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이야기

-* 서울의 산 [26] *-

paxlee 2009. 5. 6. 22:15

                 7. 관악산의 사적과 문화재(4)

 

                     6. 사적과 문화재

1)호암산성(虎巖山城)

호암산성은 금천구 시흥2동 산 83-1번지 일대에 위치해 있다. 이곳의 산성터와 한우물이라는 연못 등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다가, 서울대 박물관에 의해 1989년 10월과 1990년 3월의 두 차례 발굴조사작업이 완료된 후 1991년 2월 26일자로 사적 제343호로 변경 지정되었다.

 

호암산성 유적은 해발 347m의 조그만 봉우리를 최고봉으로 하고 있으며, 정상의 성 내부는 비교적 평탄하다. 이 일대는 시민들에게 주로 관악산으로 알려져 있는데 유적의 동쪽으로 직선거리 약 2km 지점에 관악산 정상인 연주대가 위치하고, 동남방 1km 지점에 삼성산 정상이 위치하고 있다.

 

산성유적이 있는 산봉은 삼성산의 지봉으로 호암산 또는 금지산으로 불리는데, 실제 유적 동북방에 연접하여 호랑이가 엎드린 모양을 하고 있어 마을에서는 이를 '범뫼'라고 부른다. 그리고 산성유적의 동북은 관악산과 삼성산의 험준한 봉우리들로 막혀 있으며, 서북·서남·서쪽은 안양천을 끼고 발달한 넓은 평지를 이룬다.

 

또 산성지 정상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멀리 소래·군자 일대의 해안선이 보이며 날씨가 맑으면 포구의 배가 보일 정도로 가깝게 느껴진다. 그리고 산성지 중앙부에서 북쪽으로 한강을 건너 용산과 남산 그리고 북한산까지 조망된다. 따라서 산성의 입지조건으로 볼 때 호암산성은 안양·금천 일대의 평야를 관할하는 요새지이다. 

 

서쪽의 해안과 북쪽에서 침입하는 적에 대한 공격과 방비를 위해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호암산성의 평면형태는 남북으로 길쭉한 마름모꼴인데 성벽의 총연장은 약 1.25km이고 성벽은 표고 325m의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테뫼식 산성이다. 현재 산성지 내부에서 확인된 유구는 우물지 2개소와 건물지 4개소이다.

 

호암산성은 출토된 유물과 유적, 지리적 입지조건을 바탕으로 문헌기록과 비교 검토 결과, 그 축성시기는 문무왕 12년(672)경으로 보고 있다. 신라가 나당전쟁시 한강을 넘어 수원지역으로 내려가는 육로와 남양만으로 침입하는 해로를 가장 효과적으로 방어 공격하기 위해 세워진 요새지였던 것이다.

 

한우물 인근에는 돌해태가 있다. 구전에 의하면 태조 이성계는 한양에 도읍을 정하면서 풍수설의 일환으로 우물물과 함께 방화의 상징인 해태를 세움으로 해서 경복궁의 화기를 막게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개축 때 쌓은 호안석(護岸石)에서 ‘석구지(石狗池)’라는 새김글이 발견됨으로써 지금까지 해태로 불렸던 석조물은 돌개임이 드러났다.

2) 백제요지(百濟窯址)

관악구 남현동(1980년 4월 1일 이전은 사당동 지역) 538-1번지의 관악산 줄기의 한 야산 동쪽 경사면에 위치한 백제요지(가마터)는 1976년 사적 제247호로 지정되었다. 거의 파괴된 형태로 현재 발굴되지 않은 상태로 보전되고 있다.

 

밭으로 사용되던 약 200평의 이곳에는 흑토기가 깔려 있었고, 격자문(格子文)과 자리무늬(繩蓆文)의 토기호 파편이 산재되어 있었다. 이 토기편들은 백제 중기∼후기에 속하는 것으로, 이곳이 한강변에 자리잡은 백제시대의 유일한 가마터였음을 알 수 있었다.

3) 낙성대(落星垈)

관악산 북쪽 기슭 관악구 봉천7동 산 48번지에 위치한 낙성대는 고려시대 명재상이었던 강감찬이 태어난 곳으로, 성역화하고 공원으로 조성하여 시민에게 개방하고 있다. 그런데 강감찬의 본래 출생지는 지금 공원터의 동북쪽 약 100m 정도에 위치한 봉천동 218번지 14호와 19호 지역이다.

