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Review

여행의 매력은 다양성이다.[13]

paxlee 2019. 8. 29. 20:47

 

글쓰는 엄마의 이탈리아 여행법 [1-2]



장화 모양인 이탈리아 반도의 뒷굽에 해당하는 아름다운 도시 레체는 바로크 왕관의 보석같다. 남부의 피렌체라 불리는 레체는 하얀 석회암으로 지어진 아름다운 바로크풍의 건축물과 세심하고 찬란한 장식물이 도심을 형성하고 있다. 레체의 유명한 조각가인 주세페 침발로가 완성한 산타크로체 대성당은 정교한 조각 장식으로 유명하다.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주교 궁전도 빠트릴수 없다. 주일 오후 주인들이 단정하게 차려입고 두오모에 들어선다. 우리도 어설픈 기도를 올린다. 모든 소원을 들어 달라고 조르는 모양인지 푸린양의 기도가 길다. 차를 타고 가다가 푸린양 만한 길가의 선인장이 이국적 이어서 잠시 멈추었다. 드디어 비치에 도착했다. 광활한 백사장과 광대한 바다가 눈앞에 나타났다. 겨울바다의 파도는 두러울 만큼 높고 거칠다. 예쁜 바다 구경이나 하려고 나섰는데 겁만 먹고 돌아섰다. 나에게 여행 하기좋은 걔절은 커피 마시며 산책할 수 있는 때이다. 숙소에 돌아가 주방에 있는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커피를 뽑아 마시고 찬책을 나가야 겠다. 레체의 마지막 밤을 즐기고 싶었다.


<마테라 (Matera)>

이탈리아 남부 바실리카 주의 내륙에 위치한 마테라는 로마에서 약400km 거리에 있다. '육지의 외로운 섬'이라 불리는 곳이다. 겨울철에는 대중교통의 운행 횟수가 일정치 않다. 렌트카가 아니면 어렵다. 마테라에는 사씨(Sassi)라는 동굴 거주지가 있다. 석회암을 파서 동굴집 사씨에 사람이 거주하게 된 시기는 8세기경 이슬람 세력의 박해를 피해 이곳에 온 수도사들이 동굴교회를 만들자 교회를 따라 농민들이 이주하면서 부터다. 현재 마테라에는 1500개의 동굴집과 150여개의 동굴교회가 있다. 아직 70%는 발굴되지 않았다. 사씨에는 사람과 가축이 함께 생활했다. 당나귀, 닭, 개, 염소 등을 같은 공간에서 키웠으며, 1960년대 까지도 수도, 전기, 하수도 시설이 없었다. 이탈리아인들은 이 도시를 더럽고 가난한 반도 남부의 낙후성을 상징한다며, '제국의 수치'라 여겼다. 마테라가 외부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은 의사 출신의 이탈리아 소설가 '카롤로레비'가 <그리스도는 에블리서 머물렀다>라는 소설을 발표한 이후다. 그는 마테라를 방문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증산층이 외면한 이탈리아 농민의 비참한 생활을 실감나게 그렸다. 이후 정부는 이 지역에 관심을 갖게 되고 생활터전의 열악함을 극복할수 있게 재건하기 시작했다. 1993년 마테라의 동굴 거주자와 암석동굴 교회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전통적인 인간의 주거형테를 보여주며 주변 자연환경과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마테라 구 시가지에는 동굴 거주지 형태를 개조하여 동굴 호텔이 여러곳 있다. 우리도 동굴호텔에서 머물렀다. 여행경비 중 하루 숙박비는 10만원을 넘기지 않기로 했다. 오스트리아 제그로테의 슈베트 호텔과 이곳 동굴호텔(1일 14만원) 두곳이 가장 비싼 호텔비를 주고 머문 곳이다.


