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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 - 하마스 피의 역사 *-

paxlee 2009. 1. 23. 13:04

 

           이스라엘 - 하마스 피의 역사

 

어떻게 시작됐나 어디로 갈 것인가
 

이스라엘에는 두 개의 섬이 있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자치지구인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가 ‘육지의 섬’이다. 이 중 가자지구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의 전쟁터로 변하면서 국제사회에서 가장 뜨거운 지역이 되고 있다. 가자지구는 너비 6~8㎞, 길이 40㎞, 면적 360㎢밖에 안 되는 작은 지역이지만 무려 150만여명이 살고 있다. 인구밀도는 3840명으로, 세계 최고인 방글라데시(900명)에 비해서도 훨씬 높다. 이런 작은 땅 덩어리를 놓고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 이스라엘 탱크가 하마스 기지를 포격하고 있다. photo AP
비극의 씨앗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이 발단, 아랍국가와 4차례 전쟁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국가로 인정 않고 영토 확장 열중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을 알려면 우선 가깝게는 60여년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유엔 총회는 1947년 11월 29일 2만6320㎢에 달하는 팔레스타인 영토의 56%를 유대인에게 할당하고 44%를 아랍 민족에게 배분하는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가결했다(결의 181호). 유대인들은 3000여년간의 디아스포라(diaspora·離散)를 끝내고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을 건국했다. 유대인들은 그토록 바라던 국가를 세웠지만,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잃게 됐다. 특히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등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고 전쟁에 돌입했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이 건국하자마자 팔레스타인 지역은 제1차 중동전쟁(1948년 5월 16일~1949년 2월 24일)의 무대가 됐고, 이후 1974년까지 4차례나 전쟁이 발발했다. 이처럼 전쟁이 상존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건국 당시 민족적으로 유대 민족으로만 이뤄진 국가, 영토상으로 성서에 기록된 팔레스타인 영토의 100% 회복을 목표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특히 이스라엘은 시오니즘에 따라 팔레스타인을 독립국가로 분리하는 것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내쫓고 영토를 확장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른바 ‘입식(入殖) 정책’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서로 공존할 수 없는 적이 됐고, 아직까지 중동 평화 협정을 체결하지 못하는 근본 원인이 되고 있다. 
 
샤론 총리의 결단

전쟁으로 점령했던 가자지구서 2005년 철수
땅 양보하고 유대국가 유지하기 위한 전략


하지만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의 영토를 모두 차지한다고 해도, 이 지역에 사는 모든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추방하지 않는 한 이스라엘은 유대 민족만의 국가는 될 수 없다. 이런 점을 인식했던 아리엘 샤론 당시 총리는 2005년 가자지구에서 유대인 정착촌을 철수한다는 전략적 결단을 내렸다.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은 1967년 ‘6일 전쟁’이라고 불리는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하면서 점령한 지역이다.

 

유대인 정착촌 건설에 앞장서 왔던 샤론이 추진한 전략은 땅을 양보하고 이스라엘을 유대 국가로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요르단강부터 지중해까지 ‘이스라엘 영토’에 살고 있는 유대인 인구는 현재 520만명이다. 또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에 거주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인구는 350만명이다.

 

만약 팔레스타인 국가가 세워지지 않는다면 이들은 무국적자이거나 아니면 이스라엘 국민으로 살 수밖에 없다. 특히 2025년이면 팔레스타인 주민 전체 인구는 유대인보다 훨씬 많아질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이 모두 법률적으로 이스라엘 국민이 된다면 이스라엘은 더 이상 유대국가가 될 수 없다. 샤론의 전략은 어느 정도 땅을 양보하는 대신 평화도 얻고 국가 정체성도 유지한 것이었다.

