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매력은 다양성이다.[10]
비긴 어게인 여행 [1-1]
이 여행기 작가의 첫번째 직업은 광고 카피라이터로 8년동안 일하면서 계속되는 야근애 몸과 마음이 지쳐갔다.
고민을 하다가 끝내 사직서를 내고 유렵여행을 떠났다. 돌아와서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하였다. 두번째 유산
을 하고 부부는 둘만의 삶을 살기로 결심하였다. 유산의 후유증이 완치 되기도 전에 다시 여행을 다녀왔다.
이집트, 그리스, 터키 여행은 가장 빠르게 나를 치유해 주었다. 대학교수 생활도 15년째가 되던해에 대학의 시
스템을 바뀌지도, 바꿀수도 없어 여기도 사표를 던졌다. 불행한 안락보다는 위험한 행복을 택하기로 한 나의 결
심이 정말이지 옳았다는 믿음과 확신을 주기에 충분했다. 내 삶의 고비마다 위로가 필요할 때도, 리프레시가 필
요 할 때도, 용기가 필요할 때도, 해답을 내리도록 도와준 것은 여행 이었다.
우리는 본것 이상을 생각하지 못하고, 생각한 것 이상을 보지 못한다. 오직 여행만이 알려주는 지혜가 있었다.
내가 80여개 국을 여행하는 동안 내게 인상 깊었던 나라들은 좀더 나를 잘 들여다 보게하고 내가 알고 있던 삶
에 대한 고정관념을 통쾌하게 깨부수어 주었다. 여행은 휴식이나 즐거움을 위해 떠나는 것이 아니라, 터닝포인
트를 찾기위해 떠나는 것이라면 조금은 다른곳, 남들이 가보지 않은 곳에 가서 그곳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삶 속에서 보고 느끼고 깨닭음이 있어야 한다. 나는 내가 사는 도시에서도 볼수있는 것들을 보려고 이렇
게 멀리 오지 않았어, 난 이곳이 아니면 결코 만날수 없는 장면들, 사건들,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서 돈과 시간을
들여 여기까지 온것이다. 가장 힘들었던 여행이 가장 많은 것을 배우게 해준 여행이다.
1, 나를 찾아가는 여행 : 네팔.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영화처럼 어느 장소에 간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에게 간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 무엇을 먹는가, 무엇을 입는가, 어디로 여행하는 가를 보면 그 사람을 알수 있다고 하였다. 네팔 포카라
는 히말라야 트레킹 열풍이 불면서 많은 사람들이 버킷 리스트에 올려 놓고 있다. 네팔로 가는 직항노선은 6시
간만 날아가면 네팔 카트만두에 도착한다. 카트만두에서 국내선을 타면 포카라에 1시간 안에 닿을 수 있다. 여
행 첫날 카트만두 여행자 거리인 타멜 거리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었다. 이튼날 아침 일찍 일어나 세수
도 않고 자전거 리샤를 타고 근처 스투파 사원으로 갔다. 오래된 차이 가게가 눈에 들어와 들어갔다. 가게 안에
는 여행자와 현지인이 아침 모닝 차이를 모여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차이를 마셨다. 그곳에는 모닝 커피가
아닌 차이를 마신다. 한잔에 30루피(300원)였다. 오늘은 카트만두 최고의 관광 코스인 두르바르 광장을 둘러
보기로 했다.
카트만두 중심부에 위치한 두르바르 광장은 구왕궁과 50개가 넘는 사원, 그리고 유적으로 가득한 곳이다. 날씨
가 더워서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 보다가 광장이 잘 내려다 보이는 카페를 찾아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여유를
즐기기로 했다. 망고 라씨와 에베래스트 맥주를 마시며 나는 그곳이 주는 공기를 한것 음미했다. 카트만두에서
포카라로 가는 길은 버스로 7시간 정도 걸린다. 냉방시설이 좋은 버스를 타고 바깥 풍경을 감상하며 쾌적하게
갈수 있다. 와이파이가 제공된다고 하였는데,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중간 휴게소엔 히말라야 커피 전문점도
있어 그곳에서 유기농 네팔 커피도 마실수 있었다. 음악도 듣고, 책도 읽고, 이런 저런 생각도 하다보니 어느새
포카라에 도착했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아기 엄마가 명함을 건넸다. 포카라 호숫가에서 게스트하우스를 한다
며 꼭 놀러 오란다. 남편에게 연락해서 숙소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나는 친구도 사귀고 덤으로 숙소까지 편하게 왔다.
