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흥망사로 배우는 기업생존전략 [1]
로마 흥망사로 배우는 기업생존전략 [1]
제가 2주전에 강의 연사로 참석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그동안 연구원에서 하였던 강의 주제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주제의 대부분이 향후 국가 정책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왜 민간기업인 은행에서 실시한 연수내용을 듣고자 하는가라는 의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로마흥망에 대한 국가 벤치마킹에 대해서도 알고 싶었겠지만 평소에 신한은행이 언론에 많이 거론되는데 어떻게 그렇게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는 가에 대해서도 궁금하신 점이 많은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문제도 잠깐 언급하기로 하겠습니다.
저희 은행이 설립이후 14년동안 48.4%의 외형성장을 기록함에 따라 은행 감독원과 각종 국제평가단에 의해 좋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성공요인을 보면 첫째로 '철저한 목표관리'에 있다고 보며, 두번 째로 '친절위주의 서비스 전략', 세번째는 '관리자위주의 덕성관리'라는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세번째로 거론한 관리자위주의 덕성 관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 보면 자료에 신한은행 임.부서장 연수내용에 대해 거론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임.부서장중심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행장을 중심으로 하는 최고경영자를 대상으로 하되, 장래에 은행장과 임 원진이 될 가능성이 있는 부서장도 리더로서의 덕성을 갖추어야 된다는 차원에서 이러한 교육을 지속적으로 실시해 왔습니다.
그러면 왜 신한은행이 로마를 연구하게 되었는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금융산업구조가 급격하게 개편되면서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과거의 금융기관 경영은 외부의 환경변화에 따른 대응으로 외형이나 수익이나 목표를 조정하는 전략축소와 변경에 의해 가능했지만 지금은 생존적 차원의 문제로 돌입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 금융기관 경영은 다른 산업과 마찬가지로 대경쟁의 시대로 돌입했다는 것을 전제로 로마를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반기업과 마찬가리로 금융기관들도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 리엔지니어링(Reengineering), 리컨스터럭션(Reconstruction), 특히 고객만족, 다운사이징, 아웃소싱, M&A에 의한 합병을 추진하고 있고, 전문가들에게 컨설팅도 의뢰하는 등 많은 수단들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에 대해 어느 누구도 확신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저희가 1994년까지는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만 1995년에는 최초로 외형과 손익 모든 면에서 목표미달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그 원인을 분석한 결과 경쟁격화가 그 원인으로 지적되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로마의 흥망을 임.부서장 연수 주제로 삼고, 로마를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조그마한 도시국가였던 로마가 주변국가와의 격심한 경쟁에서 승리해서 세계국가로 발전을 해 나갔는데 그 도시국가였던 초기단계가 현재 신한그룹의 현재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저희 신한은행이 주도하고 있는 신한그룹이 8개 회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만 세계 금융시장에는 거의 명함을 내밀지 못할 미소한 상황에서 2000년까지는 세계 50위 성장 목표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경쟁력의 원천을 찾는 작업이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즉 이러한 격심한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현재 우리의 상황과 비슷한 로마 흥망의 연구를 통해 어떠한 해결점을 찾을수 있다는 생각에서 로마를 연구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저희는 10년전인 1986년에도 로마를 연구한 적이 있었습니다. 신한은행이 설립된지 대략 4년후의 일이었습니다. 그 때 신한은행의 설립과 함께 연평균 50%의 성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10년 전에 공부했던 내용의 중심은 성공하면 성공할수록 겸손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번영하고 강대했던 로마도 마침내 멸망하고 말았는데 우리와 같은 자그마한 시중은행이 노력을 하지 않고 자만에 차 있다면 로마와 같이 망하고 말 것이라는 생각에서 겸손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소극적인 생각에서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96년에 공부하는 로마의 흥망은 결과론적으로 로마가 망했다는 점에서 교훈을 얻자는 것은 아니고, 로마가 주변국과의 경쟁에서 성공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가를 찾는 작업이었습니다. 대전제는 대경쟁시대를 헤쳐나가는 지혜를 로마로부터 배우자는 것이었습니다. 로마의 번영은 노력없이 거져 주어진 것이 아니라 존망의 위기마다 발휘되었던 리더들의 필사적인 노력을 통해 가능했다는 것을 이번 연수를 통해 배웠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신한은행의 고급간부는 로마의 리더들과 같은 필사의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데 노력을 하지 않으면 기원전 146년에 사라진 카르타고와 같은 종말을 맞이하고야 만다는 건전한 의미의 위기감을 가져야 대경쟁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점을 연수를 통해 강조했습니다.
