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이야기

-* 서울의 산 [30] *-

paxlee 2009. 5. 14. 05:41

 

                       10. 수락산 (1)

 

                              - 수락산 산행 안내도 -

 

1) 수락산 개요

 

                              - 수락산의 산세와 암릉 -

                             - 수락산 정상봉 -

                                - 수락산 주능선 -

 

         

                             - 깔닥능선 암릉 오름 길 -

                    - 수락산 깔닥능선 암릉 오름길에 나무계단이 설치 -

                                 - 수락산 배낭바위 -

 

수락산은 서울의 북쪽 끝에 의정부시와 남양주군을 경계로 하고 있으며 남쪽으로 불암산이 바로 연결되어 있어 종주가 가능하다.산 전체가 화강암과 모래로 이루어져 있고 기암 괴석과 샘, 폭포가 많은 반면 전에는 나무는 매우 적었는데, 요즈음엔 나무가 많이 우거져 있다. 산의 분위기가 다소 삭막하기는 하나 바위의 경치가 뛰어나고 곳곳에 맑은 물이 흘러내린다. 수락 8경이라 불리는 금류폭포, 은류폭포, 옥류폭포와 신라 때의 흥국사, 조선 때의 내원암이 있다. 그리고 동서 산록의 계곡에는 수락산 유원지와 벽운동 유원지가 있다.

 

한북정맥을 형성한 산줄기는 가평 운악산(雲岳山)과 양주 주엽산(注葉山)에서 축석령(祝石嶺)을 넘어 한 줄기는 의정부 북서쪽을 휘몰아 불곡산과 홍복산·도봉산으로 이어지고, 또 한줄기는 앞의 산줄기와 마주하여 광릉 뒤를 감싸고 돌아 서원천과 중랑천을 사이에 두고 그 동쪽으로 주엽산에서 남하하여 산줄기를 형성하고 있다. 이를 따라 내려오면 천보산(天寶山), 송산(松山), 외송산(外松山)에 이어 깃대봉과 숫돌고개를 거쳐 수락산이 솟아 있으며, 그 여맥은 불암산과 검암산(구릉산)·아차산으로 이어진다.

 

수락산은 남쪽으로 불암산과 연결되어 서울 노원구 상계동과 경기도 의정부시·남양주시 별내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수락산 능선상에 있는 암봉들은 서울을 향해서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는 형국이다. 이에 조선 태조 이성계는 왕조 개창 후 수락산을 서울의 수호산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수락산은 내원암 일대 계곡에 바위가 벽을 둘러치고 있어 물이 굴러 떨어지므로 수락(水落)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설과 산봉우리 형상이 마치 목이 떨어져나간 모습(首落) 같다 하여 이름하였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한자 표기는 달라도 수락산 암봉들이 모두 서울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는 형태을 하고 있다. 

 

골짜기에 흐르는 물이 맑아 금류(金流)·은류(銀流)·옥류(玉流)라 하는 폭포를 이루어 떨어지는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산의 자태에서 그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수락산은 사냥꾼 아버지가 호랑이가 물고 간 아들을 찾아 ‘수락’이라는 이름을 외쳐부르다 바위 아래로 떨어져 죽은 뒤, 비오는 날이면 ‘수락아! 수락아!' 하는 소리가 들리므로 산이름을 수락이라 하였다는 전설도 전해오고 있다.


이성계가 수락산을 가리켜 한양 수호산이라고 말한 이래 수락산은 지사들이 은둔하고 풍류를 즐기는 곳이 되었다. 명당 기슭에는 왕족의 묘역이 마련되었으며 왕실의 지원을 받는 사찰들이 번창하였다. 따라서 많은 유적과 경승이 있어 전해 내려오는 일화가 많다. 일찍이 삼각산 중흥사에서 공부를 하던 매월당 김시습이 1455년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쫓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듣고 공부하던 책을 모두 불살라 버린 후 정처없는 유랑의 길을 떠나 첫번째로 숨어들었던 곳이 수락산 서쪽의 석림사 계곡이었다.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은 김시습의 뜻을 따르며 그의 명복을 위하여 청절사(淸節寺)를 짓고 이곳에 주거를 마련하였다. 여기서 그는 실학 연구와 후학을 가르치며 일생을 보내니 너그럽고 후덕한 장자(長者)의 모습을 남겨 지명까지 장자동·장재울이라 전해지고 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박세당의 후손들이 그가 살던 곳을 지켰고, 근래에는 둘째 아들 박태보의 사당인 노강서원이 동작구 노량진 사육신묘역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수락산 남서쪽에는 벽운동천(碧雲洞天)의 절경을 이루고 있다.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홍봉한이 이곳에 우우당(友于堂)을 짓고 당대의 석학들과 더불어 정치와 충효를 논하였다. 그리고 수락산의 남쪽 기슭에는 선조의 생부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묘역이 자리잡고 있어 일명 덕릉(德陵)이라 불린다. 그 원찰로 흥국사(興國寺)가 있고, 서울 상계동 당고개역에서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덕릉고개라 부르고 있다.