히말라야와 안나푸루나가 조망되는 사랑곳에서
포카라에 머무는 일주일 동안 이틀만 빼고 줄곧 세차게 비가 내렸다. 늦잠을 자고 온종일 할 일이 없어 가져온
책을 꺼내 독파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비가 괜 날은 노천 카페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여행자
들은 날이 개어 히말라야가 얼굴을 보여주기를 바라는 시선은 늘 호수 저편을 향해 있었다. 어느날 빗소리가 갑
자기 들리지 않았다. 창문을 여니 눈 앞에 신성한 마차푸차레가 들어왔다. 게스트하우스 문을 나서는데, 문 앞
에 택시가 서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서툰 영어로 마운틴 켄 씨... 사랑곳 쪽을 가르켰다. 오늘은 따지지 않
고 택시를 탔다. 사랑곳은 포카라에서 히말라야 파노라마를 조망하기에 가장 가까운 곳으로 유명하다. 사랑곳
을 향해 달리는 택시 안에서 히말라야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조금씩 가까워 질수록 마차푸차레와 안나푸르
나는 감탄을 자아 내기에 충분했다. 사랑곳에 도착하니, 벌써 많은 사람들이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위용을 드
러낸 히말라야의 신비를 카메라에 담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그렇게 마차푸차레와 안나푸르나를 질리도록 감상한 후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와 아침을 먹었다.
네팔인에게 히말라야는 신들의 처소다. 등반가에게 히말라야는 도전과 정복의 새상일 것이며, 부동산 투자가
에겐 그저 돈으로 환산되는 존재일 것이다. 나에게 히말라야는 나를 찾아주는 곳, 새로운 기운을 받는 곳이다.
오스트레일리안 캠프에서 스위스 언니 로잘리를 만난 것은 우연 같은 행운이었다. 독신녀인 그녀는 인도 타말
라두에서 열다섯 명의 아이를 돌보는 기금을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노후를 위해 가지고 있었던 스위스 집도 최
근에 처분했고, 그 돈으로 아이들을 보살피고 있단다. 그녀는 극단적으로 돈을 아꼈다. 포카라 시내에서 칸데까
지 로컬 버스를 네 번이나 갈아 타면서 왔다고 해서 나를 놀라게 했다. 나는 그녀에게 스위스 사람들은 돈이 많
지 않느냐고 물었고, 그녀는 "스위스는 은행만 돈이 많다"라며 해맑게 웃었다. 그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다. 그녀
와 같은 실천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 일회성 선행은 누구나 배풀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그것도 자신의 안정
적인 미래까지 희생해서 봉사한다는 건 결코 아무나 할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녀가 더 위대해 보였는지
모르겠다.
스위스 언니 로잘리와 함께
2. 삶에 지친 당신에게 쉼표를 선물하는, 베트남.
인쳔공향에서 베트남 다낭국제공항까지 4시간 30분이면 도착한다. 북부의 하노이와 남부의 호치민과는 또 다
른 배트남을 만나게 된다. 산과 바다가 절묘하게 이루어진 다낭은 최고의 휴양지로 손색이 없다. 이곳은 태국의
바타야나 필리핀의 세부처럼 휴양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다. 베트남은 프랑스 식민지 시절 건축물들과 중국식
유적이 어우러져 낭만적 풍경을 선사하는 호이안은 남인도의 코친과 중국 리장을 합쳐놓은 인상을 준다. 오랜
전통을 그대로 살리면서 개성있게 변화한 골목들,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순박하고 착한 서민들의 얼굴을 마
주 하노라면 호이안 이야말로 가장 베트남 스러운 곳이라고 느껴진다. 오랜 역사가 스민 장소들과 과거 변화했
던 국제 무역항의 모습이 애수를 자아낸다. 내원교, 쩐가사당, 풍흥고가, 광조회관처럼 1,000년에 걸쳐 중국과
일본의 지배가 남긴 흔적들이 절묘하게 뒤섞여 있다. 목조지붕이 인상적인 내원교에는 항해의 안전을 기원했
다고 전해지는 작은 절이 있다. 재단 위로 솔솔 피어 오르는 향냄새를 맡다보니 중세로 시간 여행을 온듯한 착
각도 들었다.
