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Review

여행의 매력은 다양성이다. [28]

paxlee 2019. 11. 24. 22:18

 

유럽문학 오디세이 [23-6]



『수레바퀴 아래서』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는 정직하고 건강한 소시민 요셉라트의 아들로 어머니는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소년은 신체적으로 연약하나 끈기와 집념과 공명심에 불타고, 그 마을에서 수백년 동안 나오지 않았던 천재이자 재주꾼으로 늘 일등만 하는 마을의 희망이었다. 아버지의 명예욕과 교장 선생님의 부추김, 목사에 이르기까지 과열된 교육열에 힘입어 한스는 밤늦게까지 공부해야 했으며, 또래 친구나 놀이친구와는 담을 쌓고 살아야 했다. 그는 낚시질이나 토끼 기르기, 그리고 사계절의 음향과 빛갈, 그러한 것들을 즐길 여유가 없었다. 그는 슈투트가르트 주 시험에 합격했다. 그는 마울브론 신학교와 튀빙겐 신학대학으로까지 계속 장학금으로 수업 받게 되었고, 그 다음에는 목사나 교사직으로 나가게 되어 있었다. 그는 주 시험에 합격한 후에도 마을 목사와 교장선생님의 부추김으로 과외를 받고 다음 과 과정을 위해 준비해야 했다. 한달 동안의 휴식을 반납하고 꾸준히 공부한 덕분에 그는 마울브론 신학교에서도 수석을 할 수 있었다. 한스는 우등생이자 모범생으로 인정 받았다. 그러나 한스는 헤르만  하일러라는 친구와의 사귐을 통해 목적지향적인 학교교육의 의미를 의문시하게 된다. 하일러는 조숙하고 반항적이며, 삶과는 거리가 먼 교육을 비판하고 학교의 억압에 대해 반항한다. 교사들은  이 우정을 방해하고자 한다. 그러나 다른 한 학생의 죽음은 이 두 사람을 더욱 결집시킨다.


한스는 자신의 뜻과 욕구를 표현하지 못하고 타의에 의해 행동을 결정해야 되는 데에 회의한다. 여태까지 공부밖에 몰랐던 자신이 의문시 되고 자신의 사람과 미래에 대한 표상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한스는 자신의 뜻과 욕구를 표현하지 못하고, 타의에 의해 행동을 결정해야 되는 대에 회의한다. 여태까지 공부밖에 몰랐던 자신이 의문시 되고 자신의 직업과 미래에 대한 표상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한스는 자신의 진정한 욕구에 따르지 못하는 억압의 환경들에 저항해 보지만, 생각은 행동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한스의 성적은 떨어진다. 그러고 학교와 부적응 상태에 있었던 하일러는 마올브론을 탈출한다. 한스는 혼자 남게 되고, 선생들은 그를 마치 나병환자라도 되는 양 취급한다. 한스는 우울신경증에 시달리며, 수업 중에 엉엉 울어보지만 소용이 없다. 한스는 더 이상 학교생활을 버틸수 없어서 겨우 일년 가까이의 신학교 체재 끝에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아온다. 그럼으로써 소년이 희망뿐 아니라 아버지의 기대,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기대도 산산이 부서진다. 고향으로 돌아 와서도 한스의 상태는 더 좋아지지 아니하고, 점점 우울해진다. 한스는 주위와 사회의 기대 때문에, 또 학교의 업적추구 때문에 빼앗겼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되찾아보려고 노력하지만 헛되었다.


그는 신경쇠약에 빠지고 미래에 대한 조망도 사라진 상황에서 자살을 생각 하기도 한다. 가을날 그는 과일즙을 짜는 데에서 알게 된 엠마라는 아가씨와 첫사랑에 빠지지만, 첫사랑의 흥분과 기대도 그녀가 그를 진지하게 취급하지 않는다는 확신만 남긴체 깨어지고 만다. 고향 생활에 적응하고 훗날의 생업을 위해 한스는 기술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탑시게공장에 들어간다. 작업장의 도제들과 동료들과 함깨 사는 생활 가운데서 한스는 새로운 만족감을 느끼는 듯 싶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의 무간심과 냉대, 미래에 대한 불투명한 조망, 그리고 에마와의 사랑의 환멸 등은 그를 다시금 가차 없는 좌절과 고독속으로 몰아 넣으며, 한스는 희망을 찾지 못한다. 얼마되지 않아, 동료들과 일요일에 소풍을 갔을때, 술을 너무 많이 마시고 못 피우는 담배까지 피우고 집으로 혼자 돌아오는 길에 한스는 더 이상 집에 이르지 못한다. 한스는 끝내 흘러가는  강물위에 몸을 맡겨 버린다. 다음날 아침 그의 시체는 강물에서 꺼내어진다. 그가 어떻게 해서 물에 빠졌는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어린 시절의 위기와 상처>