넓찍한 더블 침대가 놓인 동굴 분위기는 은은한 황토빛이다. 객실 한쪽 구석은 불투명한 유리가 바닥을 덮고 있는데 유리 아래는 진짜 동굴이다. 짐을 풀고 동네 산책을 나섰다. 겨울이라 인적이 드물었다. 테이블이 세게뿐인 작은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파스타와 피니니를 주문 했다. 점심 시간이 지나 한가했다. 계산대 앞에 오토바이와 삼륜차를 연결한 탈것이 시내 루이 푸로그램을 안내하고 있어 그것을 이용하기로 했다. 1인당 10유로 2시간 투어로 비싼 금액 이지만 다른 교통수단이 없어 이용하기로 했다. 신청을 하고 바로 금발고수 머리에 검정 썬 글라스를 끼고 청바지에 가죽 자켓을 걸친 3륜 오토바이가 자신의 '테라리'라고 소개하며 껄껄 웃는다. 시동을 걸고 출발한다. 마테라 구 시가지를 돌면서 사진 포토에서 멋진 곳을 알려 주겠단다. 꽃 한송이 나무 한그루 보이지 않는 도시 풍경은 삭막하다. 바위산을 파고 들어가 세워진 교회도 층층이 쌓은듯 지어진 동굴 형태의 집도 비현실 적이다. 도무지 사람이 살것 같지 않고 사람이 살수 없을 것처럼 살풍경하다. 겨울 오후의 마테라에는 메마른 겨울 바람 뿐이다. 마르코에서 신시가지 타운센터에 가 보자고 했다. 그곳은 그대로 사람들 왕레가 있어 그나마 활기가 느껴졌다. 우리는 시가지를 천천히 걸어 호텔로 돌아왔다. 저녁은 컵라면으로 때우기로 했다.


중딩군 옆으로 나란히 서서 아이가 쳐다보는 풍경을 함께 바라본다. 희색빛 투성이던 황량하고 건조한 낮의 도시가 이니고, 우유빛 가로등과 창문으로 번지는 노란빛의 은은하고 포근한 밤의 도시가 손톱만한 달이 걸려있는 검은 하늘아래, 레몬빛으로 물든 고대 도시가 새로 태어났다. 고단했던 낮의 삶을 단숨에 잊게 만들 온화하고 부드러운 밤의 위로가 도무지 사람이 살수 없을 것 같은 이곳에서 살게 만들었는 지도 모르겠다. 낮의 황량함과 밤의 온화함은 모두가진 마테라의 풍경 앞에서 우리는 걸음을 멈추고 나지막이 감탄을 쏟아 내기도 하였다.


마테라 동굴집과 동굴교회


<포지티노>

이탈리아 남부의 중심도시 살레니노는 고속열차가 멈추고 전지역으로 이동하는 교통망이 잘 갖추어져 있다. 포지티노는 버스와 페리를 이용해 이동할 수 있다. 편하고 빠르게 이동 하려면 페리를 타면 되지만, 겨울에는 운행하지 않는다. 포지티노 까지는 이웃 도시 아말피에서 내려 포지티노 행 버스로 갈아 타야 한다. 살레르노 역 앞 버스 정류장은 기차를 타려는 사람들, 배웅 나온 사람들, 시내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시외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복잡하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동양인은 우리 뿐이다.우리는 피렌체에서 숙소로 돌라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어둠이 내렸고 외곽으로 나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은 우리 뿐이었다. 긴장을 한체 버스에 올랐다. 버스에는 한국 아주머니가 한분이 타고 있었다. 휴대폰으로 우리 말로 통화를 하고 있다.


우리는 베네치아에서 피렌체로 가는 기차를 타고 갈때, 낯빛이 안좋은 동양 여성이 다가왔다. "한국분 이세요? 혹시 진통제 있어세요?" 그녀는 한국 여행자였다. 생리통이 심해서 도움을 청했다. 가방을 열고 "이건 일반 진통제이고, 이건 강력 진총제에요. 강력 진통제는 효과가 빠르지만, 약사가 어지러울 수 있다고 했다는 말을 전하며 먼저 일반 진통제를 먹어보고 견디기 힘들면 센것을 먹도록 해요" 약사의 말을 그대로 전하여 주었다.

