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매력은 다양성이다. [22]
독일 문화 오디세이 [21-2]
독일 문화 오디세이 : : [황윤영, 김미경 공저]
< 칸트 (Immanuel Kant) >
서유럽 근대철학의 전통을 집대성한 칸트는 동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현재 러시아 칼리브그라드)에서 출생했다. 마구 제조업자인 아버지와 경건하고 신앙심이 두터운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 났으며 경건주의 학교에 입학하여 라틴어 교육을 받았다. 13살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17살때부터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서 공부했다. 1755년에는 오늘날의 교수 자격논문에 해당하는 <형이상학적 인식의 제1원리에 관한 새로운 해명>을 썼으며 1770년 46살때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의 정식 교수로 임명됐다. 작은 키에 기형적인 가슴을 가졌으며 몸이 약했기 때문에 평생 엄격한 식생활을 했던 그의 강의는 유머와 박진감이 넘쳤다. 영국과 프랑스의 문학은 물론 여행기와 지리학, 과학과 철학 등 광범위한 독서에서 얻은 풍부한 내용의 강의는 늘 생기 있었다고 한다.
칸트를 가리켜 합리론과 경험론을 비판하고 종합한 철학자라 일컫는 것은 그가 인식의 형식을 본래부터 갖고 있지만 인식의 내용은 경험으로 얻을 수 밖에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가 하루도 어김없이 정해진 시각에 산책에 나섰기 때문에 쾨니히스베르크 시민들이 산책하는 칸트를 보고 시각을 맞혔다는 얘기가 유명하다. 한번은 장자크 류소의 <에밀>에 몰구하여 산책시간을 어겼다고 한다. 그의 묘비에는 '더욱 더자주 그리고 더욱 더 곰곰이 생각해 볼수록 내위에 별이 반짝이는 하늘과 내 속의 도덕 법칙은 다욱 더 새롭고 큰 존경과 경외심으로 마음을 가득체워 준다.' <실천 이성 비판중>이라고 새겨져 있다.
칸트가 말하는 계몽이란, 인간이 자신에게 책임이 있는, 미성년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미성년 상태란 다른 사람의 인도 없이는 자신의 오성(Verstant, 개념을 간직하여 이용하는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무눙력을 말한다. 그런데 만일 그 원인이 오성의 결핍에 있는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도없이 오성을 사용 하겠다는 결의와 용기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면, 미성년 상태는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 현명해 지도록 하라! 자신이 오성을 사용하려는 용기를 가져라! 이것이 계몽주의 표어다.
< 헤겔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 >
헤겔은 칸트 철학을 계승한 독일 관념론의 완성자이다. 슈투르가르트 출생인 헤겔은 뷔르템베르크 공국의 재무관 아들로 1788년 튀잉겐대학교 신학과에 입하여 횔덜린과 셀링과 친분을 쌓았다. 헤겔은 셀링의 도움으로 예나대학의 강단에 선다. 한번은 헤겔이 <정신 현상학>의 서문과 첫 부분을 셰릴에게 증정하고 격려의 뜻을 받고사 했다. 이때 셸링은 참을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헤겔이 자신의 철학을 보잘것없는 것으로 여겨 새로운 철학을 완성 했다고 생각 했기 때문이다. 셸링은 죽을때까지 헤겔에 대한 적대 감정을 풀지 않았다. 반면 헤겔은 평생 그런 셰링의 기분을 눈치 채지 못했다. 헤겔은 그만큼 둔감했다. 예나를 떠난 헤겔은 하숙집 부인과의 불륜으로 아들을 얻게 되고 나폴레옹군의 침공으로 예나대학이 패쇄되자 밤베르크에서 신문 편집자로 일했다. 그뒤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수로 취임 했으며 1818년 에는 프로이센 정부의 초청으로 베를린대학 교수가 되었다. 1831년 콜레라로 사망했다.
"세계는 정신이다. 그리고 변증볍적으로 발전한다." 헤겔의 <정신 현상학>은 나폴레옹 군대가 예나에 입성한 날인 1806년 10월 13일에 탈고 되었다. 헤겔에 따르면 정신현상학이란 의식을 경험하는 학문으로 의식이 여러가지 경험을 통하여 진리를 파악하여 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경험이란 의식이 그 자체의 내용과의 대립을 극복하고 처음으로 돌아와서 의식 자체와 완전히 일치하게 되기까지 끊임없는 변증법적 운동을 가르킨다.
변증법이란 정립, 반정립, 종합이 3단계 체계로 끊임없는 역동적인 변화를 통해 궁극적으로 절대 정신에 도달한다. 정립(正)의 단계에서 그 자신속에 이미 대립과 모순을 포함하고 있다. 반정립(反)이란 그 모순이 지각되어 밖으로 들어나는 단계이다. 반정립은 다름과 다름으로 인한 소외를 통해 고통을 야기 시키는데, 이는 발전을 위한 필연적인 과정이다. 제3의 단계가 다시 정립으로 보면 정립-반정립-종합의 단계는 계속해서 반복된다. 헤겔은 도토리가 땅에 떨어져 싹을 튀우고 도토리 나무가 된다. 도토리 나무가 열매를 맺으면서 여러개의 도토리가 된다. 도토리-도토리나무-여러개의 도토리는 그대로 정립-반정립-종합의 과정과 잎치한다. 역사도 이러한 방식으로 자기를 실현해 가는 관정이다.
