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발의 사내가 협곡에 들어서자 산이 고요해진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이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적수를 만난 투구바위가 숨을 고른다. 사내는 차분한 걸음으로 투구 속으로 걸어들어 간다. 호기심과 기대로 가득 찬 눈빛들이 그의 동선을 따른다. 수십 명의 바위꾼들이 금발 사내의 오름짓을 구경하기 위해 모인 것이다.
예사 협곡이 아니다. 능선 자락 은밀한 곳의 섬세하게 갈라진 협곡. 이곳에선 하늘도 바위가 지배한다. 하늘을 막아선 바위 틈새로 비추는 조명, 그것은 햇살이다. 빛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바위 색도 따라 변한다. 그늘과 볕의 조화가 만들어낸 빛깔은 협곡을 기이한 분이기로 몰아넣는다.
- 그러나 아름답지 않다. 자세히 보면 석회암 특유의 구멍이 벽을 온통 뒤덮어 험상궂은 곰보상이다. 게다가 오버행으로 거칠게 치밀어 올라 사람의 기운을 압도하는 힘이 있다. 바위 사이의 공간은 투구 모양이며 그 앞에 사람이 서면 골바람이 불어와 서늘한 혓바닥으로 온몸을 휘감는다. 그로테스크한 인상의 바위 협곡, 사람들은 이곳을 선운산 투구바위라 부른다.
클라이머들에게는 도전의 벽으로 통한다. 대부분 중상급자용 루트이며 파워 파워(5.14b/c)나 오토매틱(5.14a/b) 같은 곳은 아무리 잘난 바위꾼이라 해도 가볍게 떨어뜨려 버리는 최강의 난이도이기 때문이다.
그의 걸음이 멈춘 곳은 ‘호의 기다림’(5.13a). 그는 기다림 없이 바위에 다가선다. 그늘 속에 묻힌 길을 차분히 오른다. 오를수록 오버행의 각이 심해지지만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사뿐사뿐 오른다. 쉽지 않은 루트건만 그의 손과 발이 닿자 바위는 언제 그랬냐는 듯 순둥이가 된다. 긴 팔과 다리로 쭉쭉 그러나 조심스레 오른다. 나비처럼 가벼운 몸짓이다.
마지막 크럭스다. 모두들 이 부분을 기다렸다. 온사이트로 바위에 붙은 사내가 과연 악명 높은 저 크럭스를 어찌 넘어갈지를 보기 위해……. 올라가는 홀드와 방식을 찾아내기 어려운 곳이지만 언제 저곳이 어려운 곳이었나 싶을 정도로 그는 자연스럽게 훅을 걸어 크럭스를 휙 넘어선다. 관중들의 박수가 흘러나온다. 일부는 허무하다는 반응이다. 너무 쉽고 자연스럽게 올라 맥이 빠져서다.
빛나는 금발을 날리며 사내가 땅으로 내려서자 그의 고요한 카리스마가 좌중을 사로잡았다. 그는 세계 최초로 5.15를 등반한 클라이머 크리스 샤마(Chris Sharma)다.
그의 등반 보러 수많은 한국 클라이머들 운집
지난 3월 27일, 이벌브(evolv) 암벽화를 전개하는 (주)메드아웃도어의 초청으로 미국의 프로 록 클라이머 크리스 샤마가 방한했다. 이벌브 클라이밍팀 소속인 그는 자사 브랜드 홍보를 위해 한국을 찾았으며 도착한 다음날 바로 전북 고창 선운산(336m)을 찾았다.
우리나라 나이로 29살인 샤마는 미국 캘리포니아 출생으로 12살 때 록 클라이밍을 시작해 14살 때 볼더링 대회에서 우승했으며 다음해에 고난이도인 5.14c를 등반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후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5.15급의 인간 한계를 넘어서는 난이도를 개척해 왔다. 최근의 등반으로 지난해 9월 캘리포니아 클라크(Clark)마운틴에 점보 러브(Jumbo Love)를 완성한 바 있으며 이는 5.15b 난이도의 거벽으로 80m 높이다.
선운사 계곡을 따라 오르는 샤마의 주변에는 구름 같은 인파가 몰려 있었다. 그의 등반을 보기 위해 온 산악인들이다. 이들의 밀려드는 사인과 사진 요청에도 그는 전혀 불편한 기색 없이 한 명 한 명 성의 있게 응해주었다. 그의 바로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 이가 있었으니, 스페인 여성 프로 록 클라이머 다일라 오헤다(Daila Ojeda)다. 그녀는 5.13급을 등반하는 실력파로 크리스의 애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