일본 다리 앞에 자리한 풍흥고가는 베트남과 중국, 일본의 건축양식이 뒤섞여 있다. 호이안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이라 발을 디딜 때마다 삐걱 그리는 소리는 역사를 귀로 듣는 듯 선명하게 느껴졌다. 다낭에서 후에로
가는 길은 이탈리아 남부 소랜토를 연상시키는 멋진 해안도로를 끼고 달린다. 세계 10대 비경중의 하나라는 하
이반 고개에는 외국의 침략으로 부터 나라를 지키려고 만들었다는 요새들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다낭에
서 2시간 거리인 후에를 가는 것은 드라이브 자체로도 즐겁기만하다. 17세기 응우엔 왕조의 수도이자 19새가
베트남 제국의 황도였던 후에는 옛 참파왕국의 수도답게 고풍스러운 유적들을 많이 볼수 있었다.
베트남의 해안에서 휴식
3. 버마에서 미얀마로 바뀐나라, 미얀마.
동남 아시아에서 육로로 들어가기가 불가능했던 나라 미얀마는 태국, 베트남, 라오스, 중국, 티베트, 인도,
네팔로 이어지는 장기 배낭 여행자의 루트에서도 뻐져 있는 나라는 미지의 땅으로 여져진다. 그러나 미얀마는
세상 어느곳 보다 평화스럽고, 선한 미소가 아름답고, 불심이 가득한 나라다. 삶이 가난한 살림에도 매일 아침
부처님 앞에 꽃을 올리는 일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미얀마는 어느곳보다 오염되지 않은
순수함이 남아 있는 보석같은 곳이다. 수려한 자연경관, 수천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한 유적, 맛깔스러운
음식과 저렴한 비용은 동남아 여행이 주는 매력들이 분명하다. 인도차이나 반도와 인도 대륙 사이의 비옥한 지
대에 남북으로 뻗어 있는 미얀마는 오랜 역사를 지닌 불교 국가이다. 전 국민의 90% 정도가 불교 신자이다. 버
마라는 이름은 국민의 70%가 넘는 버마족의 이름에서 유래했고, 1948년부터 1974년까지는 버마연방이었다.
1988년까지는 버마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이라고 불리던 것이 1989년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미얀마로 변경
되었다. 군부 세력이 버마를 미얀마로 바꾸면서 내세운 이유는,버마는 일부 종족을 나타낸 이름이므로 전체 국
민을 나타내려면 미얀마가 더 어울린다는 것이다.
지금 외국에선 버마와 미얀마를 함께 사용한다. 국민소득 500달러인 미얀마는 한국의 1960년대 수준의 경제력
으로 빈부격차가 없는 편이다. 이번 여행에서 미얀마 가이드는 한국인 이었다. 그는 대기업에 다니다가 IMF때
상사들이 줄줄이 해고 당하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아 자기만의 일을 갖고자 회사를 그만 두었다고 했다. 그후 그
는 회사에 다니는 동안 하지 못했던 세가지를 했다. ①원도없이 잠을 자는 것, ②머리를 기르는 것, ③배낭여행
을 가는 것. 그렇게 떠난 배낭여행이 결국 가이드라는 생각지도 않은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행중 머물렀
던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에서 어떤 사람과 인연이 되어 가이드를 하게 되었고, 앙코르와트에 직항 노선이 생
기고 덤핑 관광객들이 들이 닥쳐 관광객이 증가하면서 가이드 일의 성격이 변질되어 갔다. 그게 싫어서 베트남
하노이에 갔다가 다시 하노이에 사람들이 몰려오자 증가하는 관광지를 피해 때묻지 않은 미얀마로 흘러오게
되었다고 했다. 이분의 라이프 스토리를 들으면 선택과 판단, 가치관이 보인다.