 

그가 출생할 때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고 하여 이 생가터를 낙성대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1973년 당시 박정희대통령이 강감찬 생가 일대를 성역화하여 길이 보전하라는 지시에 따라, 서울시에서 이곳 일대 약 1만평을 물색하여 이듬해 6월 10일에 준공하여 공원으로 지정하였다.

 

공원의 총 면적은 9,500평이고 성역화 지역은 3,500평이다. 공원 동쪽에 사당을 지어 ‘안국사(安國祠)’라 하고 영정을 모셨으며, 정면에는 외삼문인 안국문과 내삼문을 세웠고, 문안에 낙성대 3층석탑을 옮겨와 안치하였다. 특히 조경시설에 역점을 두어 공원 경내에 5만그루의 나무를 식재하고, 공원 입구에 큰 연못을 파서 구름다리를 설치하였다. 

 

성역화 지역 내에도 낙성교를 두었다. 따라서 광장과 놀이마당 등 휴식처가 마련되고, 관악산 기슭이라는 지리적 위치의 이점과 조화되어 사시사철 찾는 사람이 많아 서울 남부지역의 명소가 되고 있다. 낙성대 3층석탑(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호)은 봉천동 218번지의 본래의 낙성대터에 있던 것을 1964년에 보수하여 1973년에 현재의 낙성대를 정화하고 옮긴 것이다.

 

원위치에는 높이 2m의 유허비(遺虛碑)를 세워놓고,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호로 지정하였다. 관악구에서는 1988년 이후 9·10월이면 ‘낙성대 인헌제’라 이름한 제례의식과 민속놀이 등 문화행사를 개최한다. 이 행사는 강감찬 장군의 위업을 기리며, 주민화합과 향토애를 고취시키기 위한 축제이다.

4) 시흥향교(始興鄕校)

시흥향교는 관악산 동쪽 기슭 과천 들머리의 자하동문 초입에 위치해 있다. 태조 7년(1398)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는데, 본래 과천 동북 2리에 있었고, 명칭은 과천향교였다. 이후 숙종 16년(1690)에 관내에 과거에 급제한 유생들이 없는 것은 향교 터가 나쁘기 때문이라는 의논이 있자, 현감 황이명이 현재의 위치인 서쪽 2리로 옮겼다고 한다.

 

1941년 중수했으며, 1944년 시흥 관내의 3개 향교(안산·시흥·과천)를 과천향교로 통합하였다. 1959년 시흥향교로 개칭하였고 1975년에 경기도 지방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었다. 1983년에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호로 지정받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흥살문·외삼문·명륜당·내삼문·대성전이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식으로 배치되어 있다.

5) 온온사(穩穩舍)

온온사는 관악산 동쪽 기슭에 위치한 옛 과천현의 관아에 부속된 객사의 본당 건물이다. 지방을 여행하는 관리의 숙소 역할과 함께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절을 올리는 기능도 갖고 있었다. 객사가 축조된 것은 인조 27년(1649)으로 동·서의 두채 건물이 있었다.

 

온온사라는 명칭을 갖게 된 것은 정조 14년(1790) 1차 화성 거둥 때로 과천의 객사에서 머물며 주위 경치가 좋고 쉬어 가기가 평온하다고 하여 ‘穩穩舍’란 현판을 내렸다고 한다. 1982년에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제100호로 지정되었다. 현재의 온온사는 1986년에 완전히 해체 복원하였는데 전남 나주에 있는 객사구조를 따랐다고 한다. 또 경내에는 민치록·김병익 등 주로 조선후기 과천현감들의 선정비 17기가 서 있다.

6) 봉천동 마애미륵불

관악산 북쪽 중턱의 상봉약수터에 있는 서쪽으로 향하여 우뚝 솟은 바위에 조선시대의 불상으로는 보기 드문 걸작품인 마애미륵불이 새겨져 있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9호로, 전체높이는 153cm이며 재료는 화강석이다.


