건너 일본에서 활동중이었던
팝아티스트 "무라카미 다카시"와 손잡게 됩니다.
무라카미 다카시는 약간 변태적인 작품으로 일본에서
인기가 있던 팝아티스트였는데, 이로 인해 무라카미 다카시는
세계적인 팝아티스트로 명성을 높이게 됐으며,
지금도 루이비통의 디자이너로 활동중입니다.
루이비통 멀티컬러 라인의 탄생에 대한 포스팅 <==== 클릭
그리고 루이비통이라는 거대한 배를 이끌고 있는 캡틴 "아르노 회장"도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아르노 회장은 전문 경영인 답게 전세계에 있던
명품브랜드들을 하나씩 사들이게 되고, 하나의 브랜드만 가지고 있어도 대단한
명품브랜드들을 하나로 뭉쳐,
LVMH (루이비통 모엣 헤네시)라는 그룹을 만들게 됩니다.
루이비통 모엣 헤네시 에 대한 포스팅 <====== 클릭
현재 루이비통은 전세계적인 그룹으로 탈바꿈 되어있습니다.
2010년 현재 루이비통 그룹 총 매출액 32조원!
루이비통 아르노회장 재산 45조원 !!
루이비통이 이렇게 급성장을 계속하고 있지만,
전통도 무시하진 않았습니다.
루이비통의 5대 자손인 파트리크 루이비통은 전통방식 그대로의
주문제작 방식 과정을 책임지고 있으며,
아직도 루이비통을 구입하면,
고객의 이니셜을 새겨주어, 자신만의 소중한 명품을 소유하게 만들어주고,
예전 초창기 루이비통 여행용 가방의 개발도 계속 진행중에 있습니다.
루이비통의 성공의 비결은 옛것을 지키고, 새로운것을 과감히 받아드린
溫故知新 (온고지신) 의 정신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