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의 일상 - 410. <'공간에 시간과 풍경을 품는다' >
'공간에 시간과 풍경을 품는다'
충북 청주시 '문의주택+그루터기 교회'(2018). 원경으로는 강을, 근경으로는 소읍을 살짝 내려다보는 터는 성격이 다른 중정을 각각 품은 두 개의 정방형 볼륨을 단순하게 배치했다. '집'이 메인이고 '교회'가 그 안에 포함되는 형태다. 이러한 조합은 사실 이상한 게 아니다. 개신교보다 조선 땅에 먼저 들어온 가톨릭은 성당보다 사제관을 먼저 지었다. 생활이 먼저였고 기도는 나중이었다.
문의주택+그루터기 교회 외관(2018) / 사진제공 = 모노건축사사무소.
기하학적 단순함을 가진 건축은 풍경과 '연결된다'는 의미를 명확하게 구현해 낸다. 정재헌은 낮은 곳에 교회의 입구를, 뒷길 높은 곳에 집의 입구를 두어 동선을 분리했다. 집과 교회 두 볼륨 사이 경사진 마당은 내려다보이는 소읍의 가로와 뒷산을 시각적으로 연결한다.
주택은 동서 방향으로 경사를 따라 긴 마당을 품은 박공지붕으로, 교회는 남북으로 긴 장방형의 마당을 품은 평지붕으로 디자인했다. 박공지붕은 외부에서는 채가 나뉜 듯 보이나 내부는 연결되며, 교회는 하나의 외벽이지만 성전, 사무실, 식당으로 내부 볼륨이 나뉘어 있다. 분절은 실(室)의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풍경을 담아낸다.
문의주택+그루터기 교회 내부 / 사진제공 = 모노건축사사무소.
새정이 마을 주택(2020)은 행정구역상 서울 서초구 신정동에 속하지만 아파트 숲이 아니라 청계산 주변의 그린벨트에 인접하고 있다. 대지 70평의 주택은 홑집 두 채가 마당을 사이에 두었고, 통창이 마당으로 열려 있어 계절에 따른 풍경을 만든다. 재료는 나무, 돌, 철, 콘크리트이다. 내부도 노출콘크리트를 사용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콘크리트와 나무의 조합이다.
정재헌은 '관계성'을 언급한다. "전통 한옥은 채 나눔과 홑집, 그리고 마당으로 공간을 다채롭게 구성한다. 대문에 들어서면 마당이 있고, 사랑채가 있고, 다시 마당을 사이에 두고 안채로 연결되면서 공간의 전환이 이뤄진다. 집에서 중요한 것은 자연과 외부 공간의 관계성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이다."
디파이 사옥(DFY Head office·2020)의 건축주는 건축가의 대표적 포트폴리오인 완성된 주택을 보고 설계를 의뢰했다. 서울의 강남 테헤란로 권역의 사무실들은 건물로 들어가면 마치 항구에서 배를 타고 들어간 섬 같은 공간이다. 단독주택 실내에서 누리는 자유로움이 없다. 2년여간 지속되고 있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사무실은 재택근무 등으로 지정된 자리가 없어지고 공유 공간의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디파이 사옥(DFY Head office. 2020) / 사진제공 = 모노건축사사무소.
정재헌은 '사무 공간은 직접 체감할 수 있는 외부 환경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에 내부(solid)보다 외부(void)를 먼저 디자인했다. 하늘로 열린 중정을 안쪽에 배치하여 각 층의 내부 공간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도록 연결했다. 중정의 빛은 성큰가든으로 이어진 벽을 타고 층고 높은 지하 공간으로 전해진다. 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빛줄기는 때마다 분위기를 다르게 연출한다. 3면이 벽으로 둘러싸인 중정은 감성의 공간이다. 정재헌은 '오피스'의 기본 개념이 '기능'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바뀌었고, '몸'의 편리함에서 '마음'으로 확장되고 있다고 본다.
디파이 사옥(DFY Head office. 2020) / 사진제공 = 모노건축사사무소.