남은 물도 함께 주었다. 몸이 아파 힘들었던 그녀는 우리가 기차에 오르는 것을 보자마자 너무 반가워서 이제 살았구나. 생각 했다고 말을 해 주었다.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푹 자면서 가라고,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라고 잔소리를 늘어 놓았다. 우리가 피렌체에서 내릴때, 그녀는 잠들어 있었다. 우리는 베네치아 지도를 3유로나 주고 샀지만 지도만 가지고는 길을 찾을 수 없었다. 그때 우리 앞으로 한국 아줌마가 고개를 내 밀었다. "한국분 이시죠! 이 지도는 어떻게 보는 거에요?" 우리가 페기 처분한 것같은 지도를 보여준다. "저히도 보기가 어려워 그냥 다녀요" "그렇죠? 나만 그런게 아니죠?" "골목이 이렇게 많고 좁은데 그걸 어떻게 지도에 다 담을 수 있겠어요?" 오랜 만에 한국 여성을 만난 우리는 서로를 응원하며 밝은 얼굴로 헤어졌다. 한 때는 한국 여행자가 가지 않은 곳을 여행하는 것이 진짜 여행자의 모양새라 생각 했는데, 타지에서 모국어로 이야기를 나눌수 있는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 그것 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해 졌다.


서쪽 포지티노에서 동쪽 비에트리 마레이에 이르는 해안은 넓고 광활하다. 아말피 코스트는 19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되었다. 뛰어난 지중해 풍광이 자연경관의 가치와 함께 척박한 지형을 삶의 터전으로 가꾼 문화적 가치를 인정 받았다. 부자들의 휴앙도시로 이름이 높은 아말피는 음악도시로 알려진 라벨로도 아말피 코스트에 속한 도시다. 그중 아말피 코스트에서 진주라 불리며 사랑받는 도시는 포지티노다. 깍아지른 절벽에 자리잡은 파스텔 색이 집들과 그 아래 펼쳐진 맑고 푸른 지중해가 어우러져 수채화 같은 풍경을 뽑내는 이탈리아 남부의 예쁜 해안 도시다. 겨울 해변의 풍광은 아름답고, 파도는 순하고 해변은 조용하고 햇살은 친절하다. 베네치아의 바다가 바쁘고 분주한 도시라면 포지티노의 바다는 수식어가 필요없다. 작고 부드러운 조악돌이 가득하고 하얀 포말을 업은 파도가 규칙적으로 밀려드는 쳔연의 바다에 흡입 되듯이 우리는 그냥 입을 크게 벌려 숨을 들여 마셨다. 뱃속 깊은 곳까지 지중해의 맑은 공기와 따뜻한 햇살이 스며들어 심호흡을 하였다. 포지티노 해변은 젊은 이탈리아 부부의 어린 아들과 푸린양이 독차지 하고 있다. 내일은 책을 들고 나와야 겠다. 겨울 포지티노의 레스토랑은 대부분 문을 닫았다. 문을 연 레스토랑도 점심 장사가 끝나면 'Closed' 팻말을 내 걸었다. 식당을 찾아 걷다보니 동네 수퍼가 보였다. 과일 진열장은 텅 비어있고. 주인 내외가 직접 만들어 파는 음식중 몇가지를 골라 담았다. 네모난 은박지 도시락에 담긴 치킨요리가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도 따끈하다. 버터를 바르고 소금과 후추를 뿌려 구운 닭다리는 노릇하고 기름지다. 겉 껍질은 바삭하고 속살은 촉촉하다. 감자는 버터향과 로즈마리 향이 엉기듯 어울려 고소 하면서도 향긋하다. 다음날 다시 해변에 나갔다. 기념품 가게에서 엽서와 레몬비누를 샀다. 해변에 주저 않아 애 아빠에게 한장, 사촌 동생에게 한장, 엽서에 글을 썼다. 해는 수평선 넘으로 숨어 들고, 우리는 어제처럼, 닭고기를 사왔다.


<나폴리>

소렌토역을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차가 느려졌다. 그렇게 속력이 줄드니 결국 다음 역에서 멈추었다. 10여분이 지나 기차가 다시 움직였으나 속력은 느렸다. 그 다음역에 10분 만에 도착했다. 소렌토에서 나폴리까지 1시간이면 도착한다고 했는데, 심상치가 않다. 이 기차는 지방 열차인 사철이다. 기차는 낡았고, 서는 역은 많았다. 약속 시간이 지나 메세지로 늦는다고 연락을 해도 계속 불통이다. 그렇게 2시간 만에 나폴리 역에 도착했다. 역에 내려 주인장을 찾고 있는데, "미시즈 킴'하고 주인장이 우리를 먼저 찾았다. "늦어서 미안해요'라고 말하니 그는 당신들은 안전하고, 무사히 도착했어요. 그것이면 충분하죠. '웰컴 투 나폴리!'라고  말했다. 우리는 숙소에 들어가 짐을 풀었다. 샤워를 하고 쉬었다.


