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달장군의 전설이 서려있는 아차산(287m), 용마산(348m)
산행일시 / 2009, 03, 08. 달랑 혼자서.
산행코스 / 아차산 2번출구-아차산입구-팔각정-해맞이광장-삼거리헬기장-용마산-아차산성-광장역
다음 주에 다우산방 시산제를 아차산에서 지내기로 하여 오늘 혼자서 시산제 장소를 알아보려고 산행을 하였다. 전철 5호선 아차산역에서 내려 2번 출구를 나와서 등산객을 따라 올라갔다. 가면서 아차산 입구까지 마을버스가 다니는지 문의를 하였드니 거리가 가까워 없는 것 같다고 하였다. 아차산역에서 아차산 등산로 입구까지는 약 2km 정도 되고, 약 15분이면 걸어서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이다. 등산객들과 어울려 올라가다 보면 입구에 이른다. 입구에서 산행 안내판을 살펴보고 아차산성으로 오르는 능선길과 팔각정으로 오르는 계곡길이 있어 계곡길로 울라가는데, 오늘은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아차산 산행인파가 무척이나 많다는 것에 의아해 하면서 올라가다가 좌측으로 암벽쪽으로 오르며 시산제 장소를 살펴보았다.
한 곳에 오늘 시산제 현수막을 걸어놓고 시산제를 준비하는 곳을 살펴보니 다음주에 우리도 저곳에서 시산제를 지내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암벽길을 올라갔다. 올라가면서 보니 등산로가 연결되어있고, 길마다 등산객들이 오르고 있었다. 특히 이곳에는 등산배낭을 매지않고 가족과 함께 가볍게 산책을 나온 사람들도 의외로 많았다. 그 만큼 산이 높지않고 산 길이 좋아서 산책코스로도 무난한 아차산이었다. 산 길은 대개 넓었으나 곳곳에 좁은 길도 있어서 좁은 길을 지나갈 때는 지체가 되는 곳이 많았다. 아차산 산행을 시작할 때가 11시가 다 되어 올라와서 그런지 올라가는 사람도 많았지만 정상을 다녀 하산하는 등산객들도 많아서 좁은 길에서는 기다렸다가 진행을 하곤 하였다.
아차산은 백두대간의 분수령에서 갈라진 한북정맥의 산줄기 가운데 하나가 한강에서 끝나는 마지막 봉우리의 하나이다. 이 산줄기는 양주군 광릉의 진산인 주엽산에서 남하하여 천보산, 수락산, 불암산을 이루고, 그 주맥이 검암산(구릉산)에서 망우리고개를 넘어 망우산· 용마봉· 아차산에 이르며, 아차산성이 있는 봉우리를 정점으로 한강으로 빠져들어 간다. 이 산줄기는 동쪽으로 왕숙천, 서쪽으로 중랑천(한천)을 나누며 한강에서 만나게 하고 있다. 즉, 아차산 일대의 산지는 한북정맥 주맥에서 양주에 이르러 남하한 줄기 끝에 위치한다. 서울 산악인들이 즐겨타는 '불수사도북'을 이제 아차산에서 시작하여 용마산, 망우산, 구릉산(검암산)을 이어서 산행하는 '아용망구'에서 이어가는 '불수사도북'을 종주하는 산악팀들이 있다.
아차산 해맞이광장에 올라서면 서울의 한강이 시원하게 내려다 보인다. 검단산과 예봉산이 가까이 있고, 멀리 천마산의 뾰죽한 정상이 손짖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강을 가장 까까이서 조망할 수 있는 아차산은 고도가 287m로 높지않고 산길이 흙 길 이어서 산책로처럼 편안하게 산행을 즐길수 있어 좋다. 바위가 없지 않으나 거의가 마당바위처럼 넓고 평평하여 바위를 오르는 수고로움은 별로 느끼지 않고 산행할 수 있다. 광진구청에서 산행입구에서 부터 산행안내와 길을 보수하여 산행하기에 편하게 만들어 놓았다. 산을 오르면 니끼다소나무가 길 양 옆에 울창하게 숲을 이루고 있으며 동부의 서울이 한 눈에 내려다 보여서 즐거운 마음으로 편하게 산행을 할 수 있어 산행하는 등산객이 많아 곳곳에서 지체를 하면서 진행하였다.
