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매력은 다양성이다. [37]
생(生)이 보일때까지 걷기 [35-3]
2부, CDT(Continental Divide Trail)
< 2007년 8월 15일~19일. 그레이프 디바이드 분지 : 와이오밍 >
그레이프 디바이드 분지는 와이오밍 주의 남서부에 위치한 고산지대의 사막이었다. 이곳은 천연가스와 석유, 우라늄의 매장량이 풍부했지만 물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이곳 식수 보급소에서 다음 보급소까지 가기위해 끝없이 늘어선 울타리를 따라 날마다 무거운 배낭에 최소한 5ℓ의 물까지 지고 50km를 걸어야 했다. 기온이 낮에는 40도까지 올라가고 밤에는 10도 이하로 곤두박질 했다. 밥은 무료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 일반적인 미국 상식을 가르쳤다. 미국 대통령을 순서대로, 연방주의 각 주도를 알파벳 순으로, 미국의 프로야구팀의 이름을 알파벳 순으로, 나열하기 등을 알려 주었다. 나는 M과 N으로 시작하는 연방주의 이름이 각각 8개라는 사실을 배웠다. 그러나 계속되는 단조로운 풍경에 식상해 이러한 단조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각자 떨어져 걷기 시작했다. 그는 늘 나보다 앞서 갔지만 이제 나보다 뒤처지기 일수였다. 그는 매마른 단조로운 지형을 지독히 싫어 했다.
< 2007년 9월 5일~6일. 버스케스 피크 와일드니스 : 콜로라도 >
"도대체 비가 언제쯤 그칠까요?" 밥과 나는 해발 3,600m에 이르는 바스케스 피크 와일드 니드(Vasquez Peak Wulderness)의 수목 한계선에 늘어선 나무 아래에다 텐트를 치고 드러누워 있었다. 기온도 영상 10도여서 침낭속에 있었다. 비좁은 텐트안에 둘이서 끼어 있다보니 갑갑하기 짝이 없었다. "빗줄기가 잦아들면 바로 출발합시다" 밥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럼 15km를 더 걸어야 하는데, 비가 그치치 않으면 위험해요" 그는 출발 준비를 하면서 "빗줄기가 약히지기 시작 했어요. 뒤쪽은 밝아졌으니, 출발 합시다" 30분 후에 비는 그쳤다. '나무 한그루 없는 분수계'의 능선에 다다랐을 때 날씨는 태풍이 몰고온 얼음처럼 차거운 빗줄기가 사정없이 얼굴을 때렸다. 우비를 입었어도 몇 km도 못가 뼛속까지 젖어 버렸다. 난 손가락이 얼음같이 차거운 것을 깨닫고 경악했다. 손에 감각이 없었다. 걸음을 멈추고 밥을 부르려고 해도 입술과 혀가 말을 듣지 않았다. "밥....," 서서히 공포가 차 올랐다.
비 바람과 추위 때문에 체온이 급격히 떨어졌다. "밥!"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지만 반응이 없다. 그때 트레일을 벗어난 것을 깨닭았다. "밥!" "무슨 일이에요?" "손이 말을 듣지 않아요. 더 이상 못가겠어요" "이곳에서 야영 할 수밖에 없겠군요." 밥이 한곳에서 텐트를 치기 시작했다. 밥은 발포매트와 침낭을 안으로 밀어 넣은 뒤 "옷을 모두 벗어요" 체온을 올리려면 젖은 옷을 벗어야 한다. 나는 오들오들 떨며 옷을 벗고 밥이 펼쳐놓은 두개의 침낭속으로 기어 들어 갔다. 밥도 벌거 벗은체 침낭 속으로 들어와 내 몸에 자신의 몸을 밀착 시켰다. "쉬, 쉬" 그는 나를 품에 안고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떠는 내 귀가에 대고 속삭였다. 나는 물에 빠져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사람처럼 밥에게 달라 붙어 그의 체온을 빨아 들이려 애썼다. 살기위해 육제척으로 이 만큼이나 타인에게 의존 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내게 중요한 것은 생존 하는 일 그 하나 뿐이었다. 그의 한시간이 지나서야 오한이 잦아 들었다. 손가락에도 서서히 감각이 돌아 오면서, 뜨겁게 달구어진 수천개의 바늘에 찔리는 것 같은 통증이 있었다. 그러나 생존투쟁은 거기서 끝난게 아니었다.