나폴리 지방의 역에서 기차를 타면 폼페이에 갈수 있다. 3번 플렛폼에서 타라고 역무원이 알려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기차가 들어왔다. 지난번에 탓던 문제의 그 사철이다. 기차에 올라갔다. 폼베이 유적지가 바로 다음역이다. 내릴 준비를 하고 출입문 앞에 섰는데, 기차가 예상치 못한 역에 멈쳤다. 파란색 라인을 타고 가다 폼베이 유적지역에 내려야 하는 우리에게 느닷없이 나타난 낯선 역은 초록색 라인에 있는 역이다. 뭔가 잘못 됐다. 일단 기차에서 내렸다. 문제는 나폴리 가리발디 역의 3번 플렛폼 이었다. 그곳엔 소랜토로 가는 파란색 라인과 '포지오아리노'로 가는 초록색 라인이 동시에 섰다.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 우리는 소렌토 행을 타야 하는 데, 포지오마리노 행을 타고 말았다. 역무원이 알려준 3번 플렛폼만 믿고 탓는떼,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우리가 내린 역은 보스코 토레카세 역이다. 그곳은 파란색과 초록색 라인이 갈라지고 나서 정차하는 첫번째 역이다.역 창구로 올랐다. 그곳에는 우리와 같은 처지의 여행자 커플이 역무원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방법을 물었다. 역무원은 "기차를 타고 돌아가거나, 걸어 가세요" 무관심하게 답했다. "걸어 가라구요? 폼페이 유적지까지 걸어갈수 있어요?" "그기까진 힘들고요. 한번에가는 기차를 탈수 있는 토래안 운치아타 역까지는 걸어갈 만 한거리에요" 역무원이 방향을 알려 주었다. 그들이 역을 나섰다. 역 앞에는 택시도 버스 정류장도 없다. "저기요" 그들에게 물었다. "20분 이상 걸어야 하는 거죠? 우리 같이 택시를 타면 어때요?" "좋아요 요금은 절반씩 내면 되겠네요." 커플여자가 흔쾌히 동의한다. "그러면 내가 역무원에게 가서 택시를 불러 달라고 할께요" 이번엔 커플 남자가 나선다. 그들은 네델란드 노테르담에서 온 30대 여행자 였다.  역무원에게 택시를 불러줄수 있느냐고 문의를 하니, 모른다고 잘라 말한다. 그럼 전화 번호라도 알수 있느냐고 물어도 "그런거 가지고 있지 않아요" 쌀쌀맞게 거절한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걸었다. 걷다가  택시를 만나면 타기로 하였다. 네델란드 커플이 앞을 서고 우리는 따라 갔다. 10분 동안 버스도 택시도 구경을 못했다. 다시 20분 동안 열심히 걸었다. 성인 남자의 걸음을 따라 가자니 숨이 턱까지 차 오른다. 주민들에게 물어 물어 토래안 운치아타 역에 도착했다. 티켓을 끊어 플렛폼에 섰다. 네델란드 커플이 "우리, 다시는 이런 실수 않기로 해요"웃으며 기차에 올랐다. 우리는 폼베이 유적지에 대한 기대가 줄어 들었다.