미국의 독립전쟁, 프랑스 혁명, 나폴레온전쟁등 헤겔의 시대는 극과극의 대립이 사회전반에 만연했다. 따라서 그들의 화합과 조화가 간절히 요청되었다. 이때 바로 변증법을 통해 각 요소의 특징을 다 포괄하고 이들의 평화로운 화해가 가능하다. 헤겔의 철학은 관념론적 형이상학이라는 점에서 많은 비판을 사기도 했지만 화해와 타협이 필요한 시대적인 요청에 부응한 사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 마르크스 (Karl Heinrich Mark 18181~1883) >
"의식의 존재를 규정하는 게 아니라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다" "인간이 변해야 사회가 변하는게 아니라 사회가 변해야 인간이 변한다." 마르크스는 트리어 출신으로 유대인 그리스도교 가정의 7남매 중 세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버지는 변호사로 자유사상을 지닌 게몽주의자 였고 어머니는 네덜랜드의 귀족 출신이었다. 1835년 본대학교에서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 미술사 등 인문학을 공부했고, 1836년 베를린 대학교에 입학하여 법률, 역사, 철학을 공부했다. 당시 헤겔의 철학을 알게 되어 헤겔학파의 좌파인 청년헤겔파에 소속되어 무신론적 급진 자유주의자가 되었다. 마르크스가 편집장이던 반정부 신문인 <라인신문>이 폐간되자 프로이센 귀족의 딸로 4살 연상인 예리와 결혼하여 파리로 옮겨간다. 그곳에서 경제학과 프랑스 사회주의를 연구했다. 프로이센 정부의 요청으로 파리에서 추방되어 브뤼셀로 가서 프로이센 국적을 포기했다. 엘겔스와 함께 공산주의자 동맹에 가입하여 동맹의 강령인 <공산당 선언>을 공동명의로 집필했다. 앵겔스와 런던으로 망명한 마르크스에게 재정적 원조를 아끼지 않았다. 1881년 12월에 아내의 죽음과 1883년 1월에는 큰딸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그는 그해 3월 14일 런던에서 앵겔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64세로 일생을 마쳤다.
<공산당 선언>
한 유령 <공산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당 선언(1848)> 만큼 세계곳곳에서 널리 읽혀지고 세계의 정치사상에 심각한 영향을 준 문서는 없을 것이다. 이책은 4개의 장으로 구성 되었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라는 제목이 붙어져 있는 제1장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라는 계급이 역사속에서 등장한 과정을 살펴보고 프롤레타리아의 승리가 불가피한 것임을 보여 준다. "이제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이런 사상이 대두된 당시 사회상을 보면 시민 개인이 요구하는 자유와 권리가 정치적으로 탄압 되었고 반면 기술과학의 발전에 따라 이루어진 급속한 산업화는 물질 만능주의의 기형적인 성장을 가져왔다. 자본가가 노동자의 착취로 인한 사회 계층간의 극심한 갈등속에 몰락하는 노동자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 되었다. 그 핵심 사상으로서의 유물론적 변증법은 "세계는 물질이다. 그리고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 세계는 물질로 이루어 졌으며 정신이나 의식 따위는 물질의 산물이라고 보는 것이다. 헤겔의 관념적 변증법의 변형이며 물질이 절대 정신의 위치로 놓이게 된다.
<소펜 하우어 (Arthur Schopenhauer 1788~1860) >
염세사상의 대표자인 쇼펜하우어는 단히치 출생으로 부모는 은행가와 여류작가였다. 1793년 단히치가 포로이센에 병합되자 함부르크로 이사했고, 1803년에는 상인으로 만들려던 아버지가 죽자 1809년부터 괴팅겐대학에서 철학과 자연과학을 배우고 슐체의 강의를 들었다. 1811년에는 베를린대학으로 옮겨 피히테의 슐라이어 미허의 강의를 들었다. <층속 이유율의 네가지 근원에 관하여, 1813>로 예니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의지의 표상으로서의 세계>에는 당시 이성주의 철학의 흐름에 반기를 들었던 염세주의 철학가 쇼펜하우스의 세계관이 드러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의지가 모든것의 근원이고 모든것은 의지의 결과인데, 이 의지는 개인에게는 고통이며 삶은 허무하다. 우리가 사물자체를 있는 그대로 대하는게 아니라 사물에 대해 주관적인 상징만을 가질 뿐이다. 따라서 삶과 세계는 끊임없는 다툼, 문화, 갈등과 투쟁의 역사인 것이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없고 그 충족은 극히 제한되며 결국 환멸과 슬픔만 남는다. 슬픔과 고통의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생명의 의지를 부정해야 한다.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의식의 상태, 즉 이 의지가 부정되고 형상 계기가 무로 돌아가는 것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는 인도철학에서 말하는 해탈과 정적의 획들을 이상적 경지로서 제시했다. 또한 자아의 고통에서 벗어 나면서부터 시작되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동정(Mitleid)을 최고의 덕목이자 윤리의 근본원리로 보았다. 그의 철학은 만년에 이르기까지 크게 인정을 받지 못하였으나, 19세기 후반 염세적 시류에 맞물려 크게 보급 되었다.
<니체 (Friedrich Wilhelm Nietzche, 1844~1900)>
니체는 레캔 출신으로 5세때 목사인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누이동생 엘리자베스와 함께 외할머니 집에서 성장했다. 어린시절부터 너무 많은 책을 읽고 글도 많이 썼기 때문에 평생 두통을 안고 살았다. 14세때 프포르타 공립학교에서 엄격한 고전 교육을 받았고 20세에 본대학에 입학하여 고전문헌학에 몰두했다.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옮긴 그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깊은 감명과 영향을 받았고, 버그너의 음악에 심취했다. 1869년에는 29세의 나이로 스위스의 바젤대학 고전문헌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는 옷을 잘 입는 멋장이 교수였다. 1870년 프로이센과 프랑스의 전쟁에 지원하여 위생병으로 종군했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35세에 바젤대학을 퇴직하고 요양을 위해 이탈리아 북부와 프랑스 남부에 체류하면서 저작에 전념했다. 1889년 정신착란을 일으키고 1900년에 바이마르에서 생을 마감했다.