불상의 오른쪽 두광 높이에 ‘彌勒尊佛’(미륵존불) 4자가 크게 새겨져 있고, 그 옆에 ‘崇禎三年庚午四月日’(숭정3년경오4월일) 9자와, 그 밑 연꽃자리 가까이에 ‘大施主 朴山會兩主’(대시주 박산회양주)라는 글자가 3자와 5자의 2줄로 새겨져 있다. 이 명문이 있어서 이 불상이 미륵보살이며, 인조 8년(1630)에 이룩된 것을 알 수 있다.

7) 삼성산 천주교성지

관악구 신림10동 산 57-14 장군봉 북쪽 기슭에 위치한 삼성산 성지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최초의 서양인 선교사 앵베르 주교와 모방·샤스땅 신부의 유해가 모셔진 곳이다. 이들 세 성인은 1839년 기해교난(己亥敎難) 때 새남터에서 효수형으로 처형된 후 4년동안 노고산에 묻혔다가 1843년 삼성산으로 이장된 후 1901년까지 약 60년동안 이곳에 묻혀있었다.

 

다시 1901년 11월에는 명동 주교좌 성당에 유해가 안치되었다. 그후 1970년 천주교회측에 의해 이곳이 성인들의 묘지였음이 확인되었고, 1989년 9월 10일 이들의 유해를 이곳에 다시 옮겨 모셨다. 바로 옆에 질 좋은 약수가 항시 넘치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곳이다.

8) 사찰
가) 삼막사(三幕寺)

삼막사는 연주암·염불사와 함께 이른바 관악산 3대 사찰로 꼽히고 있으며, 또한 조선시대에 서울 근교 4대 명찰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서울 남쪽 지역에서 가장 이름난 수찰(首刹)이기도 하였다. 삼막사는 신라 문무왕 17년(677)에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신라의 원효·의상 두 고승과 윤필거사(潤筆居士, 또는 尹弼이라고도 함) 등 세 분이 이 곳에 띠집을 엮어 수행처를 마련한 것이 그 시초라는 것이다. 이는 1771년 설암이 작성한 『삼성산삼막사사적』에 기록되어 있다.


한편, 『범우고』의 금천조에는 고려말에 지공·나옹·무학이 삼막사를 창건하였으며, 이들의 상이 사찰에 봉안되어 있었다고 되어 있다. 여하튼 이 지역 일대의 다른 사찰에서도 원효·의상·윤필거사, 또는 지공·나옹·무학 등과 얽힌 설화가 널리 전승되고 있다는 사실은 삼성산이라는 역사지리적 배경이 관계된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삼막사는 창건 후 신라말에 도선국사가 잡초만 무성하던 빈 터에 사찰을 중건하고 관음사라 이름하였다가, 후에 도선국사의 문도들이 삼막사라고 불렀다. 고려 충목왕 4년(1348)에 나옹선사가 이곳으로 거처를 옮겨 머물렀다. 충정왕 1년(1349)에는 중국에 있던 지공스님이 제자인 나옹을 만나기 위해 이곳에 찾아온 이후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선풍(禪風)이 크게 일어났다.

 

조선 태조 때 나옹의 제자인 무학대사가 동서남북의 각 방향에서 서울을 외호하는 4개 사찰을 선정할 때 삼막사는 남쪽에 해당하는 사찰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사찰이 거의 불에 탔으나 대웅전만 소실을 면하였다. 그후 중건·중수가 계속되었으나, 1990년에 화재가 발생하여 대웅전이 전소되고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것으로 평가되던 범종을 비롯하여 불상·불화 등도 모두 소실되었으며, 이후 계속 중창불사를 일으켜 규모를 갖추어 가고 있다.


삼막사 경내에서 서북쪽으로 약 700m 거리에 칠성전이 세워져 있으며, 칠성전의 내부에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4호인 마애삼존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 삼존불은 1763년이라는 조성 연대가 뚜렷하여 조선 후기의 불상 및 조각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기도 하다. 또 칠성전 서북편에는 경기도 민속자료 제3호로 지정된 남근석과 여근석이 있어 출산과 관련된 민간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나) 연주암(戀主庵)

연주암은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 85-1번지인 관악산 연주봉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관악산을 즐겨 찾는 이들에게는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찰이며, 해발 629m의 기암절벽 정상에 위치한 연주대와 함께 관악산의 명소로 손꼽힌다.


