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알프스
- 고려인의 숨결과 분단현실 느끼게 하는 '아시아의 알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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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터폴 트레일~프리코리아 베이스캠프 트레킹
- 워터폴 트레일~프리코리아 베이스캠프 트레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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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가 키르기스스탄에 가까워졌을 때 창밖을 내다보았다. 프리코리아(Free Korea·4,740m)가 있는 악사이산군이 보인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해발 4,000m가 넘는 높은 산, 큰 산은 언제나 가슴을 설레게 한다. 그러나 시선을 이리저리 옮겨도 악사이산군은 보이지 않았다.
8월 20일, 알라르차국립공원으로 가는 사이 수도 비슈케크(Bishkek) 시내 끄트머리에 흰 산이 보였다. 현지 한국인 가이드 엄아사씨가 가르쳐 준 다음에야 악사이산군이 희미하게 바라보였다. 비슈케크 시내에서 내리 1시간을 달렸다. 흰 산이 점차 다가와 알라르차국립공원에 이르렀다. 계곡 건너로 다채로운 색깔의 집들이 일률적인 모양으로 자리했다. 과거 이곳이 사회주의공화국이었다는 것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1인당 60솜(한화 20~25원)의 부담스럽지 않는 입장료를 지불하고서 공원으로 들어섰다. 버스는 한동안 덜컹대며 다소 거친 흙길을 내달렸다. 창밖으로는 부드러운 능선과 가냘픈 강줄기 너머로 소와 말, 양떼가 풀을 뜯고 있다. 삼나무 숲이 나오더니 고개를 반대로 돌리자 크리스마스트리에 어울릴 듯한 구상나무가 촘촘히 서 있다. 높은 산만큼 국립공원의 규모를 실감케 하는 대자연이다. 더 이상 차가 진입할 수 없는 곳에 이르러 트레킹이 시작되었다. 비슈케크에서 40km 거리였다.
- ▲ 워터폴 트레일에서 바라본 알라르차국립공원의 풍경.
- 유럽 알프스에 버금갈 만큼 아름다운 풍광
알라르차는 아랍어로 ‘신의 산’이란 뜻이다. 악사이의 ‘악(Ak)’은 키르기스어로 ‘흰 눈’, 사이(Sai)는 ‘계곡’을 뜻한다. 주변의 산군 지명도 하나같이 ‘악수’, ‘악토’로 불리는데 이는 ‘눈 덮인 흰 산’을 말한다. 백두산의 ‘백두’나 히말라야의 ‘히말’의 뜻이 ‘흰 산’인 것처럼….
처음 이 산에 갈 때 의문이 하나 생겼다. 낮선 키르기스스탄 땅에 ‘프리코리아’, ‘스보보드나야 까레야(4,740m)’라고도 불리는 암봉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해방 한국’의 뜻이라니. 프리코리아 봉우리는 1952년 6·25전쟁 당시 러시아인들에 의해서 초등됐다. 구소련 통치하에 키르기스스탄 산악인들이 자본주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명명한 이름으로 ‘북한을 지지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렇다면 프리코리아로 붙여진 이름이 그들과 큰 관계가 있을까?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난 역사를 되짚어봐야 한다.
며칠 전 이곳 시장에서 장을 보는 길에 어떤 노인이 말을 걸어왔다. 그가 ‘까레야’라고 했을 때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한국에서 왔다고 했더니 그가 자기를 가리켜 ‘까레야’라 하며 미소를 지었다. 책에서만 보고 듣던 고려인, 까레이스키였다. 그러고 보니 검은 눈과 머리카락, 이목구비가 우리와 닮았다.
- ▲ 산행 코스가 전체적으로 완만한 산길은 협곡의 계류 소리를 들으며 걸을 수 있다.
- ▲ 계곡 건너로는 일률적인 모양에 다채로운 색깔의 집들이 자리한다. 키르기스스탄의 사회주의공화국 시절을 연상케 하는 가옥들이다.
