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허우범의 실크로드 7000㎞ 대장정③
paxlee
2014. 5. 19. 20:47
한무제의 인기를 능가한 청년 장수 곽거병
'사방은 경계가 없고, 백성은 다른 나라가 없다'
가희(歌姬)인 위자부가 무제의 황후가 되자 그녀의 친척들도 속속 무제의 신임을 받는다. 동생인 위청(衛靑)과 아들들은 물론, 조카인 곽거병(霍去病)까지도 포함된다. 특히, 무제는 위청과 곽거병의 무용(武勇)이 맘에 쏙 들었는데, 이들은 후에 흉노와의 전쟁에서 혁혁한 전과를 세움으로서 무제의 사람 보는 안목이 적중했음을 입증해준다.
한나라와 흉노의 숙명 같은 전쟁
무릉에서 동쪽으로 약 1㎞ 떨어진 곳에 위청과 곽거병의 묘가 있다. 무제가 신임한 최고의 장수인 두 사람의 묘는 무릉의 배장묘(陪葬墓) 역할을 하고 있는데, 곽거병묘가 오히려 무릉보다 정비와 보존이 잘되어 있다. ‘현대의 루쉰’으로 불리는 중국의 문화사학자 여추우(余秋雨)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중국인들은 황제보다 황제의 명을 받아 흉노를 물리친 장군을 더욱 흠모하는 것 같다.
한나라의 흉노와의 전쟁은 고조 유방 때부터 치욕으로 일관됐다. 이때 흉노의 군주는 최전성기를 이끈 묵돌선우(冒頓單于)다. 그의 유인책에 걸린 고조의 군대는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대동(大同) 부근의 평성(平城)에서 포위된다. 이 포위는 눈 내리는 한 겨울 일주일간이나 지속되었는데, 고조는 선우의 부인에게 갖은 보화를 뇌물로 바치고 포위가 느슨한 틈을 타서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한다. 이를 일러 ‘평성의 치욕’이라 한다.
묵돌선우가 여태후에게 보낸 희롱 편지
- 묵돌선우가 여태후에게 보낸 편지와 여태후의 답신 기록.
“저는 기력이 쇠하여 이도, 머리카락도 모두 빠지고 걸음걷기도 힘든 늙은이일 뿐입니다. 선우께서는 어디서 그런 소문을 들으셨는지 모르겠으나 신분을 낮추시면서까지 저를 찾아오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의 나라는 아무 잘못도 없으니 선우께서 관용을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어가 두 대와 준마 두 필을 바치오니 평소 필요하실 때 사용하시기 바라옵니다.”
흉노에 대한 회유책은 제4대 황제인 경제(敬帝) 때까지 계속된다. 명주옷, 비단외투, 허리금속장식, 갖가지 옷감 및 곡물 등을 매년 흉노에게 바쳤다. 황족의 딸도 흉노에게 시집보냈다. 한나라로서는 굴욕적인 평화를 유지한 것이다. 무제는 오랫동안 계속된 이러한 굴욕을 설욕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라고 생각했다.
무제가 재위에 오른 지 7년(B.C135년). 두태후가 사망하자, 스물두 살 젊은 황제의 친정(親政)이 시작된다. 중앙집권을 강화한 무제는 그로 인해 든든한 경제력을 구축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준비한 흉노와의 전쟁을 시작한다. 하지만 첫 번째 흉노공략은 실패한다. 지금의 산서성 대동 부근의 마읍(馬邑)으로 흉노를 유인하여 공격할 참이었는데, 이를 간파한 흉노가 군대를 철수시켰기 때문이다. ‘평성의 치욕’을 씻기 위한 공략이 ‘마읍의 수치’를 보탠 꼴이 되었다.
흉노설욕의 명장 곽거병
본격적인 흉노설욕전은 그로부터 5년 후인 원광 6년(B.C.129)에 이뤄진다. 이 전투에서 일등공신은 위황후의 동생 위청이다. 그는 한나라가 건국한 이래로 만리장성을 넘어 북방으로 진격하여 승전보를 올린 최초의 주인공이다.
위청은 10여 년간(B.C129-119) 모두 7번을 출병하여 흉노를 무찔렀는데 5만여 명을 참수하거나 포로로 잡았다고 한다. 무제는 위청의 혁혁한 전과를 치하하여 그때마다 식읍을 내렸고, 세 명의 어린 자식을 제후에 봉했다.