 

수락산 동쪽에 위치한 내원암은 정조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크게 번성하였으며, 왕세자인 순조의 탄생설화를 간직하고 있다. 절의 건물은 근래에 새로 지은 것이지만 고려시대 이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미륵입상이 있어 고찰로서의 연원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내원암에 오르는 계곡은 옥류동(玉流洞)·금류동(金流洞)·은선동(隱仙洞)의 폭포와 연못을 만들어 수락팔경을 읊조리게 한다.

 

또 수락산 남쪽 기슭의 용굴암은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 민씨가 여주 지방으로 피신하면서 이곳에 들러 무사하기를 빌었던 곳이기도 하다. 이렇게 수락산은 오랜 연원을 가지며 많은 유적을 간직하고 있는데, 6·25 전쟁 때는 서울 방어선으로 수락산과 불암산전선이 이루어짐으로써 많은 전재를 입었고, 불암산유격대로 불리는 육군사관생도들이 내원암을 중심으로 유격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최근에는 서울의 대도시화가 진행되어 수락산 남서쪽 일대가 대규모 아파트 주택단지로 개발되었다. 1988년 노원구가 설치되고 지하철이 개통되어 주거지로 각광을 받으면서 인구가 집중되자 이제 수락산은 이곳 주민들의 뒷동산이 되어 아침운동과 등산 및 휴식공간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한북정맥을 형성한 산줄기는 가평 운악산(雲岳山)과 양주 주엽산(注葉山)에서 축석령(祝石嶺)을 넘어 한 줄기는 의정부 북서쪽을 휘몰아 불곡산과 홍복산·도봉산으로 이어지고, 또 한줄기는 앞의 산줄기와 마주하여 광릉 뒤를 감싸고 돌아 서원천과 중랑천을 사이에 두고 그 동쪽으로 주엽산에서 남하하여 산줄기를 형성하고 있다. 이를 따라 내려오면 천보산(天寶山), 송산(松山), 외송산(外松山)에 이어 깃대봉과 숫돌고개를 거쳐 수락산이 솟아 있으며, 그 여맥은 불암산과 검암산(구릉산)·아차산으로 이어진다.

 

수락산은 동쪽으로 도봉산과 마주고, 쪽으로 순화궁고개를 넘어 국사봉과 마주하며 서울의 북쪽 시계를 이루고 있다. 해발 637m의 수락산은 사암(砂岩)으로 형성되어 빗물을 흘려버리는 바위산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산 전체가 바위벽과 암반으로 이루어져 도처에 기암괴석을 이루고 있어 수목은 울창하지 않으나 산세가 웅장하고 계곡이 깊고 수려하다. 특히 상계동 1240번지 벽운동 유원지계곡과 의정부시 장암동 하촌의 석천동계곡, 남양주시 청학리 사기막의 수락산 유원지계곡은 절경을 이룬다.

 

2 . 명승과 사적

 

1) 수락산유원지와 수락팔경

 

수락산 유원지는 남양주시 별내면 청학리에 위치한 수락산 계곡 일대를 지칭하는 것으로, 도봉산과 함께 서울 근교의 양대 명산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산세가 웅장할 뿐 아니라 깊은 계곡의 수려함이 있어 시냇물 소리가 청아하게 들려온다. 맑은 모습의 산 전체가 석벽과 암반으로 도처에 기암괴석이다. 계곡을 흐르는 물 또한 옥류·금류·은류폭포의 절경을 이루어 예로부터 시인·묵객이 찾던 곳이었다.


산중의 명소로는 오리바위를 돌아 오솔길을 거쳐 212계단의 가파른 돌층계를 오르면 내원암의 비경이 그윽하고 해발 637m를 장식하는 투구·고속·오리봉의 장관과 칠성대·향로봉·미륵봉의 기이한 모습이 눈을 끈다. 계곡의 곳곳에는 울창한 활엽수림으로 이루어져 가을 단풍이 유명하며 유서 깊은 흥국사·석림사 등 많은 사찰과 암자를 산록에 감싸고 있다.