- 1937년 소련은 자국민 보호를 위해 스탈린이 타민족 강제이주정책을 펼친다. 그로 인해 약 18만 명의 고려인들이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지로 강제 이주되었다. 중앙아시아는 그런 곳이었다. 황무지에 내팽개쳐진 고려인들의 역사는 알라르차국립공원의 매혹적인 경관과는 대조적으로 소수민족의 비애가 서려 있었다.
그들의 채취를 느끼며 프리코리아 봉우리를 향해 트레킹에 나섰다. 그곳에 뭐가 숨어 있을까 싶은 숲 속으로 들어서자 빙하수를 흐르는 계곡과 하늘을 찌를 듯 치솟은 삼나무 숲이 펼쳐진다. 우거진 나무, 그 나무를 타고 오르는 덩굴은 우리나라와 차원이 다른 원시림이다. 계곡 따라 잘 정돈돼 있는 등산로는 많은 사람들이 다닌 듯했다.
두 갈래의 길. 악사이 워터폴 트레일(Waterfall Trail·3.75km)과 알라르차 리버 트레일(River Trail·1.3km)이 표시된 안내판이 서 있다. 우리 팀이 등반할 프리코리아로 이어지는 좌측의 워터폴 트레일로 걸음을 옮긴다. 3.75km 길이의 다소 짧은 트레킹 코스였다. 하지만 시작에 불과했다. 막상 걸어 보니 이정표 상의 거리는 폭포까지였다. 우리가 목표로 한 프리코리아를 보기 위해서는 라첵산장(3,200m)까지 3km를 더 가야 한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숲은 더욱 원시림으로 변한다. 편백나무같이 쭉쭉 뻗은 아름드리나무들이 군락을 이룬다. 간혹 넘어져 있는 고목은 자연 상태의 숲을 그대로 보여 준다. 인간의 손때가 전혀 묻지 않은 산 같다.
트레킹 시작 후 첫 계곡을 만났다. 쉬고 있던 트레커들이 더 이상 올라가면 물이 없다고 일러 준다. 마실 수 있는 물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일제히 계곡 물을 그대로 한 모금씩 마셨다. 속이 시원하다.
- 워터폴 트레일~프리코리아 베이스캠프 트레킹
- 계곡이 끝나자 길이 가팔라진다. 한 시간쯤 지났을 무렵 완만한 능선에 올라서더니 숲이 사라지고 초원이 펼쳐졌다. 수목한계점을 넘은 것이다. 초원에 외국 트레커들의 텐트가 눈에 띈다. 텐트 안에는 인기척이 없다. 문이 굳게 닫혀 있는 것이 트레킹을 나간 것 같다. 우리도 시간이 허락한다면 텐트를 치고 쉬었다 가고 싶었다.
저 멀리 악사이 워터폴이 보였다. 약 20m 높이의 물줄기는 가느다랗게 떨어지면서 하늘에 흩날리고 있었다. 사진에서 봤던 웅장함은 없었다. 폭포까지는 어림잡아 1시간. 이것을 보기 위해 여기 오겠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폭포로 이어지는 길은 노랗게 물든 풀이 하늘거리며 운치가 있었다. 풍광이 유럽 알프스에 버금갈 정도다.
알라르차국립공원은 ‘아시아의 알프스’라 불린다. 산행 코스가 전체적으로 완만해 초보자나 어린이와 노약자도 무리 없이 트레킹이 가능하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깨끗한 자연환경, 깊은 협곡과 만년설을 이고 있는 산, 거기에 빙하 탐방에 이르기까지 아기자기한 맛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 라첵 베이스캠프 너머로 거대한 악사이빙하와 함께 코로나 (왕관봉ㆍ4,860m), 프리코리아(4,740m) 봉을 감상할 수 있다.
