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작은 어머니!
숙모님을 찾아간 날
숙모님을 우리는 어릴때부터 작은 어머니라고 불렀다. 그래서 숙모님! 하고 부르는 것보다 작은 어머니라고
불러야 더 정감이 느껴진다. 작은 어미니의 그 곱던 모습이 오늘 93세의 생신날을 맞이하여서 보는 그 얼굴은
한 세상을 뛰어 넘어 다른 세상에서 뵙는 것 같았다. 작년 그 지난해에 안양에서 뵈었을 때는 그래도 힘이 부쳐
서 간신히 걸어 다니시기도 하셨는데, 이제는 침대에 누워 계서야 하는 현실속의 작은 어머니를 바라보는 눈
길은 지나간 많은 세월의 간극을 느끼게 하였다. 몸이 늙어가는 것은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하여도 저렇게 야위
어 가는 몸을 어떻게 하지 못하는 인생의 늙음이 치매에 얶매이고 몸이 변화하여 그 아름답던 살은 어디로 누구
에게 빼았기고 뼈와 피부만이 앙상한 모습을 바라봐야하는 나의 눈길은 가슴을 미어지게 만들었다.
내가 어릴때 말을 하면서부터 보아온 작은 어머니는 어디로 숨어 버리고 내 앞에 마주한 작은 어머니는 옛날의
내고향 그 시골에서 바라보던 작은 어머니의 모습은 아니다. 산으로 둘러쌓인 농촌 산 꼴짜기 작은 마을에 앞
뒤집에 살 때의 우리 작은 어머니는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셨는데, 세월이 너무 많이 흘러갔다. 40여년전에
큰 아들을 대전으로 학교를 보내면서 이사를 하셔서 포도밭을 사셔서 포도농사를 지으시며, 4촌들을 키우고
학교에 보내실 때는 그래도 대전과 고향을 오가며 삶의 보람도 느끼시면서 살으셨는데, 작은 아버지가 중풍
으로 쓰러지신 후 삶은 급격하게 힘들어 가셨다. 중풍이라는 병상에 누어 10년 넘게 고생을 하시다가 돌아
가시고 작은 어머니 혼자 자식들을 키우며 고생도 참 많이 하셨는데, 그 고생의 보상이 지금 이것인가를 생각
하면 눈물이 앞선다.
큰 아들은 대전에 있고, 막내 아들이 논산에 있어서 그곳에 계시다가 치매로 고생을 하셔서 요양원에 모신지 벌
써 1년이 가까워 오고 있다. 그래서 작은 어머니에게 한 번 다녀와야 한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미루고 미루다가
오늘 시간을 내어 다녀왔다. 어느 집안이나 지금은 부모님이 치매로 고생을 하면 많은 자식들이 요양원에 모시
는 것이 흉이 아니라는 것을 많이 이해하는 시대의 변화 이므로 이제는 요양원에 부모를 모셨다고 하여 손가락
질을 받는 그런 모순은 면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인정을 해 주는 시대로 변해서 그래도 마음이 그렇게 아프
지는 않지만, 찾아 뵈올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죄를 짓고 있는 것 같아 몸둘바를 모를 때가 많다. 지금도 자기 부
모를 요양원에 모신다고 타박을 하는 분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삶이 그만큼 각박하여 졌다.
오늘 뵈온 작은 어머니는 참으로 한 많은 삶을 살으셨다. 우리들의 부모가 그렇지 않은 부모가 얼마나 될지 모
르지만 참으로 모진 세월의 삶을 살았다. 기우러 져가는 조선 말기가 아니면 일제 강점기에 태어 나셔서 식민지
시대의 일본인들에게 많은 침탈을 당하고 해방의 기쁨도 잠간 6.25 한국전쟁으로 페허가 된 시대의 변화에
보리고개를 넘기면서 삶도 아닌 삶을 살아온 우리의 부모님의 세상은 너무 힘들고 어렵고 아픔의 세월이 아니
었던가 생각하게 된다. 군사혁명을 껶으면서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음지로 음지로 향하면서 술
어 살다시피 하였던 그 고통도 눈을 감고 넘기셨습니다. 새마을 운동을 하면서 시골에도 지붕개량을 하고, 부엌
개량을 하면서 삶의 질을 추구 하였지만, 모두가 전시효과를 위한 정책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리고 국민소득 2만불 시대라고 떠들지만 우리의 삶은 밥은 굼지 않지만, 삶의 여유가 느껴지지는 않는 삶을
오늘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빈부격차 때문인가. 민주주의 영향인가. 정치와 경제 그리고 우리의 삶
어느하나 모두가 잘 사는 나라는 아직도 멀고 요원하다는 숨소리가 거칠게 느껴진다. 오늘의 탄핵정국도 무엇
이 문제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욕심만을 향해가는 정치나, 경제나, 사회제도나, 국가 발전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먼저 바라보는 정치권의 오늘의 모습은 중진국의 한계에 부딪혀있는 오늘의 우리 모습을 대변하는 것
이 아닌가 걱정하게 된다. 법을 법대로 적용하지 않고 자기의 잣대로 법을 적용하는 우리 국민들의 사리사욕은
부페를 청산하겠다고 아우성을 치는 모습을 바라볼 때 국민을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보는 게 아닌가 생각
을 하게 만든다.
