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동양철학 인생과 맞짱뜨다
[서평] 동양철학 인생과 맞짱뜨다
중국 철학사
철학의 양대산맥은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이 항상 서로 마주 보면서 발전해오고 있다. 서양 철학사를 보면 스승과 제자, 선배와 후배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치열한 논전을 벌이는 경우가 아주 많다. 플라톤의 말에 따르면 참다운 존재는 초월적인 이데아의 세계에 있고, 현실의 존재는 이데아를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데아가 원본이라면 현실은 복제품의 세상일 뿐이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초월적인 이데아를 부정하고 현실의 개별적인 사물만이 실재한다고 보았다. 개별적 사물은 단순히 원본을 베낀 껍데기가 아니라 그 안에 목적, 방향, 운동, 가치 등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서양철학은 출발 단계에서부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를 전혀 다르게 바라보았다. 이를 두고 '부친 살해(patricide)'의 전통이라고 말한다.
동양철학사는 스승과 제자, 선배와 후배가 서로 닮았음을 강조한다. 맹자와 순자는 서로 자신이 공자를 더 많이 닮았다며 경쟁하는 모양새를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얼마나 공자와 다른 새로운 주장을 펼치고 있는지의 '선명성'을 내세우기보다는 얼마나 공자와 같은 주장을 펼치고 있는지의 '유사성'을 내세우고 있다. 공자의 사상에 대해 맹자는 인자무적(仁者無敵)의 측면에서 재해석하고, 순자는 예(禮)의 측면에서 재해석하며 그들은 자신의 관점이 공자의 사상을 제대로 계승하고 있다고 항변하였다. 이렇게 상반된 철학사를 배우면서 동양철학에도 부정과 비판의 내용이 있는가? 그런 문제들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하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 책의 저자 신정근 교수의 '동양철학 인생과 맞짱뜨다'를 읽어 보기로 한다.
서양을 모험과 도전의 문화로 이해한다면, 동양은 효도와 희생의 문화로 규정할 수 있다. 중국 전국세대의 맹자와 닮은 인물을 서양의 문학사에서 찾는다면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의 주인공 '돈티호테'와 '맹자'가 꽤나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돈키호테는 중세의 기사 이야기에 빠져 살다가 실제로 기사 수업을 받기 위해 애마 로시난테를 타고 시종인 산초와 함께 모험의 길을 떠난다. 그는 도중에 풍차를 거인으로 여겨 산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돌격을 외친다. 뿐만 아니라 풍차의 날개에 떠받쳐 공격에 실패하고서도 풍차의 정체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기사로 변신한 친구와의 결투에서 패배한 뒤에야 돈키호테는 비로소 무기를 내려놓고 이성을 되찾는다.
맹자는 전쟁으로인한 살상의 세대에 성선(性善)의 가치를 내걸었다. 그는 제자와 함께 주위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성선의 세계를 일구고자 했다. 제후들의 거듭된 무관심과 냉대에도 불구하고 맹자는 자신의 소신을 꺾지 않았다. 그는 현실에서 소외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늘과 성인의 혁명을 긍정하며 현실 변혁의 가능성을 신뢰했다. 돈키호테와 맹자는 다른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분명히 '참'의 세계가 어딘가에 있다고 굳게 믿었다. 또한 위기에 부딪쳐도 자신들의 오류와 실패를 시인하지 않았다. 그들은 현실이 주술과 마술에 결려 있다거나 현상의 사람이 소체(小體)의 욕망에 빠져 있다고 보았다.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와 산초라는 두 인물을 통해 인간의 이상적인 측면과 현실적인 측면을 잘 포착하고 있다. 그래서 돈키호테는 진정으로 인간을 그린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맹자는 대체(大體)와 소체를 통해 사람이 도덕적 이상으로 향하는 측면과 감각적 쾌락으로 바빠지는 측면을 잘 대배시키고 있다. 맹자는 성선(性善)의 발견만큼이나 대체와 소체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이중성의 설정이 돋보인다. 맹자는 성선의 기치를 내걸며 소체의 욕망을 누르고 대체의 길을 따라가려 했다. 돈키호테와 겹쳐서 바라보니 맹자가 얼마나 인간에 다가가려 했는지를 분명히 알수있다. 그는 성선을 인간의 향기로 보았고, 그것을 맡기위해 모험에 찬 여행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진리란 무엇인가?