디파이 사옥은 서울 강남구 논현동 제1종 일반주거지역에 있다. 정면에는 고층 아파트가, 대지 주변은 비슷한 규모의 건물들이 둘러싸고 있다. 가로로 면한 저층부는 열고 옆 건물과는 80㎝ 두께의 벽으로 강한 경계를 만들었다. 1층 라운지를 반 층 들어올리는 스플릿플로어(splitfloor)로 계획하여 내부를 외부 시야로부터 보호하면서 지하로는 빛이 흘러들어가도록 했다. 외피는 사비석과 스테인리스스틸 산화발색으로 마감했다.
파주주택(2020)은 판교 운중동 '친구네집'과 비슷한 시기에 계획된 다른 표정의 집이다. 판교보다 10년 후에 계획된 교하 신도시는 판교의 두 배나 되는 집터와 느슨한 규제, 지형을 담은 가로의 구성으로 전원도시에 어울리는 밀도와 동네 풍경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파주주택(2020) / 사진제공 = 모노건축사사무소.
주택은 바깥에서 보면 하나의 건물처럼 보이지만 수평의 본채와 손님채, 수직의 별채로 나뉘어 있다. 세 개 영역으로 구분된 공간은 각각 독립된 외부와의 관계성에 따라 성격을 명료하게 한다. 마당 안쪽으로 경사진 모임 지붕(Hip Roof)으로 연결된 ㄷ자형 본채는 수평적이면서 내향적이며, 육면체 복층으로 구성된 별채는 단단한 프레임을 만들면서 수직적이고 외향적이다. 본채 마당을 통해 바라보는 풍경은 따뜻하고 편안하며, 본채 뒷마당으로 연결된 손님채는 세밀하고 고요하다. 별채에서 바라보는 외부의 풍경은 자연의 변화에 따라 변화무쌍하다.
파주주택(2020) / 사진제공 = 모노건축사사무소.
파주주택은 주차장이 있는 진입마당, 안마당, 뒷마당 그리고 뒷산의 풍경까지 하나의 시선으로 연결된다. 이 중첩된 장면들은 채와 채, 벽과 처마, 바닥과 지붕이 만드는 '사이'의 풍경이며 '간극'의 투명한 연결이다. 청고벽돌을 사용한 불투명한 물질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투명성'은 움직임에 의해 인지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풍경을 경험하게 한다.
정재헌이 꼽는 서양건축의 근원은 미국 시카고에 위치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1967~1959)의 로비하우스(Robie House·1910)이다. 수평선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프레리 양식(prairie house), 캔틸레버, 유기적 건축을 특징으로 한다. 입구는 돌아서 들어가는 형식으로 프라이버시를 강조한다. 낮은 담장은 외부인의 시선을 가리되 주택 사용자의 시야를 확장시킨다.
나무호텔(2020) / 사진제공 = 모노건축사사무소.
나무호텔(2020)은 아치울 주택 설계 개념의 확장이다. 호텔은 서울의 동부 광장동이라는 동네에, 이질적인 건물들 사이에 우뚝 솟아 있다. 어수선한 도로 쪽 전면은 하나의 매스로 단순하게 했고, 골목을 접한 후면은 작은 볼륨으로 세밀하게 구성했다. 진입 동선을 길게 끌어 시퀸스를 만들었다.
호텔은 방의 면적과 구조, 가구 배치가 모두 다르다. 조건에 따른 상이한 모양의 객실로 계획되었다. 경치를 빌리는 차경(借景)의 시도도 이뤄졌다. 발코니를 두고 외부와 연결하는 식으로 마당 같은 곳을 수직 공간에 적용했다.
나무호텔(2020) / 사진제공 = 모노건축사사무소.
호텔의 창은 풍경의 특정한 단면들을 마치 편집한 듯 제시한다. 도시 풍경을 전면으로 보여주는 파노라마 뷰는 아니다. 어느 창은 허리 아래, 바닥과 닿을 만큼 아래쪽에 나 있고, 어느 창은 중앙은 벽으로 차단되어 있고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양옆을 뚫었다. 창을 통해 바깥의 빛과 푸른 잎과 벽돌과 도시 풍경을 아주 조금씩만 취해 구조적으로 조화로운 한 편의 추상화를 제시한다.