『수레자퀴 아래서』는 작가가 고향 마을에서 다녔던 초등학교 상급학년 시절의 체험과 처음으로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떠났던 마울브론 신학교의 체험이 그려저 있다. 아주 어려서 부터 작가가 되겠다는 소명감을 가진 헤세는 학교와 선생과 가정에서 올바른 이해를 받을 수 없었다. 그는 마울브론 신학교에서 도망쳐 나왔고, 기술자 직업훈련을 받아야 했으나 육체적으로 맞지 않았다. 학교와 가정에 대해 반항적이었던 헤세는 가끔 신경정신과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이 소설에서 그는 자신이 어린 시절에 겪었던 체험의 충격과 마음의 상처를 한 소년의 이야기 속에 옮겨 놓았다. "정신 똑바로 차려 안 그러면 수레바퀴 아래에 깔리게 돼" 라는 교장 선생님의 말처럼, 사회 분위기와 교육제도, 그리고 업적 지향적인 어른 세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한 가냘픈 영혼은 파멸하고 만다. 1906년 발표되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과 교육적 환경이 백년도 더 지난 우리의 현실과 너무나도 유사하다. 얼마나 많은 젊은 이들이 좌절하며 죽어 가는가, 작가는  20세기 초 독일사회의 가치의식과 교육제도, 기성세대의 가치관에 문제가 있음을 비판한다.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이 인간성의 형성과 내면적 욕구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제시한다. 작가는 숨학히게 인간 본성의 출구를 막아버리는 사회적 제도의 기성세대의 몰이해와 비교육적 가치관, 조잡한 생의 현실을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다. 작가는 그의 전신적 반대 모델이라 해야 할 하일러의 행동 방식을 우리에게 세시하고 잇다고 할 수 있다 하일러는 정열적이고 재주있고 반항적이었다. 자유로운 영혼, 하일러는 수도원을 도망쳐 나왔고, 자기의 의지가 교장의 명령이나 금지보다도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한스는 정체성가 적성을 찾기에는 너무 무능하고 연약한 장애자 아닌 장애자같은 순진무구한 바보 같은 천성으로 그려져 있다. 끊임없이 돌아가는 수레바퀴처럼 끝까지 몰아대는 타자적 생의 수레바퀴에 깔려 죽어가는 한스의 모습은 올바른 자아를 확립하기엔 너무 유약한 정체성 상실의 비극이 아닐수 없다.


『변 신』


"그레고르 잠사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잠자리 속에서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다" 그레고르는 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자명종이 울리자 출근을 하려 시도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가 파산한 이후 가족에 대한 의무감으로 와판원을 하면서 부모와 여동생을 부양해 왔다. 방문 앞에서 가족들은 그의 출근을 재촉하고, 출근할 시간이 지나도 그레고르가 나타나지 않자 지배인이 집으로 찾아온다. 그레고르가 힘겹게 문을 열자 지배인은 놀라 도망치고, 어머니는 기절하고, 아버지는 증오심에 불타는 표정으로 그레고르를 방안으로 몰아 놓는다. 그레고르는 쫓겨 들어 가면서 상처를 입는다. 그레고르의 독방생활이 시작 되면서 아무도 그의 방문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여동생만이 그의 방을 드나들며 음식을 챙겨준다. 그레고르는 이제 곧 일어나게 되면 여동생이 그렇게 가고 싶어 했던 콘서바토리움에 꼭 보내야 겠다고 다짐한다. 그레고르는 문 틈새로 가족들을 관찰하며 애정을 유지하려고 애쓴다. 그레고르는 그동안 하고싶지 않았던 외판원 일을 가족들을 위해 해 왔는데 이제 어쩌면 더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얼마 후 어머니가 그의 방을 찾아 왔으나, 그녀는 벌레로 변한 하들의 모습을 보고 실신하고 만다. 그것을 본 아버지는 사과를 그레고르에게 던져 심한 상처를 입힌다.


그레고르는 그러나 아버지가 은행경비원으로 일하고 어머니는 삯바느질을 하고, 여동생은 점원으로 일하는 것을 보고 가슴 아프기도 한다. 가족들은 생계를 위해 더욱 바빠지고, 자신의 손발을 드는 일은 점점 뜸해지고, 무엇보다도 여동생이 그 일을 귀찮아하는 것 같다. 그에게 음식을 가져다 주고 그의 방을 챙겨주던 여동생은 모든 잡동사니들을 그의 방으로 옮겨 놓은다. 하숙인이 들어오면서 거실로 가는 문은 잠긴다. 어느 날 하숙인들 앞에서 그레네가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을 때 그레고르는 거실로 나간다. "그레고르는 연주에 매료되어 약간 앞으로 나아갈 엄두룰 내어 어느새 머리를 거실에 들이밀고 있었다. 하숙생들은 벌레의 등장에 너무 놀라서 계약을 해지한다. 그레테는 더 이상 벌레가 된 오빠의 모습을 감싸지 못하고 그를 없애야 한다고 부모를 설득한다. 그레고르는 점차 식욕이 감퇴되고 쇠약해지며 고독과 불안의 생활 가운데서 시름시름 하다가 뻣뻣이 축은 상태로 발견된다. 가족들은 그의 죽음에 안도하고, 새로운 꿈과 좋은 계획에 부풀어서 전차를 타고 교외로 산책을 나간다. 셋이 다 함께 집을 떠났다. 벌써 여러 달 전부터 하지 못했던 일이다. 전차를 타고 교회로 향했다. 그들 모두가 탄 전차 칸은 따뜻한 햇빛이 속속들이 들어와 있었다. 그들은 좌석에 편안히 뒤로 기대고, 장래의 전망에 대해 논의 했는데, 자세히 관망해보니 장래가 그렇게 암담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정확한 실제와 무조선적 현실로서의 변신>