진리(眞理)는 하나의 특정한 꼴이 아니라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 즉 책도 진리이고, 말도 진리이고, 신도 진리이고, 역사도 진리이다. 진리가 하나가 아니고 이렇게 다양 하다보니 진리가 어디있는지에 대한 생각이 문화권마다 다를 수 밖에 없다. 중국 사람들은 진리가 경(經)에 있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역경(易經)', '시경(時經)', '서경(書經)'등이 그것이다. 경의 의미와 풀이를 위해 일찍부터 경을 연구하는 학문이 생겨났다. 그것이 바로 경학(經學)이다. 경에 쓰인 언어와 구문은 고대의 언어인지라 후대 사람들이 해석하기엔 어려웠다. 그래서 이를 풀이하기 위해 전(傳)이 쓰였다. 경의 의미가 시대를 넘어 다음 세대로 '전'해져야 했기 때문이다.
옛날에도 소송이 발생하면 공정한 재판의 근거로 '춘추(春秋)가 그 역할을 해 주었다. 춘추에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그 사실이 타당한지 부당한지에 대한 평가가 내려져 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춘추의 어떤 기록과 비슷한지 참조해서 송사를 판별하곤 했다. 이를 춘추결옥(春秋結獄)이라고 했다. '경'이나 '경전'이 한 사회를 유지하고 지탱하는 근거가 되면서 그 지위가 절대화 되었다. 사람들은 무슨일이 있을 때마다 '어떤 경에 따르면', '무슨 경의 어떤 구절에 따르면'이라는 말로 자기주장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했다. 조선시대를 뒤흔들었던 '예송(禮訟)도 각자 다른 경전을 근거로 자기주장의 타당성을 밝힌 바 있다. 경전은 오늘날 헌법과 벌률처럼 세분화 되지는 않았지만 결코 그것에 뒤지지 않는 역할과 권위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경(經)은 지도의 축소처럼 추상적인 언어로 서술되어 있다. 경이 아무리 세상의 모든 진리를 담고 있다 한들 과연 내가 처한 구체적인 상황에 답을 줄 수 있을까? 답을 줄수 있다 하더라도 그 많은 경을 어찌 다 읽을 수 있을까? 철학자들은 이러한 의문을 풀기위해 심(心)을 끌어들여 복잡한 논의가 진행된다. 첫째 진리는 경전에도 있고 사람의 마음에도 있다. 경전의 진리는 누구도 훼손할 수 없지만 마음의 진리는 욕망에 의해 무시될 수 있다. 따라서 마음의 수양도 중요하지만 경전의 학습을 게을리 할 수 없다. 둘째 경전의 진리는 활용하기 어렵지만 마음의 진리는 적시에 활용이 가능하다. 욕망은 마음의 진리를 일시에 방해할 수 있지만 마음의 진리를 압도할 수는 없다. 따라서 경전의 학습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진리가 구체적인 상황에 드러나도록 수양하는 것이 중요하다.
수양의 문제에서 성즉리(性卽理)를 주장했던 주희의 입장을 나타내고, 심즉리(心卽理)를 주장했던 육구연( 陸九淵)의 입장이다. 두 사람의 진리의 존재를 긍정하지만 진리의 소재가 다르다고 보았기 때문에 학습과 수양에서 다른 입장을 나타낸 것이다. 주희는 1175년에 친구 여조겸(呂祖謙)의 주선으로 강서지방 신주에 있는 아호사(鴉湖寺)에서 육구연을 만나게 되는데, 이 만남은 철학사의 명장면으로 남아 있다. 선진시대 공자와 노자의 만남은 다소 전설의 요소를 담고 있지만, 육구연과 주희의 회합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육구연은 시 한 수로 자신의 입장을 펼침과 동시에 주희의 입장을 비판했다. 그 시 안에 두 사람의 차이가 드러나 있다. "황폐한 무덤에서 슬픔이 종묘에서는 공경함이 우러나니, 이는 영원히 닳지 않는 사람의 마음이라네,....간단한 공부는 결국 오래가고 크지만 갈피 없는 사업은 끝내 떳다 가라앉았다 할 뿐이네.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길을 알려면 참과 거짓을 마땅히 지금 당장 가려야 한다네."
