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클라이머 크리스 샤마 *-

paxlee 2009. 5. 20. 22:34

 

        [방한 인물] 클라이머 크리스 샤마,

 

       그의 손이 닿자 투구바위도 순둥이가 되었다

세계 최초로 5.15급 등반한 클라이머 크리스 샤마 방한, 시범등반
금발의 사내가 협곡에 들어서자 산이 고요해진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이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적수를 만난 투구바위가 숨을 고른다. 사내는 차분한 걸음으로 투구 속으로 걸어들어 간다. 호기심과 기대로 가득 찬 눈빛들이 그의 동선을 따른다. 수십 명의 바위꾼들이 금발 사내의 오름짓을 구경하기 위해 모인 것이다.

예사 협곡이 아니다. 능선 자락 은밀한 곳의 섬세하게 갈라진 협곡. 이곳에선 하늘도 바위가 지배한다. 하늘을 막아선 바위 틈새로 비추는 조명, 그것은 햇살이다. 빛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바위 색도 따라 변한다. 그늘과 볕의 조화가 만들어낸 빛깔은 협곡을 기이한 분이기로 몰아넣는다.

그러나 아름답지 않다. 자세히 보면 석회암 특유의 구멍이 벽을 온통 뒤덮어 험상궂은 곰보상이다. 게다가 오버행으로 거칠게 치밀어 올라 사람의 기운을 압도하는 힘이 있다. 바위 사이의 공간은 투구 모양이며 그 앞에 사람이 서면 골바람이 불어와 서늘한 혓바닥으로 온몸을 휘감는다. 그로테스크한 인상의 바위 협곡, 사람들은 이곳을 선운산 투구바위라 부른다.

클라이머들에게는 도전의 벽으로 통한다. 대부분 중상급자용 루트이며 파워 파워(5.14b/c)나 오토매틱(5.14a/b) 같은 곳은 아무리 잘난 바위꾼이라 해도 가볍게 떨어뜨려 버리는 최강의 난이도이기 때문이다.

그의 걸음이 멈춘 곳은 ‘호의 기다림’(5.13a). 그는 기다림 없이 바위에 다가선다. 그늘 속에 묻힌 길을 차분히 오른다. 오를수록 오버행의 각이 심해지지만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사뿐사뿐 오른다. 쉽지 않은 루트건만 그의 손과 발이 닿자 바위는 언제 그랬냐는 듯 순둥이가 된다. 긴 팔과 다리로 쭉쭉 그러나 조심스레 오른다. 나비처럼 가벼운 몸짓이다.

마지막 크럭스다. 모두들 이 부분을 기다렸다. 온사이트로 바위에 붙은 사내가 과연 악명 높은 저 크럭스를 어찌 넘어갈지를 보기 위해……. 올라가는 홀드와 방식을 찾아내기 어려운 곳이지만 언제 저곳이 어려운 곳이었나 싶을 정도로 그는 자연스럽게 훅을 걸어 크럭스를 휙 넘어선다. 관중들의 박수가 흘러나온다. 일부는 허무하다는 반응이다. 너무 쉽고 자연스럽게 올라 맥이 빠져서다. 

빛나는 금발을 날리며 사내가 땅으로 내려서자 그의 고요한 카리스마가 좌중을 사로잡았다. 그는 세계 최초로 5.15를 등반한 클라이머 크리스 샤마(Chris Sharma)다.

그의 등반 보러 수많은 한국 클라이머들 운집

지난 3월 27일, 이벌브(evolv) 암벽화를 전개하는 (주)메드아웃도어의 초청으로 미국의 프로 록 클라이머 크리스 샤마가 방한했다. 이벌브 클라이밍팀 소속인 그는 자사 브랜드 홍보를 위해 한국을 찾았으며 도착한 다음날 바로 전북 고창 선운산(336m)을 찾았다.

우리나라 나이로 29살인 샤마는 미국 캘리포니아 출생으로 12살 때 록 클라이밍을 시작해 14살 때 볼더링 대회에서 우승했으며 다음해에 고난이도인 5.14c를 등반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후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5.15급의 인간 한계를 넘어서는 난이도를 개척해 왔다. 최근의 등반으로 지난해 9월 캘리포니아 클라크(Clark)마운틴에 점보 러브(Jumbo Love)를 완성한 바 있으며 이는 5.15b 난이도의 거벽으로 80m 높이다.