1916년 발표된 『변신』은 독자들의 경악을 불러 일으켰다. 이 작품에서는 실제와 비 실제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고, 실제의 세계와 꿈에서나 상상할 수 있는 환상의 세계가 나란히 대두되어 단절되지 않고 결합되어 있다. 꿈과 환상의 체럼에 대한 근본토대는 평상시의 실제적인 삶이다. 그레고르의 방안 풍경은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절대적인 정확성을 지닌 현실이다. 창조적 환상과 자유로운 유희로서의 동화의 세계와는 전혀 다르다. 동화의 세계가 현실초월의 이상으로서의 꿈과 환상을 현실 속에 불어 놓어준다면, 여기에서의 변신은 헤어날 수 없는 무조선적 현실, 실제 생활의 균형을 깨뜨려 버리는 필연의 무대이다. 그는 실제로 독충으로 변해있고, 더 이상 그 존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주인공 그레고르 잠사는 이제 외판원이 아니라 사랑했던 가족들에게서 조차 징그럽고 무서운 존재로 배척당하고 제거해야 할 짐승 자체이다.

이 작품은 "한 외판원의 모습에서 벽을 기어오르는 끔찍한 독충으로 변해 버리는 변형을 새로운 객관성으로 제시해 준 걸작이다."  작가는 그레고르가 독충의 존재로 서의 새로운 상황들을 어떻게 적응하는지, 그리고 그의 생의 조건들을 어떻게 변화 시키는지를 철두철미한 객관성으로 꼼꼼하고, 정확하게 보고한다. 변신은 그의 모든 생활습관들을 깨뜨려 버린다. 그러나 독충으로서도 그레고르는 여전히 인간적인 느낌들과 감성들, 누이와 부모에 대한 사랑을 지니고 있다. 그레고르는 가족들이 생의 질서를 방해한다. 그레고르의 변신은 본인뿐만 아니라, 주변 세계에도 똑 같이 어렵게 닥쳐온 불행이자 대참사이다.


『토니오 크뢰거』


주인공 토니오는 신중하고 냉철한 시민기질을 가진 북쪽 출신의 아버지와 정열적인 예술가 기질을 가진 남쪽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다. 유년시절 학교공부 보다는 문학작품을 읽고, 시를 쓰는 일을 더 즐겨한다. 급우들이 춤출 때면 한쪽에서 바라보기 일쑤이고, 흥미도 없어서 잠이 온다. 매사에 모범적이고 쾌할하고 우등생인 한 한센과 금발의 미인 잉게보르크 홀름을 짝사랑 한다. 이 두 사람의 이름은 토니오에게는 일상생활의 적응력이 뛰어난 유능한 시민인 동시에 생을 의미하며, 정규적이고 일상적인 것으로 부터 쓸쓸히 떨어져 있는 그의 예술가적 기질과 상반된다. 그러면 서도 그는 이 두 사람에 대해 내면적으로, 서정적으로 은밀히 사랑과 동경을 품고 있다.이는 토니오가 생에 대해서 품고 있는 이중감정과 일치한다. 토니오는 일방적인 우정과 애정을 체험하는 본질적으로 어울릴수 없는 예술가적 기질을 자각한다. 아버지가 죽고 집안이 몰락하자 그는 예술의 길을 찾아 에술의 상장인  남쪽으로 떠난다. 그것은 생과 일치되는 서민세계에 대한 외적 결별을 의미한다. 남쪽에서 이탈리아에서 그는 일상적인 것과 정상적인 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오직 "정신과 언어의 위력"에 몰두한다. 그 힘은 그에게 세계에 대한 통찰력을 부여해 준다. 그러나 거기에는 온정과 사랑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육체의 모험과 심한 향락속에 빠지게 된다. 토이오는 예술가이기 위해서는 삶과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얼음처럼 차가운 정신성에 파묻혀 고독하게 된다. 토니오는 일상적인 삶에 대한 동경과 인식의 차가운 정신성 사이의 이율배반적인 갈등 속에서 중간 지점인 뭔헨에서 중간적인 대화상대인 리자베타를 찾는다.그는 그녀와 함께 남과 북으로 상징되는 예술성과 시민성 사이의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토론한다.


