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벽에세이 8
[암벽에세이 | 아름다운 시절 8]
부상과 도약 사이의 회색빛 나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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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홀드들을 하나하나 잡으며 예술과 일반인들의 관계를 생각하곤 했다. 처음에는 잡히지 않던 홀드가, 불가능해 보이기까지 하던 홀드가 연습을 거듭하자 어느 날 잡히고, 그 다음부터는 익숙해지고, 쉬워지고, 드디어 내 것이 되는 과정. 내 것이 된 다음에는 그 동작을 즐길 수도 있고, 변형할 수도 있고, 남에게 가르쳐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예술작품도 그럴 것이다. 창작이 아닌 향유라 하더라도, 교육과 습득을 거치고, 상당 기간의 실습을 거쳐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는 것이다.
초등학교 교사인 내 친구는 나를 만나면 그 주일에 읽었던 시집에 대해 얘기하곤 하는데, 나는 “응, 응”, 듣고 있지만 정말 딱할 때가 많다. 평생 문학을 좋아하고 시집을 사 읽는다면서도 그녀가 선택한 시집이나 감상의 수준이 너무도 저차원이어서 전달하기 부끄럽다. 세상에 이렇게 좋은 진짜 시들이 많은데 유치한 허세에 속아 그게 최고인줄 알고 똑같은 것에 계속 시간을 투자하는 그녀가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래서 내가 가끔 “이런 시는 어떠니”하고 추천하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린다. 그러면서 시가 어려울 필요가 뭐가 있느냐고 오히려 내게 따진다. 그것은 내가 암장에서 더 어려운 동작을 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고 따지는 것과 같을 것이다. 더 이상 발전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것과 뭐가 다른가. 등반을 하려면, 제대로 암벽에 오르려면 점점 더 어려운 동작을 배우고, 익히고, 실습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산에 가서 자연 암벽을 오를 때 몸에 익힌 기초 동작들을 바탕으로 응용도 하고 새로운 시도도 하며 그날의 산행을 즐길 수 있을 텐데. 피카소나 슈베르트, 도스토예프스키를 향유하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은 그 정서적 질과 풍요함에 있어서 많은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모든 문화적인 것들도 마찬가지이리라.
사람은 늘 변화해야 하고 변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말하곤 한다. 내가 유일하게 설파하는 주장일 것이다. 내가 살아온 나날들에서 얻어진 지혜고 교훈이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변화를 즐기는 것이다. 물론 정신적, 정서적 측면에서 말이다. 사람은 변화해야 지루함에서 벗어나고, 삶의 활력을 얻는다. 공자님도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하고 새로운 걸 배우는 것과 그걸 익히는 것을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으로 책 맨 앞에 써놓지 않았나. 공자님은 맹자님처럼 논쟁적이지 않고, 그래서 똑똑하거나 유식해 보이지 않고, 노장처럼 온 우주를 꿰뚫어본 듯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감성적이고, 시적이며, 은유적이다. 거창한 것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 사는 일에 대해 말한다. 그것도 직설적으로 설명한 것이 하나도 없다. 어떤 땐 이 말이 저 말 같고 저 말이 이 말 같아서 답답하다. 그래도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대로 날아간다면 공자님만 만나고 돌아올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은 대면하기 부담스럽다. 핏대를 세워 논쟁하거나 세계를 논할 마음이 내게는 없다. 그럴 시간이 있다면 산에나 한 번 더 가지. 어느 봄날 이상한 모자를 쓴 공자님을 만나서 꽃 잎 떨어진 차 한 잔을 마시며 애매모호한 말들에 대해 물어보고 그 대답을 듣는 상상이 나를 즐겁게 한다. 그때는 제발 등산복은 벗고 가리라.