다음으로 로마에 대한 연구를 통해 얻은 이론적 기반을 간단히 설명드리겠습니다. 문명관이라는 것은 문명이 어떻게 흥하고 망하는지를 바라보는 관점이 되겠습니다. 조직연구자들이 문명관을 중요시하는 이유는 조직도 넓은 의미의 문명과 같기 때문입니다. 문명을 바라보는 입장에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문명은 계속 진보한다는 낙관론도 있고, 서구가 동양보다 우월하다는 그런 종류의 문명관도 있습니다. 그리고 토인비와 같이 문명에는 반드시 흥망성쇠가 있으며, 흥하는 문명은 반드시 망한다는 운명사적인 문명관도 있습니다. 운명론적인 성격의 문명관과 조직론과는 다릅니다. 조직론은 연구하는 입장에서는 결과적으로 망한다는 문명관이 아니라 언제나 조직을 성공으로 이끌어서 계속 존재하게 하는 방법론으로서의 조직론입니다. 조직이 스스로를 변혁시키고, 변화시키는 변이 과정을 규명하는 것이 조직론입니다. 따라서 문명관은 사후관찰적이고, 조직론은 사전예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명론과 조직론의 입장에서 조직을 다시 살펴보면 조직은 생물과 마찬가지로 진화합니다. 그러나 조직이 진화한다고 해서 반드시 진보하는 것은아닙니다. 진화속에는 진보도 퇴보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직이론연구자의 입장에서 보면 진화하는 것이 아니고 당위적으로 진보시켜야만 되는 문제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국가이기는 하지만 로마의 진보과정의 최전성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학자마다 견해가 다르지만 폴리비우스의 경우 그의 저서 '역사'에서 공화정이 절정에 이른 기원전 149년에서 146년 제3차 포에니 전쟁 직후로 보았습니다. 포에니 전쟁이라는 것은 페니키아인(터어키족)과의 전쟁입니다. 그런데 18세기 역사학자인 기본의 '로마제국의 흥망사'에 보면 5현제시대(96-180년)를 로마시대의 절정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한 로스토프체프라는 서양 고대사학자의 '고대세계사'에 보면 아우구스투스가 제국을 건설할 당시인 BC27~AD24년을 정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학자들의 견해에도 불구하고 저희는 조직의 성장사이클은 하나가 아니고 두개의 싸이클인 운동사이클과 성장사이클을 그린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운동사이클은 성장사이클에 선행해서 미래변화와 성장사이클의 원동력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운동사이클은 조직내외의 다양한 성장요인과의 역학관계가 발생시키는 에너지의 변화를 흐름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성장사이클은 운동사이클의 운동결과로 나타나는 성장현상이라고 봅니다. 문명과 GNP성장, 국토의 확장 등으로 예를 들수 있습니다. 이를 토대로 보면 운동사이클의 정점은 로마가 카르타고를 누르고 지중해의 패자가 된 2차 포에니전쟁 즉 BC201년 전후가 로마의 운동에너지는 절정에 달했다고 봅니다. 그 결과로서의 성장사이클의 정점은 AD98년부터 117년까지 약 20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때 제국의 영토는 최대로 확장되었습니다.
모두에도 말씀드린 것과 같이 로마라는 나라를 벤치마킹의 대상으로 삼았던 이유중의 하나는 바로 주변국가와의 격심한 경쟁에서 살아남아 대제국을 이루었고, 오랜 세월을 유지했다는 위대함 때문에 로마를 분석했습니다. 로마를 조직론적 입장에서 살펴보면 로마가 라틴족만으로 구성된 도시국가가 아니라, 다양한 인종을 통합하여 이룩한 세계제국이었다는 것이 조직론적 측면에서 본 특징이었습니다. 로마는 전성기에 황무지인 북유럽을 제외한 현재의 유럽 대부분과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대부분의 영토를 점령했습니다. 그러나 로마의 위대성은 제국을 건설한 것에 있지 않고 바로 다양한 역사와 민족성과 상이한 역사와 국민성을 가진 천개 이상의 국가를 로마라는 이름하에서 통합하고 공존했다는 것입니다. 또하나의 위대성은 통합과 공존이 강압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주변국 스스로가 로마의 핵우산과 보호아래 스스로 들어왔다는데 있습니다. 이것이 조직론적 입장에서 본 첫번째 특징입니다.
두번째 특징을 보면 요즘 리더쉽을 말할 때 GM의 웰치회장과 같이 위대하고 똑똑한 한사람의 리더쉽을 말합니다만, 로마는 한사람에 의해서가장 많은 사람의 협조와 협동에 의해서 승리했다는 것입니다. 전제군주시대도 있었지만 로마가 성장.확대과정에서는 한사람의 장군과 영웅보다는 다양한 계층의 수많은 시민군이 있었고, 한사람의 군주보다는 국가를 위해 죽은 수많은 집정관이 활력있게 국가를 운용했다는 것입니다. 로마는 협동시스템에 의해 운용되었다는 점이 중요한 사항입니다. 로마는 BC753년에 탄생하여 AD 476년 서로마제국까지는 약 1500년, 동로마제국까지 포함하면 2200년까지 대제국으로 존재했습니다. 인류역사상 로마처럼 대제국을 오랫동안 유지했던 나라는 아직 없었습니다.