- 고산 식물 보자 까레이스키의 끈질긴 생명력 떠올라
국립공원 입구에서 라첵산장까지 4시간 반이면 오른다. 내려오는 시간을 감안하면 왕복 7시간은 걸린다. 협곡의 계류 소리가 울려 퍼지는 산길을 걸어 고도를 높이는 사이 아침 일찍 올랐던 트레커들이 하산한다. 하지만 우리 일행 6명은 15일 일정으로 프리코리아를 등반하기 위해 라첵산장 부근에서 야영을 한다.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기 때문에 충분히 자연을 즐기며 오르면 된다.
폭포를 지나 올라갈수록 가파른 너덜지대가 연속으로 나타난다. 주위에는 바람을 막아줄 나무와 풀이 없는 탓인지 바람이 거세다. 300m 길이의 가파른 산길을 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 겨우 능선 위로 올라섰다. V자 협곡 사이로 팻말이 눈에 들어온다. ‘라첵산장’이라 적힌 나무 팻말 뒤로 여러 사람이 쉴 수 있는 널찍한 공터가 나왔다. 캠핑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공터였다. 안으로 더 들어가자 트레커들이 텐트촌을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그 너머로 악사이의 최고봉 코로나(왕관봉·4,860m)가 만년설을 이고 있었다. 드디어 라첵산장에 도착했다. 트레킹 시작 5시간 만이었다.
풍광을 눈에 담으려 텐트촌 앞쪽 능선에 올라섰다. 말발굽처럼 휘어진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좌측의 코로나와 우측의 복스피크(4,240m)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더니 멀리 중앙에 악사이빙하 위로 하얗게 빛나는 벽이 나타났다. 프리코리아였다.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이 정말 알프스의 풍경과 닮아 있다.
프리코리아를 향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서다 저절로 발걸음이 멈춰졌다. 너덜지대 위에 놓인 이름 모를 식물이 눈에 들어왔다. 고산지대에서 돌과 돌 사이로 싹을 틔우는 것만 해도 힘들겠다 싶었다. 발길을 옮기다 다시 한 번 되돌아본다. 거친 환경에도 끈질긴 생명력을 보이는 식물을 통해 까레이스키가 오버랩된다. 러시아인들이 초등하고 이름을 붙인 프리코리아. 이 길의 끝! 그들은 무엇을 떠올리고 무엇을 생각했을까. 그 시대를 회상하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 ▲ 일반 트레커들은 라첵 빙하를 구경하기 위해서 이곳까지 트레킹을 한다.
- ▲ 상당히 넓은 면적의 라첵 베이스캠프(3,200m). 전문산악인과 트레커들의 야영지로 이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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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킹 팁
알라르차국립공원의 산들이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트레킹 코스 또한 부드럽고 편안하다. 공원 곳곳에 대피소가 설치돼 있으며 텐트와 필요한 물품을 가져가면 어디서든 야영이 가능하다.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겨울 시즌에는 눈이 많아 동계 장비를 챙겨야 한다. 좀더 전문적인 산악인이라면 아이젠을 차고 코로나 최고봉까지 트레킹도 할 수 있다.
교통 올해 7월 15일부터 에어비슈케크항공이 인천공항과 비슈케크를 잇는 직항 운항을 재개했다. 인천공항을 출발해서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공항을 경유,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 노선도 운항한다. 항공료는 90만~120만 원선으로, 미리 티케팅하면 좀더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7~8시간 소요.
식료품 구입 마트와 시장에서 원하는 식재료 구입이 가능하다. 고려인 상점에는 신라면과 고추장, 소주도 있다. 하지만 가격이 국내에 비해 두 배 정도 비싸므로 미리 준비하는 게 좋다. 오르투싸이 바자르에서는 신선한 과일과 채소를 저렴한 가격에 구할 수 있다. 다만 공산품은 수입에 의존하는 터라 우리나라에 비해 비싸고 질이 떨어진다.
[해외 트레킹ㅣ키르기스스탄 알라르차국립공원]
- 글·사진 염동우 기자 /월간 산 2014,01.
- 글·사진 염동우 기자 /월간 산 2014,01.
- 워터폴 트레일~프리코리아 베이스캠프 트레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