하마스의 등장

온건파인 압바스 제치고 2006년 총선서 압승
압바스 정권과 평화협상 추진해온 샤론에 도전


그런데 샤론의 도박에 예상치 못했던 ‘변수’가 발생했다. 바로 팔레스타인 무장단체인 하마스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정권을 잡은 것이다. 하마스는 2006년 2월 실시된 총선에서 압승을 거뒀다. 하마스는 의회인 입법위원회(PLC) 전체 의석 132석 가운데 76석을 확보, 43석을 얻은 집권 파타당에 승리하면서 팔레스타인의 집권당이 됐다.

하마스가 당시 총선에서 승리한 이유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집권 파타당의 부정부패와 무능에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파타당은 1994년 자치정부 출범 이후 줄곧 권력을 장악해왔다. 특히 야세르 아라파트 자치정부 수반은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 ‘국부(國父)’와 같은 인물이었다. 2004년 11월 아라파트 사망 이후 후계자인 마흐무드 압바스는 2005년 1월 자치정부 수반 선거에서 무난히 당선되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하마스를 선택한 것은 자신들의 고단한 삶을 진정으로 대변할 세력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이스라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샤론의 전략을 요르단강 서안과 동예루살렘을 이스라엘 땅으로 고착시키려는 의도로 간주했다.

때문에 이스라엘에 대한 강경 투쟁으로 정통성을 유지해온 하마스를 선택한 것이다. 하마스의 집권은 샤론의 전략에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었다. 샤론의 전략은 온건파인 압바스 수반과 파타당과의 평화 협상을 통해 국익을 담보하려던 의도였기 때문이었다.

 

두 개의 팔레스타인

하마스, 압바스 몰아내고 가자지구 완전 점령
이스라엘은 요르단강 서안의 압바스 정부만 인정


하마스가 집권하게 되자 이스라엘 정부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붕괴시키기 위해 초강경 정책을 구사했다. 미국도 하마스와 일체의 대화를 거부하는 등 이스라엘 정부를 적극 지원했다. 압바스 수반이 이끄는 파타당도 하마스의 자치정부 구성에 협력조차 하지 않았다.

하마스는 지도자인 이스마일 하니야를 총리로 하는 독자 정부를 출범시켰다. 이후 양측은 서로 유혈 충돌을 벌이면서 사사건건 대립하다가 갈등을 가까스로 수습하고 2007년 3월 공동내각을 구성했다. 하지만 양측은 치안 통제권 문제를 놓고 다시 충돌했다. 하니야 총리는 팔레스타인 보안군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자신에게 넘길 것을 요구했지만, 압바스 수반은 이를 거부했다.

이런 가운데 하마스가 자신들의 지지 기반이 강력한 가자지구에서 파타당이 통제하던 보안시설을 강제로 장악하면서 100여명이 사망하는 유혈 사태가 벌어졌다. 압바스 수반은 이를 빌미로 같은 해 6월 공동내각을 해산하고 비상내각을 구성했다. 하마스는 이를 불법적 조치라며 불복하고 가자지구를 완전 점령했다. 결국 팔레스타인은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에 각각 두 개의 정부가 세워지게 됐다.

이스라엘 정부는 압바스와 파타당 정권을 팔레스타인의 합법 정부로 인정하고, 하마스 정부가 있는 가자지구에 대한 전면적인 통제 조치를 단행했다. 국지적인 충돌을 벌여온 양측은 지난해 6월 19일 이집트의 중재로 6개월간의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    

이스라엘도 샤론의 전략으로 국내 정치적으로 심각한 내홍을 겪어야 했다. 샤론은 자신의 노선을 반대했던 집권 여당인 리쿠드당을 탈당하고 카디마(전진)당을 창당하는 등 유대인 정착촌 철수를 밀어붙였다. 그러던 샤론은 2006년 1월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져 ‘식물인간’이 됐다. 카디마당은 같은 해 3월 총선에서 가까스로 승리, 노동당 등과 연정을 구성했다.

선거를 승리로 이끈 샤론의 후계자인 에후드 올메르트 부총리가 총리가 됐다. 하지만 올메르트 총리는 뇌물수수 혐의 등으로 기소돼 지난해 8월 총리직과 당 대표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발표했다. 카디마당의 후임 당 대표로 선출된 치피 리브니 외무장관은 지난해 10월 새로운 연정 구성에 실패, 오는 2월 10일 조기 총선을 실시키로 했다.           
 