승복을 입고 출가하는 학생들
관광객이 증가하면 가이드는 수입이 증가할 텐데, 이분은 순수한 여행객이 찾는 미얀마까지 흘러오게 되었다
고 하였다. 여기서 한달에 서너팀을 가이드 하면서 1년의 반이 비수기에 일도 없이 그곳에서 위파사나 명상을
하거나 수영을 하면서 지내고 있다. 그가 준 충격은 신선했다. 그는 가이드 일은 푸로페셔널 했고, 자긍심에 가
득차 있었다. 인간의 좌절과 역경을 돌보고 희망을 주는 종교라는 것도 사실은 사원이나 돌탑에 있는 것이 아
니라, 그 사원과 돌탑은 짓게한 인간의 마음속에 있다. 어떤 어려움에도 꺽기거나 흔들리지 않는 인간의 강인
한 믿음과 사랑이 이렇게 거대한 장관을 있게한 주춧돌이자 디딤돌인 것이다. 인레에는방학이 되면 이곳 아이
들은 한달간, 길게는 석달간의 단기 출가를 한다. 삭발을 하고 승복을 입고 아이들은 한꺼번에 출가 시틴다. 동
네 사람들은 모든 모든 일을 제쳐놓고 사원에 모여 맛있는 것을 함께 해먹고 노래를 하고 춤도 추며 잔치를 벌
인다. 스님이 되어보는 출가의식은 미얀마 인들에게 삶의 인성이 형성되는 기간이 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긴 나무다리, 우베인 목교는 높이 3m, 폭이 2m, 길이 1200m로 세계에서 가장 긴 나무다리이다.
1851년에 만달레이 아마라푸라 지역의 수장이었던 우베인 이라는 사람이 놓았다. 그는 강건너 마라간다용 수
도원서 공부하는 승려들이 더 편하게 왕래 하도록 이 다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붉은 옷의 승려와 소박한 차림의
주민들이 오가는 사이에 벽안의 관광객들도 신비로움에 취하기도 한다. 미얀마는 이렇게 소박 하면서도 위대한
인간의 역사를 돌아보는 장면들은 가슴에 인두 자국같은 기억으로 남는다.
4. 자유와 낭만이 넘치는 센프란시스코, 미국.
센프란시스코 도시를 동서로 운행하는 교통수단을 케이블카라고 부른다. 파웰-매이슨 노선, 파웰-하이드 노선
과 켈리포니아 노선, 3개 노선이 운영되고 있다. 관광객들이 선호하는 케이블카는 피셔민스 워프와 롬바드 스트리트에 정차하는 파웰-하이드 노선이다. 가파른 언덕을 오르락 내리락 할 때마다 눈앞에 펼쳐지는 변화무쌍한 경치는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이다. 케이블카와 함께 센프란시스코의 대표적인 상징이 금문교이다. 차를 타고 건널수도 있지만 한번쯤 걸어서 건너보는 것도 좋다. 40분 정도 걸린다. 또 센프란시스코는 예술의 도시다. 벽화의 도시라 불릴 만큼 도시전체를 덮고 있는 세련되고 수준높은 가라피티는 도시 자체를 살아있는 미술관으로 바꿔 놓았다. 히스페닉이 모여사는 미션지구는 멕시코 벽화운동의 영향으로 훌륭한 벽화가 80점 이상 있어서 벽화만을 둘러보는 여행상품이 존재한다. 센프란시스코 아트인스티투드에는 프라다 칼로의 남편인 디에고 리베라가 직접그린 걸작들이 있으며, 관광명소인 코이트타워에는 1933년 타워가 설립될 당시 정부가 공중 근로사업의 일한으로 26명의 화가를 고용해서 '디에고 리베라 스타일'로 그린 벽화도 있다. 반나절 벽화 투어를 이용하는 게 좋다.
센프란시스코를 달리는 케이블카
5. 오로라 여행, 케나다 옐로 나이프.
