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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릉(思陵)을 가다. (09,17)

paxlee 2020. 9. 17. 19:08

            사릉(思陵)은 단종의 비 정순왕후의 릉이다.

 

            홍살문에서 바라본 정순왕후의 릉이다. 가운데 붉은 금지표시 선까지 들어갈수 있었다.

 

            사릉의 소나무는 한이 많아 그 무개를 이기지 못하여 땅으로 처져있다. 그리고 상순은 동쪽을 향해 굽어있다.

 

            정순왕후 릉의 정자각과 비각이다.

 

            정순왕후의 릉이다. 가까이 갈수 없었다.

 

            릉의 주위는 소나무가 울창하다.

 

            조선 왕릉은 어는 곳이나 소나무 숲이 아름답다.

 

            정순왕후 비각 옆에 소나무도 동쪽을 향해 굽어있다.

            소나무 숲의 솔향이 상쾌하였다.

 

 

사릉(思陵)은 조선조 6대 임금 단종의 정비인 정순왕후(1440년~1521년 7월 7일 : 음력 6월 4일)의 릉이다.
남편 단종이 세조에 의해 왕위를 찬탈 당한 후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를 떠난후 군부인(君夫人)
으로 격하 되었다. 청계천에 있는 영도교(永渡橋)는 귀양 가는 단종과 정순왕후가 마지막으로 헤어진 곳으로
전해 지는데, 결국 두 사람은 이승에서는 다시 만나지 못 하였다. 단종이 세조에 의해 사사된 후 정순왕후는
노비가 되었다. 친정마저 풍지박산이 난 상태였다. 그녀는 동대문 밖 숭인동 청룡사 근처에 초암을 짓고 시녀
들과 함께 살았다. 정순왕후 송씨는 시녀들의 도움으로 끼니를 잇고 염색업을 하며 어렵게 살았다고 한다.

 

단종의 죽음을 전해 들은 송씨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큰 바위에 올라 영월을 향해 통곡을 하며 단종의 명복
빌었다. 후에 세조가 그녀의 '신분은 노비지만, 노비로서 사역을 할수 없게 하라'는 영을 내리고, 정업원에서
살게 하였다. 정업원(淨業院)은 부군을 잃은 후궁들이 출궁하여 여생을 보냈던 곳이다. 정순왕후는 일생을
그곳에서 동쪽 하늘을 바라보며 단종의 명복을 빌다가 81세에 세상을 떠났다. 단종을 생각하며 일생을 살다
사망하였다. 후에 숙종(24년, 1698년)때 단종과 그녀는 복위되어 시호를 받고 종묘 영녕전에 신위가 모셔졌다.
그녀의 복위로 종묘에 배향되면서 능호를 사릉(思陵)이라 했는데, 이는 억울하게 살해된 남편을 사모(思慕)한
다는 뜻에서 사릉(思陵)이라 지었다고 한다.

 

            방문객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정순와후의 릉을 찾아오는 참배객은 꾸준히 있었다.

 

            또 다른 방문객은 할머니, 손녀, 그리고 엄마, 삼대가 기념 촬영 중이다.

 

            릉의 숲속에 가을 꽃 구절초가 많이 피어서 반겨 주었다.

 

            광해군묘도 이곳에서 2km 떨어진 곳에 있다는 안내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