육구연은 자연의 진리관을 쉽고 핵심이 분명한 이간(易簡)공부로, 주희의 진리관을 마구 흩어져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지리(支離) 사업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진단에 따라 그 결과도 달라진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이간 공부는 오래 지속되고 위대해지는 반면, 지리 사업은 일시적으로 부침을 거듭하다가 결국 사라져버린다는 것이다. 주희는 육구연의 비판에 책을 뒤져 이것저것 하나씩 알게 되면 일시적으로 모든 것을 해결한 것처럼 기뻐한다. 하지만 이렇게 알게 된 지식은 전체적으로 연결되지 않고 조각 지식으로 남는다. 책을 읽을 때는 분명히 답을 찾은 것 같지만 막상 현상에 부딪치면 어쩔 줄을 몰라 우왕좌왕가게 된다. 육구연은 책을 파먹을 듯이 읽기를 반복해도 진리를 찾을 수 없고, 진리를 찾는다고 해도 제때에 실천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영원히 닳아서 없어지지 않는 불마(不磨), 즉 불멸(不滅)의 마음에 의존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제자백가
중국 철학은 다양한 장르가 많으나, 춘추전국 시대에 '제자백가(諸子百家)'로부터 생겨난 백화제방(百花齊放), 백가쟁명(百家爭鳴)은 여려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을 활발하게 개진해 분위기가 한껏 달아오른 공론장을 가리킨다. 춘추전국과 백가쟁명은 이미 원의로부터 독립해서 새로운 의미의 장을 일구어 낸다. 춘추전국은 주나라가 제후국에 대한 통제력을 잃자 실력자들이 돌아가면서 국제 정세를 주도하던 시대를 이르는 말이다. 제가백가는 춘추전국새대가 나아갈 길을 밝히기 위해 온갖 지혜를 짜냈던 공자, 노자, 맹자, 장자, 순자 등의 사상가를 가리킨다. 제자백가의 춘추전국세대는 중국의 역사를 넘어 인류의 역사에서도 축복받을 만한 지적 향연이 벌어진 시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제자백가의 자유로운 지적 향연의 참여자들로 해석한다면 중국 역사에서 제자백가는 네 차례 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건국 후 문치주의(文治主義)를 표방한 조광윤의 주자학(성리학)이 송나라에서 비롯되었다. 중국 철학사에서 주자학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춘추전국시대의 공자가 후대에 중국의 문화를 대표하는 인물로 추앙받고 있으나 역사적으로 볼때 그는 제자백가 중 한 명이었다. 송나라 주희 역시 훗날 중세 동아시아 문화를 조형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그는 다양한 흐름을 가진 송나라 지성사의 한 명이었다.
유럽의 근대 철학은 보통 영국의 경험론과 대륙의 합리론을 양대 축으로 설정하고 훗날 칸트가 양대 축을 종합한 것으로 정리한다. 송나라의 제자백가도 이러한 도식을 빌린다면 북송시대 사상가들의 다양한 문제 설정을 이은 남송의 지성사는 육구연(陸九淵)의 합리론과 진량(陳亮)의 경험론으로 양분되며 주희가 그 두 흐름을 종합하고자 했다. 주희가 맹자의 합리론과 순자의 경험론을 종합했다고 할 수 있다. 송나라 학인들은 유(儒), 불(佛), 도(道)의 학파를 넘나드는 지적 경험을 바탕으로, 이전까지 전개되어온 철학사를 송두리째 전복하면서 문화의 패러다임을 새롭게 조형하려고 했던 것이다.
동심이 진리이다.
