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의 다양한 문화

-* 은희경의 안나푸르나 트레킹 *-

paxlee 2008. 7. 5. 13:16
 
                       [은희경의 안나푸르나 트레킹]
 
                 
          내 나이에 하루 여덟 아홉 시간씩 열흘 넘게 계속해서 걸어야 하는 트레킹 일정이 쉽지 않다고 염려하는 사람도 있었다.
         북한산 산행을 날마다 하루에 두세 번씩 하는 셈이라니 틀린 말은 아니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한다고 하자 주위 사람들이
         걱정을 해주었다. 극심한 두통과 구역질, 호흡곤란 등 주로 고산병(高山病)에 대한 것이었다. 누군가는 산소 부족으로 정신이
         혼미해 헛것을 따라갔다고 하고 또 누군가는 자다가 숨이 막혀 한밤중에 아랫마을로 뛰쳐 내려왔다고도 했다.


         그러나 나는 별로 걱정을 하지 않았다. 해발 2000미터가 넘는 산에서 야영한 경험도 여러 번이었고, 무엇보다 머리 쓰는 일 없이

         무조건 앞을 향해 걷는 단순한 일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하긴, 술친구 일곱 명과 3주 동안 헤어지지 않고 놀게 됐는데 겁날 게 뭐 

         있었겠나. 우리 가운데 가끔이나마 산에 오르는 사람은 두 명 정도였고 나머지는 십여 년 만에 산길을 걷거나, 혹은 산행 경험이

        거의 없는 축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태평했다.

 
잔머리깨나 굴리는 우리는 2713미터 고지인 좀솜까지 비행기를 타고 간 뒤 거기에서부터 트레킹을 시작하기로 꾀를 내놓고 있었다. 내려오는 일이니 올라가는 것보다 쉬울 게 아닌가. 카트만두 공항을 거쳐 포카라에 도착한 우리는 앞으로의 긴 일정에 대비한다는 핑계로 실컷 먹고 마셨다. 오토바이를 빌려 타고 언덕에 올라가 페와호로 지는 해를 보고, ‘2008년 안나푸르나 트레킹’이라는 글자를 박아 단체 티셔츠도 맞추었다.
 
고산 지역에 폭설이 내린다는 말에 가짜 노스페이스 상점으로 몰려가 스패치도 샀는데, 용도가 뭐든 간에 색깔 고르는 일에만 신경을 썼다. 그리고 예정대로 다음날 18인승 프로펠러 비행기에 올랐다. 스튜어디스가 사탕과 함께 솜이 담긴 쟁반을 내밀었는데, 귀 막는 데 쓰는 솜을 솜사탕으로 착각해 입에 넣는 옆자리 승객 때문에 우리는 서로 눈을 맞추며 웃음을 참아야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세계의 지붕’이라 일컬어지는 무시무시한 장소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갑자기 눈앞에 거대한 설산이 나타났을 때의 충격은 설명하기 어렵다. 웅장한 산들이 꼭대기에서 눈보라를 일으키며 눈을 부릅뜬 듯 바로 창밖에서 나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깊게 팬 골짜기들이 손금처럼 환히 보이는 거리였다. 크라카우어(Jon Krakauer·미국의 산악인 겸 논픽션 작가)가 ‘희박한 공기 속으로(Into Thin Air)’에서 묘사한 장면이 이거구나 싶었다.
 
비행기 유리창 너머 에베레스트와 맞닥뜨린 순간, 그는 에어버스 300기의 순항고도 높이로 솟은 산에 오르겠다는 생각이 얼마나 무모했는지 실감하며 공포를 느꼈던 것이다. 나 역시 덜덜 떨기 시작했고, 누구에게인지는 모르지만 부디 살려만 주면 착한 사람이 되겠다고 수없이 맹세했다. 그 간절한 맹세는 산을 넘기 위해 몇 번인가 거의 뒤집힐 듯 아찔하게 흔들리던 비행기가 끝내 악천후를 이기지 못하고 출발 지점으로 회항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다음날에는 비행기가 아예 뜨지도 못했다. 우리에게는 결국 아래에서부터 착실히 걸어 올라가야 하는 코스 외에 다른 선택은 없었다. 그 일을 겪은 뒤 나는 겸손한 마음으로 산에 올랐다, 라고 하면 인간이란 존재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위험이 사라지면서 기도도 멀어져 갔다. 우리는 구불구불 끝없이 이어지는 가파른 돌계단을 하루 종일 오르내려야 했고 휴식은 짧았으며 밤이면 침낭 속에 웅크린 채 추위에 떨어야 했다.
 