연주암은 『연주암중건기』 등의 자료에 의하면 의상대사가 관악산에 의상대를 세우고 수행하였으며, 677년에 그 아래에 관악사를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대웅전 앞에 있는 3층석탑이 고려 후기 양식을 나타내고 있음을 볼 때, 창건 연도가 꽤 오래된 고찰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연주암이라는 사찰 이름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유래가 전해지고 있다. 그 첫 번째는 고려말의 충신이었던 강득룡·서견·남을진 등이 고려가 멸망하자 관악산 의상대에 숨어 살았으며, 여기서 멀리 개성를 바라보며 고려왕조를 그리워했으므로, 연주대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조선 태종의 맏아들인 양녕대군과 둘째 효령대군이 태종이 셋째인 충녕대군, 즉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자 유랑길에 나섰다가, 관악사를 찾아와 수행을 하면서 40칸 규모의 건물을 새로 지어 궁궐이 잘 보이는 현재의 위치로 거처를 옮겼다는 것이다. 이후에 사람들이 두 대군의 심정을 기리는 뜻에서 의상대를 연주대로, 관악사를 연주암으로 각각 부르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연주암에는 현재 대웅전과 삼성각, 그리고 종각 등의 전각과 2동의 요사가 세워져 있는데, 대부분 근대 이후에 들어와 세워진 것이다. 절벽 정상에 자리하고 있는 연주대는 경기도 지방기념물 제20호로 서울 근교에서 보기드문 절경을 자랑하는 곳이다. 처음 이름은 의상대사가 이 곳에서 수행하였다고 하여 의상대라고 불리었다가, 이후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조선시대에 연주대로 이름이 바뀌어진 듯 하다.

다) 염불사(念佛寺)

염불사는 삼성산 남쪽 중턱 수십폭의 돌병풍을 둘러친 듯 웅장하고 가파른 암벽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관악산의 명소 가운데 하나이다. 염불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전한다. 첫째는 고려 태조가 926년에 후백제를 공격하러 가기 위해 삼성산 밑을 지나던 중, 산모퉁이에 오색구름이 영롱하게 서려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사람을 보내 그 연유를 알아보았더니 그곳에 능정대사가 앉아 좌선삼매에 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태조는 대사의 법력에 몹시 탄복하여 그곳에 사찰을 세우도록 명하였으니, 절 이름은 안흥사로 이 절이 염불사의 전신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원효·의상·윤필 등의 세 성인이 창건하였다는 설로, 세 분이 염불을 하던 정토였기 때문에 염불암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후 염불사는 1407년 조선 태종이 풍수지리상 관악의 지맥을 누르기 위해 관악산 내의 사찰을 중건할 때 중창되었다. 그후 여러 전각이 중건되었고 1956년에 이르러 6·25전쟁을 겪으면서 퇴락했던 사찰을 중수하였다. 현재의 염불사는 모두 1910년 이후에 지어진 건물들이다.

라) 안양사(安養寺)

안양사는 경기도 안양시 석수동 산 27번지 삼성산 서남 기슭 안양유원지 북쪽에 자리하고 있다. 안양이라는 지명이 고려시대에 이 안양사가 창건되면서부터 생겨난 것이라는 점에서, 안양지역에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사찰이다. 안양사의 창건에 관해서는 『동문선』에 실려 있는 이숭인의 ?금주안양사탑중신기?에 상세한 유래가 언급되어 있다. 그 내용은 앞의 염불사와 비슷하다.


이후 중건 사실 등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언제인가 폐사가 되어 절터만 남아 있던 곳에 1968년에 대웅전을 짓고 차례로 건물을 세웠다. 경내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3호로 지정된 거북 형상의 비석 받침돌인 안양사귀부가 있다.

마) 망월암(望月庵)

망월암은 경기도 안양시 석수동 삼성산 정상의 바로 남쪽에 있다. 태종 7년(1407)에 신미(信眉)가 태종의 명으로 삼성산 남쪽에 5층석탑을 세우고 절을 창건하여 망일사(望日寺)라고 하였다 한다. 그러나 신미의 활동연대로 보아 이 절은 세조 7년(1461)에 창건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정조 3년(1779)에 동호가 중창하였고, 1934년에는 법당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요 유물로는 창건 당시 건립한 석가탑이 있다.