서양화가 우제길(1942~ )의 작품처럼 평면을 겹친 틈으로 빛이 들어오는 듯하다. 도시 풍경을 많이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빛과 나무와 돌과 바람을 각각 분절시켜 바라보게 하는 미학을 창출한다. 정재헌은 호텔을 20년을 설계해 왔다고 말한다. 외부로 향하는 호텔 내부의 시선은 풍경에서 오는 느낌을 좇는 듯 보인다.
판교 운중동 친구네집(2021)의 형상은 언뜻 ㄷ자형으로 보이지만 내부 공간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아래채와 위채로 나뉘는 11자형이다. 아래채는 낮은 경사 지붕을 가진 필지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진 다면체이고, 위채는 평지붕을 가진 직육면체이다. 이 집은 긴 동선을 가졌다. 아래채 하부를 통해 진입한 마당을 거쳐 별채와 본채 현관 그리고 지하 다목적실로 각각 들어갈 수 있다. 가로와 안마당 사이에 '지붕 밑 진입 공간'을 크게 뒀다. 집과 밖의 자연스러운 공간이다.
마당과 연결된 곳이나 아래채와 위채가 만난 곳에 마루와 같은 반외부 공간이 있다. 이곳을 통해 방과 방, 채와 채 사이가 나뉜다. 내외부 공간이 결합된 형식으로 계절을 느끼도록 계획했다. 중심보다 부속 공간을 강조했다. 방 개수나 거실 면적을 줄이고 식당, 부엌, 화장실, 옷방, 다용도실을 확장했다. 집은 불편(不便)하지 않아야 하지만 때로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재료, 질감, 소리, 기억이 담겨 있다.
정재헌은 이웃과 공유하는 대지 내에 외부 공간을 둔다. 건축가의 미션 중 인간적인 규모의 공간감을 만들어 내는 게 중요하다고 굳게 믿는다. 목적지로 가는 과정에서 빛의 변화, 숨겨진 자연과 조응할 수 있는 내외부와의 관계에 치중한다. 외기와의 접합 지점을 많이 만들어야 가능하다.
붙박이장을 벽처럼 느껴지도록 공간 속에 녹아들어 존재감 없이 만들려고 한다. 실의 외벽에 설치되는 붙박이장은 두께감 있는 벽이 되어 완충과 단열의 역할뿐 아니라 빛이 유입되거나 내부에서 외부를 향할 때도 깊이가 생겨 심리적으로 편안하다. 실내에는 사용자 간 일정한 거리를 두는 영역성을 확보한다.
판교 운중동 친구네집(2021) / 사진제공= 모노건축사사무소
정재헌은 조형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걸 싫어한다. 벽돌을 선호하는 이유이다. 산업 재료로 인한 눈의 피로감이 심하다. 눈에 모든 감각이 집중되어 다른 기관의 감각이 퇴화된다. '건축은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것이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이음매 없이 형태가 두드러지는 노출콘크리트의 건축 언어와는 대조적이다.
건축가 정재헌은 무엇을 지었고 그의 건축 철학은 어디로 지향하나? 건축으로 개념화할 수 없는 게 있다. 백남준(1932~2006)의 말을 빌리면 '홈드라마처럼 인생의 갈등을 표현하거나 한국의 민주화를 작품화하지는 않는다'(1995년 10월, 당시 김훈 시사저널 편집국장(소설가)과의 인터뷰 중). 그러나 '미디엄'으로의 '건축'의 창조적 가능성을 실험해 가고 있다.
목소리를 높이지는 않으나 그의 건축관은 진보적 성향이 뚜렷하다. '작은 집일수록 품격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많은 함의를 갖고 있다. 급작스럽게 전환되지 않는 공간, 다음을 예측할 수 있고, 영역과 영역 사이에 적당한 거리가 있는 '전이(轉移) 공간'이 필요한 이유이다. '품격(品格)'은 축문 그릇 셋을 나란히 놓은 모양이다. 고대 중국에서 셋은 '많다'의 의미다. 품은 그릇을 늘어놓고 한 번에 많은 것을 비는 일이다. '여럿, 물건, 물품 등'의 뜻이 여기서 나왔다. 그릇 각각에는 신만이 줄 수 있는 것이 담겨 있다. 물건을 물건답게 하고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됨됨이'도 그 안에 포함된다(시라카와 시즈카의 '상용자해').
