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Review

백수의 일상 - 166. <마음은 어떻게 세계를 만드는가 > (2)

paxlee 2021. 4. 30. 06:02

왜 같은 것을 보면서 다른 것을 볼까

우리의 일상적 분별 너머에 과연 무엇이 있을까요? 이 문제를 생각해보기 위해 다음의

그림을 한번 봅시다. 이것은 형태 심리학(게슈탈트심리학)에 흔히 등장하는

<토끼와 오리>입니다.

 

이 그림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봅니까? 누군가는 긴 귀를 가진 토끼를 보고, 또 누군가는 길쭉한

부리를 가진 오리를 보겠지요. 집에서 토끼를 키워 토끼와 친숙한 사람은 아마도 토끼를

보고, 오리를 길러 오리와 친숙한 사람은 아마도 오리를 볼 것입니다.

그렇게 누구는 토끼를 보고, 누구는 오리를 본다면, 그럼 그 두 사람은 과연 다른 것을 본 것일

까요? 아니면 같은 것을 본 것일까요? 누구는 토끼를 보고 누구는 오리를 본다고 말하면,

토끼와 오리가 서로 다른 것이니까, 두 사람은 다른 것을 봤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같은 그림을 보면서 누구는 그것을 토끼로 보고 누구는 그것을 오리로

본 것이니, 또 같은 것을 봤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같은 것을 본다'와 '다른 것을 본다'가 함께 성립할 수 있는 것일까요? ​

'같은 것을 본다' 와 '다른 것을 본다'가 함께 성립할 수 있는 것은 두 경우 '보다'의

의미 또는 '본 것'의 의미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단순하게 '무엇을 본다'라고 말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본다는 것은 '무엇(x)을

무엇(y)으로 본다' 입니다. 그림(x)을 놓고 누구는 그것을 토끼(y1)로 보고, 누구는

그것을 오리(y2)로 본 것이지요. 그러니까 '그림(x)을 본다' 고도 말할 수 있고,

'토끼(y1)를 본다' 또는 '오리(y2)를 본다' 고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두 사람이 'x를 본다'는 의미에서는 '서로 같은 것을 본다'고 말할 수 있고, 또 두

사람이 각각 다른 'y를 본다'는 의미에서는 '서로 다른 것을 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x와 y는 어떻게 구분되는 것일까요? 일단 x는 눈앞에

주어진 것이므로 감각대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y는 그 상황에서 나의 의식이 실제로 알아차린 것, 내가 본다고 의식하는 것이므로

의식대상 내지 인식대상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렇게 규정하면 앞의 두 사람이

같게 본 것(x)은 감각대상이고, 서로 다르게 본 것(y)은 의식대상 내지

인식대상이라고 구분해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단순한 그림 하나를 보는 데에도 보는 층위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즉 같은 것을

보는 층위와 다른 것을 보는 층위가 서로 다른 것이지요. 그런데도 그 둘 다를

똑같이 '본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그 보는 층위의 다름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눈앞에 주어진 감각대상(x)과 우리가 최종적으로 인식하는 의식대상(y)의 차이를 유식불교

(唯識佛敎)의 용어를 가져와서 좀 더 명확하게 개념화해보기로 하지요. 유식은 4~5세기

경 인도에서 확립된 일종의 대승불교사상입니다. 유식에서는 인식을 '헤아림'이라는

의미에서 (量헤아릴 양)이라고 합니다. 측량, 계량, 수량등에서의 량이지요.

 

그리고 인식하는 자는 '능히 인식하는 자'라는 의미에서 능량(能능할 능 量헤아릴 양) 이라고

하고, 인식되는 대상은 피동을 나타내는 (所바 소)자를 써서 소량이라고 합니다.

능동과 피동을 능과 소로 구분한 것이지요. 그리고 인식 과정을 거쳐서 얻어진

결과를 '인식의 결과'라는 의미에서 량과(量果열매 과) 라고 합니다.

봄과 마찬가지로 인식은 'x를 y로 아는 것' 입니다. x는 인식이 지향하는 대상, 눈앞에 주어진

대상이고, y는 그 인식 과정을 거쳐서 결과적으로 알려진 대상, 인식된 대상이지요. '눈앞의

대상(x)인 감각대상을 '인식하고자 하는 대상'이란 의미에서 '소량'이라고 부르고, '인식된

대상'(y)인 의식대상 내지 인식대상을 '인식된 결과로서의 대상'이라는 의미에서 '량과'

라고 부르기로 합시다.