아차산에는 아차산성과 온달장군의 전설이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렇게 낮은 산에 산성이 있었다는 사실은 그 만큼 지리적으로 요충지였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서울에 남산과 인왕산, 북악산, 낙산을 잇는 서울의 '내사산성'과 북쪽에는 북한산의 '북한산성'이 있고, 동쪽에는 아차산에 아차산성이 있으며, 남쪽에 있는 남한산에 남한산성이 있으며, 서쪽에 있는 행주산에 행주산성이 있다는 사실은 서울이 옛날부터 수도로서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산행을 하다보면 그 산에는 우리가 미처 몰랐던 우리 역사의 중요한 문화유적과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는 것을 알게되므로 단순히 산행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문화유적을 확인해 보고 선인들의 삶의 의미를 함께 느끼며 감동을 받는 것도 산행을 더 즐겁게 하는 모티브가 되어준다.
아차산의 정상은 어디인지 정상석이 없었다. 아차산에 올라서면 저 만큼 용마산의 정상이 보인다. 아차산은 높지도 않지만 거리도 짧은 편이라 보통 용마산까지 산행을 한다. 용마산을 다녀 오다보면 삼거리 헬기장이 있는데, 여기서 망우산으로 산행을 연장해서 망우리까지 산행을 하면 하루코스가 충분하다. 길이 좋아 산행은 힘이 들지않는다. 망우산에는 공동묘지가 많은데, 유명한 정치인, 문화인, 예술인의 묘역이 곳곳에 산재해 있어 한 번씩 들려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기도 하다. 용마산을 향해 조금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야 한다. 용마산으로 접어 들면 조금 암벽길이 노출되기도 한다. 용마산이 아차산보다는 곳곳에 만나는 암벽 때문에 조금 더 악산처럼 느껴진다. 중간쯤에 헬기장을 한 번 더 만나게 된다.
암벽길을 타고 올라가면 용마산 정상에 올라서면 삼각대가 탑 모양으로 서 있다. 여기서는 중량천의 양편으로 아파트가 솟아있다. 망우산 능선이 이어지는 곳을 따라 그 끝에 불암산과 수락산이 조망되며, 도봉산과 북한산도 한 눈에 들어온다. 서울의 동쪽에 자리잡은 용마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서울의 조망권도 새롭다. 강남쪽이 더 가깝게 느껴지는 곳이기도 하다. 전철 5호선 종점 상일동에서 시작하는 일자산도 길게 뻗어있어 한 번 쯤 산행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이어서 대모산과 구룡산을 산행하고 청계산을 거처 관악산까지 이어 산행을 하는 것도 한번 쯤 시도해 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한 쪽에 자리를 잡고 누룽지에 더운물을 붓고 기다렸다가 간단하게 점심식사를 하고 다시 아차산으로 하산을 하였다.
하산코스는 아차산성길로 내려갔다. 아차산성은 오랜 세월에 그 흔적이 곳곳에 조금씩 남아있어 그 둘레에 철책을 둘러쳐 놓았다. 그 철책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한 곳에 석축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이것이 아차산성이 있었던 증거로구나 한다. 이곳에는 소나무 숲이 울창하고 아름답기도 하다. 거의 내려오니 야외무대에서 공연을 하는 음악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정답게 들려 그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통키타와 친구들'이 연주하는 작은 음악회는 등산객의 심신의 피로를 풀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한참을 공연모습을 보다가 내려왔다. 길 옆에는 맥문동이 그 추운 겨울에도 굳굳하게 푸른잎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으며, 양지바른 곳에는 파란 난초잎이 이곳 저곳에서 힘차게 올라오고 있는 모습에서 봄을 느낄수 있었다.
