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의 삶의글

백제 왕궁지 공산성

paxlee 2017. 5. 27. 21:52



 백제의 왕궁지 공산성


공산성은 백제의 웅진시기(475~538) 백제의 왕궁이 있었던 산성으로 금강이라는 자연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축조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왕궁지, 왕궁부속시설지, 벡제시대의 토성 들이 확인되었다. 왕궁지는 공주의 시가

지와 금강, 송산리고분군이 조망되는 우월한 입지에 위치하고 있다. 발굴조사 결과 건물지와 부속시설이 확인

되었으며 출토유물을 통해 볼 때 왕궁지임이 확인되었다.


공산성 성벽은 대부분의 구간이 조선시대 축조된 석성으로 그 석성 밑으로 벡제 시대의 토성이 지나가고 있다.

다만 공산성의 동남부에는 벡제시대의 토성 구간이 현재도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다. 공산성은 금서루(서문)와

진남루(남문), 영동루(동문), 공북루(북문)등 4대문이 있고, 금서루와 진남루 사이 안쪽에 자리잡은 왕궁지에는

 쌍수정이 있고, 넓은 행궁지 공터에 깊은 연지가 있다. 이곳에도 부속사찰인 영은사가 금강강변에 연지와 만하루가

 있다. 연지는 강물이 많을 때에는 연지에 물이 많이 고이고 그렇지 않을 때는 바닥이 보인다.


공산성을 둘레길을 한 바퀴 돌아보면 동북쪽에는 금호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공주는 금호강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서울과 다르게 남쪽이 구 시가지이고 북쪽이 신시가지여서 아파트 등 높은 건물은

주로 북쪽에 많이 있고 남쪽은 상대적으로 낮은 건물로 이루어 져 있다.


세계문화유산 공산성 백제 역사 유적지구 탐방객은 공산성 주차장이 이곳 금서루(서)쪽에 있어 여기서

공산성 투어을 시작한다.


왕궁지 언덕위에 있는 쌍수정에서 가운데 해설사의 설명을 경청하고 있다.

왕궁지의 넓은 공터는 그대로 잔디밭이다.

그 한쪽에 깊은 연지에서 해설사의 해설이 계속되고 있다.

연지 바닥에는 물이 없다. 왕궁의 그 시절 그때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물도 없은지 모른다.

연지쪽에서 쌍수정을 바라본다.

진남루(남문) 에서

진남루(鎭南樓) 현판이 붙어있다.

공산성 토성의 오름길을 걷고 있다.

백제을 상징하는 봉황새 깃발이다.

영동루(동문)

백제의 토성 공산성의 모양이다.

공산성에서 바라본 공주의 남쪽 구시지이다.

공산성 둘레길을 걷고 있는 친구들

공산성의 숲과 강과 공주시의 어을림이 푸르다.

금강 건너편 신시가지가 공주의 얼굴이다. 

공산성 북쪽의 금강의 다리와 지금도 아파트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공산성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금강. 여기서는 비단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열심히 사진 촬영을 하는 진행다.

공산성 왕궁 부속 사찰인 영은사이다.

영은사 앞에 만하루와 연지이다.

공산성 전망대에서 바라본 금강 건너편 공주시이다.

공주시의 남북을 이어주는 다리이다. 위쪽이 부여와 천안을 이어주는 고속화 도로이다.

공산성의 전망대 정자이다.


백제는 BC18BC~AD660년 까지 지속된 고대 삼국시대를 주름잡든 고구려, 신라, 백제 3국 중에서 백제의

도읍지 공주를 찾아갔다.  백제가 서울 한성 몽촌토성을 중심으로 시작한 한성시대와 그 다음 웅진시대는

공주를 중심으로 문주왕 원년()475년 원년에서 심근왕, 동성왕, 무령왕, 성왕 16년(538년)간 5대 64년간

이어진 곳이다. 백제는 백재만의 독창적인 문화를 만들었다. 그것은 무령왕릉의 유물은 고고학적, 역사적

으로 중요하게 평가받고 있다. 백제의 문화를 편찬한 삼국사기, 벡제본기 온조왕 15년기록된 것을 보면,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나 사치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의

미의식을 한마디로 표현한 위 문구는 백제문화의 특징이다. 최근 백제역사유적의 가치와 진정성을 토대로 

유네스코에 등재된 것은 세계인들이 주목해야 할 온 인류의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이 후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아온다고 해설자가 말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