이러한 수락산의 선경 중에 정허거사(연대미상)가 즐겨 불렀다는 ‘수락팔경(水落八景)’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양주라 수락산을 예듣고 이제 오니....     

아름답게 솟은 봉이 구름 속에 장관일세


청학동 찾아들어 옥류폭에 다다르니...... 

거울 같은 맑은 물이 수정 같이 흘러가네


푸른 송림 바위길을 더듬어서 발 옮기니...

백운동에 은류폭이 그림 같이 내려 쏟고


자하동에 돌아들어 금류폭을 바라보니...

녀 내려 목욕할 듯 오색 서기 영롱하구나


미륵봉의 흰 구름은 하늘가에 실려 있고.....

향로봉의 맑은 바람 시원하기 짝이 없네


칠성대 기암괴석 금강산이 무색하고......  

울긋불긋 고운 단풍 그림인 듯 선경인 듯


내원암 풍경소리 저녁연기 물소리네......   

불노정 맑은 약수 감로수가 이 아닌가


선인봉 영락대에 신선 선녀 놀고 가니......

청학 백학 간 곳 없고 구름만이 오고 가네

 

수락산유원지 하면 우선 마당바위(場岩)를 연상케 할만큼 기이하게 생긴 바위가 있다. 마당만큼 커서 마을 이름도 마당바위로 불린다. 예로부터 ‘위에는 100명이 앉을 수 있고, 잡곡을 털 수도 있다’는 말이 전해올 만큼 넓고 크다. 여름철 피서지로 손색이 없다.

 

2) 덕흥대원군 묘역

 

노원구 상계동에서 남양주시 별내면으로 넘어가는 덕릉고개에는 선조의 생부 덕흥대원군의 묘소 일명 덕릉이 자리잡고 있다. 수락산 기슭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 산 5-13에 위치한 묘역은 경기도기념물 제55호로 지정되어 있다. 덕릉에 관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지금도 전해온다.


조선 중종의 일곱번째 아들인 덕흥대원군은 생전에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그의 아들인 하성군이 즉위하여 선조가 되었다. 선조는 아버지 덕흥대원군을 위하여 묘소만이라도 능으로 추존하고 싶어서 신하들에게 의견을 물었으나 신하들이 따르지 않았다. 이에 선조는 정식으로 능으로 승격시키는 것을 단념하고 한 꾀를 내었다.

 

즉 동문 밖의 땔감상인을 불러 명하기를 “가게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나무수레와 숯수레를 불러들여 어디를 지나서 이곳으로 왔느냐고 물어 그 장사꾼이 덕흥대원군 묘소를 지나왔다고 하면 그대로 보내고, 만일 덕흥대원군의 능을 지나왔다고 하면 안으로 불러들여 술과 밥을 후하게 대접하고 그 장사꾼의 나무와 숯을 높은 값으로 사들이라”고 하였다.


이 명을 받은 땔감상인은 그대로 이행하니, 이 소문이 퍼져 오강시상(五江柴商)까지도 동편에 있는 흥인문을 일부러 찾아와서 덕릉 경과를 빙자하였다. 이후 덕흥대원군 묘소는 저절로 덕릉으로 불리게 되었다 한다. 대원군 묘소 아래 마을에는 덕흥사(德興祠)가 있다. 이곳은 대원군과 그의 모친인 창빈 안씨, 그리고 하원군 등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3) 석림사(石林寺)와 박세당 유적

 

 

                                        - 석림사 전경 -

 

수락산 중턱 남쪽 기슭 의정부시 장암동 산 147번지에는 석림사가 있다. 이 절은 신라시대의 옛 절터로 석탑과 축대·주춧돌만이 남아있던 곳에 현종 12년(1671) 석현화상과 치흠이 석림암으로 창건하였다. 그리고 박세당이 김시습의 명복을 빌기 위해 중창하였다. 그후 여러 차례 중수가 있었으며, 6·25전쟁으로 완전히 퇴락한 것을 1956년에 비구니 상인이 복원하였다.