100세 시대의 인생이 오늘 이런 것이라면 차라니 60년을 살아도 제대로 살고싶은 곳에서 우리가 하고 싶은 일
을 하면서 사람답게 살아보고 싶다는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바램이 아닌가 생각을 해 본다. 노동
력이 있는 인구보다 노령인구가 많아 진다면 그것은 바람직한 삶의 현장이 아니라 죽지 못해 사는 불쌍한 세상
이 될것만 같다. 우리의 삶이 정녕 이런것이라면 고려시대의 고려장을 자꾸 생각나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
까? 의학이 발달하여 인간의 수명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나면 국가는 노령인구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여 국민
의 삶의 질을 높이고, 건강의 질을 높이고, 경제의 질을 높여 최소한 삶을 보장해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요구
해 본다.
현재 우리나라는 총체적으로 침체의 늪에 빠져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탄핵정국도 촛불과 태극기로 갈
려 자기 주장만 옳다고 외치고 있는데, 아무도 그 양쪽의 문제점을 파악하여 수습하려는 자가 한 사람도 눈에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이 오늘의 우리의 문제이다. 국민이 양쪽으로 갈라져 서로의 주장만 외치면서 이길이 살길
이라고 자기주장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은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법이 존재
하지만 법의 적용도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만 해석하고 해결하려는 욕심이 국가를 망치고 국민을 양쪽으로
갈라놓고 있다는 것을 왜 인식하지 못하는 지.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 대통령을 향해 달리는 사람들의 면면
을 보면 전체를 아루러 보지 못하고 지엽적인 문제에 매달려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아직 우리
는 더 많은 고통을 받아야 하고 아직 더 고생을 해야지 이 모순투성이의 탄핵정국을 벗어날수 있을 것 같다.
헌재의 탄핵문제의 해결이 어느 쪽으로 나던 어느 한 쪽은 받아드리지 않을 것 같은 오늘의 세태를 어떻게
해결하여 나갈지 우리의 정치지도자들은 그 문제를 고민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우리 작은 어머니를 이야기 하다가 이야기가 비약하여 정치 경제 사회문제까지 걱정을 하는 모습을 보여 이 글
을 읽으주시는 분들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이 모든 문제가 우리의 삶과 연결된 문제이다 보
니 그렇게 된 점을 이해 하여 주십시요. 의학이 발전하였는데. 건강은 여전히 예전 그대로 우리의 삶을 건강하
게 만들어 주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요? 병마의 시달림에서 아픔에서 벗어날 수 있어 수명이 100새 시
대를 구가하고 있지만, 또 다른 노인병에 시달리는 노령인구는 더 많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수명이 줄어
들드라도 건강한 삶을 원합니다. 건강한 삶이 아닌 수명 연장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작은 어머니의 요양원 삶이나, 우리나라의 문제나 우리가 피부로 느끼는 우리의 삶의 문제가 우리의 가슴을 억
누르고 있다. 기차를 타고 논산을 다녀 오면서 경제가 발전하면서 우리의 삶의 질은 조금씩 풍요로워지고 있다
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나, 삶의 질은 삶의 걱정은 예나 지금이나 그렇게 변하지 않은 것 같아 가슴 한 켠에는
답답함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는 하나의 문제에 부딪히면 전체 속에서 그 문제를 바라보지 못하고 지엽적인 문
제에 매달려 옳고 그름을 따지려는 자세가 한심함을 자아내게 한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에 집중하면서 보이
지 않는 그 이면의 진실을 찾아 보려하지 않는 끈이 짧은 지식의 바탕이 문제를 더 어렵게 꼬이게 하는 것을 바
라보는 국민의 눈은 날카롭기만 하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아는 만큼 보인다는 그 말이 오늘
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절실하게 깨닭아야 하는 문제가 아닌가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