옐로나이프 공항의 북극곰의 인사
한국에서 벤쿠버, 벤쿠버에서 캘거리, 엘로나이프까지 비행기를 세번 타야하는 여정이다. 무려 24시간이 걸려
서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케나다 노스훼스트준주의 엘로나이프는 오로라를 볼수 있는 곳이다. 한 해에 240번
이상 오로라를 볼수 있다고 불리는 곳으로 오로라는 라틴어로 새벽을 뜻하는 말이다. 오로라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면, 어슴프레 밝아지는 새벽처럼 극지방의 밤을 밝히는 빛을 오로라가 나타나는 것은 태양 때문이다. 태양에서 방출된 플라스마 입자가 자석성질을 가진 지구의 극지방 주변을 둘러 싸면서 붉은 색이나 녹색의 자기 에너지 띠로 나타나는 것이다. 입자가 극지 상공의 대기를 이온화하여 일어난 현상으로 빨강, 파랑, 노랑, 연두, 분홍 등으로 나타난다. 비행기가 드디어 엘로나이프 공항에 도착했다. 창밖은 그야말로 동토의 왕국이다. 공항에 들어서니 박제된 북극곰이 북극에 온것을 환영한다는 듯이 발을 들고 우리를 반겨준다. 짐을 찾아 오로라 빌리지에서 마중나온 픽업트럭을 타고 숙소로 향했다. 숙소에 도착한 시각이 밤 10시 반이었지만, 오로라를 보기위해 방한복으로 갈아입고 오로라 빌리지로 향했다. 오로라 빌리지 에선 방한복을 대여해 주고 있다. 케나다 구스방한 점프와 바지, 마스크, 두꺼운 방한신발과 장갑까지 착용하니 너무 두껴워서 걸어 다니기가 불편했다. 약
30분을 달려 오로라를 잘 볼수있는 오로라 빌리지에 도착했다. 오로라는 1년 내내 나타나지만, 11월에서 4월까지 추울때 자주 나타난다.
예쁘고 특이한 삼각집은 티피라고 부른다. 티피 안에는 가운데 화로가 놓여 있고, 간단한 수프와 빵, 따뜻한 차
와 커피, 코코아 등이 준비되어 있어 밖에서 장시간 오로라 사진을 찍거나 오로라를 관측하다가 꽁꽁언 몸을
녹일수 있다. 티피에 대한 설명이 끝나자 사람들은 일제히 밖으로 나갔다. 10분 정도 지났을 때, 오로라다. 하고
환호성이 들렸다. 어두운 밤 하늘에서 희미한 하얀 빛 줄기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신의 영혼 인듯, 신의 빛 인듯,
신의 손길이 느껴지는 영험한 기운이 나에게도 내려오기 시작했다. 오로라는 끝없이 생겼다 사라지고 모양도
계속해서 변화했다.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거듭 할수록 돌고래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오로라는 하늘의 돌로래
다. 세벽 3시경 숙소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 태어나 처음 본 오로라에 대한 흥분이 쉬이 가시지 않았다.
오로라 관측은 밤 9시에서 1시까지 이다. 더 보고 싶으면 3시까지 관측이 가능하다. 4박 6일 일정으로 4일 밤
동안 오로라를 관측 하는데, 헛탕을 치는 날도 있다. 한낯 최고기운이 영하 20도이다. 날이 흐린날은 볼수없다.
오로라를 보지 못한 다음날은 데이 어드벤처를 즐겨 보기로 했다. 얼어붙은 그레이트슬레이브 호수를 걸어보
는 아이스로드 체험, 시베리안 허스키가 끄는 썰매타고 숲을 달리는 개썰매 체험, 이누이트 사람들이 신었던 스
키처럼 생긴 신발을 신고 눈쌓인 산속을 트레팅하는 스노뉴잉이 대표적이다. 개썰매 체럼은 특히 재미있었는
데, 엄청 추웠다. 엘로나이프 시내 관광도 재미있다. 북부 문화센터, 노스웨스트 주의 뉴타운, 하우스 보트및
경비행기 탑승지가 있는 구시가지를 돌아보며 옐로나이프의 역사와 원주민의 전설에 대해 듣고 경험할수 있
다. 서양 탐험가들이 이곳을 발견 했을때, 원주민들이 구리성분이 많아 노란색을 띠는 칼을 지니고 있어서 이
들을 '옐로나프족'이라 부른데서 지명이 우래 했다고 한다.