이 소설의 핵심으로, 순수 지향적 예술성으로 부터 인간적인 사회와 생으로의 불가피한 전환을 의미한다. 그는 여자 친구인 화가 리자베타와의 대화에서 예술성과 시민성의 고통스러운 불일치인 삶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다. 리자베타는 예술과 삶이 서로를 인정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공존할 수 있음을 지적하고 토이노를 예술성 속에서 "길을 잃은 시민, 그릇된 길에 접어든 시민 이라고 부른다. 에술 안에서 길을 잃은 토니오는 이탈리아 세계에 등을 돌리고 북구적인 삶에 대한 향수 속에서 자신의 고향 뤼백을 거쳐 북쪽 덴마크로 여행을 떠난다. 냉철한 북부에서 그는 삶에 대한 사랑과 동경을 재확인하고 이탈리아의 감각적 향락의 유혹으로부터 빠져 나간다. 이제 토니오는 생의 따스한 온정과 질서와 사랑을 동경하고 생의 회복을 꿈꾼다. 북쪽은 고향이자 예전부터 신뢰해온 시민성의 세계를 상징한다. 북쪽에 머무는 동안 어린 시절에 사모했던 한스와 잉게를 만나고 어린 시절의 사랑이 다시 깨어난다. 어린 시절의 회상이 반복되는 장면은 주인공이 차갑고 , 고독한 예술가성에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욕구의 반영이며, 그가 애써 결별했던 시민사회에로의 회귀를 뜻한다. 아래층에서 벌어진축제와 춤에 참여하지 못하고 황홀한 시선으로 몰래 훔쳐보는 주인공이 모습은 주인공의 생에 대한 수줍고 은밀한 사랑을 나타냈다.그는 후회와 향수에 젖어 흐느끼며 생에 대한 강력한 동경을 느낀다. 토니오는 시민사회를 이탈한 뜨내기로 순수 예술가의 존재형식 속에서 방황하다 고향과 아버지의 세계로, 질서의 세계로 되돌아와 평범하고 건강한 세계에 굳게 서게 된다. 사랑이 결여되어 잇는 토니오의 정신과 인식은 사랑을 획득함으로써 죽음에 떨어지는 것을 방어하고 그의 목적인 생을 사랑하게 된다. 마지막 장에서 토니오는 리지배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생에 대한 사랑과 시민성은 하나이며 같다는 인식을 포현한다. "27살의 토마스 만은 생과 사회에 낯설게 대치해서 예술자체의 목적에만 살아가는 문사가 아니라, 생 가운데 서있으면서도 사물의 예리한 인식을 통해 생에 물들지 않는 시인을 정신과 예술의 종합으로 본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세기말의 갈등에 찬 격동기에 단절되고 고립될 수밖에 없었던 예술가와 시민, 정신과 생 사이의 잃어버린 인간성의 회복을 시도하면서 이를 예술의 사회에 대한 윤리적인 책임으로까지 받아 들이고 있다. 생과 시민성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윤리적 예술가로 성장해 있는 토니오는 결국 젊은 날의 작가 시선의 초상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토니오는 경건한 시민적 세계와 관능적, 에술의 세계 사이에서 항상 갈등을 느끼며 안주하지 못하고 '미의 오솔길 위에서 모험을 일삼으면서 인간을 경멸하는 오만하고 냉철한' 예술가로 서가 아니라 '인간적인 것, 생동하는 것, 일상적인 것에 대한 시민적 사랑' 을 간직하고 있는 예술가로 드러나며, 이 모습은 초기 토마스 만의 이상적 예술가 상이다.


< 크리스타 볼프의 『메데아』>


우리의 곁으로는 문명이 발달해 찬란해 보이는 코린트스, 그들의 도시가 범죄를 발판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메데아는 알아차린다. 메데아는 어느 날 연회장을 슬며시 빠져나가는 왕비 메로페의 뒤를 따라나선다. 왕비는 지하실 제단에 숨겨져 있는 어린아이의 유골 앞에서 오열한다. 코린토스의 공주 이피노에가 아버지에 의해 몰래 살해되어 안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가 이피노에 그 애를 없애려고 했다오. 우리가 자신의 자리에 그녀를 앉힐까 두려워했기 때문이었고, 코린토스를 구하려는 일념에 우리는 실제로 그렇게 계획했었다오," 메데아는  잔인한 범죄와 무자비한 폭력과 술수가 지배하는 코린토스의 썩어빠진 궁정을 꿰똟어본다. 메데아는 왕의 눈에 가시였다. 이피노에 공주의 살해를 고발하는 메데아를 크레온은 추방시키려 한다. "명목상의 추방 이유는 크레온 왕의 어의가 공언 했듯이, 그녀가 조제한 약제와 음료를 먹고 왕의 노쇠한 어머니 건강이 악화 되었다는 것이었다."