아차산성(사적 제234 호)
"아차산성(阿且山城, 峨嵯山城)은 광진구 광장동 산 33번지와 산 5-11번지 일대에 걸쳐 있으며, 1973년 사적 제234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는 이 아차산성은 일명 아차성 또는 아차산성, 장한성, 광장성이라고도 불린다. 이곳은 삼국시대의 매우 중요한 요새였다.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390년에 한강 남쪽에 자리한 백제의 도읍을 함락시킨 이래 신라 무열왕이 675년에 한반도를 통일할 때까지 260여년 동안 이곳 장한성과 강 건너 풍납성을 중심으로 한 넓은 산과 들은 신라, 고구려, 백제 세 나라가 서로 확보하려고 싸움을 벌이던 무대였다. 평면상 성곽의 전체 둘레는 1,046m이고 가장 높은 곳은 장대지가 있는 산성의 서북단으로 해발 203.4m이고, 가장 낮은 곳은 성의 남단으로 해발 122m이며, 성 내부 면적은 64,885㎡이다."
"온달장군의 전설"
"서울과 구리에 걸쳐 있는 아차산은 해발 3백m 밖에 되지 않은 야트막한 산이지만, 삼국시대의 전략요충지로 특히 온달장군의 전설이 전해져 온다. 학문적 고증과는 상관없이 이 지역 주민들은 온달장군이 아차산에서 전사했다고 믿고 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아차산에는 '온달샘'이라 불리는 약수터와 온달이 가지고 놀았다는 전설이 서린 지름 3m의 거대한 공기 돌이 있다. 대성암 뒤에는 의상대사가 수련을 했던 곳으로 알려진 천연 암굴이 있어 눈길을 끈다. 이밖에 석곽분, 다비터, 봉수대, 강신샘 등이 저마다 사연을 가득 담고 있는 곳이다. 고구려가 전쟁에 대비해 만든 소규모 요새지인 보루성도 아차산 정상주요부분에 산재해 있다.
온달장군은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로 영양왕 때 고구려가 잃어버린 한강 유역을 회복하기 위해 신라와 싸우다 전사하였다. 온달은 어린 시절에는 집안이 몹시 가난해 눈 먼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거리를 다니며 걸식하였다. 그는 용모가 파리하고 우스꽝스러워 사람들로부터 '바보 온달'이라고 불리었다. 그런데 당시 고구려 평원왕(평강왕)의 공주가 어린 시절 잘 울어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던 왕의 놀림을 진실로 믿고 온달과의 결합을 고집하다 쫓겨났다. 이에 온달은 평강왕의 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이면서 가세가 펴지게 되고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고구려에는 매년 3월 3일 군신(君臣)과 5부의 병사들이 사냥한 노획물로 하늘과 산천에 제사하는 국가적 대제전이 있었다. 온달은 여기에 공주가 기른 말을 타고 참여해 뛰어난 사냥 솜씨를 발휘하여 왕의 인정을 받았다.
그 뒤 온달은 북주(北周)가 요동으로 침입해 오자 고구려군의 선봉으로 이를 격퇴하는 큰 공을 세워 비로소 국왕의 사위임을 공인받고 대형(大兄)이라는 관등을 받아 고구려 지배세력에 편입되었다. 590년 영양왕이 즉위하자,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 탈환을 위한 군사 출정에 자원해서 참전하였다. ≪삼국사기≫에 보면 온달이 떠날 때 "계립현과 죽령 이서의 땅을 우리에게 귀속하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 맹세하고 나가 신라 군사들과 아단성(阿旦城, 아차산성) 아래에서 싸우다 화살에 맞아 넘어져 죽었다. 이때 죽은 시신을 모신 영구가 움직이지 않으니 평강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면서 "죽고 사는 것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이제 돌아갑시다." 하자 관을 들어 옮겨 장례지낼 수 있게 되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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