바) 관음사(觀音寺)

관음사는 관악구 남현동 519-3번지 관악산 북동 기슭, 남태령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예로부터 서울 근교 사찰 가운데 영험있는 관음 기도도량 중의 하나였다. 관음사는 1943년 이후에 쓰여진 『봉은사본말사지(奉恩寺本末寺誌)』에 의하면 신라 진성여왕 9년(895) 도선대사가 세운 비보사찰(裨補寺刹) 중의 하나라고 전한다.

 

조선 초기에 쓰여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변계량이 관음사의 절경을 읊은 시가 수록되어 있어, 이 무렵까지 관음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영조 때 쓰여진 『여지도서』에도 관음사가 보인다. 예로부터 관음사 아래에 있는 승방벌이라는 마을과 그 앞에 승방교가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관음사는 작은 규모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철종 14년(1863) 8월에 행념이 당시 철종의 장인인 영은부원군 김문근의 시주를 받아 다시 고쳐 지었다. 1975년에 중창을 발원하여 7년여 동안 여러 건물을 차례로 중수하였다. 관음사 입구에는 수령 300여년의 느티나무가 있어 지정보호수로 관리되고 있다.

사) 자운암(紫雲庵·慈雲庵)

자운암은 관악구 신림9동 194-1번지 관악산 북쪽 기슭 서울대 북쪽 산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서쪽에서 관악산 연주봉을 향하여 올라가는 계곡을 자하동(紫霞洞)이라 한다. 신위는 “시내를 따라 백옥같은 언덕으로 가는 길은 익숙하여, 시와 선으로 자운암에서 입정하네"로 시작하는 「자운암」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아) 호압사(虎壓寺)

 

                                          - 호압사 전경 -

 

호압사는 금천구 시흥동 관악산의 한 봉우리인 호암산의 동쪽 산중턱에 위치해 있다. 이 절은 태종 7년(1407)에 태종이 이 절이 있는 삼성산이 호랑이 형국을 하고 있어 과천과 한양에 호랑이로 인한 재난이 많다는 술사의 말을 듣고, 호랑이의 살기를 누르기 위하여 절을 창건하고 호압사라 하였다 한다.


호압사 창건에 대해서는 또 다른 설화가 전해진다. 조선 태조가 경복궁을 건설할 때 호랑이 형상에 가까운 한 괴물이 나타나 궁궐 건설을 방해하였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태조에게 한 노인이 나타나 한강 남쪽 관악산의 한 줄기를 가리켜서 바라보니, 바로 호랑이 형상의 한 산봉우리가 한양을 굽어보고 있었다.

 

그 산봉우리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태조가 그 꼬리 부분에 절을 지은 것이 바로 호압사라는 것이다. 헌종 7년(1841) 4월에 의민이 상궁 남씨와 유씨의 시주를 얻어 법당을 중창하였고, 1935년에 주지 만월이 약사전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 약수암(藥水庵)

약수암은 관악구 신림10동 318번지의 관악산 북쪽 기슭에 있다. 약수암은 어느 때인지 모르나 김처사라는 사람이 이곳에 초가를 짓고 수도하던 것이 절의 시작이라 한다. 그후 고종 17년(1880)에 명성황후가 법당을 건립하여 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절은 1923년경 화재로 초가집은 전부 타버리고 법당은 절반이나 타 없어진 것을 다시 고쳐 지었다. 현재는 승가대학 부속사찰로 되어 있는 비구니 도량이다.

차) 중초사지(中初寺址)

중초사터는 삼성산 서남 기슭 경기도 안양시 석수동 212번지에 있는 통일신라 때의 절터이다. 현재는 절터가 안양유원지 입구 유유산업주식회사의 공장 구내로 되어 있으나, 이전에는 포도밭이었는데 많은 기와편이 발견되어 절터였음을 알 수 있었다.

 

현재 보물 제4호 당간지주와 보물 제5호 3층석탑, 그리고 마애종이 남아 있어 절의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중초사지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서쪽 지주의 바깥면에 글귀가 새겨져 있어 이를 통해 당간지주의 확실한 조성연대와 이곳이 중초사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자료 / '서울시사편찬위원회' 간행 '서울의 산'에서 / 관악산 (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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