능선에 밤이 내리면서 태풍은 점점 거세져 갔다. 바람이 텐트를 덮칠 때마다 텐트가 날아갈까봐 공포에 떨었다. 비바람은 이튼날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잠잠해 졌다. 나는 녹초가 되어 얕은 잠에 빠졌다. 동이트고 바깥을 내다보니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파란 하늘이 보였다. 그는 지난 밤 내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었다. 밥은 이미 짐을 싸고 있었다. "밥 정말 고마워요?" "뭐가요?" "당신이 간밤에 내 생명을 구했잖아요" "에이, 쓸데없는 소리" 그는 그렇게 말하고 출발 분비를 했다. 그러나 CDT에서 체험하는 아름다움은 PCT와는 전혀 달랐다. 자연의 위엄은 나를 압도하는 동시에 그속에서의 내 존재가 어떤 것인지 분명히 깨닫게 해줬다.
< 2007년 9월 20일 ~ 30일. 산후안 산맥 : 콜라라도 >
콜로라도 주를 지나는 CDT의 길이는 1,200km에 달했다. 해발 고도는 총 4,000m가 넘었다. 우리가 걸은 주간의 평균 고도는 약 3,300m 였으며, 해발 4,000m를 넘기는 일도 다반사 였다. CDT정복은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9월에는 계절이 갑자기겨울로 바뀌는 일도 있어 도보여행을 힘들게 했다. 다행히 콜로라도 주의 CDT 근처에는 도보여행을 통해 알게된 친구들이 여럿 있었다. 우리는 이들을 만나기 위해 볼더나 크레스티드 부트, 파고사 스프링스 등에 들렸다. 그러나 친구들 집에서 하룻밤 이상 묵은 일은 없었다. 겨울이 언제 닥칠지 모르기 때문에 밥은 모질게 나를 몰아댔다. 3개월이 넘는 기간동안 단 하루도 온전히 휴식을 취한 날이 없었다. 크리드 컷오프 라는 짧은 겅로가 있었지만, 밥은 멋진 풍광을 자랑하는 동시에 험하기도 한 산후안 산맥을 거치는 경로를 고집했다. 나는 트레일을 출발 하면서부터 밥과 붙어 다녔다. 우리가 서로 얼마나 다른지는 시간이 갈수록 분명해 졌다. 자연속을 누비는 삶을 사랑한다는 점 외에는 공통점이 거의 없었다.
어차피 걷는 동안에는 누구나 혼자다. 혼자 힘으로 오르고, 모든 식량의 무게를 혼자 짊어져야 한다. 트레일위에서 사람은 혼자일때 가장 강하다!. 우리는 서로에게 힘을 주기 보다는 상처를 입힐 뿐이었다. 나는 그와 헤어지는 편이 낫다고 결론을 내렸다. 나는 걸으며 이 결심이 옳은 것인지 고민을 거듭 했다. 그가 도착 하기를 기다렸다가 그가 내 옆에 앉으며 "무슨일 있어요" "밥, 이야기 좀 해야 겠어요" "나는 당신처럼 빨리 걷지도 못하고 지구력도 떨어져요. 내가 당신이 원하는 미적 기준을 충족 시키지도 못하고 우리 두사람은 도저히 맞지 않은것 같아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요?" "헤어지는게 최선이라는 말을 하고 싶어요" 그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이제부터 혼자 다니겠어요. 당신이 눈에서 보이지 않게 될때까지 않아서 기다릴 거에요. 당신은 늘 그랬드시 계속해서 걸을 테지만, 나는 다음 도시에 도착하면 제로 데이를 가질 예정이에요.
그러면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져서 완주 할때까지 더는 만날일이 없겠죠" 나는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는 동안 그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밥이 한참 침묵한 후 "좋아요. 그럼 내가 가죠. 당신은 여기 앉아 있어요" 밥이 따라 일어났다. "밥, 이제 혼자 다니고 싶다고 했잖아요. 난 당신과 함께가지 않을 거니까" 밥은 말없이 따라 왔다. "먼저 가세요, 내가 여기 앉아서 당신이 앞서 가길 기다리 겠어요." 그러자 밥은 가지 않고 고집센 아이처럼 내 옆에 앉았다. 그가 "함께 시작했으니 함께 끝냅시다" 나는 그를 저주 하듯이 마구 고함을 질렀다. 나는 곰곰히 생각 해 봤다. 밥은 나보다 고독한 인간이었다. 그는 고독을 잊기 위해 내가 필요 했던 것이다.