남부 겨울답게 인색하게 내려 쬐는 햇볕아래 드러난 폼베이는 즉 페라리는 단어가 제격이다 얕게는 1m 에서 깊게는 7m까지 쌓여있던 화산재를 이겨내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 건물은 남은 벽으로 간신히 공간을 구분하고 있었다. 신전이나 공중목욕탕, 극장 등과 함게 곧고 길게 뻗은 도로는 상당한 수준인 당시이 토건 기술을 짐작해 볼수 있다. 폼베이는 부자들의 휴양 도시였다. 온통 희색빛 투성이인 폼베이 시민들의 모습을 석고로 만들어 놓은 유물 보존 실이 있었다. 1860년 로마대학 고고학자 주세페 피오랠리 교수는 폼베이 발굴 임무를 부여 받았다. 교수는 발굴 현장의 건물마다 알수 없는 빈 공간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의문의 공간에 석고를 부었고 석고가 굳은 다음 주변의 흙을 떼어 냈다. 그 공간에서 놀라운 형체가 나타났다. 바로 폼베이 최후에 죽어간 시민의 모습이 었다. 화산재와 열기를 피하기 위해 코와 입을 막은체 앉아있는 사람, 뱃속의 아기를 보호하려고 엎드린체 죽어간 임신부, 절망적인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죽은 남자, 고통스럽게 몸을 뒤틀고 있는 개의 모습이 생생하게 들어 났다. 


화산재에 파묻힌 1800년 후에 그날의 고통과 비극을 눈 앞에서 마주했다. 유적지를 돌아보던 여행자들은 안타까운 탄식을 토해냈다. 그렇게 발굴된 폼베이 시민의 죽음은 2000여구에 달했다고 한다 우리는 천천히 유적지를 빠져나와 건물의 긴 회랑을 지나 공중목욕탕을 돌아보며 1세기 로마에서 21세기 이탈리아로 돌아 왔다. 한 겨울임에도 기차역은 여행자로 가득하다. 야외 유적지에는 관리인도거의 없어 실제로 주머니에 넣을 만한 크기의 작은 조각이나 유물은 모두 사라진 상태라고 한다. 폼베이 역으로 걸어 가면서 상상속의 도시를 둘러본 소감은 착잡했다.


나폴리가 세계에서 아름다운 항구로 손꼽히는 이유는 그 항구가 엄마의 품처럼 포근한 느낌을 주기 때문 이란다. 아름다운 도시라고 하기에는 부족 하지만, 아름다운 항구라고 하는데는 수긍이 갔다. 나폴리 바다와 베수비오산의 정경을 바라보는 이거리의 이름은 '산타루 치아'다. 나폴리엔 세개의 산타 루치아가 존재한다. 아름다운 해안거리, 정겨운 가곡, 그리고 나폴리 수호신이 모두 '산타루 치아'다. 제정 로마시절 로마 총독이 나폴리를 방문했다. 나폴라 항을 거닐던 총독은 아름다운 처녀를 발견하고 그녀를 로마로 대려 가려고 했다. 처녀의 어머니는 근처에 있는 수도원으로 딸을 피신 시켰다. 총독은 어머니에게 딸의 행방을 물었지만 그녀는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총독은 처녀의 어머니를 혹독하게 고문 하였고 그녀는 끝내 숨을 거두었다. 총독의 병사들은 이번에는 신부를 잡아갔다. 처녀의 행방을 물었으나 신부도 대답하지 않고 그 역시 모진 고문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후 신의를 지킨 신부를 '처녀들의 수호성인 즉, 성 루치인'라 부르게 되었다 그 후부터 나폴리 항을 지키는 주민들과 어부들은 나폴리를 지킨 수호자로 '산타루치'라는 이름을 경배하기 시작 했다고 전한다.