니체가 로마에서 러시아 태생의 독일인 살로매를 만난다. 당시 21살의 살로매는 최고의 지성인 이었지만 팜므파탈로 분류된다. 니체가 살로매를 보자마자 던진 말은 "우리는 어느별에서 떨어져 오늘여기서 만나게 된걸까요? 서른 일곱살의 니체는 5월의 어느날 루체른 공원에서 21살의 살로매에게 청혼 했지만 그의 결론은 "그대 여자한테 가려는가 채찍을 잊지말자." "철학자 한테 결혼은 코메디이다." "신은 죽었다.(Gottist tot)" 니체의 저서 <즐거운 학문>에서 미친 사람들의 입을 통해 최초로 언급되는 "신은 죽었다" 혹은 차라투라스트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신께서 내려와 이것을 전하는 순간 그것은 엄첨난 사건이다. "신은 죽었다"는 말은 물논 "신의 존재와 상관없이 동시대인이 처한 니힐니즘적인 상황에서 전통적인 사상, 진리, 지식, 규범들 일체의 가치를 부정함을 의미한다. 신은 죽었다. 그 결과 피아의 세계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하는 이원론은 사라지고 남는 것은 허무이다. 왜냐하면 이 순간은 천둥이 지배하는 문명을 해체한 순간이며 영원불멸의 유토피아로 간주되던 이상사회를 부정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은 죽었다는 허무의 시작으로 인간의 본질에 대한 물음과 문명에 대한 비판적인 해석을 제기하는 중요한 가능성의 장치이다.
니체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기본적 충동, 본능적 충동은 의지이다. 권력에의 의지는 영웅주의, 투쟁, 권력, 힘을 골자로 하여 돈과 명예와 욕망을 추구하며 실현하고 그 가운데서 중상과 비방과 거부와 파괴가 난무한다. 삶이 굴러가는 삶의 동인으로서의 이런 권력에의 의지는 엄밀히 말해 노예의 의지도, 세계와 인간을 지배하고 예속 시키며 더 많은 권력과 통제를 위한 인간의 무한한 의지에서 혹은 의지를 위한 의지에 스스로 지배 당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되풀이 되는 인생은 허무이다. 이런 허무주의를 철학적 주제로 받아 들여 그 의미를 철학사 속에서 체계화 했던 사람이 니체였다. 인간은 목적이나 목표가 아니라 상승과 하강 사이에 놓여있는 하나의 다리, 하나의 과정이다. 인간은 자기 초극을 통해서 위버맨쉬(저 편으로 건너 가려는 자)로 나아갈수 있는 존재지만 다른 한편으로 마지막으로 전락해 버릴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위버멘쉬는 모든 피폐화된 자기와 고통스러운 현실 세계를 긍정하고 재 창조하는 자로 자률적인 의지의 세계를 선포하는 가치 창조자이다.
10. < 독일문학, 독일인의 삶과 생각.>
독일 문학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면<에다>가 있는데, 구전으로 전승되던 게르만의 신화와 영웅 설화등이 고대 아슬란드에서 기록된 것이다. 여기서 게르만 민족의 문학의 뿌리를 엿볼수 있다. 중세의 중심지는 긍정이고, 방랑, 음유시인 등이 영웅 서사시 <니벨롱겐의 노래>, <파르치팔>, <트리스판>, <에레크> 등을 남겼다. 독일 바로크 문학에는 쾌락과 죽음의 동경, 규범의 강요와 현실의 무상함 등이 주된 주제로 나타난다. 18세기 계몽주의 이래로 본격적인 시민계급의 시대가 도래했다. 기독교 질서와 귀족중심의 봉건지배 구조에 맞서 개인의 존엄성을 내세우며 이성과 합리주의로 현실을 개혁하려는 문학이 등장한다. 슈프름 운트드랑(질풍노도)의 젊은 작가들은 반봉건을 지향했던, 반계몽주의적인 방식을 선택하여 절대적인 자유를 추구했다. 괴테는 이탈리아를 여행 하면서 고전주의로 돌아섰다. 고전주의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예술을 모범으로 삼아 조화와 균형, 객관성, 보편성, 총체성, 정제된 형식등을 추구했다. 산업혁명이후 포이어 바흐와 마르크스 등의 유물론 사상이 확산되고 자연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현실주의 의식이 널리 퍼졌다. 20세기 전반의 독일문학은 인상주의, 상징주의, 신낭만주의, 신고전주의, 표현주의, 신즉물주의 등 다양한 양식의 문예사조가 등장 하였다. 세계대전 패전후 독일의 전후 문학은 '폐허문학', '영사점', '언어발췌'와 같은 용어들이 유행하고 폐허의 참담함 속에서 나치와의 단절과 새출발의 의지를 표명하였다. 20세기 후반에는 탈 정치화, 탈 이데롤로기화의 경향이 뚜렸해 지고 인간해방, 사회 정의 같은 거대 담론에 억눌려왔던 개성적 감수성과 개인적 욕구가 분출 되었다.