< 2007년 10월 1일~2일. 차마 : 뉴멕시코 >
9월 28일 산후안 산맥의 해발 3,500m지점에서 우리는 뜻 밖의 첫눈을 만났다. 눈은 오래 가지않고 녹았다. 겨울이 등뒤에 바짝 다가와 있음을 실감하기에는 충분했다. 우리는 10월 1일에 CDT가 통과하는 마지막 연방주인 뉴멕시코의 경계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날밤 몇주일 만에 해발 3,000m 보다 낮은 차마(Chama)라는 마을에 텐트를 치고 묵었다. 뉴멕시코에 도착하여 시간적인 압박감에서 벗어났다. 여기서 부터는 남쪽으로 이어져 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장을 보고 문이 열려있는 집을 지나며 들여다 보니 많은 물품이 쌓여있다. 작은 사무실 책상앞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안녕 하세요" 인사를 하고 간판을 보았다. 'KZRM-96.1-Rocky Mountain Rock'이라는 글씨가 보였다. "라디오 방송을 하나 보죠?" "맞아요" 그는 내가 누구이며 여기서 무순일을 하고 있는지 질문을 했다. 내가 CDT라는 말이 나오자 "그럼 잠깐 들어와서 생방송으로 인터뷰나 합시다"
내가 미적 거리며 밥에게 눈빛으로 의견을 물을 때, 그가 "어차피 히치하아크를 해서 트레일로 돌아가야 하잖아요" 방송으로 우리를 테워다줄 사람을 수소문 하면 되겠네요." 그는 우리를 방음이 된 녹음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마이크 앞에서 나는 몇 분동안 차마와 리오아라바 카운티의 청취자들에게 트레일에서의 경험을 들려줬다. "특별히 인사를 전하고 싶은 사람이 있나요?" 진행자가 인터뷰를 끝내며 물었다. "아니요, 다만 지금 길가에서 히치하이크를 할 예정이니 지나다가 저희를 발견하면 테워 주세요. 고맙습니다." 조금 뒤에 도로에 나왔으나 우리를 테워줄 차량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길가에 키가 크고 마른 체구의 남자가 스루하이크의 상징인 배낭과 등산 스틱으로 무장한체 서 있었다. 그는 바로 PCT에서 만났던 네덜란드인 토에크였다. "토에크 씨! 드디어 만났군요." "다시 만나서 정말 기쁘요, 토에크가 나를 껴안고는 곧이어 밥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나는 그와 몇번 메일을 주고 받았기 때문에 그도 CDT를 종주 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길가에서 자동차를 향해 엄지를 내밀었다. 얼마후 세명앞에 차가 멈춰섰다. "라디오 방송을 듣고 오는 길인가요?" 목장을 운영 한다는 마흔살쯤 되어 보이는 그에게 호기심 어린 투로 물었다. 그는 의하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냥 도보 여행자들 같아서 차를 세웠어요." 목장주는 CDT가 지나는 쿰브레스 고개에서 우리를 내려 줬다. 토에크와 PCT 완주 후 3년동안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 "GT 씨, PCT에서 마지막날에 CDT에 관해 이야기 했더던 기억나요?" "직장은 어떻게 하고 왔어요?" "지금까지 2년동안 일한 뒤 3년째 되는 해에 6개월 동안 안식기를 가졌어요. 다행히 매번 승인을 받았죠. 덕분에 AT와 PCT를 완주 했고 이번에 CDT에도 올수 있었어요" "더 이상 허가가 안나면 어떻게 할 것건가요?" "잘 알면서 뭘 물어요, 당연히 그만 둬야죠. 내 고용주도 그럴 거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매번 허가를 해주는 거에요." "토에크 나는 얼마전에 해고 당했어요." "그런데 기쁘지 않은 거예요? 이제 자유로워 졌잖아요" 토에크는 내 얼굴을 살폈다. "기쁘기야 하죠. 그런데 한편으론 두려워요" "뭐가 두려운대요? 돈이 궁해서 그래요?" "그건 아니에요, 돈은 몇년간 쉬어도 될 만큼 벌어 뒀어요. 허지만 갑작스레 모든게 불확실 지니.....," 나는 그동안의 회의와 근심을 털어놨다. 그에게 CDT는 트리플 크라운의 마지막 트레일이다. 멕시코 국경에 도착했을 때 혼자서 그 특별한 손간을 맞고 싶지 않았다. 나는 토에크의 3관왕 달성을 축하해주는 비밀 계획을 세웠다. 밥과 내가 한밤중에 텐트속에서 고함을 치며 다투고 아침에 토에크가 이렇게 물었다. "GT씨 도대체 왜 밥과 함께 여행하는 거죠? 아무리 봐도 두 사람은 어울리지 않는데....," 그러나 나는 아무 대답도 해주지 못했다.