전쟁이 돌파구

하마스는 4월 총선 승리 위한 강경 모드로
이스라엘 집권당은 민심 돌릴 카드로 이용


이스라엘이나 하마스 모두 이처럼 복잡한 국내 정치 상황을 타개하려면 돌파구가 필요했다. 바로 전쟁이었다. 전쟁의 빌미는 하마스가 제공했다. 하마스도 오는 4월 자치정부 수반과 총선에서 승리하기 위해 더욱 강경한 모습을 보여야 했다.

특히 여론조사에서 압바스 수반이 하마스의 하니야 전 총리에 앞서는 것으로 나타나자, 하마스는 가자지구 봉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주민들의 민심을 얻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하마스는 지난해 12월 19일 만료된 이스라엘과의 휴전 협정 연장을 거부하고 로켓 공격을 더욱 강화했다.

이스라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야당인 강경 우파의 리쿠드당에 패배할 가능성으로 전전긍긍하던 카디마당과 노동당은 기다렸다는 듯 지난해 12월 27일 전쟁이란 카드를 빼들었다고 분석할 수 있다. 카디마당과 노동당 연정은 그동안 하마스의 공격에 강력히 대처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물론 이스라엘이 내세운 표면적인 공격 이유는 하마스의 로켓 공격과 지하터널을 통한 무기 밀반입을 저지한다는 것이다. 하마스는 가자지구를 장악한 이후 이스라엘을 향해 무려 5500여발의 로켓탄을 발사했다. 
 
이스라엘의 목표

하마스 무력화시키고 지원세력인 이란에도 경고장
오바마에 의지 과시, 평화협상 유리한 고지 선점도


이스라엘 정부는 공군의 공습으로 하마스의 로켓 진지 등 주요 시설이 파괴됐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1월 3일 탱크를 앞세우고 대규모 지상 병력을 가자지구에 투입했다. 물론 이스라엘의 목표가 가자지구를 재점령하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의 의도는 내친김에 하마스를 무력화하려는 것이다. 이는 기존에 추진해온 샤론의 전략을 보다 확실히 하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마스를 궤멸시켜 온건파인 압바스 수반과 파타당의 입지를 강화한다는 것이다.
 
리브니 외무장관이 “하마스의 가자지구 지배는 이스라엘의 장애물”이라고 밝힌 것도 이런 맥락이다. 압바스 수반과 파타당이 4월 선거에서 승리하면 자국의 이익을 최대한 보장하는 선에서 평화협상을 마무리하겠다는 속셈이다. 이스라엘은 또 핵 개발을 계속 추진하고 있는 이란에도 경고장을 보내려는 의도도 갖고 있다.
 
이슬람 시아파인 이란은 하마스가 수니파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왔다. 이스라엘이란 공동의 적에 맞서 일종의 전략적 연대를 해온 것이다. 이를 간파한 이스라엘은 최악의 경우 이란을 공격했을 때, 자국의 뒤통수를 칠 수 있는 하마스를 이번 기회에 평정하는 것이 최선의 대비책이라는 점도 고려한 것이다.

 실제로 수니파의 맹주인 이집트와 사우디 아라비아, 요르단 등이 이스라엘의 하마스 공격에 비판의 목소리를 낮추고 있는 것도 이란의 영향력 확대를 이스라엘이 어느 정도 제어해주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이스라엘이 미국의 부시 행정부 퇴진과 오바마 행정부 출범을 고려했다는 것이다.