'내가 아이손과 함께 떠난 것은 타락하고 몰락한 콜히스에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도망이었다. 마지막에 우리 아버지 아이에테스가 보여주었던 교만과 두려움 섞인 표정을 나는 이 크레온 왕의 얼굴에서도 보았다. 우리 아버지는 회생된 자신의 아들, 너를 위한 장례식에서 내 눈으로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크레온 왕은 파렴치하게 권력을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


메데아가 조국을 배반한 것은 이아손과의 사랑 때문이 아니라 가부장제적 아버지의 폭력을 거부하는 정치적 결단이었다. 그러나 코린토스 사람들은 그녀를 이아손 때문에 조국을 배반하고 이아손을 따라 미국으로 도망한 타락한 여인으로 폄하한다. 메데아는 점점 이아손의 성적 욕망의 도구로 전락하고 이아손의 마음에서 부터 멀어진다. 크레온은 이아손에게 중책을 맡기고, 이아손은 점차 정치권력에 눈멀어 글라우케 공주와 결혼하기 위해 자식들과 메데아를 멀리한다. 메데아는 코린토스 왕국에서 은밀히 벌어지고 있는, 권력을 위한 불의와 폭력의 현장을 발견하고 "승리와 희생만이 존재하는 지구라는 이 원반 밖으로 밀려나는 일이 있더라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기어이 알아낼 생각이다." 이피노에는 글라우케 공주의 언니였다. 살인소굴로 변해가는 궁궐에서 울부짓는 어머니와 사리사욕과 부패의 원흉인 아버지는 글라우케의 일생 동안 어두운 악몽이었다. "핏기 없는 지저분한 피부와 축 늘어진 숱 없는 머리카락, 날렵하지 못한 손발"의 글라우케는 병들어 있었고, 검은 수건 속에서 피어보지도 못하고 시들어가고 있었다. 글라우케는 궁궐 안에서 아버지의 강요에 의해 숨죽이며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메데아는 그녀의 처지를 동정하여 콜히스 여인만이 짤 수 있는 옷감에 금빛 레이스가 달린 푸른색 옷을 입혀주었다. "사악한 마법의 조롱이자 속임수를 부린다는 메데아는 그러나 글라우케에게 기쁨과 욕망을 알게해주고, 어머니와 아버지의 무거운 악몽으로 부터 벗어나게 해주려고 애썼고, 수영도 가르쳐주었다. 가공할 만한 힘으로 빈약한 육신을 덮치는 발작이 일어나면 곁에서 그녀를 붙잡고 지켜 주었던 그 여자, 스디쓴 약초 달인 물을 마시게 해준 여자. 궁궐의 뜰이나 우물 근처에 다가가기만 하면, 예외 없이 그녀를 덮치는 소름끼치는 두려움 앞에서도 도망쳐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그 장소를 피해 다니는 법을 가르쳐 준 그 여자,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메데아의 남자 이아손에게서 글라우케는 난생 처음 행복을 느낀다. 아버지가 그를 보냈다는 것을 알아 차리지 못하고서 아둔한 그녀의 심장은 쿵쿵 뛴다.


콜히스 인들은 "도시를 등진 산비탈에서 데메터(농사와 곡식을 관장하는 대지의 여신) 축제를 지내고 있었다." 콜히스 여인들의 울부짓는 소리와 한 남자의 동물적인 비명이 들려왔다. 콜히스 여인들이 투론의 성기를 잘라낸 것이다. 메데아는 "콜린토스를 향해 팔을 치켜들고, 남아 있는 힘을 다해 코린토스가 멸망할 것이라고 예연했다." 병사들은 콜히스 인들이 페스트라는 재난과 지진과 불길한 월식을 코린토스에 불러왔다고 말하며, 투론에게 폭력을 행사한 여인들을 메데아가 사주했다고 한다. 콜히스 인들의 오두막으로 병사들이 몰아닥쳐 메데아를 체포했다.


메데아는 자신이 아르케미스 축제에서 입었던 하얀 의상을 재판이 열리기 적전 글라우케에게 선물로 넘겨주면서, 웨딩드레스가 될것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글라우케의 행복을 빌었고, 글라우케는 눈물을 흘리면서 고마워 했다. 메데아가 추방된 날 글라우케는 갈피를 못잡고 울면서 방안을 이리저리 해매고 다녔다. 마침내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바람을 쐬고 싶다고 말하면서 "그녀는 뜰로 나갔고, 그 뒤를 시녀와 몇 명의 경비병이 따라갔다. 그녀는 교활하게 원을 그리며 서서히 우물 가까이 다가갔다. 빠르게 몇 걸음 걸어 우물가에 선 그녀는 허공 속으로 깊이 한걸음 더 내딛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메데아는 자신의 추방직후 그들이 자신으 아이들을 돌로 쳐 죽였음을 칠년도 더 지난 후에갸 알았다. 그리고 자신이 부정한 이아손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신의 아이들들을 죽였다고 말해진다는 사실도 알았다. 아이들이 죽고 칠 년째 되던 해 코린토스인들이 선발한 일곱 명의 귀족가문의 소년소녀들이 헤라 신전에서 죽은 그녀의 아이들을 기념하기 위해 일 년 동안 머물렀고, 지금부터는 칠년에 한 번씩 할 예정이라는 전갈도 받았다.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메데아는 고뇌하고 전율한다.