원주민의 집 피디(Peetee)
6, 바오바브나무의 고향 마다가스카르.
아프리카와 인도사이 인도양에 떠있는 마다가스카르는 그린랜드와 뉴기니, 보르네오에 이어 세계에서 네번째
로 큰 섬이다. 이곳은 『어린 왕자』에 나오는 바오바브나무와 보아뱀이 있는 곳이기도 하고, 월드디즈니 애니메
이션 영화의 재목이기도 하다. 김포공항에서 마다가스카르로 가는 직항이 없어 방곡을 경유해야 한다. 방곡까
지 타이항공으로 5시간, 그기서 4시간을 기다렸다가 에어마다가스카르로 9시간을 날아 마다가스카르의 수도
인 안타나나리보에 도착했다. 비행 시간만 14시간, 대기 시간까지 18시간이 걸린 먼 거리다. 마다가스카르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18개에 이르는 다양한 부족이 모여살고, 그 만큼 외모가 아시아인
에서 아프리카 인에 이르기 까지 다양하다. 승무원도 인도네시아인으로 보이는 승무원부터 검은 피부의 토종
아프리카 인처럼 보이는 승무원까지 천차만별이다. 2000년전 동남아시아의 인도네시아 인들이 배를 타고 건너
가 살기 시작한 뒤, 아랍은 상인들과 아프리카의 노예, 유럽의 제국주의가 밀려왔기 때문이다. 비행기의 기내식
은 생선이나, 육류던 먹음직 했고, 맥주나 와인은 물론 마티니 로소같은 칵테일까지 나왔다. 기내식으로 나온
하얀 쌀밥은 더 차지고 맛 있었다. 여기는 80%가 농사를 짓는 농업국가로 국토의 많은 부분이 논이고, 하루 세
끼 쌀밥을 먹는다. 장시간에 걸처 수속을 마치고 공항을 빠져 나오니, 깜깜한 밤 하늘에 별이 가득하다. 숙소인
삼성급 호텔은 훌륭했다. 아침식사로 나온 바게트가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만큼 맛 있었다.
이곳은 베트남과 라오스와 같이 160년 동안 프랑스 식민지 였다. 수도 안타나나리보의 시내 구경을 하고 섬으
서쪽 끝에있는 모론다바로 이동하기 위해 국내선을 타러 갔다. 섬 동쪽에 있는 안타나나리보에서 서쪽 해안가
제2의 도시 모론디바로 가는 비행기는 가장 작은 19인승 프로펠러 비행기였다. 탑승 수속땐 짐의 무게뿐 아니
라 사람의 몸 무게도 재는 것이었다. 비행기가 워낙 작아서 무게가 초과하면 안되므로 그런다고 했다. 비행시
간은 1시간 거리다. 이곳에서 최고의 볼거리는 바오바브나무 군락지와 칭기 국립공원이다. 점심을 먹고 여유있
게 일몰시간에 맞춰 바오바브 나무 군락지로 향했다. 해안가를 벗어나 바오바브 에비뉴로 들어서자 마침내 눈
앞에 짠하고 바오바브나무 군락지가 나타났다. 1년에 고작 3mm씩 자란다는 거대한 바오바브나무는 세계적으로
8종이 있다고 한다. 마다가스카르와 아프리카에 7종이 흩터져 있고 호주에 1종이 있다고 한다. 바오바브나무는
속이 뻥 뚫릴만큼 하늘을 향해 낄쭉끽쭉 늘씬늘씬 시원하게 뻗어있다. 오로지 여행은 다른 어디에서도 만날수
없는 한컷의 장면을 통해 나를 겸손하게 해 주고는 했다. 바로 그점이 오지여행을 좋아하는 이유중의 하나다.
1000년을 산 바오바브나무와 대조되는 작은 인간의 모습은 문명국가에서 온 우리가 좀 산다고 오만해 봤자
'고작 요만한것'일 뿐이라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여행은 일상에서 누리지 못하는 호화로움을 누려보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기꺼이 고통 받으러 가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