<젊은 베르트르의 슬픔>
<젊은 베르트르의 슬픔>은 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작품이다. 베르테르라는 청년이 유뷰녀에 대한 이루어 질수없는 사랑으로 자살을 한다는 이야기로 괴테의 자전적 소설이다. 총 87편의 편지에는 자유를 향한 강한의지 사랑의 고뇌, 격렬한 감정표현, 끝없는 동경 등 당시 젊은 이들 가운데서 유행하던 슈트름 운트 드랑(질충노도)의 대서사시적 경향을 적나나하게 드러내고 있다. 평범한 시민인 주인공 베르테르는 사회에서의 적응에 실패한 체 시골 마을로 들어오게 되고 마을 무도회에서 로테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녀에게 이미 약혼자 알베르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그녀에 대한 사랑은 멈출수 없었다. 일 때문에 도시로 나갔던 로테의 약혼자가 돌아오고 베르테르는 절망에 빠진다. 베르테르는 냉정하고 합리적인 계몽주의 셩향의 알베르트와 자살에 관해 심한 논쟁을 벌인 후 결과와 형식만을 중시하는 알베르트는 이것을 사랑의 정표로 생각하고 열정에 사로잡힌다. 알베르트와 로테 사이에서 괴로워하던 베르테르는 여행을 떠난다. 1년만에 돌아온 베르테르는 알베르트와 로테가 결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시 만난 로테는 그를 차갑게 대하지만 시와 음악을 매개로 다시 이전처럼 까워진다. 우연한 기회에 베르테르는 사랑 때문에 살인을 저지른 남자를 변론하지만 결국 그는 사형선고를 받는다. 그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베르테르는 낙심한다. 로테가 남편의 충고대로 베르테르에게 만남을 자제할 것을 요정하자 베르테르는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을 찾지 못한다. 실의에 빠진 베르테르는 여행을 빙자하여 엘베르트에게서 호신용 권총을 빌리고 로테의 손에 의해 건내진 총으로 목숨을 끊고 만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슈도름 운트드랑 혹은 천재시대의 정형적인 작품이다. 당시 기독교 사회에서는 용납할수 없었다. 이 작품은 자살, 자유죽음에 대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베르테르 신드롬' 이라는 모방자살이 이 작품에서 비롯 되었다. "그는 인간의 손에서 모든것이 멸망한다"고 주장하며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쳤다.
<파우스트 (Faust)>
쾨테의 희곡 <파우스트>는 전설을 문학적으로 형상화 했다. 서곡과 1,2부로 구성 되었는데, 서곡은 연금술사를 두고 신과 악마 메피스 로펠레스가 벌이는 대결이다 파우스트가 타락하여 영혼을 뺐을수 있다는 메피스토텔레스와 모든 방황도 불구하고 "인간은 결국 고귀함을 잃지 않고 바로 설수 있으리라는 즉,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 하지만 선량한 인간성은 검은 충동에 사로잡혀 버리드라도 결국은 바른 길을 잃지 않으리라"는 신의 승부내기에서 시작한다. 제1부에서 파우스트는 자신을 찾아온 메피스토 텔레스와 계약을 맺는다. `"내가 순간을 향해 멈추어라.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 라고 라고 말하게 되는 날 너는 나를 결박해도 좋다. 그러면 나는 기꺼이 멸망의 길로 가리라" 피스트펠레스는 미녀의 주방으로 데려가 늙은 파우스트를 활기찬 젊은 이로 만들어 주고 온갖 감각적 향락을 제공한다. 그때 시민 출신의 그레트렌을 만나 혼전 임신을 하게 하고, 결국 이로 인해 그녀의 가정은 파탄이 난다. 어머니는 죽고 오빠는 파우스트와의 결투에서 살해되며 그레트헨은 정신착란에 빠져 자신의 아이를 죽이고 감옥에 구금된다. 파우스트가 그녀를 구하려고 하자 그녀는 죽음으로 자신이 죄를 용서 받고자 한다. 2부에서는 파우스트가 메피스트 텔레스의 도움으로 고대 그리스 최고의 미녀인 헬레네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들 사이에는 오이포리온 이란 사내 아이가 테어난다. 그러나 이 아들이 그리스 독립전쟁에서 죽게 되고 헬레나가 죽은 아들에게 돌아가면서 둘의 사랑은 끝이난다. 파우스트는 이제 인류사회의 공익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한다. 황제로부터 황무지를 받아 대단위 개간사업을 벌리고 종이 화페를 만들며 경제파탄에 빠진 공동체를 일으켜 세운다. 추악한 환의와 평화를 느끼며 "순간아, 멈추어라!"를 외친다 그리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는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천사들의 합창이 울려퍼진다. 괴테는 두번의 이탈리아 여행후 질풍노도의 문학을 벗어나 고전주의에 들어선다. 고전주의는 조화와 균형의 단정한 형식미를 중시하는 예술사조로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의 예술과 문화를 모범적으로 삼는다. 낙관주의적이며 조화를 이룬 순수한 아름다움의 아폴로적 문화가 모범인 것이다. 파우스트는 고전주의의 대표작으로 제1부는 59세때 발표되고, 제2부는 그가 사망하기 직전에 완성되어 유고집으로 출판 되었다.
<데미안 (Demian)>
데미안은 헤세(Herman Hesse,1887~1962)의 작품이다. 헤세는 기독교 선교사를 부모로 둔 독실한 기독교 집안 출신이다. "시인이 되거나 전혀 아무것도 되고싶지 않았기 때문에 다니던 신학교에서 뛰쳐 나오고 연상의 여인과의 사랑 때문에 자살을 기도했다. 질풍노도의 청춘은 한동안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이후 서점 점원과 공장 실습생으로 일하며 괴테를 탐독하고 문학과 철학에 관심을 갖고 시를 썼다. 그는 동양의 정신계계와 문화를 연구하며 기독교와 불교와 바라문교등의 종교의 경계를 넘나 들었다. 헤세는 194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네 속에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 오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어린 싱클레어는 부모님이 계신 집안의 밝은 세계와 하녀와 범죄자가 처해있는 어두운 세계를 동시에 예감한다. 그는 불량배 크레머에게 도둑질과 거짓말을 강요당하므로써 안전한 밝은 세계의 붕괴를 경험한다. 싱클레어의 구세주로 데미안이 등장한다. 카벨과 아벨에 대한 또 다른 견해를 갖고 있는 그는 크레머를 멀리 사라지게 한다. 그러나 싱클레어는 어린 세계로 도피하며 데미안과 결별한다. 상급학교에 진학한 싱클레어가 사춘기로 방황하는 가운데 데미안의 편지가 도착한다. "새는 알에서 부화하려고 한다. 알은 세계요,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신의 이름은 아크락사스" 싱클레어는 대학에서 데미안을 다시 만나게 되고, 그의 어머니 에바에게서 꿈속의 연인을 보게 된다. 전쟁으로 두 친구는 헤어지고 싱클레어는 중상을 입어 죽어가는 데미안을 만나게 된다. 데미안은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6년에 쓰여지고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19년에 출판되었다. 익명으로 발표하여 에밀싱클레어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에밀 실클레어의 젊은 시절의 이야기라"라는 부제가 붙은 이 작품은 청춘기의 고뇌와 방황을 1인칭으로 솔직하고 강렬하게 표현함으로써 전후 세대에 영향을 미쳤다. 어둠과 맑음, 선과 악마 등의 대립된 요소를 하나로 통합하는 자신의 운명을 탐구하는 젊은이의 운명을 그려낸 이 작품은 헤세 자신에 내재하는 모순을 객관적으로 묘사한 소설이다. 데미안이란 말은 데온(Damon)에서 유래된 것으로 신과 인간의 중간자 악마, 초자연력 등을 의미한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 했다." 문학이 도울 것이다.