암장에서의 처음 몇 달간은 자신감과 좌절감의 반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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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도 벽의 기본코스를 어느 정도 마스터했을 때, 105도 벽 앞으로 갔다. 암장선배들(나이는 어리지만)이 어서 오라고들 야단이었다. 105도 벽은 말 그대로 윗부분이 나한테 쏟아지도록 기울어진 ‘오버’ 벽이다. 내가 다니는 암장에서는 105도 벽의 첫 번째 코스를 ‘깍쟁이 연습코스’로 설정해 놓았다. 어디 씌어 있는 건 아니지만 누구나 그 벽 앞에 가면 맨 먼저 그 코스를 하는 것이다. 그건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전해져 온 암장의 전통이랄까 관습 같은 것이다. 우리 암장은 1991년엔가 생겼다고 하니까 설핏 보아 신식은 아니지만 대신 차곡차곡 쌓인 노하우들이 홀드와 홀드 사이에 유서 깊게 배어 있다. 암장을 거쳐 간 수많은 클라이머들의 입김이 공기에 녹아 있어 격한 운동 사이에 깊은 숨을 토해내고 있노라면 도란도란 말소리들이 들린다. 105도 벽에서 제일 먼저 깍쟁이 연습코스를 하게 하는 것은 아직 손가락 힘이 발달하지 않은 초보자에게 그 정도 난이도가 알맞기 때문이란다. 홀드들도 크고 보폭도 넓지 않다고 또 다른 소리가 웅얼거리며 말한다. 근육은 팔의 윗부분에서부터 아랫부분으로, 손등으로, 손가락으로 발달해 내려오는데, 그래서 암장운동을 하면 팔 힘은 비교적 단기간에 생기지만 손가락 힘까지 충분히 생기려면 수 년 이상이 걸린다고. 이 연습코스를 네 바퀴 돌면 원주 간현암에 가서 난이도 10B인 진짜 깍쟁이 루트에 줄을 걸 수 있다고 그들은 은근히 나를 부추겼다.
첫 번째 홀드를 잡고 매달려 보았다. 무릎 높이에 박혀 있는 홀드라 두 손으로 잡자마자 양다리를 개구리처럼 완전히 접고 앉아야 했다. 엄청난 힘이 들었다. 120도, 135도 벽에 비하면 살짝 기운 것 같은데도 90도 벽과는 천지차이였다. 죽을 둥 살 둥 매달리다가 뒤로 고꾸라졌다. 다시 매달려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거대한 벽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섭고, 두려웠다. 좌절감이 나를 휘덮었다.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느낌.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할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어쨌든 해보고 또 해봐야지…. 억지 희망을 꾸역꾸역 심었다. 1주일을, 열흘을 첫 번째 홀드에 머물러 있었다. 매번 매달리다가 나자빠졌고, 계속 고꾸라지는 모습을 암장사람들한테 서커스 곡예사처럼 보여야 했다. 보는 이들이 나보다 더 안타까워했지만 나는 솔직히 창피했다. 암장에 가기 싫었고, 가도 재미가 없었다. 손가락 뼈대가 아파서 냉장고 문을 여닫을 때조차 괴로웠다. 그래도 그만 둘 수 없다는 고집이 차돌처럼 굳어갔다. 세상의 웃음거리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얼마나 많은 책들을, 재미를 물리치고 도전한 일인가. 사람들의 조소거리가 되는 것보다 내 자신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평생 후회할 게 겁나서 나는 암장에 출근도장을 찍었다.
몸은 훌륭한 계기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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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쯤 지나자 드디어 첫 번째 홀드를 잡고 일어나 무릎을 쭉 펴고 두 번째 홀드를 잡을 수 있었다. 두 번째 홀드에서 세 번째 홀드를 잡을 때 또 시간을 끌었다. 도무지 잡히지 않다가, 간당간당 잡힐 듯 말 듯하다가, 어느 날 잡히고, 한 번 잡힌 홀드는 몸이 정확하게 기억했다. 신기했다. 몸은 훌륭한 계기판이었다. 자기가 한 번 수용한 동작을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았다. 기억력과는 달랐다. 뇌기능처럼 들쑥날쑥 믿을 수 없는 게 아니었다. 선배들이 또 중얼거렸다. 그러니 천천히 하라고. 근육이 기억하도록 아주 천천히 동작해 보라고. 빨리빨리 하면 숙달은 되지만 효과가 적다고.