<로마 바티칸> : 소크라테스와 악처 이야기

나폴리에서 기차를 타면 로마까지 2시간 반이다. 우리의 마지막 기차 여행이다. "날씨 예보를 보니 모래 비가 오네, 그날로 정하자" 홈페이지에 접속해 참가 신청을 했다. 이번 여행에서 가이드가 있는 한국어 투어를 하는 날, 바티칸 막물관에서 가까운 지하철역에 사람들이 모였다. 30명은 될듯이 많이 모였다. 작은 깃발을 든 가이드에게 참가비를 지불하고 그가 나누어 주는 이어폰과 수신기를 받았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국가 바티칸 시국은 경복궁의 1.3배에 인구 1000여명의 극소국 이지만 존재감 만은 어느 국가와도 견줄수 없는 '교황'이라는 명사와 동일시 되는 바티칸 시국은 그 이름에서 신성함이 뿜어져 나온다. 잠시 카페에서 숨고르기를 했다. 1506년 로마의 한 농부가 포도밭에서 대리석 조각상을 발견하였다. 근육질의 성인 남성과 두 남자 아이가  굵고 사나운 뱀에게 속절없이 공격을 받으며 괴로워하는 형상 이었다. 조각상은 라오곤 이라는 트로이의 신관과 두 아들이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저주를 받아 바다 뱀으로 부터 공격을 당하는 장면 이었다. 고황청은 이 "라오곤 군상'을 대중에게 공개하면서 소장하고 있는 다른 작품도 함께 공개 하였다. '라오곤 군상'은 바티칸 미술관의 기원이라고 할수 있다. 머리칼이 몇개 남지 않은 머리칼이 길게 구불거리는 턱수염 툭 튀어나온 커다란 눈, 둘글둘글한 코을 가진 사람이 소크라테스 란다. '너 자신을 알라'며 날카롭고 명철한 명언을 남긴 그리스의 철학자의 석고상은 악처의 대명사인 크산티페의 구박에도 견더 낼수 있었을 것 같다. 한 제자가 그에게 물었다. "결혼은 해야 합니까?" 소크라테스는 "결혼 하게, 온순한 아내를 만나면 행복할 것이고, 사나운 아내를 만나면 철학자가 될테니" 이 대목에서 과연 크산티페가 본질적으로 성정이 나쁜 여자인가 하는 문제다.


             아테네 학당


소크라테스는 가족의 생계를 꾸리는 일에 무관심 했다. 누추한 차림으로 아테네 시내를 돌아다니며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했다. 상류층 제자도 많았으나 그는  돈을 받지 않거나 저녁 한끼로 대신 하고는 했다. 당시  높은 수업료를 받는 소피스트들과는 대조적 이었다. 사나운 아내를 만나 철학자가 된것이 아니고, 철학자를 먼나 사나운 아내가 되었을 것이라고 이책의 저자는 생각한다. 미술관의 서명실 벽화 <아테네 학당>에서 라파엘로가 그린 바티칸의 명화 속에서 소크라테스를 발견했다. 선체로 알렉산더 대왕에게 설교를 늘어 놓은 한 남자의 헐렁한 헤어스타일이 소크라테스로 거리의 철학자 답다. <아테네 학당>은 바티칸의 명작이자 라파엘로 본인의 대표작이다. 철학의 거장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걸어 나오는 듯 하다. 54명의 등장 인물이 복잡하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구도와 배치가 조화롭다. 그림 양쪽엔 두개의 석상이 서 있는데, 왼쪽은 아폴로, 우측은 아테네 여신이다. 이성과 지혜를 상징하는 두 신이 지혜의 학당이라는 주제와 걸 맞는다. 마테나 석상 아래쪽엔 기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수학자 유클리드가 컴프스로 도형을 그리고 있으며, 천동설을 주장한 천문 지리학자 프톨레아이오스가 그 옆에서 지구본을 들고 서있다. 그 옆에 라파엘로 자신의 모습도 그려 넣었다. 그림 왼편 아폴로 동상의 아리쪽엔 투구를 쓴 알렉산더 대왕이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그 아래쪽에 노트에 무엇인가를 적고 있는 수학자 피타고라스가 보인다. 한국 학생들을 고달프게한 수학자와 철학자가 한자리에 모여있다. 


<천지창조>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에는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가 있다. <천지창조>는 구약과 신약의 성서를 바탕으로 하여 세상이  창조되는 순간에서 인간이 타락하는 과정까지를 그린 작품이다. 미켈란젤로는 천장 아래의 작업대 위에서 하루 18시간씩 작업했다. 물감이 눈에 떨어져 눈에 이상이 생기고 목이 뒤틀리는 고통을 감내 하면서 4년만에 작품을 완성 하였다. 저명한 미술 사학자인 에른스트 곰므리치 교수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회화작품'이라 천사를 보낸 이 작품을 작업할 당시의 미켈란 젤로는 역설적으로 가장 우울한 시기 였다고 전해진다. 천장화 작업을 하고 있는 화가에게 언제 그림이 완성 되느냐고 교황이 물었다. 미켈란 젤로는 눈 한번 주지않고 대답했다. "제가 끝낼수 있을때 그림이 끈 나겠지요" 순순히 넘길리 없는 성격 나쁜 교황이 화가나서 미켈란 젤로를 지팡이로 한대 치고 말았다. 괴팍한 미켈란 젤로는 그길로 짐을 싸서 고향인 피렌체로 돌아가 버렸다. 졸지에 덤테기를 쓰게된 피렌체 대사가 미켈란젤로를 설득하고 교황을 설득해 두 사람은 간신히 화해하고 천장화 작업이 재개 되었다. 완성된 작품에 미켈란젤로는 즈카르야 라는 예언자의 얼굴에 교황의 얼굴을 구려놓고 뒤의 아기천사가 손가락 욕을 날리고 있는 모습을 그려 넣었다 실력도 있고 성깔도 있고 뒤끝도 있는 다 갖춘 화가다.