< 2007년 10월 20일. 엘말파이스 국립기념물 : 뉴멕시코 >
엘말파이스(El Malpais)는 '척박한 땅'이라는 뜻이다. 뉴멕시코 주 북서부에 위치한 이곳은 먼 옛날 용암이 흘러 내리다가 그대로 굳어진 지형이다. 이곳의 CDT는 푸에블로 인디언인 주니(Zuni)와 아코마(Acoma)부족 사이의 서로 교류하던 옛 길을 따리 이어져 있다. 우리는 이곳을 걷는 동안 용암지대를 뒤덮은 검고 날카로운 현무암이 여러 갈래로 쪼개져 있어서 실수로 넘어 지기라도 하면 고통이 클 것이다. 경관은 매력적이지만 험했다. 모랫길 위에 길이가 1m는 된직한 발울뱀이 가로누워 있었다. 토에크가 카메라를 들고 가까이 촬영하려고 방울뱀에게 다가가는 것을 보고 "미쳤어요? 벰에서 떨어져요! 그러다가 물리겠어요?" "알았어요, 금방 끝나요." 그는 조용히 사진을 몇장 더 찍은 뒤에야 물러났다. "지나다가 방울소리를 들은게 천만 다행 이었어요" 방울뱀은 우리를 본체 만체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 2007년 10월 23일 파이터운 : 뉴멕시코 >
파이타운(Pie Town)의 지명은 실젤 파이라는 음식에서 비롯되었다. 1920년에 이곳에 제과점이 있었는데, 주민은 200명에도 못 미치지만 파이를 파는 카페는 여전히 두군데나 있었고 우체국도 하나 있었다. 그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상점하나 음료수 자판기 조차 없었다. CDT 스루하이커들 사이에서는 이 마을이 니타의 토스터 하우스로 유명했다. 트레일 엔젤인 니타와 던은 근교의 다른 집으로 이사를 하면서 이곳에 있는 오래된 집을 장거 리 도보 여행자들과 자전거 여행자 들에게 통째로 내줬다. 여행자 들이 쉽게 찾을수 있게 출입문과 울타리에 토스터 수십개로 장식해 뒀다. 그래서 토스터 하우스란 이름을 갖게 되엇다. 이곳에서 보낸 제로 데이는 스루하이커들의 친목 모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스칼릿과 블로섬, 도나와 그뤼비, 비트로와 닉이 연이어 토스터 하우스에 나타났다. 우리는 낮 동안 카페 두군데에서 몇 시간이나 진을 치고 앉아 파이를 먹으며 CDT의 다양한 경로에서 겪은 갖자의 경험을 나누었다. 물 때문에 끔찍이 고생하였다. 멕시코 주에는 천연식수 공급원이 적었기 때문에 가축용 식수공급대를 이용했다. 물을 아끼기 위해 우리는 저마다 나름의 전략을 고안햇다. 나는 양치질을 한 뒤 입안을 행구지 않게된지 오래였다.