 

석림사 중수나 역사가 있을 때마다 박세당의 후손들이 선조의 유지를 받들어 후원하였다고 한다. 지금 옛 건물로는 산영각·천태각 등이 남아 있고 법당과 부속건물은 근래에 재건한 것이다. 석림사 옆 장암동 197번지에는 박세당의 묘소와 영정각이 있다. 박세당은 조선 숙종 때의 학자로서 정쟁에 혐오를 느껴 관료생활을 포기하고 수락산 기슭에 은둔하여 농사를 지으며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만 힘썼다.

 

그는 실학파로서 농촌생활에 토대를 둔 박물학(博物學)의 학풍을 이룩하였다. 박세당 묘소 동쪽편 장암동 산 146-1에는 계곡 사이의 깨끗한 바윗돌을 주춧돌로 삼아 세워진 6각형의 궤산정이 있다. 이곳은 박세당이 살았던 곳이다. 궤산정이란 이름은 박세당이 이 정자에서 제자들과 학문을 토론할 때 자주 강론하던 ‘아홉길 산을 만드는데 마지막 삼태기의 흙이 모자란다’는 뜻에서 붙여졌다 한다.

 

또 정자 밑 바위에는 ‘西溪幽居’(서계유거/서계가 한적하게 산다), ‘聚勝臺’(취승대/경치 좋은 곳) ‘石泉洞’(석천동/돌과 샘이 어우러진 곳)이라는 박세당의 암각이 뚜렷하다. 또 청풍정이 있던 자리 옆에는 박세당의 처남 남구만이 쓴 ‘水落洞天’(수락동천)이라는 초서 글씨가 암각되어 있다. 또 박세당이 심은 느티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어, 두 그루 소나무와 은행나무 등과 어울려 멋진 풍경을 이루고 있다.

 

4) 노강서원(鷺江書院)

 

                                            - 노강서원 -

 

노강서원은 수락산 남쪽 중턱 의정부시 장암동 146-1에 위치해 있으며, 경기도 기념물 제41호로 지정되어 있다. 노강서원은 숙종 21년(1695) 서울 노량진에 건립한 충신 정려로서 ‘朴泰輔之祠’(박태보지사)라 사액되었다가, 정조 15년(1791)에 노강서원으로 다시 사액되었다. 6·25전쟁 때 훼철되어 1969년 수락산 기슭 옛 김시습의 서원터에 새로 건립되었다. 경내 건물로 박세당의 둘째 아들인 박태보 위패가 모셔진 본전과 동재·서재·정문(旌門)과 관리사 등이 있다.

 

5) 우우당(友于堂)과 벽운동천(碧雲洞天)

 

수락산 입구 노원구 상계동 1241번지의 우우당은 영풍부원군 홍봉한이 영조 37년과 44년 두번씩 영의정을 지냈을 당시의 벽운동 별장 안채의 일부이다. 이곳에는 추사 글씨 ‘友于堂’(우우당) 현판이 걸려 있었으며, 정문 앞 살구나무 근처에는 승마대가 지금도 남아 있다. 홍씨 일문이 한창 위세를 떨칠 때 벽운동별장에는 문인·정객들이 모여들어 탄금대와 벽운루·우우당은 초만원을 이루었다고 한다.

 

홍봉한의 맏딸인 정조의 생모 혜경궁 홍씨도 어린 시절 이곳에서 경치를 감상하며 서정성을 키웠고, 후에 ?한중록?과 같은 문장을 남겼다. 벽운동의 주인 홍봉한이 세상을 떠난 약 100년 뒤에는 이병직의 고조되는 부원군이 벽운동의 명승지를 사들여 5대에 걸쳐 지켜오다가, 1957년 6월에 이르러 덕성학원에서 매입, 덕성여대 생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수락산 계곡 냇가 상계동 1240번지에는 큼직한 바위에 ‘碧雲洞天’(벽운동천)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따라서 수락산 계곡으로 흐르는 개울을 벽운천이라 부르며, 이곳에 있는 마을을 벽운동 또는 백운동이라 부른다. 이것은 계곡에 바위가 허옇게 드러난 수락산의 절경이 골짜기의 계곡과 어우러져 흰 구름이 머무르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우우당의 한쪽에 백운루라는 현판이 있었다고 한다. 또 벽운동천이라 새긴 바위 옆에는 이병직의 호인 국봉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서울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서울의 산 [32] *-  (0) 2009.05.18
-* 서울의 산 [31] *-  (0) 2009.05.14
-* 서울의 산 [29] *-  (0) 2009.05.09
-* 서울의 산 [28] *-  (0) 2009.05.08
-* 서울의 산 [26] *-  (0) 2009.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