부시 행정부는 그동안 이스라엘 정부를 적극 지지하면서 중동 평화 협상을 지원해왔다. 하지만 오바마 행정부는 부시 행정부와는 달리 하마스와도 대화에 나서는 등 평화 협상에서 팔레스타인의 입장을 포용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스라엘은 오바마 행정부에 자국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줌으로써 앞으로 평화 협상 등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전쟁의 득실

이스라엘 군사력 압도적이지만 정치적 패배 가능성
하마스는 전쟁에 져도 이슬람권의 지지도 높아질 듯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뜻대로 하마스는 완전히 제거될 수 있을까. 군사력으로 볼 때 이번 전쟁은 ‘골리앗 대 다윗’의 싸움이다. 이스라엘은 현역 16만8000명과 실전 경험이 풍부한 예비역 40만여명을 보유한 세계 4대 군사강국이다. 반면 하마스의 병력은 1만5000명 정도이고 이슬람 지하드, 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PFLP),인민저항위원회(PRC) 등 군소 무장단체 병력 5000여명이 연대하고 있을 뿐이다.

때문에 골리앗인 이스라엘이 다윗인 하마스에 승리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하마스는 이스라엘의 봉쇄에 따라 이슬람 세력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좁은 가자지구에 갇힌 상태다. 2006년 헤즈볼라가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였던 때와는 다르다. 헤즈볼라는 당시 잘 훈련된 정예부대를 보유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란과 시리아 등으로부터 군사·재정적 지원을 받았다.

하지만 이번 전쟁의 승패를 군사력으로만 단언할 수는 없다. 하마스는 그동안 주민들의 강력한 지지를 바탕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투쟁을 벌여왔다. 하마스의 조직과 대원들이 모두 제거된다고 해도 하마스가 부활할 것이 분명하다. 이스라엘도 하마스를 완전히 뿌리뽑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와 관련, 예루살렘 포스트는 이스라엘이 하마스 와해를 목표로 전면전에 나선 것은 이번 기회에 가자지구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는 것이 하마스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보다 낫다는 계산이 깔린 것으로 분석했다.

하마스 전문가인 칼레드 라우브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아랍미디어 소장은 “정치적으로 보면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주민뿐만 아니라 아랍과 이슬람 사회의 지지를 더욱 받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제로 하마스가 약화된다고 하더라도 압바스 수반과 파타당이 가자지구를 다시 장악할 만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반면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의 ‘생존게임’의 승자는 아무도 없고, 모두 패자라는 분석도 있다.

| 하마스는 어떤 단체 |

1987년 反이스라엘 무력투쟁 주도하며 창설
목표는 이스라엘 멸망… 서방은 테러단체 규정


▲ 하마스 대원이 부상한 동료를 부축해 피신하고 있다. photo 로이터
 
하마스는 두 얼굴을 가진 단체이다. 1993년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과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가 체결한 오슬로 평화협정을 거부하고 지금까지 이스라엘에 대한 무력 투쟁을 계속해왔다. 때문에 이스라엘과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은 하마스를 ‘테러단체’로 규정해왔다.

하마스는 1987년 인티파다(이스라엘에 대한 무력투쟁) 운동을 주도하면서 창설됐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이스라엘과의 투쟁을 이끌 강력한 지도부를 원했지만,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는 대변자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한때 테러단체로 규정될 만큼 과격했던 PLO는 이스라엘의 생존권 인정과 무장투쟁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이를 간파한 팔레스타인 강경파 지도자 아흐마드 야신은 가자지구를 중심으로 하마스를 만들었다. 하마스의 기본노선(강령)은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이스라엘을 완전히 몰아내고 팔레스타인 전역에 이슬람 국가를 세우는 것이다. 강령은 또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성전(지하드)밖에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마스는 정치위원회와 군사위원회로 구성됐다. 하마스의 최대 조직은 군사기구인 ‘이제딘 알 카삼 여단’이다. 하마스는 종교적 열정이 강한 젊은이를 조직원으로 받아들인다. 이들은 대부분 가자지구 출신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극단적 증오심을 갖고 있다. 하마스는 이들이 테러공격을 감행할 경우 유가족들에게 3000~5000달러의 보상금을 주며 지하드의 순교자로 추앙한다. 하마스는 또 병원·학교·자선단체 등을 운영하면서 주민들의 환심을 사왔다.

 - 글 / 이장훈 국제문제애널리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