그는 도시 임대주택은 품격이 있어야 된다고 말한다. '실내 면적을 조금씩 줄여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외부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원재료도 고급으로 지어야 하며, 정부는 더 많은 예산을 배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프랑스 유학의 경험을 사례로 든다. 수업 시작 전, 수량이 제한된 건축 전문 서적을 파리에서 먼 곳에서 유학 온 나라 학생들부터 나누어 준다. 이러한 행위는 부자나 강자가 가난한 자와 약자에게 베푸는 배려나 도움이 아니라 그 사회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의무로 여긴다.
건축의 본질인 '주거(住居)'는 어디 가고 '부동산'이라는 자산 가치로만 평가되는 사회시스템의 개혁을 요구한다. 건축가가 대규모 단지 아파트 설계에 참여할 기회는 원천적으로 봉쇄된 것부터가 잘못되었다. 공기관이 신속하게 아파트를 지어 공급해야 되는데 건축가들이 발목을 잡는 것처럼 인식한다. '주택은 쉽게 소유할 수 있게 제도가 개선되어야 한다.' '소유를 해야 사랑을 하게 된다.' 이 땅은 오랫동안 정주문화를 가졌기에 집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서양은 집이 도시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다. 건축의 입면이 드러난다. 우리는 마당을 중심으로 한 가옥 구조이기에 내향적이다. 이를 이상헌 교수는 정재헌 건축의 특징과 함께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공공 공간으로서 도시 가로에 대한 인식이 없었기 때문에 건물이 가로를 향해서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필지를 둘러싸는 담 내부에 마당을 품는 방식으로 내향적으로 배치되었다." 정재헌은 우리에게 내재된 DNA와 눈으로 보는 형상은 다를 수밖에 없기에 한지 창을 사용하면서도 전통 문살은 피하는 식의 건축 어법을 구사한다.
파주주택에서는 한국 건축의 주요한 요소인 지붕의 처마를 사용하지 않고 벽에 뚫린 창을 낮추어서 처마의 효과를 낸다. 홑집으로 지어서 풍경을 어떻게 끌어들이느냐를 고민한 결과이다. 이 땅의 겨울은 추우면서 건조하다. 여름에는 통풍이 잘되어야 한다. 비 맞지 않는 마당 같은 공간을 필요로 한다. 그의 건축 철학은 명료하다. '자산으로서의 집이 아닌, 자신만을 위한 집에서 자신을 치유하고 돌보며 성장시키는 삶을 살고 있는가를 되돌아 보아야 한다.'
정재헌은 마당 있는 한국의 전통 집에 대한 유형론을 우리의 현대 생활 방식과 사회 구조, 건축 구조 등에 조화를 이루게 하여 재조명한다. 움직임을 통해 경험을 극대화하는 전이 공간들이 풍요로움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동료 건축가 조남호는 정재헌 건축을 한마디로 요약한다. '공간의 신체적 체험을 중시하고, 장소에 뿌리내리는 풍토적 특성을 살린 건축을 지향한다.'
상편에서 언급한, 사무소 직원 대부분이 제자들이라는 사실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정재헌은 미셸 카강 사무실에서 근무하다 1998년 귀국하여 짧은 기간에 작은 사무실과 대형 사무실을 거쳐 전주대 교수가 되었다. 한국은 본격적으로 IMF 경제체제에 접어들고 있었다. 2003년 경희대로 옮기면서 본격적인 건축교육자의 길에 들어섰다.
신중현(1938~ )은 한국 가요를 현대화시킨 선구자적 인물이다. 신중현은 걸출한 동료 및 후배 아티스트들과 달리 후학들을 적극 키웠다. '신중현 사단'이라고 하지 않나. 정재헌은 건축계에서 신중현 모델을 택한 듯하다. 르 코르뷔지에가 1950년대에 김중업을 받아들이고, 앙리 시리아니 역시 많은 한국인들을 받아들였듯, 정재헌에게 교육은 건축물을 짓는 것 이상의 가치가 있다. 강의 때 철저한 준비는 물론이고 가장 좋은 옷을 차려입고 학생들 앞에 선다.
[효효아키텍트-124] 건축가·건축교육자 정재헌(下)효효 매일경제 : 2022. 04.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