<피아노 치는 여자 (Die Klaviers Pielerin)>
엘리네크(Eltriede Jelinek,1946~)는 '노벨상 미스테리', '스켄들 제조기', '남자 잡아먹는 여자', '제집 더럽히는 여자' 등의 수식어를 달고 다닌다. 삼십대 중반 에리카는 피아니스트로 성공하는데 실패하고 피아노 선생으로 학생들을 가르킨다. 에리카는 은밀하게 자신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사디즘적, 마조히즘적 성향을 들어내며 관음적 행동도 서슴치 않는다. 자신감에 넘치고 잘 생긴 공학도 클레머는 그녀에게서 관심을 보이며 성적관계를 맺으려고 시도한다. 클레머는 에리카와의 관계를 자신이 주도하려 하지만 에리카는 온갖 마조히즘적 행위들을 요구하면서 자신이 주도하려 한다. 에리카는 클래머가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 사랑해 주기를 기대하지만 클레머는 자신의 욕망에 따라 에리카를 지배할수 없다는 사실에 분노한 어느날 그녀를 폭력으로 짓밟고 강간한다.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에리카는 다음날 그에게 복수하려고 칼을 지니고 찾아 가지만 결국 자기 어깨를 찌르고 다시 어머니 에게로 돌아간다. 엘리네크는 인류문화사에서 터부시 되어온 여성의 성의 묘사를 자신의 사회비판 도구이자 문학의 방편으로 삶고 있다. 따라서 엘네크의 문화에는 노골적인 터부 침범이 일어나고 늘 포르노 시비가 따라 다닌다. 지금까지 소위 외설적인 문학작품에 대한 담론에서 주된 논쟁거리는 작품의 성적 표현을 두고 음란물인가 아닌가를 구분하는 것이었다.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며 탈경계를 말하는 현대사회에서 더 이상 이러한 이분법적 가치관과 평다기준으로 엘리네크의 글쓰기를 외설이냐 예술이냐 하는 가치 매김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만의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글쓰기에서 전통적인 언어를 과감하게 해체하기 때문이다. 또한 현대 소비 가부장 사회의 부당함과 이를 무비판적으로 몸에 익힌체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을 장르의 헤체및 혼합, 기계적인 반복과 악의적 과장, 신랄한 독설과 풍자 등으로 구현 하면서 시적이고 음악적이며 회화적인 유희를 벌리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의 작품이 예술이냐 외설이냐의 이분법적' 등식을 뛰어 넘는 외설적인 예술작품으로 간주될수 있을 것이다.
< 제3부 독일인의 삶 곁으로 >
독일 요리는 프랑스 요리처럼 화려 하거나 다양하지 않지만 소박하고 깊은 맛이 나며 푸짐한 것이 특징이다. 독일 음식이라고 하면 여러 종류의 소시지와 감자 요리가 유명하다. 천 여종이 넘는 소시지는 지방마다 독특한 맛을 자랑하고, 감자는 다양한 조리법 개발로 감자요리 전문점이 있을 정도로 즐겨 먹는 음식이다. 빵은 호밀이나 밀 이스트 이외에 설탕을 전혀 넣지 않고 기울을 제거하지 않은 빵들이 식사때 먹는 종류인데, 브렌첸(작은 바게트)과 둥글고 검은 빵을 많이 먹는다. 여러가지 형테로 각종 크기의 것이 있으며 약 200가지의 빵을 구할수 있다. 독일식 아침에는 오렌지 쥬스, 따뜻한 커피와 부드러운 마말레이드(잼)와 햄, 치즈와 소시지를 올린 빵을 먹는다. 점심은 따뜻한 음식을 먹으며 하루중 가장 든든하게 먹는다. 오후에는 '커피 휴식'을 가지며 커피와 보기만 해도 예쁘고 먹음직 스러운 케이크 한조각을 먹는다. 저녁은 '아벤크 부르트(저녁빵)라고 부르며 빵과 찬 음식을 먹는다는 뜻이지만 따뜻한 음식을 먹기도 한다. 스파게티와 피자는 독일인이 일상적으로 선호하는 음식이며, 지중해 음식인 케팝 등 터키나 그리스, 중국, 태국, 음식은 매우 일반화 되었고, 일본식 스시나, 한국의 비빕밥에 대한 선호도도 점점 크지고 있다. 크리스마스 시기에는 직접 구운 과자나 스톨렌(말린 과일을 넣어 만든 케이크), 랩쿠헨이 있다. 또한 독일인은 식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육류인데 고기를 양념하여 오븐에 넣어 통째로 구워 먹는 고기요리를 즐긴다. 독일은 다른 유럽국가들 보다 돼지고기를 많이 소비하는데, 그 양은 1년에 450만톤, 인구 1인당 하루 약 156g에 달한다. 독일 어느 지역을 가드라도 정육점이나 수퍼마켓에 각양각색의 온갖 소시지들이 진열장 가득 체워진 것을 볼수 있으며, 이들 가운데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빵에 끼워 먹으며 근사한 한끼 식사가 된다.