명나라의 걸출한 사상가 이탁오(李卓吾,1527~1602)는 자신의 50년 인생을 굽어보면서 스스로 개(狗)라고 자평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성인의 가르침이 담긴 책을 읽었지만 그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또 공자를 존경했지만 어떤 점이 존경할 만한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른 바 난장이가 겨우 사람들의 가랑이 사이로 연희를 구경하다가 다른 사람들이 재미있다고 소리치면 따라서 재미있다고 소리치며 장단을 맞추는 격이었다. 이처럼 나는 50 이전에 참으로 한 마리 개였다. 앞에 있는 개가 무언가를 보고서 '왈왈' 짖으면 나도 따라서 '왈왈' 짖었다. 만약 누가 나더러 크게 짖는 이유를 물어본다면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벙어리처럼 씩 웃을 뿐이다." 그는 이렇게 솔직하게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사상가이다.
이탁오는 50세에 이르러 진리를 이해하기도 전에 그대로 믿어왔던 지난날의 사상 관습에 제동을 걸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이 지금까지 '알고 믿은 것'이 아니라 '믿고서 안다'고 한 것이니 결국 아무 것도 '모르고 안다'고 한 것이다. 이탁오는 자신을 개로 자각한 뒤 더 이상 개로 살려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의 마음으로 진리를 이해하고자 했다. 개로 자각하기 이전까지 이탁오는 '이탁오다움'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이 진리에 따라 조종되는 기계와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이탁오는 진리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바탕으로 아이의 마음, 즉 동심(童心)에 주목하게 했다.
"동심은 거짓이 없고 순진 그 자체로 가장 먼저 갖는 본래 마음이다. 동심을 잃어버린다면 진심을 잃어버리게 된다. 동자는 사람으로 처음이고, 동심은 마음의 처음이다. 최초의 마음이 어찌 없어질 수 있겠는가! 하지만 동심을 느닷없이 잃게 될 수도 있을까? 어린 아이일 때 동심이 없어진다. 점차 자라면서 도리가 듣고 보는 것으로 전달되면 마음에서 주인 역할을 하므로 동심이 없어진다." 사람은 후천적인 학습을 통해 기성의 제도와 가치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때 아이는 제도와 가치를 학습시키는 부모와 스승 그리고 사회에 비해 열세에 있다. 아이는 부모의 말을 듣고, 스승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게 되는데, 이 과정을 겪으면서 기성의 제도와 가치가 아이의 마음을 압도하게 된다. 우리는 압도된 상태을 일상어로 "철이 들었다"고 표현한다. 이탁오는 "철이 든 상태"가 바로 완전하게 사회화된 상태, 즉 과(過)-사회화(Overscialzation)으로 보았다. 이 과사회화는 역설적으로 아이의 마음을 잃어버린 것이다.
울분을 승화시키다.
중국의 사상가와 예술가 중에는 특별한 인생 체험을 가진 사람이 많다. 공자는 세 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사마천은 황제를 기망한다는 죄목으로 생식기를 잘리는 궁형을 당했다. 그는 극형을 당하고서도 아버지와 약속한 사기의 완성을 위해 삶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으서며 '사기'를 저술하였다. 주나라 문왕은 유리에 갇혔지만 '역경'을 풀이했고, 공자는 진과 채 지역에서 억류되었지만 '춘추'를 엮었고, 굴원은 조정에서 쫒겨났지만 '이소'를 지었고, 좌구명은 실명했지만 '국어'룰 엮었고, 손빈은 다리가 잘렸지만 병법을 지었고, 여불위는 촉으로 좌천되었지만 '여씨춘추'를 엮었고, 한비는 진나라 감옥에 갇혔지만 '세난(說難)'과 '고분(孤憤)'를 썼고, '시경' 300편도 현인과 성인이 울분을 들어낸 저작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모두 울분이 맺힌 뜻을 지니고 있지만 소통할 길을 찾지 못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일을 풀어내서 현재를 넘어 미래를 기대했던 것이다.