그렇다 이렇게 끝이 난 것이다. 그들은 후세 사람들이 나를 자식을 살해한 여인이라 부르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그들이 되돌아 볼 소름 끼치는 잔인함에 비하면 그런 것은 아무 일도 아니다. 우리는 결코 깨칠 줄 모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제 내게 남아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을 저주한다. 너희를 저주한다. 너희는 추악한 삶을 살다가 비통한 죽음을 맞으리라. 너의의 울부짓음이 하늘에까지 들리고, 그래도 하늘은 꿈쩍도 안하리라. 나, 메데아는 너희들 저주한다.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내가 살 수 있는 세계, 시대가 어딘가에 있을까. 물어 볼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대답은 그것 뿐이다.


<왜곡된 진실과 질서의 회복>

메데아의 아버지 아이에테스는 자신의 독재와 집권을 위해 메데아의 동생을 죽였다. 메데아는 조국의 부페와 독재가 싫어 이아손을 따라서 아버지 나라를 도망쳐 왔다. 그런데도 메데아의 정치적 결단은 무시당하고 사랑 때문에 조국을 배반했다고 메데아는 메도당한다. 메데아가 새로이 정착한 코린토스 궁궐도 독재와 불의는 마찬가지였다. 메데아는 자식들과 동생을, 그리고 방해 인물들을 죽이지 않았다. 오히려 메데아는 도망쳐 온 조국 콜히스보다 더 부패한 코린토스의 폭력과 탐욕을 고발하다 추방당하고, 아이들까지 죽임을 당한 죄없는 희생양이다. 작가는 메데아의 진정한 모습을 밝히면서 오랫동안 잘못된 오해들을 드러내고 진실의 목소리들에 귀 기울일 것을 바란다. 이 소설은 메데아가 코린트소 왕국에서 불의를 발견하고 고발하며 억압당하고 먼 곳으로 유패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다. 작가는 가부장재적 탐욕과 불의에 저항하며 거칠고 악독한 악녀 역할을 맡아했던 고대의 메데아의 모습을 분별력과 통찰력과 주체성을 갖춘 지혜로운 여인 메데아로 탈바꿈시킨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여섯 명의 화자들은 가각의 목소리를 통해 여성의 진정성이 무시당하고 진실이 왜곡당하는 사회의 부당함과 폭력과 억압으로 희생양이 되어 버린 메데아의 모습을 고뇌에 찬 성찰의 목소리로 고백하고 있다.


<여성문학 비평의 시각 : 진정 한 자아표출로서의 여성성>

볼프의 『메데아』(1996)는 2년여 년 동안 서구사회를 지배해 온 남성 중심주의의 탐욕과 폭력, 그리고 비 인간화의 과정에서 벗아나고자 노력해 온 여성주의적 시각의 표출이다. 작가는 창조적인 상상력과 예술적인 에너지를 동원하여 메데아라는 인물을 신화의 전통적인 해석으로부터 탈출시키고 서사의 고대적 의미를 전복시킨다. 이러한 작업은 이미 『카산드라』(1983)에서 출발하여 풀리지 않는 갈등과 위협적인 위험들로 억압당하는 현시대의 근원을 찾고자 하는 데서 출발한다. 작가는 직면해 있는 죽음의 위협과 진실의 은폐를 표명하기 위해 이제 역사에서부터 신화로 옮겨간다. 『카산드라』에서 볼프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남성지배의 폭력을 고발한다. '카산드라'는 무서운 공격과 피격의 뒤바뀜을, 정복자와 피정복자의, 그리고 그리스와 토로이의 뒤바뀜을 폭로한다. '죽임과 죽음 사이에는 제 삼자, 곧 삶이 있다.' 예언자는 아주 먼 미래에서 하나의 인간성을 예감한다. 권력 쟁취에 제동을 걸고 생 속으로 승리를 끌어들일 수 있는 남자들과 여자들을, 인간들을 예감한다. 그것은 곧 여성적인 대안이다." 이 점이 바로 볼프의 여성적 글쓰기 방식이며, 1970년대 이후 일기 시작한 여성해방 운동과 맞물린 여성문학 비평의 시각이다.