- 무릉박물관 안의 곽거병묘.
“용감한 것도 좋지만 병법도 공부를 해보는 게 좋지 않겠는가?”
“어떤 전략을 쓸 것인가는 상황에 따라 변하기 마련입니다. 새삼스레 낡은 병법을 배우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대를 위하여 저택을 마련했노라.”
“흉노가 아직 멸망하지 않았는데 집을 꾸미고 살 필요가 없습니다.‘”
곽거병을 너무도 사랑한 무제
무제는 곽거병을 아주 사랑했다. 글도 모르고 우직하기만한 위청보다 재기발랄한 곽거병이 무제의 마음에 들었다. 무제의 특기인 인재발탁은 또다시 성공을 거둔다. 표기장군(票騎將軍)에 오른 스무 살의 곽거병은 기병 1만 명을 이끌고 흉노의 거점인 기련산(祁連山)까지 진격하여 흉노군을 격파하자 패전의 문책이 두려웠던 혼야왕(渾邪王)은 수 만여 명의 군사와 함께 투항한다. 36세의 황제는 너무 감격한 나머지 곽거병에게 대장군 위청과 동등하게 대사마(大司馬)에 임명한다. 대장군 위청의 시대가 가고 표기장군 곽거병의 시대가 온 것이다.
곽거병의 흉노정벌로 감숙성의 하서지역은 한나라 영토로 편입되고 흉노는 막북(漠北), 즉 고비사막 이북으로 달아나 더 이상 한나라를 넘보지 못했다. 흉노는 천지가 뒤집히고 억장이 끊어질 일이지만 어쩌겠는가. 이 또한 한나라가 언제까지나 발아래 있을 것이라는 오만과 나태에서 비롯된 것임을. 중요한 요충지이자 삶의 터전을 빼앗긴 흉노는 노래로서 슬픈 마음을 표현할 뿐이었다.
우리 이제 기련산을 빼앗겨 가축들을 먹일 곳이 없네.
우리 이제 언지산을 잃어버려 여인들은 화장도 할 수가 없네.
흉노정벌이 완성되어 서역으로 통하는 교통로인 감숙성을 얻게 되자, 최고 공로자인 곽거병이 24살로 요절한다. 곽거병의 죽음은 서역정벌을 구상한 무제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무제는 엄숙하고 성대하게 장사를 지내도록 명했다. 철갑군을 동원하여 장안에서 자신의 능으로 조성하던 무릉(武陵)까지 행렬하도록 했다. 이처럼 곽거병에 대한 무제의 사랑은 죽어서도 같이 있고 싶었을 정도였다. 무제는 곽거병에게 경환후(景桓侯)라는 시호를 내렸는데 ‘무용을 드높여 영토를 확장했다’는 뜻이다. 분묘도 그가 흉노와의 전장에서 승리를 거둔 기련산의 모양을 본뜨게 했다.
곽거병묘 정상에 올라야 위청의 묘가 보이고
- 무릉박물관 입구.
무제의 이러한 행동의 이면에는 ‘땅에는 사방의 경계가 없고, 백성에게는 다른 나라가 없다’는 중국적 논리가 숨어 있다. 즉, 중원 땅은 물론 오랑캐의 영토까지도 황제의 지배하에 두려는 야심의 반영이기도 하다. 총명한 무제가 유교를 국교로 정한 까닭도 군신관계에 있어서 군주의 절대적인 권한과 신하의 지극한 충성만이 용납되는 통치방식이 유교의 기본정신임을 알았기 때문이리라.
- 곽거병묘(오른쪽)와 위청묘.
대장군 위청은 항상 진중한 자세로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였다. 곽거병이 쉽게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숙부인 위청의 용맹이 흉노에게 너무나 강하게 각인되어 있어서 함부로 하지 못한 점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의 묘가 조카의 묘에 비해 초라해 보인다. 하지만 무덤의 크고 작음이 무슨 대단한 일이던가. 후세의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고 기억되는 것이면 그것으로 족한 일이 아니겠는가. 대장군 위청의 진중하고 과묵한 얼굴이 햇살에 미소를 짓는다. 그 미소 한 가닥이 청량한 바람을 타고 곽거병묘 너머로 흘러간다.
- 허우범 역사 기행 전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