불파불립(不破不立)
당나라(618~907) 후반에 활약했던 한유(韓愈,768~824)는 유명한 산문 '원도(原道)에서 당시의 사상 동향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한나라에서는 황로학이, 진. 송. 제. 양. 위. 수나라에서는 불교가 성행했다. 도덕과 인의를 말하던 사람들은 양주 일파에 들어가지 않으면 묵자 일파에 들어갔고, 노자 일파에 들어가지 않으면 불교 일파에 들어갔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견제하는 모습들이었다. 도덕과 인의를 고수하던 유학은 쇠퇴하고 불교와 도교가 융성하였다. 한나라 이래 유학의 사회적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한유는 당제국을 유교의 나라로 만들기 위해 사상적 투쟁을 펼쳤다. 한유는 '원인(原人), 원도(原道) 등 '원'자가 들어가는 산문들이 있다. '원'은 근본을 다룬다는 뜻이다. 한유는 '원'의 형식을 빌려 자신의 시대에 의미를 잃어버린 '도'와 '인'의 근원을 새롭게 밝히고자 했던 사람이다. 그는 '원도'에서 '인(仁). 의(義). 도(道). 덕(德)의 의미와 위상을 정립하고자 했다.
차별없는 사랑은 인이고, 실행에 마땅한 것이 의이다. 인과 의를 말미암아 나아가는 것이 도이고, 자기에 가득 차서 밖에 기대지 않는 것이 덕이다. 인과 의는 고정된 이름(주인)이고, 도와 덕은 텅빈 자리(손님)이다. 박애(博愛)에서 '박'은 사랑의 범위를, '애'는 행위의 방향을 가리킨다. 행의(行宜)에서 '행'은 정신의 방향을, '의'는 행위의 목적을 가리킨다. 이렇게 보면 인과 의는 사람이 무엇을 왜 해야 하는지 방향과 목적을 분명하게 지시한다. 내용과 방향이 정해져 있다는 점에서 정명(正名)인 것이다. 도는 인과 의가 지시하는 방향과 내용대로 움직여 나가는 여정이고, 덕은 전적으로 인과 의가 안내하는 대로 움직여서 완전하게 현실화된 상태를 가리킨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구분하자면 인과 의는 실체적 존재인 반면 도와 덕은 개념적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관계 설정은 한유가 인과 의가 도와 덕의 위상을 초월하도록 규정한 데에서 나온다. 이러한 정위(定位)는 한나라 이후에 지속되어온 인과 의에 대한 도와 덕의 우위를 열위로 전복시킨 것이다. 이 규정은 공식적으로 유교가 불교나 도교보다 더 우월적 가치를 갖는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경(經). 전(傳). 주(注). 소(疏).
오래되었으나 그 가치가 오늘날까지 살아있는 책을 고전(古典)이라 하고, 고전 중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 책을 경전(經傳)이라 한다. 장화(張華,232~300)의 박물지(博物志)에 의하면 성인이 지은 것을 경이라 하고, 현인이 풀이한 것을 전이라 한다고 쓰여 있다. 먼저 경과 전은 글을 쓰는 주체가 다르다. 또 경이 기준이 되는 1차적 자료라고 한다면, 전은 경을 풀이해서 그 뜻이 읽는 이에게 전달 되도록 하는 2차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경은 원전(Original Text)이고, 전은 경을 풀이한 2차자료(Secondary Text)이다. 경과 전이 나온 뒤 주(注)와 소(疏)라는 또 다른 해설이 나왔다. 주는 전의 뜻을 풀이한 것이고, 소는 주의 뜻을 풀이하였다. 주(注)는 논에 '물을 대다'라는 뜻이고, 소는 '어리에 빗질하다'라는 뜻이다. 소가 좋으면 주가 살아나고, 주가 좋으면 전이 살아나고, 전이 좋으면 경이 살아난다. 결국 전, 주, 소는 경의 뜻이 읽는 사람에게 정확하게 옮겨지게 하는 해설서이다.
경과 전의 뜻을 밝히는 학문을 훈고학(訓古學), 경학(經學) 또는 문헌 해석학이라고 한다. 문헌 해석학에서 어기면 안 되는 규칙이 있는데, "전은 경을 깨뜨릴 수 없고, 주는 전을. 소는 주를 깨뜨릴 수 없다."는 점이다. 이는 뒤에 생긴 자료가 선행하는 텍스트의 의미를 침해할 수 없다는 뜻이다. 결과적으로 '경불가침해(經不可侵害)의 원칙'이다. 소를 쓰는 사람은 주를 해설하다 보면 주문(注文)에 무언가 불분명하고 오류로 보이는 글귀가 들어 있을 수 있다. 주에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소에서는 주의 뜻을 고칠 수 없다. 이 원칙은 주가 전문에 대해서도 전이 경문에 대해서도 꼭 지켜야 하는 원칙이다. 그러나 송나라에 이르러 주희 등은 이전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의경(疑經)과 개경(改經) 현상이다. 의경은 경문을 의심하는 일이고, 개경은 경문이 의심스러우면 의심스럽지 않도록 글자를 뜯어고치는 일이다.