처음에는 무거운 소금이나 곡식을 싣고 가는 나귀 떼에게 길을 비켜주며 벗겨진 잔등에도 마음 아파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어딜 가나 발길에 차이는 똥과 똥 냄새가 지긋지긋한 나머지 전생에 얼마나 나쁜 놈이었으면 나귀로 태어났을까, 라고 타박하기에 이르렀다. 그토록 경탄을 자아내던 계단식 논의 멋진 풍광도 시간이 갈수록 남해 가천 다랑이마을과 다를 게 없었고, 가슴을 뛰게 만들던 설산 역시 도봉산 보듯 심상했다.

우리 일행에게도 어김없이 고산병이 찾아왔다. 얼굴이 퉁퉁 부어 올랐고 두통, 근육통, 감기 등의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종아리가 단단하게 두꺼워져 근육이 생겼다며 좋아했는데 알고 보니 압력이 낮아 부은 것이었다. 하물며 커피믹스 봉지도 터지기 직전까지 팽창했다. 문득 몇 년 전 로키산맥을 여행했던 그리운 기억이 떠올랐다.

 자동차로 달리던 넓은 포장도로, 산봉우리와 산봉우리를 이어주던 케이블카, 멋진 산장에서 마시던 에스프레소와 막 구운 호밀빵…. 걷다 지친 일행은 그 얘기를 듣자마자 모두들 입을 모아 외쳤다. “우리 왜 거기로 안 가고 여기 온 거예요?” 안 그래도 일정에 쫓기던 터에 여행에 대한 흥미까지 잃게 되자 몇은 중간에 산을 내려갔다. 나머지 사람들 역시 산이 가까워지는 재미와 한국에 돌아간 뒤 자랑할 재미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면 계속 걸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최종 목적은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에서 일출을 보는 것이었다. 드디어 전날 밤 숙소인 마차푸차레 베이스 캠프에 여장을 풀고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3700미터나 되는 곳에서 잠드는 일도 쉽지 않았지만 계속 눈이 내려 출발 여부조차 불확실했기 때문이었다. 눈은 새벽 두시에야 그쳤다. 길이 있을 리 없었다.

셰르파족 가이드가 어림짐작으로 내딛는 걸음을 따라 그 발자국을 그대로 밟으며 나아가야 했다. 허벅지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넘어지고 구르면서. 안나푸르나 남봉의 뒤쪽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분지처럼 설산들이 사방을 빙 둘러 에워싸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북두칠성이 먼 하늘 위가 아니라 바로 머리 뒤에서 친구처럼 내 곁을 따라 걷고 있었다.

추운 건지 공기가 희박한 건지 온몸이 얼어붙고 정신이 혼미했다. 저 멀리 베이스 캠프가 보이는 덕분에 가까스로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열흘 넘게 걸어 올라왔고 거기서 다시 새벽 눈길과 강추위를 뚫고 3시간여를 걸어 4130미터 고지에 도착했으니, 풍경이 못 견디게 아름다워야 하는 것은 물론 당연한 일이었다. 알고 보니 스키어를 태운 헬기가 들락거리고 식당에서 비빔밥까지 팔 만큼 대중적(?)인 장소였지만 말이다.

그날 오후 내려오는 길에 간밤의 눈사태 현장을 보게 되었다. 가이드에 따르면 해마다 여러 명이 목숨을 잃는 위험한 곳이라고 한다. 한강 폭만큼이나 넓은 골짜기 가득 커다란 눈덩이가 쌓여 있는 속으로 숨죽이며 조심조심 걸음을 옮겨야 했다. 프로펠러 비행기로 산맥을 넘어갈 때처럼 한순간 싸늘한 기운이 등골을 훑고 지나갔다. 히말라야 고지 위에 얼어붙은 채 죽어 있는 후배의 시신을 수습하러 떠나던 엄홍길 대장의 휴먼 원정대가 떠오르기까지 했다. 다음 순간 생각했다.

호들갑스럽기도 하지. 도시에서의 삶이란 옷을 입고 집안에 들어앉아 있는 것과 비슷하다. 그 속에서 나는 여러 가지를 갖춘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오직 먹고 자고 안전을 구해야 하는 거친 대자연의 조건 속에 놓인 나는 어지간히 유치하고 파렴치하고 단순하다. 이처럼 다른 존재로서의 나를 만나본다는 데 여행의 의미가 있는 것일까.

여행을 다녀오면 사람들이 이렇게 묻곤 한다. 뭐가 제일 좋았어요? 그때마다 신중히 대답하기 위해 기억을 돌이켜보는데 내 대답은 늘 “떠났다는 점이 제일 좋다”이다. 두 번째로 좋은 것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 다행인데, “돌아왔다”는 것이다. 내가 끌고 가는 삶이 버겁고 피곤하고 지루해서 떠나고, 그렇게 얼마쯤 지나면 돌아오고 싶어지는 것, 나에게는 그게 여행이다. 내가 몰랐거나 잊고 있었던 나를 만나본 뒤에 다시금 나로 돌아와 살아가는 일은 어쨌든 조금이나마 새로울 것 같으니까.

                      - Weekly Chosun [2001호] 2008.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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