<최후의 심판>


미켈란젤로는 그로 부터 30년 후 60세가 되던해 또 하나의 걸작인 <최후의 심판>을 이곳에 남겼다. <최후의 심판>은 죽은 영혼들이 하느님 앞에서 심판을 받는 내용을 담았다. 천국으로 승천하는 자와 지옥으로 끌려가는 이의 대비가 극명하다. 미켈란젤로가 7년동안 작업한 끝에 완성한 이작품이 공개 되었을 때 종교계 일부 인사들은 비난을 쏟아냈다. 그림속에 등장하는 성인과 성녀가 모두 나체라는 것을 용납하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결국 미켈란젤로가 89새에 사망한 이후 그의 제자 '다니엘레타 볼테라'가 생식기 부분에 그림을 입히는 작업을 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볼테라는 평생동안 기저귀 화가, 속옷 화가라는 별명을 가지고 살아야 했으며 스승의 그림을 망쳤다는 죄책감으로 괴로워 했다. <천지창조>는 내부 촬영과 가이드 설명도 금지하고 있다. 드디어 한나절 동안 계속된 가이드의 시간이 끝났다. 가이드가 "매일 오전 교황청에서는 동전을 발행하고 있습니다. 교황의 얼굴이 새겨져 있는 귀하고 의미있는 동전 입니다. 저는 언제나 투어의 마지막에 이 동전을 선물해 드립니다. 가장 열심히 가장 진지하게 투어에 임해준 한분에게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 동전의 주인공은 "우리 어린이 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맨 앞에서 고개를 번쩍들고 이야기를 들었답니다. 이렇게 집중한 꼬마 관람객은 처음이에요" 모두가 박수를 쳤다. 해해 웃으며 푸린양이 달려 나가 교황의 동전을 받았다.


Epilogur

저자는 중3 중딩군과 초등학교 2학년인 푸린양과 함께 겨울방학을 이용해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다. 오스트리아에서 1주일간, 이탈리아에서 3주간을 자유여행을 했다. 여행은 언제나 힘들고 고생이지만, 아이들과 함께하는 여행은 흥미진진하고 솔직하게 하루 24시간을 붙어 다니며 31일을 함께하며 엄마와 아들, 딸이 보낸 시간은 아이들의 여행 취향과 그들이 보고싶은 것이 무엇 이었으며, 무엇을 보고 느낀 것보다 엄마와 아들, 엄마와 딸이 함께한 시간이 쌓아 올린 정과 추억은 앞으로의 삶에 디딤돌이 되어 줄것이라 믿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부족함이 있었고, 스스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는 의욕과 엄마의 불편한을 들어 주려고 애쓰는 아이들을 볼때 엄마의 마음은 한없이 넓어졌다는 것이 이번 여행에서 얻은 수확이다. 그 무엇보다 값지고 가치있는 여행이었다. 저자는 사전에 여행하게 되는 그곳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해서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을 빠짐없이 보여주면서 우리의 삶이 이만큼 다양하다는 것을 보고 느끼고 감동하게 만들어 주는 엄마의 마음을 많이 배우고 싶다. 여행의 스타일이 부부와 연인과 친구와 때로는 혼자가는게 진짜 여행이라며 혼자 떠나는 사람들이 많지만, 자녀와 함께하는 여행만큼 많은 것을 배우고 오는 것도 드물 것이다. 그 사람의 성격과 사람됨을 알려면 여행을 같이 해 보라고 하였다. 여행을 같이 하면서 24시간을 함께 하다보면 그 사람의 장점과 단점이 적나나하게 보이기 때문 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