<맥주 왕국>
독일은 백주의 본고장이자,. 맥주의 왕국이다. 또한 독일인들은 세계에서 맥주를 가장 많이 마시는 사람들로 유명하다. 국민 1인당 매년 130여 리터의 맥주를 소비한다. 미에 걸맞게 독일에는 전세계 맥주 양조장의 1/3인 1400여개의 맥주 회사가 있으며, 그 중 절반 가량이 독일 남부 바이에른 지방에 몰려있다. 이러한 맥주 양조장은 전통적으로 수도원과 관련이 깊은데, 옛날 수도사들이 스스로 곡차를 만들어 "영양물"이라 마셨고 심지어 '약'으로도 썼다. 독일의 양조역사도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0세기 경에 처음으로 뉘른베르크에서 독일의 '아이스비어'가 만들어 졌는데, 맥주에 '흡'을 첨가하는 방식이었다. 독일 맥주는 1516년에 바이에른 공 빌헬름 4세가 "맥주 순수령"을 반포하여 주원료인 대맥과 호프, 물 이외의 부가적인 원료 사용을 금지시켜 순수한 맥주가 그 특징이 되고 있다. 이것은 독일만의 순수한 맥주 맛을 유지시켜 나가기 위해 기본재료 3가지 외에 아무것도 첨가 해서는 안된다는 법령이었다. 이후 1551년 '호모'를 추가하여 4가지가 되었고 1906년 독일 전역에서 맥주 순수령이 채택 되었다. 맥주 순수령은 맥주의 질을 높여 보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지만, 밀 맥주에 쓰이는 밀이 늘어 나면서 빵을 만들 밀이 부족해지자 보리 사용량을 늘리고자 한 것이기도 하다. 1516년 맥주 순수령을 공포 했음에도 불구하고 밀 맥주를 계속 만들자 보리 사업을 독점하고 있던 바이에른 왕조가 1567년 밀 맥주제조를 금지 시켰다. 하지만 1610년에 다시 밀 맥주의 판매가 허용 되었다. 1871년 비스마르크에 의해 독일이 통일 되면서 바이에른에 국한 되던 맥주 순수령을 독일 전역에 반포, 1933년 독일 맥주관련법에서 상면 발효맥주에만 설탕인 다른 종류의 맥아가 맥주의 재로로서 가능하다고 개정했다. 한편 북부지방의 도르트문트에서는 필젠(필스) 타입의 상큼한 담색 맥주와 문헨 맥주의 맛을 곁들인 특유의 담색 맥주가 상당한 시장을 확보 하였으며, 바이에른 에서도 점차 담색 맥주를 생산하게 되었다. 이 황금색의 맥주는 하면발효 맥주로서 독일의 양조사인 그롤이 체코의 필센에 있는 한 양조장에서 만든것이 그 시작이었다. 독일의 양조 기술자는 냉각 기술과 매칭되면서 품질위주의 생산 방식만을 고집하며 세계에서 가장 주목 받으며 퍼져 나갔다. 독일 맥주는 일반적으로 짙고 풍부한 맛을 주며 부드러운 촉감과 은은한 향기를 지녀 그 품질의 우수성은 세계에 자랑하고 있다. 그 지방의 수질, 원료, 기후, 생활습관에 따라 양조방식을 달리하고 있어 그 종류도 수없이 많고 원액즙의 농도 또한 다양하다. 북부 함부르크에서 남부 문헨까지 독일전역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는 맥주는 필스 맥주다. 독일의 대표적인 맥주 브랜드는 외팅어, 크롬바허, 비트버거, 바슈타언어, 벡스, 하쓰뢰더, 벨 틴스, 피울러너, 리데 베르거, 슈테른 베르크 등이다.
<맥주 장인 브라우마이스터 (Diplom Braumeister)>
독일에는 현재 크고 작은 1400여개의 맥주 공장이 있고, 각기 독자적인 전통기술로 맥주를 제조하고 있다. 여러가지 다양한 제조 방법에도 불구하고 그 전통과 명성을 이어가는 데는 브르우마이스터라고 불리는 맥주 양조 기술자가 있기 때문이다. 전문적으로 그들을 양성하는 기관도 있어. 고품질의 맥주를 양조하는데 온 힘을 쏟고 있다. 독일에서 맥주를 전문적으로 배울수 있는 곳은 독일의 모든 종합대학중에서 문헨 공과대학 하나 뿐이다. 이 대학은 노벨상을 11명이나 배출한 세계3대 공과대학이자 독일에서 랭킹 1위의 독일 최고 명문 대학이다. 문헨 공과대학에는 맥주제조 학부과정과 맥주 제조 마스터 과정이 있다. 맥주 제조과정의 커리클럼은 세포생물학, 유기화학, 물리학, 매카닉, 기계도면및 설비, 컴퓨터 프로그래밍, 무기화학, 열역학, 미생물학, 유체역학, 유전학, 기기분석등 웬만한 공과대학에서 배우는 기본적이 커리쿨럼에다 경제학, 재무관리, 경영학까지 해야만 통과될수 있는 아주 힘든 과정이다. 그런 기본 과정+백주에 관련된 공학을 해야 하며 논문및 해당관련회사에서 최소 18주의 실습을 해야만 학부 졸업이 되며 실질적으로 맥주에 관련하여 브라우 마이스터 과정까지 취득을 하려면 26주의 실습경력까지 요구한다. 이 과정은 9학기, 즉 4년 반이 걸린다. 졸업후에 유럽을 포함, 세계 굴지의 식품및 맥주회사로 취업하거나 약품회사나 연구소로 가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와인 (Wein>
독일이 맥주의 왕국이라고 불리지만 맥주만큼 종류가 다양한 것이 바로 독일의 와인이다. 독일에는 서부 지역만 해도 5만여종의 와인이 있으며, 이를 모두 합치면 맥주보다 종류가 더 많다. 독일 와인은 다양한 하이트 와인으로 알코올 도수가 낮고 향이 짙으며 산뚯한 단맛이 있는 와인이 특히 유명하다. 1980년 대까지 독일에서 생산되는 와인의 약 90%가 화이트 와인이었으나 프랜치 '페러독스(Frech Paradox) 이후 래드와인이 선호되면서 생산 비율이 증가하여 현재 약 30% 정도가 래드 와인이다. 라인강 유역에서 자란 포도로 빚은 모젤 와이나 라인 와인이 대표적이다. 대부분 가늘고 긴 병에 담겨져 있는데, 라인와인은 갈색, 모젤와인은 녹색으로 정해져 있다. 독일의 화이트 와인은 세계의 애음가 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다. 와인 생산지역과 지역의 특색은 다음과 같다.