처음 105도 벽에 왔을 때의 두려움이 가시기 시작했다. 도저히 접근조차 안 되던 홀드들도 계속 시도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잡히고, 한 번 잡힌 홀드는 다음에 기어이 잡힌다는 확신이 나를 들뜨게 했다. 다른 말로 하면 실패의 연속 과정이 목표를 향해 근육을 강화시키고 힘을 키운 것이리라. 실패가 거듭될수록 노력의 질도 비례해 높아졌다. 지난번엔 이렇게 했더니 안 되고 저지난번엔 저렇게 했더니 안 되었으니 이번엔 플러스 마이너스하여 요렇게 해보자…. 그런 식으로 종합 분석해 요령을 찾아 헤맸고, 이 과정이 실패의 다른 이름이었으며, 성공으로 접근해 가는 길이었다. 고군분투의 시간들이 쌓여 실력이 되는 것 같았다.
암장에 가는 시간이 기다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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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장에 다닌 지 얼마나 오래 되었어요?”하고 묻곤 했는데 이젠 그런 질문을 하지 않게 되었다. 얼마나 오래 다녔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열심히 꾸준히 했는지가 관건이었다. 열정과 노력과 지구력. 그 3종 배합이 운동에서도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냈다.
의식보다 몸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에서 의식이 나오고, 자신감도, 긍정적 기운도 몸에서 나오는 게 느껴졌다. 노래가 저절로 흥얼거려졌고, 암장에 가는 시간이 기다려졌다.
며칠 뒤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무술 고수들이 나왔다. 합기도, 킥복싱, 가라데, 무에 타이, 태껸… 그들이 차례로 자기들 무술의 현란한 묘기를 선보였다. 번개가 치는 것 같았고, 강한 힘이 동작을 관통했다. 사회자가 물었다. 어떻게 그 무술을 그렇게 잘하게 되었느냐고. 출연자들은 하나같이 반복 연습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대답했다. 나는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특별한 요령이나 방법이 없다는 것. 운동은 오직 한 방향으로만 나아가고, 반복하면 안 되던 것이 되고, 더 반복하면 빨라진다고. 그 빠름에서 힘이 나온다고 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진리를 나만 모르고 있다가 이제야 깨달은 것 같았다.
그러나 105도 벽은 설 때마다 만만치 않았다. 몸체가 발뒤꿈치보다 뒤로 기울어야 하는 역자세여서 그런 것 같았다. 인간은 직립 보행하는 동물이 아닌가. 똑바로 서서 걷고, 몸을 앞으로는 굽힐 수 있지만 뒤로는 굽힐 수 없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인체구조상의 문제인지 진화가 그렇게 돼온 것인지 전문적인 지식이 없어서 모르겠다. 하여간 뒤로 굽힐 수 없는 몸을 억지로 뒤로 기울이는 자세 자체가 자연에 반한 것이고, 그런 자세로 벽에 매달리려니 쉬울 수가 없었다.
암장에 다닌 지 석 달이 되어서야 겨우 깍쟁이 연습루트를 한 바퀴 돌게 되었다.
한 바퀴 돌게 되자 욕심이 났다. 빨리 한 바퀴 더 돌아야지, 그래서 어서 네 바퀴를 연이어 돌아야지…. 마음이 급했다. 나는 그 날 시계를 보며 15분에 한 번씩 돌았다. 오늘은 다섯 번 돌고, 내일은 여섯 번 돌고, 모레는 일곱 번 돌아야지. 인터벌도 10분으로 줄여야지. 다음주에는 연속 두 바퀴를 돌아봐야지…. 나는 그렇게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번번이 힘이 부쳤다. 어디서 힘을 좀 줄일까. 나는 내 동작 하나하나를 점검해 보며 개선책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이 도는 것을 유심히 관찰했고, 내가 하던 것과 비교했다. 네 바퀴를 연이어 도는 사람들이 클로즈업되어 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경쟁심이 없다고 생각해 왔는데 나도 모르게 피가 끓어오르곤 했다. 아슬아슬 겨우 한 바퀴를 도는 주제에 잘하는 사람들이 내려오면 즉각 벽으로 올라가 그들의 동작을 흉내내 보았다. 팔을 X자로 깊게 엇갈려 잡는 동작을 열댓 번이나 거듭 해보던 중 오른쪽 팔꿈치에서 툭 소리가 났다. 순간 팔에서 힘이 제로 상태로 사라졌다. 육신에서 영혼이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나는 벽에서 내려와, 덜렁덜렁하는 팔을 늘어뜨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밤새도록 팔이 쑤시고 아팠다. 하필 다음날 여행이 계획되어 있었고, 취소할 수 없었다. 나는 여행 중 팔이 아파 제정신이 아니었다.