『풀잎은 노래한다』


터너 부인의 살인사건은 독자의 제보에 의해 알려졌다. 지역 주민들은 어쩌면 올 것이 왔다고 여기며 침묵하고 있었다. 지역 주민들은 어쩌면 올 것이 왔다고 여기며 침묵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터너부인은 '나쁜 여자'였고 아프리카에서 살고 있는 백인 부부들이 별로 평판이 좋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백인 부부인 리처드와 메리는 마을의 축제나 댄스파티에도 불편했고, 외부인과의 교재를 끊인 체 고립된 생활을 했다. 성냥갑만한 집에서 살면서 농작물을 재배하고 가축을 사육하면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해나가고 있었다. 원주민들은 백인들이 농장과 가정 일을 도와주는 일꾼들이었다. 남편 리처드는 삼십년 넘게 어렵사리 농장을 유지하면서 어느 정도 일꾼들과 마찰없이 지내온 샘인데, 도시에서 살다 늦게 시골로 시집오게 된 메리는 가난과 더위와 흑인들과의 마찰을 지긋지긋하게 생각하며 원주민들의 옆에만 있어도 숨이 막혔다. 백인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메리는 원주민들을 늘 무시하고 증오에 가까운 경멸과 차가움의 태도를 보였다. 자신의 양친도 남아프리카에서 태어나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영국을 메리는 자신의 모국으로 생각하고 동경했다. 알코올 중독의 아버지와 가난에 찌들어서 힘들어하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메리는 도시로 떠나와 버리고 아버지와는 소식도 단절했다.


도시에서 일자리를 얻어서 정착하며 자유롭게 살았던 메리는 국립학교 교육도 받았고, 비교적 문화인으로서 안락한 생활을 누렸다. '저질 소설"들을 많이 읽은 덕택에 많은 것들을 간접체험으로 알고 있었던 노처녀 메리는 주위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과 소문을 느꼈을 때, 한시라도 빨리 주위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녀는 사랑도 없는 결혼을 하고 말았다. 삼십 살이 넘었을때, 그것도 우연히 영화 보러 도시에 나갔다가 시골의 농장주 리처드터너를 만나 서둘러서 결혼을 해버렸다. 남편 리처드는 농사일에 성공한 적이 거의 없었고, 리처드의 생활은 가난과 답답함과 폐쇄성을 면치 못했다. 나름대로 착하고 고루하기만 한 리처드는 부도덕해 보이는 담배농사 같은 일은 손대지도 않았다.반면에 이웃에 사는 찰리 슬레터는 아프리카에 온지 20년이 지났으나 아직도 영국인 특유의 기질이 남아있는 사나이로 사건의 처음부터 끝까지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한다. 슬레터는 성격이 거칠고 잔악하고 무모한 사나이다. 그는 체찍으로 일꾼들을 다루고 대문위에 채찍을 걸어놓고 산다. '필요한 경우에는 살인을 해도 무방하다'라고 말하는 이 사내는 작달막한 체구에 팔뚝이 굵고 어깨가 딱 벌어진, 다소 교활하고 날카로운 인상의 사나이다. 나름대로 주체성이 강한 사람은 살아남듯이 슬레터는 살아남아 음흉하고 교할하게 이 사건을 반사해 주는 묘한 대비를 이룬다. 메리의 마음은 농사일과 가난, 그리고 무능한 남편에 대한 불만과 원주민 일꾼들에 대한 알 수 없는 경멸과 우월감으로 뒤엉켜 어찌할 수 없는 분노와환멸에 빠져든다. 메리는 원주민들을 학대하고 남편 리처드를 무시하고 원망하기도 했고, 도시로 도망도 쳐보았다. 메리의 성격은 갈수록 날카로워지고 신경질적으로 변해 갔다. 메리의 집에서 일하던 하인은 그녀의 학대에 견디지 못해 항상 바뀌게 된다. 특히 리처드가 열병에 걸려 자리에 눕자 그녀의 학대와 경멸감은 극에 이른다.


이렇듯 불편한 환멸과 절망의 가장에 신비스럽고 우람한 체격의 하인 모세가 들어온다. 집안일을 꾸려주는 원주민 모세에게 메리는 많은 것을 맡기고, 그에게 의지하기까지 한다. 몸과 마음이 다 약해 지고 정신까지 무너져 버린 메리는 일꾼 모세가 없으면 안 될 지경이었다. 한때는 체찍으로 갈겨서 쫓아내었던 그 원주민 모세가 이제는 튼튼한 육체와 충성으로 보살펴 주기를 원할 정도로 그녀는 약해져 있었던 것이다. 메리와 모세의 미묘한 관계속에 이지적이 ㄴ영국 청년 마스턴이 등장한다. 메리는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청년 ㅁ스턴이 어쩌면 자신을 구출해 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을 갖게 된다. 마스턴은 은연중에 윽인 모세를 경계하게 되고, 메리는 모세를 내쫓아 버린다. 메리는 모세가 배반감과 복수심에서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제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방아들인다. 메리를 살해한 모세는 집 근처에서 그녀의 시신을 사람들이 발견할 때까지 기다린다. 말라리아에 걸린 이후로 계속 고생하던 리처드도 결국에는 페인이 되어 메리가 죽은 후 이웃에 사는 백인 슬레터의 손에 이끌러 병원으로 호송된다.