삭사후에는 냄비에 소변을 받아 딲은뒤 물을 약간만 사용해 행구었다. 그나마도 설거지 한 물까지 마시는 토에크의 전략에 비하면 덜 지져분한 편이었다. 물 부족에 혹독하게 달련된 스루하이커들 에게도 이런 것은 입에 올리고 싶은 화제가 아니었다. 다음번에는 어느곳에서 제로 데이를 갖는게 좋을지도 논의 했다. 이런 대화를 그들은 트레일 토크라고 불렀다. "안녕 밥 오후내내 뭘 했어요>" "우체국에 다녀 왔소" "우체국에는 왜요?" "텐트를 집으로 보냈어요" 나는 고함을 질렀다. "당신 미쳤어요? 그럼 우린 이제 어디서 자야 하죠?" "어차피 뉴멕시코 주 남부에는 비가 오지 않아요. 이제부터 커우보이 캠핑을 하면 되요." "그래도 함께 쓰는 텐트 잖아요. 우체국에 가기전에 한번쯤 물어 봐야 한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어째서 당신에게 물어봐야 한다는 거죠?" 거만하기 그지 없는 대답이었다.
<2007년 11월 9일. 하치타 : 뉴멕시코 >
"스루하이커들은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여려분 덕분에 이 따분한 시골에도 활기가 돈답니다." 우체국 여직원은 냉장고에서 시원한 콜라를 꺼내 우리 손에 하나씩 주면서 말했다. 우체국 앞에서 바운스 박스의 식량을 배낭에 챙겨넣고 길을 걷고 있는데 도로 맞은편 몇집건너 청바지 차림의 노인이 손짓으로 우리를 부르고 있었다. 그는 명함을 건에며 자기 소개를 했다. "저는 샘 휴스요. 콜라 마실래요?" 그는 몇년 전부터 하치타에서 트레일 엔젤 역할을 하며 CDT의 남쪽 출발점을 찾아오는 스루하이커들을 멕시코 국경까지 대려다 주고 있다고 했다. 그의 명함에는 '금, 보물 탐색자'라고 적혀 있었다. 낡은 샘의 쇼파에 앉아 콜라를 마시며 줄담밸배를 피워대는 노인은 "태워다 달라는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내가 캔 금만으로는 연료값을 대기도 벅차요." "여러분은 어느 종착점으로 갈 예정이오!" CDT 남쪽 종착점은 세곳 이었다. 공식 종착점인 크레이지 쿡은 허허벌판 한가운데 있었다. 엔털로프 월스는 국경 통과가 있는 지점으로 역시 주위가 황향 하였지만 아스팔트 도로가 닦여 있었다. 세번째 종착지인 콜럼버스는 국경지대에서 대도시라 할수 있는 인구 1700명의 마을 이었다. 앤텔로프 웰스로 갈거요." 내 대답에 웃으며 그가 말했다. "CDT가 지겹지도 않은 모양이로군 내 방명록에 글을 남기고 콜라 한잔씩 더 마시고 가요"
30분 뒤 81번 고속도로에 도달 했을때 우리는 또 한번 붙잡히고 말았다. 이번에는 국경 수비대였다. 갈색으로 그을린 피부에 건장한 체구의 국경 수비대원들은 트럭에 탄체 우리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CDT 그거, 정말 멋진 일이에요! 우리도 언제 시도해 봐야 할텐데, 그들은 인사를 건넨 다음 "우리는 여러분이 어느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지 항상 파악하고 있습니다. 국경지대에 감시 카메라가 설치 되어 있다는 것은 잘 알고 계시겠죠. 야간 근무를 하는 동료들에게도 여러분이 여행중임을 고지해 두겠습니다." "안전 문제는 걱정 안해도 되겠군요" 토에크가 말하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중형차 수대가 달려 오드니 우리 옆에 멈추었다. 문이 열리고 도나와 그뤼비, 지그, 리, 니트로와 그녀의 부친이 몰려 나왔다. 이들은 국경에서 니트로의 트리플 크라운당성을 축하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모두들 얼싸안았다. 우리는 CDT를 정복한 다섯 사람에게 축하의 말을 건내고 이메일 주소와 전화번호를 주고 받은 뒤 수십장의 사진을 찍었다. 아직 크레이지 쿡 까지는 하루 반나절은 더 걸어야 했으므로 곧 그들과 헤어졌다. 니트로의 부친은 출발하기 전에 아이스박스를 열드니 우리에게 물었다. "콜라 마실래요?" 콜라 때문에 배가 터질 지경이었지만, 사양하지 않앗다. 오후내내 콜라 다섯캔을 마셨다.