중국 고대 철학사
1910년대에 근재적 학문 분류에 따라 '중국 철학사' 저작이 나오기 시작했다. 중국 고대 사상이라고 하면 복희(伏羲), 산농(神農), 황제(黃帝), 요(堯), 순(舜), 우(禹), 탕(湯)의 이야기를 떠올리던 시대였다. 후스는 중국 고대 철학사를 서술하면서 먼저 방법론을 설명하고, 이어서 시경을 중국 철학의 발생 시대로 다룬 후 바로 노자와 공자의 사상으로 넘어갔다. 그는 노자와 공자로 시작하는 후스의 철학사 서술을 "곁가지를 싹둑 자르고 끊어버리는" 절단중류(截斷衆流)로 평가했다. 후스가 중국 민족의 철학 사상 발달사가 아니라 중국 고대 철학자의 사상 발달사를 기술하려고 했기 때문에 과감한 선택이 가능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는 중국 고대 철학사 서론에서 철학사 서술의 목적을 세 가지로 제시했다. 첫째 옛날과 지금 사상의 연혁과 변천을 분명히 하는 명변(明變)이다. 이로써 철학자의 공통점만이 아니라 차이점도 주목을 받게 되었다. 둘째 사상 변천의 원인을 탐구하는 구인(求因)이다. 개인의 재능, 사회적 상황, 사상 학술의 영향을 따져서 변화를 설명해내야 한다. 셋째는 개별 사상가의 가치를 평가하는 편판(評判)이다. 이 평가는 주관적 평가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작업이다.
명변, 구인, 평판은 후스가 철학사를 서술하는 목적이자 기준이었다. 후스는 철학사의 자료를 선별하는 다섯 가지 원칙도 제시했다. 첫째는 저자와 역사적 연대가 일치하느냐를 따지는 사실이다. 둘째는 용어가 특정한 시대이 용례와 부합하는지를 살피는 문자다. 셋째는 글쓰기가 특정한 시대의 사례와 부합하는 지를 살피는 문체이다. 넷째는 택스트의 주장이 체계를 갖추고 모순된 점이 없는지를 따지는 사상이다. 다섯째는 앞의 네 가지가 택스트 안에서 근거를 찾는 내증(內證)이다. 다른 책에서 근거를 찾는 것이 방증(旁證)이다. 방증이 때로는 내증보다 더 결정적인 근거를 제시할 수도 있다. 후스는 철학사의 세 가지 목적과 자료를 선별하는 다섯 가지 방법을 통해 이전의 도통론과 학안에 따른 철학사와 격을 달리하는 중국 고대 철학사를 서술할 수 있었다. 지금 와서 보면 후스의 주장과 중국 고대 철학사는 이미 상식이 되었거나 과거가 되었다. 하지만 1910년의 시공간에서 후스의 '중국 고대 철학사'는 철학사를 근대적으로 기술한 최초의 저작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중국은 역사적 유산과 전통 문화를 '천경지의(天經地義), 즉 영원한 진리로 간주해 왔다. 중국의 철학사를 바탕으로 일컬어지는 동양철학은 서양철학과 쌍벽을 이루고 있다. 중국의 역사속에 흐르고 있는 풍부한 고전과 자료와 문화가 동양철학을 대표하고 있다.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진리인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문제들에 해답을 주는 것이 철학이라고 한다. '동양철학 인생과 맞짱뜨다' 이 책은 '삶의 지혜를 넘어 도전의 철학으로'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신정근 교수의 동양철학사는 공자와 맹자에서 량수민과 천두슈까지 많은 학자들의 인문학과 철학적 사상을 통해 중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를 하면서 많은 학자들이 주장하고 논하고 증명하는 방법론까지 읽는 동안 즐거움을 누리는 유익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