<탈식민주의 와 페니니즘>

작가 헤싱(1919)은 이란에서 태어나 서른 살이 되던 해 영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성장기를 주로 빔바므웨에서 보냈다.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서 심한 상처를 입은 레생의 아버지와 전쟁터에서 부상당한 아버지를 치료해 준 간호원 어머니 사이에서 자란 레싱은 정상적인 교욱을 받을 기회도 있었지만 14살 때 학교를 그만두고, 혼자서 독서와 글쓰기에 전념했다. 작가는 『풀잎은 노래한다』를 1950년에 발표함으로써 비평가들의 폭발적인 찬사와함께 일약 정상에 올랐다. 서사적인 스케일을 가진 레싱의 작품들에는 다양하고 , 광범위한 소재들이 인간과 사회의 개선을 통한 이상사회 이념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주된 작품 소재들은 "반곤노예문제, 계층 간의 갈등, 여성 문제 등을 비롯해서 남아프리카의 식민지 정책이 빚어내는 삶의 현장의 생생한 사실주의가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그녀는 불행했던 과거으 기억으로 부터 자신을 해방시킬수 없었다. 그녀는 부모의 세대가 생존하기 위해서 원주민들을 무조건 억압해야만 했던 과거를 무의식적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메리가

파멸하게 된 동기는 메리가 자라난 환경과 배경, 그리고 성격 및 그들의 삶의 페턴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메리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활동적인 여자였지만, 과거 부모들의 궁핍하고 비참한 생활, 그리고 아버징 대한 어머니의 경멸 등으로 인해 정서적인 발전이 차단된 인물이다" 사회의 요구에 따라 타자의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메리는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지 못하고 정체성을 세우지 못한 것이다. 궁극적으로 그녀는 자기 정당성을 발견하지 못해 당당하지 못한 백인 사회의정체성 부재에 근거한 백인의 불행을 감지한 것이다. 남아프리카에서 일어나는 흑백문제를 통해서 예리하게 파헤친다. 오랫동안 실민 생활에서도 결코 이해와 소통을 거부해 온 백인들이 오만함과 허위의식을 고발한다. <풀잎을 노해한다>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원주민들의 푸른 초원은 노래 부르며 빛과 생명력으로 무성한 숲을 이룰 것이라고, 백인들이 살았던 집은 없어져 버리고 그 위는 잡초만이 무성할 것이라고 메리는 생각했을 것이다.


Epilogue


김정자 교수는 <유럽문학 오디세이>에서 보여준 다양한 문학기행이 전하는 메세지는 문학의 기원인 신화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소설을 소개하여 주었다. 유럽 문학의 다양한 삶에 대한 우여곡절이 만들어 내는 이야기에 대한 광범위한 내용에서 교양적이고 다양한 주제를 망라하여 보여준 문학의 풍경은 작가와 작품이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느 어떤 메세지이며, 그들이 감당했던 역할과 사명, 그리고 미학적 구조에 대한 표출이다. 우리는 학문의 길 위에서 그 풍경을 강상하면서 문학작품의 다양한 상상력과 비판력을 길러주며 창의적 문제해결에 기여해 오고 있다. 책 읽기는 무엇이 인간이 괴뇌와 곤경을 극복할수 있는 길을 열여주고, 어떻게 인생을 잘 살아가는 능력가 도덕적 감수성을 깨우치는데, 다양한 책 읽기가 그 해답을 전해 준다. 문학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의 재현이 아니고, 신의 목소리를 해석하고 대변해야 하기 때문에 위대한 문학일수록 난해 해진다. 명작은 놀라운 상상력과 창조력과 지적 능력의 결합체로 사상과 비유의 폭이 넓고, 그 만큼 깊고 넓은 가치를 포괄하고 있다. 어떤 명작은 쉬우면서도 훌륭할수 있고, 어떤것은 비극적 이면서도 아름다울수 잇으며, 어떤것은 소박하면서도 따뜻한 인간미를 강조 하기도 한다. 이러한 명작과 고전들은 지나간 시대의 훌륭한 작품만을 의미하지 않고, 시대와 장르를 뛰어넘어 인간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획득한 작품이다. 그래서 21세기에도 고전은 탄생한다. 위대한 문학은 대부분 어렵고 해석을 필요로 하는데, 이것은 학문으로써 문학을 하는 사람의 몫이고, 동시에 이글을 읽는 독자의 역량 강화의 문제이다. 이책에 실린 선택의 책들은 저자의 지식과 생각과 느낌을 공유하면서 독자들이 명작을 이해하고 감상하는데 도움과 안내역할을 했으면 한다. 유럽문학의 출발접인 그리스에서 영국, 프랑스, 독일의 문학을 고전에서 현대에 이르는 과정을 문학사의 흐름에 따라 유럽의 오늘에 이르는 과정속에 나타난 독립된 민주국가 모습을 형성하기까지 민주주의의 발전과 세계역사와 문화의 중심에서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유럽의 문명과 문화의식이 오늘의 유럽연합을 이루고 유로화로 경제적 통합을 이루게 된 배경이 유럽문학에서 시작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끝까지 읽어준 독자 여려분에게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