로마의 영토는 북쪽의 라인강에서 아프리카의 나일강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세로폭과 가로폭이 2000마일에서 3000마일을 넘어 약 410만 평방킬로가 넘었습니다. 지금 미국과 소련의 면적에 비하면 작지만 우리나라의 약 20배가 되는데 이것이 위치상으로도 온대지방이고, 가장 살기좋은 북위 24도에서 54도, 그리고 대부분의 영토가 비옥한 농경지였습니다. 로마는 국가의 면적을 확대하는 과정에 있어서 황무지와 기후가 나쁜 곳은 아예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렇게 로마의 번영은 기간과 영토면에서 상당히 인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로마가 현재 우리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요즘 유행하는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의 이야기'를 보면 지성에서는 그리스인보다 못하고, 체력에서는 게르만인보다 못하고, 기술력에서는 에투루리아인보다 못하고, 경제력에서는 카르타고인보다 못한 로마인들이 어떻게 그토록 오랫동안 커다란 문명권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18세기 영국의 역사학자인 기번의 '로마제국 흥망사'를 간단히 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가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그 정복의 속도나 범위 때문만은 아니다. 러시아의 군주국은 지금(기번 당시)보다 더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다. 로마의 확고한 권력체제는 시대적 지혜에 의해 이룩되어 보존되었고, 일반적 통치원리는 현명하고 간단하고 자애로웠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즉 로마의 위대함은 시대적 지혜를 가지고 국가를 운영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다음으로 정치의 변혁에 대해 설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로마는 왕정, 공화정, 제정, 전제정의 정치변혁을 겪습니다. BC753년에 그리스 유랑민의 후손이 로물루스가 초대 왕에 오르게 됩니다. 그런데 로물루스가 만든 1대, 2대, 3대 왕의 행적이 로마의 전통을 만들었습니다. 예를들면 로물루스가 만든 원로원이 나중에 로마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2대왕 누마가 왕이 될 때는 세습이 아닌 선출에 의해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이 두가지 점만 보아도 기업에 비유하면 기업의 창업기에 건전한 문화를 형성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7대왕인 타르키니우스가 독재를 하게됩니다. 이 때 브루투스(케사르를 죽인 브루투스와는 다른 사람)라는 사람이 나타나 광장에서 연설하여 타르키니우스를 축출하게 됩니다. 왕을 축출한 브루투스는 공화정을 열게 됩니다. 공화정은 왕을 없애고 왕의 역할을 하는 집정관제도를 BC509년에 창설합니다. 그러나 그의 훌륭함은 시대 상황에 맞게 시대적 지혜를 읽고서 공화정을 만들었다는데 있으며, 공화정에 반대하는 그의 아들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잔인하게 죽이면서까지 새로운 제도의 정착을 위해 노력했다는 점입니다. 두번째 집정관인 발레리우스는 별명이 '공공의 이익을 중시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원래 부자였는데 그가 부자인 것을 사람들이 비난하니까 그 집을 부수고, 평민들이 사는 집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이렇게 자기 아들까지 죽이면서 새로운 제도를 정착시킨 초대 집정관 그리고 검소하게 산 발레리우스 등이 공화정의 초기역사를 만들게 됩니다.
이렇게 정착된 공화정은 내적으로는 혼합정치라고 하는 견제와 균형의 특유한 정치시스템을 정착하고, 외적으로는 토인비가 정치건축의 걸작이라고 말하는 BC338년의 로마연합의 성립을 통해 적극적으로 확대정책에 나서게 됩니다. BC264년부터 120년 정도 진행된 3차례의 포에니전쟁을 겪은 로마는 지중해를 로마의 내해라고 불리울 정도로 영토를 확대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로마는 초기에는 35개의 구로 이루어진 직접 민주주의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탈리아를
제패하고, 스페인과 북아프리카를 점령하고 부터는 종전의 도시국가에 맞는 공화정은 더 이상은 기능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케사르는 이러한 공화정의 한계를 인식하고 새로운 도시국가, 대제국에 걸맞는 정치체제를 만들고자 했지만 부르투스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로마는 제정에 들어서 게 됩니다.