봄이 왔고, 내 팔에도 피가 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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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와서 치료에 들어갔다. 팔꿈치 인대가 늘어나고 근막이 상했다고 했다. 의사는 내가 암벽산행을 한다는 사실을 미더워하지 않았다. 몸에 근육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하긴 나는 평생 운동을 하지 않았다. 남들처럼 철봉도 하고 아령도 하고 팔굽혀펴기도 했으면 좋았을 것을! 의사는 근육량이 많아야 강한 운동을 해도 그것을 받아들여 소화해 내는데 나 정도로는 어림없다고 혀를 찼다. 그러니 암벽등반 같은 걸 하려면 근육부터 키우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근육을 키우려면 암장운동을 해야 하고, 암장운동을 조금만 심하게 하면 근육이 다치는 꼴이니 딜레마가 아닐 수 없었다.
며칠 치료 받으면 나으려니 생각했는데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도 팔은 낫지 않았다. 오른팔에 전혀 힘을 줄 수 없었고, 움직일 때마다 통증이 느껴졌다. 물리치료를 열심히 받았지만 그때뿐, 집에 돌아오면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걸 확인해야 했다.
속이 부글부글 끓고, 약이 올랐다. 차근차근 잘 해왔는데, 이만큼 쌓아왔는데 와르르 무너진 느낌. 생각하면 할수록 억울했다.
암장사람들은 나를 볼 때마다 자기들이 다쳤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이불문, 다친 경험이 없는 사람이 없었다. 어떤 사람은 6개월 만에, 혹은 1년 만에 나았다고 했고, 3년, 4년 동안 운동을 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나는 초조했다. 3년, 4년 기다려야 한다면 나의 도전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고, 1년이나 6개월도 사실 기다릴 수 없었다.
나는 갖은 방법을 다 동원했다. 큰 물통을 사서 뜨거운 물을 채우고 아픈 팔을 하루에 대여섯 번씩 담갔다. 그러자 어느 날 부드러워지는 듯, 조금씩 나아지는 기미가 왔다. 역시 혈액순환이 가장 큰 치료제였다.
나는 암장에 계속 나갔다. 벽에 매달릴 수는 없었지만 기초운동만이라도 하고 돌아왔다. 남들이 나비처럼, 발레리나처럼 벽을 날아다니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다 돌아왔다. 그렇게 석 달을 흘려보냈다.
봄이 왔고, 내 팔에도 피가 돌기 시작했다.
나는 팔을 달래가면서 살짝살짝 홀드에 매달려보았다. 욕심은 금물이었다. 남들과 비교하는 것도 독약이나 마찬가지였다. 운동은 정말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하고 자기를 완전하게 조절해야 했다. 의욕과 힘만으로는 되지 않았다. 항상 인체의 상태를 점검하며 진도를 생각해야 했다. 그래야 다치지 않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또 하나 있었다.
인체가 무리 없이 버틸 수 있도록 점진적으로 꾸준히 나아가되, 무르익었을 때 확 도약하는 것도 필요했다. 그래야 더 나은 그레이드로 승급할 수 있었다. 도약하지 않으면 평생 제자리였다. 특히 힘을 쓰는 운동은, 언제나 힘이 들므로, 그것에 복종만 해서는 안 되었다. 도약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했다. <계속>
- 글 이청해님 월간 산 2012, 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