<커피와 케이크>
유럽인들은 모두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면서 여유를 즐긴다. 독일의 커피 문화속에서 모여드는 정치인들, 로비스트들, 대학생들 및 관광객들이 집결하는 도시 베를린에는 각자 커피취향에 어울리는 모든 커피를 마실수 있다. 달콤한 것의 공장 뒤꼬새르 및 프린세스 치즈케이크 등 카페명부터 기발한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베를린 중심지를 벗어나거나 라이니 켄도르프 지역의 카페 첼팅어가 유명하다. 함부르크에는 커피 파리스라는 유켄트스틸의 카페가 있다. 통계에 따르면 독일인은 1인당 연간 149리터의 커피를 마신다. 이는 1인당 연간 맥주 혹은 물 소비량을 뛰어넘는 수치다. 신선하게 볶은 커피 원두를 사용하는 것이 ㅇ요즘 크랜드다. 독일에는 전통있는 우너두공장과 더불어 자체적으로 배합한 커피원두 및 순종의 커피원두를 고집하는 신생 커피원두 공장들도 적지 않다. 그중 브래맨은 독일의 대표적인 정통 커피도시로서 커피 원두공장이 104곳이나 있다. 커피와 달콤한 케이크는 수많은 독일인들에게 실과 바늘과 같다. 특이한 바움 케니크로 덴마크의 슈네빌 등 치즈 케이크, 사과 케이크, 흑림 앵두 케이크 등은 독일 카페의 대표적인 케이크들로 사랑 받는다. 비교적 신생 고급제과점에서 맛과 멋이 모두 화려한 작은 쇼트 케이크가 트랜드를 이룬다.
13. 분데스리가의 나라 독일.
<전차 군단>
2014년 브라질 원드컵의 주인공은 독일이었다. 독일은 1954년, 1974년, 1990년, 2014년에 통산 4번째 우승국이 되었다. 전차군단 독일은 통일 독일로 우승하게 되어 더 큰 의미를 가진다. 브라질 미라키나 경기장에서 아르헨티나와 결승 연장전에서 괴체가 결승골을 넣어 1:0으로 우승을 자지했다. 뢰브(54) 독일 대표팀 감독은 '우리는 10년 전부터 오늘의 우승을 준비했다고 말했다. 독일이 우승할수 있었던 주요 원인은 독보적인 선수 개인의 기량이다. 감독의 전술보다도 뛰어난 조직력을 이루어 진정한 한팀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독일축구의 기적은 조기축구회 목주 클로재이다. 그는 개인 통산 원드컵 16골이라는 최다 골로 신기록을 세워 영광의 자리에 섰다. 그는 유소년 팀에서 전술력 부족이라고 퇴짜를 맞고 7부리그에서 최정상으로 도약하며 4회 연속 월트컵 국가대표에 선발, 출전하였고 4번째 월드컵에서 기적의 주인공이 되었다. 꿈의 무대 원드컴에서 "아름다운 저녁이다. 최다골 기록을 가족에게 바친다"며 기뻐 했다. 이번 월드컵을 마지막으로 36세 골잡이는 은퇴식을 갖는다.
<스포츠 엘리트 슐레>
운동을 한다면 공부는 등한시해도 된다는 생각은 독일에서는 불가능하다. 이런 편견을 깨는 학교가 스포츠 엘리트 슐레이다. 스포츠 엘리트 슐레는 독일 올림픽 체육연맹이 기록 스포츠의 향상을 위해 학교와 거주를 함께 결합시킬 것을 제안한 교육시설이다. 엘리트 슐레는 올림픽 기간에 맞춰 4년의기간이 부연된다. 4년이 지난후 기존의 엘리트 슐레들은 평가되고 평가에 따라 위상이 재인정 받거나 거부 된다 2002년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스포츠 엘리트 슐레의 연방회의에서 "스포츠 엘리트 슐레란 재능있는 청소년 선수들이 최고기록을 내기 위해 스포츠를 하는 동안 훈련장과 연계된 주거지에 머무르며 학업과 훈련을 병행할수 있게 만든 시설이다." 엘리트 슈레는 월 회비가 400~410류로(약72만원) 정도지만 대부분 관련 협회나 클럽에서 지원한다. 전국 16개주에 거의 하나씩 운영되고 있다.
<분데스리가>
독일에서 활동한 발레리나 강수진과 축구 스타 차범근 선수
축구는 단연 독일 최고의 스포츠다. 분데스리가는 1963/64년 시즌부터 시작한 프로 축구로 그 역사가 50년이 넘었다. 제1부와 제2부에서 각각 18개 팀이 홈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경기를 치른다. 클럽당 34경기를 치르며, 이기면 3점, 비기면 1점, 지면 0점을 준다. 총점이 가장 높은 팀이 우승하게 된다. 시즌이 끈나면 1부리그 하위 2개팀과 2부리그 상위 2개 팀이 서로 자리를 바꾼다. 최고의 리그로 전 세계에서 가장 관중이 많은 리그로 유명하다. 해외 유명스타를 비싼값에 영입한ㄴ 리그들과 달리 분데스리가는 자국 선수를 기반으로 구단 재정 규모에 맞쳐서 리그를 키우고 이끌어 간다. 바이에른 문헨 같은 팀은 유럽최고 수준을 유지하며 세계축구의 흐름을 리드하고 있다. 우리나라 차범근 선수가 프랑크 푸르트(1979~1983), 레버쿠젠(1983~1989)에서 활략했다. 분데스리가에서 역대 가장 많이 우승한 팀이 바이레른 문헨 팀이며, 2014년 월드컵에서 대표팀 주역들은 대부분 문헨 소속 선수들이었다. 역대 선수주에서 바켄바우어, 마테우스, 클린만 선수등이 유명하다. 개인기 위주의 남미 축구와 달리 독일축구는 조직력 중심의 수비위주 축구다. 독일에는 2만 6천개 팀과 670만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다.