제정(帝政)이 기원전 27년에 시작되고 전제정(專帝政)은 기원후 284년에 시작됩니다. 제정이후 로마는 영토를 다소 확대하기는 하지만 내적 에너지는 이미 소진되고 제국은 쇠망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이러한 정치체제에서 얻은 첫번째 교훈은 조직이 위기에 처하고, 성장의 한계에 이르렀을 때 반드시 극적인 변혁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왕정에서 공화정으로의 체제변혁을 통해 Take Off가 있고, 비선형적인 변혁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한번 Take Off가 필요할 때 이를 실패하자 로마가 쇠망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두번째 교훈은 체제변화가 필요한데 체제변화는 필히 그것을 주도할 리더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리더쉽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로마는 처음에 왕정일 때는 개인적 희생을 기초로 하였고, 공화정에서는 원로원과 집정관과 민회라는 세가지 협동시스템을 통해 대제국을 이룩했습니다. 그러나 제정과 전제정으로 가면서 개인의 숭배와 지배, 왕의 지배에 접어들면서 쇠망의 길에 접어들게 됩니다.
다음으로 로마의 특징은 끊임없이 자기의 중심을 강화해갔다는 점을 들수 있습니다. 중심은 최고경영자 또는 주주라고 볼 수 있고, 주변은 노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로마가 훌륭하다고 하는 것은 중심인 로마와 주변인 국가와의 사이, 귀족과 평민사이, 시민과 노예사이에는 항상 갈등과 대립이 있는데, 중심이 주변을 설득하여 흡수하는데 성공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조직의 성공요건으로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초기 왕정시대 타리키니우스왕 시대에는 에투리니아인의 이주를 허용했습니다. 우리와 비교하면 월남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에투리니아인의 기술을 로마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또 공화정시대인 BC367년에는 평민을 정치권의 전면에 나서게 하는 리키니우스법을 제정하여 평민을 귀족과 대등한 세력으로의 성장을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로마가 계속적으로 새로운 피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피를 받아들이는 것은 BC287년 호르텐시우스법으로 완성이 됩니다.
또 하나 예를 들면 BC264년에서 20년동안 일어난 제1차 포에니전쟁 당시에는 과거에는 적이었던 샴륭족의 오틸리우스를 집정관으로 받아들여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이만큼 로마는 타민족, 타국가 출신도 중심으로 받아들여 로마화하는 것이 강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가 주변과의 단절을 시도하는 AD27년부터는 중심이 주변을 흡수하지 않고 중심이 자기만을 강화하고자 했기 때문에 쇠망했습니다. 중심이 자기 강화를 위해 주변을 받아들일 때는 중심의 존재와 주변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연한 능
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기업체에서의 사장과 민족의 지도자가 이러한 능력이 필요할 것이며, 로마에서는 원로원을 중심으로 이러한 강화를 위한 노력을 했다는 것입니다. 로마를 지탱해준 기둥에는 세가지가 있습니다. 집정관, 원로원, 민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심의 중핵은 원로원이었습니다. 로마의 원로원은 자부심과 사명감이 불타고, 아주 유명했습니다. 이런 원로원이 있었기에 주변의 에너지를 받아들이고, 중심을 강화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경우는 미국의 정치인과 일본의 공무원을 생각하면 되 겠습니다.
다음으로 대외적인 확대과정을 보겠습니다. 도시국가였던 로마는 공화정 초기에 부루투스 이후에 라틴동맹을 체결합니다. 그래서 본격적인 확대의 길로 접어들었는데, BC336년에 로마연합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번영과 정복과 지배의 길로 접어 들게 됩니다. 로마연합의 힘이 샴륭족과의 전쟁과 피로소왕이 침투해왔을 때에도 이길 수 있는 힘이 되었고, 결국 이태리 반도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세차례의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를 했는데 특히 2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의 유명한 명장 한니발이 로마를 마구 유린
하게 됩니다. 이때 로마의 집정관 19명중 10명이 죽게 됩니다. 그러나 전투에서는 한니발이 이겼는데 전쟁에서는 한니발이 패했습니다. 그것은 한니발이 커다란 착오를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바로 정치건축의 걸작이라고 하는 로마연합의 힘을 과소평가 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번영은 BC90년도 정도에 마무리가 됩니다. 율리우스법으로 로마의 시민권이 점차 확대되었는데 로마의 에너지가 충분한 그 순간에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BC135~132년까지 있었던 노예반란들이 공화정의 한계를 들어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시이저는 이러한 체계의 한계를 토대로 새로운 체제를 구축하고자 했지만 기존 이권에만 급급한 원로원을 중심으로 하는 로마인은 현실에 부적절한 공화정만을 고집하게 됩니다. 이 정도로 로마의 역사를 통 해 지혜를 얻기 위해 간단한 지식 공부를 마무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발표자 : 송연수(신한종합연구소 부소장)
- 출처 / 시오노 나나미 팬클럽 http://cafe.daum.net/oriol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