이와 같이 소량과 량과를 규정하면, 이 소량과 량과의 구분은 인식대상을 지칭하는 유식의 또

다른 개념인 '소연'에서의 구분, 즉 소소연과 친소연의 구분과도 일치합니다. 소소연은

'인식의 먼(소) 대상(소연)'으로서 우리가 인식하고자 하는 대상(x)인 소량에 해당하고,

친소연은' 인식의 가까운(친) 대상(소연)'으로서 인식 과정을 거쳐 인식된 결과(y)인

량과에 해당하지요. 우리의 인식 과정은 다음과 같은 개념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의식이 무엇(x)을 무엇(y)으로 알다
능량 소량 량과
능연 소소연 친소연

 

 

우리에게 인식이란 모음에서 앎으로 이행해가는 활동입니다. 즉 인식은 인식하고자 하는

대상(x)을 어떤 것(y)로 아는 것이지요. 그런데 일단 인식이 이루어지고 나면, 알고자

했던 것(x)은 뒤로 물러나고 우리의 의식에는 오직 우리에게 결과적으로 알려진

것(y)만이 대상으로 드러납니다. 인식 과정 자체가 소량(x) 위에 량과(y)가

덧씌워져서, 결국 안의 것(x)은 가려지고, 바깥 것(y)만 드러나는 은폐 과정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마치 몸에 옷을 걸치면 몸은 가려지고 못만 드러나는 것과 같습니다. 또 얼굴에

가면을 쓰면 얼굴은 가려지고 가면만 보이는 것과 같지요. 그래서 우리는 쉽게

소량(x)을 잊고 량과(y) 그 자체가 객관적 실재인 듯 여기게 됩니다.

앞의 그림에서 토끼를 본 사람은 거기에는 토끼만 있고 그 외에 다른 어떤 것은 없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가 거기에서 토끼만 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오리를 본 사람은

거기에는 오직 오리가 있을 뿐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가 거기에서 오리만

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와 같이 인식이 이루어지고 나면, 인식을 야기했던 소량(x)은 오히려 의식에서 멀어지고

가려져서 마치 없는 것처럼 묻혀버리고, 인식된 량과(y)만 거기에 있는 것으로 드러

나게 됩니다. 두 사람이 같은 것(x)을 보는데도 서로 다른 인식 결과(y)를 얻게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인식 결과인 량과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가장 두드러진 원인은 서로 다른 의도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게 보고자 하는 대로 보는

경향이 있지요. 헤어진 애인이 너무 보고 싶으면 지나가는 사람이 애인처럼 보일

수도 있고, 배가 너무 고프면 탁자 위에 놓여 있는 돌멩이가 맛있는

빵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원인은 인식자가 갖고 있는 인식체계 내지 개념들의 차이일 것입니다. 우리의 두뇌

에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주어진 감각자료들을 한데 모아 종합·정리하고 해석하여 특정한

의미로 읽어낸느 정보처리시스템인 두뇌신경망이 갖추어져 있지요. 그 신경망 중에서

토끼 방면이 더 강화되어 있으면 같은 것을 보아도 그것을 토끼로 보고,

오리 방면이 더 강화되어 있으면 그것을 오리로 보겠지요.

 

교육등을 통해 특정 외국어에 대한 언어인지체계가 갖추어지면 누군가 내는 소리가 의미 있는

말로 들리는 반면, 그런 인지체계가 없으면 그냥 소리 내지 잡음으로 들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나에게 그리스인이 하는 말은 새의 지저귐과 다를 바 없는 그냥 소리일

뿐이고, 새에게는 사람의 말이 개의 짖음과 다를 바 없는 그저 잡음일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개념적 차이는 그 개념을 공유한 자에게만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같은 것(x)를 다른 것(y)으로 보는 이유
① 의도의 차이

② 인식체계 내지 개념들의 차이

인지체계 내지 정보처리시스템의 차이에 따라, 인식된 결과인 량과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단적

으로 보여주는 것이 유식에서 제시하는 '일수사견'의 예입니다. 같은 물을 놓고 인간은

그것을 마시는 것으로 보고, 물고기는 그것을 거주공간으로 봅니다. 천사는 그것을

반짝거리는 보석으로 보고, 아귀는 그것을 끈적거리는 피고름 같은 것으로

보지요. 그렇게 인지체계가 서로 다르면, 같은 것(x)을 봐도, 그 결과(y)는 서로

다르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렇게 서로 다르게 보기 전, 같은 것(x)은 과연 무엇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