15. 크레식과 대중음악
<독일의 음악가 바흐와 헨델>
<독일의 클레식 음악>
프랑스가 미술로 널리 알려졌다면, 클레식 음악은 독일인의 민족성과 감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예술로 일컬어 진다. 본래 클레식은 고대로마에서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 최상위층을 일컫던 말로 '최고의', '잘 정돈된', '영구적이며' '모범적'인 것을 의미한다. 이후 클레식은 예술의 최고 걸작이나 특정시대, 즉 18세기 중반에서 19세기 초기의 유렵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조화와 균형및 절제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 고전주의를 말한다. 음악에서는 대략 바흐가 사망한 1750년부터 베토벤이 사망한 1827년까지 의 기간으로 모차르트, 하이든 등이 활동했던 시기이다.
<찌그러진 진주, 바로크 음악>
다가올 고전주의에 앞서 낙후 되었던 독일음악의 발전을 도모하며 독일 음악을 전 유럽으로 확산시킨 사람이 바흐와 헨델이다. 바로크는 포르투갈어 'barrcco'로 찌그러진 진주를 말하며 시대의 부정적 인식이 드러나 있다. 독일은 특히 30년 전쟁(1618~1648)으로 인구의 1/3이 죽고 영토가 초토화되는 가운데 귀족과 교회의 요구에 따라 치장이 많은 장식예술이 발달했다. 여기에는 종교적 초월의식, 세속적인 쾌락과 죽음의 공포, 규범의 강요와 현실으 무상말 등이 얽혀있다.
<음악의 아버지 요한 세바시티안 바흐>
독일 퀴링겐주 아이제나흐에서 출생한 바흐(Bach,1685~1750)는 음악가 집안의 출신이다. 류ㅣ네부르크, 이른 시타트, 뮐하우젠, 바이마르, 쾨텐, 특히 말년에는 27년동안 라이프치히에서 교회 작곡가, 합창장, 오르가니스트 등으로 일하며 1000곡 이상의 작품을 남겼다. 두번의 결혼에서 얻은 자녀가 20명이 었은데, 장나 W.F바흐, 차남 K.ph.I 바흐 그리고 막내 J.Ch. 바흐도 뛰어난 음악가 였다. 바흐는 음악의 본질에 충실 하면서 단순한 진리와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의 음악은 수하공식을 대입하듯 음격하고 절제된 당시 프로테스탄트적인 경향을 보여주고 있으며 또한 이와 대조적으로 죽음에 대한 동경을 드러내기도 한다.
바흐가 음악으 아버지로 추앙된것은 멘델스존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모차르트가 바흐의 악보를 빌려서 공부햇고 베토벤의 책 상위에는 늘 바흐의 악보가 있었다고 하지만 바흐의 음악은 19세기 초에는 거의 잊혔었다. 그런 바흐를 부활시킨 것이 멘댈스존이다. 15살에 외할머니로부터 <마테 수난곡>악보를 선물받은 멘델스존은 20세가 되던 1829년 3월 11일 <마테 수난곡>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며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길고 고루한 곡을 누가 들으러 오겠느냐는 우려와는 달리 연주회의 입장권은 순식간에 매진 됐고 연주회장 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발길을 돌렸다고 한다. 바흐를 처음들어 본다면 굴드가 연주하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들어보자 국드의허밍이 곁들여진 음반은 기존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에 비해 파격적인 해석과 변주라고 한다. 아니면 사라장이 협연하는 <관현악 모음곡 제3번 제2악장> 일명 G선상의 아리로 바흐를 시작해도 좋을 것이다. 그밖에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브란텐 부르크 협주곡>, <무반주 첼로 모음곡> 등이 있다.
<음악의 어머니 헨델>
바흐와 같은 해인 1685년 2월 23일 독이의 작센주 할레에서 태어난 헨델(Hanel,1685~1759)은 이탈리아에서 활동하고 인생의 후반을 영국에서 보내며 귀화했다. 오페라 작곡과 상상연에 온 심혈을 기울였지만 실패했다 헨델은 오라토리오 <베시아>로 운명을 개척했다. <메시아>의 44번째곡이 부활절에 흔히 들을수 잇는 할렐루야이다. 오라코리오는 오페라와는 달리 무대장치도 없고 연기와대사 대신에 노래가사로 스토리르 전달하는 종교극이다. 그는 멜로디와 화성에 중점을 두고 격정과 환희가 넘치는 선율을 선보였다. 특히 같은 부분을 계속 반복연주한 다카포 형식을 사용하여 작곡가는 조금만 작곡해도 되고 청중은 종은 맬로디를 계속들으며 익힐수 있었다. 그의 음악이 이해하기 쉬웠던 이유이다.
웨스트인스터 사원에 매장된 헨델은 1759년 4월 14일 성 금요일의 아침 8시에 세상을 떠났다. 바흐와 헨델은 같은 시대의 독일 음악가 이면서도 평생 만나지 못했다. 헨델을 모른다면 조수미가 부르는 오페라 <리날도>의 아리아 '날 울게 하소서'로 시작하는 갇힌 공주가 부르는 독백조의 노래 선율에는 절제된 슬픔이 스며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