< 2007년 11월 11일 ~ 13일. 크레이지 쿡, 앤털로프 웰스, 미국 멕시코 국경 : 뉴멕시코 >
기둥 하나에 새겨진 CDT의 로고와 특징없는 시멘트 판에 새겨진 글씨만이 우리가 크레이지 쿡에 와 있음을 알려줄 뿐이었다. 미국의 장거리 트레일 중에서도 가장긴 트레일의 남쪽 종착점에 도착한 것이다. 무심코 시계를 본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가 목적에 도착한 날짜와 시간은 정확히 11월 11일 11시 11분 이었다. 우리는 치와와(Chihauhau) 사막의 바짝 마른 들판 한가운데 서 있었다. 우리의 뒤쪽으로 빅해칫 산맥이 보였다. 토에크와 밥과 나는 배낭을 내려놓고 어슬프게 서로를 마주 봤다. 우리가 목적지에 도착 했다는 사실이 좀처럼 실감나지 않았다. "우리가 걸어온 거리가 총 몇 km 나 될까요?" "아마 5,000km가 좀 안될거요" 밥이 대답하자, 토에크도 고개를 끄덕이며 "다섯달이 채 걸리지 않았으니 한달에 거의 1,000km를 걸은 셈이죠." 우리는 잠시 말을 잃었다. 자신이 이뤄낸 성과에 스스로 놀라는 중이었다. "그럼 이제 기념식을 거행 해야죠. 토에크, 트리플 크라운 달성 대관식을 치를 준비가 되었나요?" "물론이죠" 토에크가 함박 웃음을 지으며, 대꾸 했다. 미국 장거리 하이킹 협회는 종합 약 1년 동안 세개의 장거리 트레일을 완주한 사람에게 뱃지를 수여하고 트리플 크라운 에 성공한 모든 사람이 모이는 행사를 매년 주최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상 트리플 크라운기념식은 마지막 트레일 종주를 마치는 것과 동시에 이루어 진다. 토에크에게는 지금이 바로 기념비적인 순간 이었다.
밥과 나는 토에크에게 가장 멋진 날을 선물해주기 위해 몇 시간 동안 머리를 굴린 끝에 배낭에 있던 물건들로 장신구 몇개를 만들어 뒀다. 마침네 밥이 토에크의 카메라로 동영상 찍을 준비를 했고 나는 대관식을 준비했다.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그대를 토에크 1세로 명명하고자 하노라, 그러려면 왕다운 옻차림이 필요하니 이 대관식 망토를 걸칠 것을 명 하노라" 나는 이렇게 선언하며 독개구리 색깔같은 녹색 판초 우비를 그의 어깨에 둘러줬다. 그리고 오른손에 등산 스틱을 , 왼손에 오랜지 한개를 지어 주며 덧 붙었다. "이 제국의 보주(구체 상단에 십자가가 박힌 모양으로 중세 황제의 강력한 왕권을 상징한다) 와 왕홀(지휘봉 모양으로 이 또한 강력한 왕권의 상징)도 이제 그대의 것이다. 마지막으로 무릎을 굻고 영광스러운 스루하이커의 관을 받도록하라" 토에크는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먼지 날리는 흙바닥에 무릎을 굻었다. 나는 기사 작위 수여식을 팔때 처럼 등산스틱을 그의 양 어깨와 머리에 한번씩 갔다 댔다. 밥은 네게 종이 상자로 만든 왕관을 건내 줬다. 어젯 밤에 정성껏 오려 붙이고 세트레일의 로고까지 그려 놓은 왕관이었다. 나는 경건한 몸짓으로 토에크의 머리위에 왕관을 씌우고 엄숙하게 말을 이었다. "그대가 트레일에서 달성한 트리플 크라운의 위엄을 치하 하노라" 동시에 그의 목에는 다체로운 색의 젤리번으로 만든 화려한 목걸이가 걸렸다. 콩 모양의 이 달콤한 젤리는 토에크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 이었다. 어젯밤 나는 젤리빈 한봉지를 치실에 바늘로 꿰어 이 목걸이를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코에크 1세 만세! 라고 세번 외침으로써 대관식을 종료했다. 토에크는 감동에 젓어 몸을 일으키고는 나와 포옹을 나누었다. 분위기는 한껏 들떠 있었다. 밥과 나는 대관식을 마친 트레일 황제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나는 밥의 목에 마시멜로 목거리를 , 밥은 내 목에 치실에 꿴 스니커즈 초코바 한개를 걸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