선운사 계곡을 따라 오르는 샤마의 주변에는 구름 같은 인파가 몰려 있었다. 그의 등반을 보기 위해 온 산악인들이다. 이들의 밀려드는 사인과 사진 요청에도 그는 전혀 불편한 기색 없이 한 명 한 명 성의 있게 응해주었다. 그의 바로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 이가 있었으니, 스페인 여성 프로 록 클라이머 다일라 오헤다(Daila Ojeda)다. 그녀는 5.13급을 등반하는 실력파로 크리스의 애인이다.
▲ 1. 파워 파워(5.14c)를 온사이트로 도전했으나 실패했다. 2. 주(Zoo 5.12a)를 오르는 크리스 샤마. 3. 5.15급 클라이머의 손.
이들이 닿은 곳은 속살바위와 투구바위. 속살바위 곁을 지나 능선의 투구바위를 본 후 다시 속살바위로 돌아가 등반할 채비를 한다. 투구바위는 협곡이라 바람이 강하고 쌀쌀한 편이어서 아침부터 등반하기는 힘들다고 여긴 모양이다. 성미 급한 이들은 샤마가 언제 ‘파워 파워’나 ‘오토매틱’ 같은 고난도의 루트를 오를지 궁금해 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에게 등반을 강권할 순 없다. 모든 것은 그의 마음에 달려 있다.

선운산에서 그가 처음 잡은 바위는 ‘JCC2(5.11c)’다. 첫 등반인 만큼 조심스럽게 오른다. 5.15급 클라이머의 등반으로 보기에 겸손하게 느껴질 정도다. 서서히 바위의 감촉을 익히고 몸을 푸는 과정인 게다. 가볍게 완등한다.

등반 후에는 오헤다와 단둘이서 여러 얘기를 나눈다. 등반과 바위에 대한 얘기를 나누는 것 같지만 스페인어라 알아들을 수 없다. 연인이며 자일파트너인 이들은 사소한 몸짓과 말도 이해하고 반응하며 지켜주는 그런 관계란 걸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과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다.

이어서 다일라의 등반. 체격 조건은 샤마에 비할 바 못되지만 쉽게 말해 ‘자세가 나온다’고 할까. 다이내믹한 동작과 파이팅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만큼 크리스의 등반은 여느 클라이머에 비해 조용하고 자연스러워 사람들의 시선을 확 끌어당기는 맛은 없다.

이번에는 난이도를 약간 높여 ‘주(Zoo 5.12a)’를 오른다. 위아래에서 많은 사람들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지만 당황하거나 오버하는 기색은 전혀 없다. 손발이 길고 경험이 많아 쉽게 쉽게 오른다. 관중을 위한 쇼맨십도 어느 정도는 있을 법한데 오직 바위에만 집중할 뿐이다. 일정한 속도로 쉼 없이 오른다. 마치 대학생이 초등학생용 루트를 오르는 것처럼 그의 등반은 참 쉽다. 관중들도 감탄보다는 그저 “잘하네. 쉽게 하네” 하는 분위기다.

호수는 깊을수록 고요한 법. 가만히 보면 땀 흘리지 않고 오르는 경지에 이른 듯하다. 바위 속으로 스며들어 오르는 자연스러움의 극치에 가까운 몸짓이다. 휴식 시간을 갖나 싶더니 투구바위로 간다. 본격적인 고난도 등반에 도전하는 것이다. 나훈아를 쫓는 아줌마 팬처럼, 동방신기를 쫓는 학생들처럼 샤마를 따라 산꾼들이 이동한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분위기다.
최고 난이도 루트 온사이트 도전했으나 실패

‘호의 기다림’을 간단히 해치우자 “역시”하는 소리가 터져 나온다. 이어 그의 걸음이 멈춘 곳은 ‘파워 파워’다. 파워 파워는 오버행 각이 커 이름처럼 상당한 파워를 요하며 홀드가 미세하기에 순간적인 집중력과 균형이 맞아야 오를 수 있는 루트다. 열기가 뜨거워지며 산만하게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후다닥 모여 벽 주변을 에워싼다.

▲ 4. 연인이며 자일 파트너인 스페인 클라이머 다일라 오헤다. 5,6. 그는 북한산 무당골의 갬블을 세 번의 시도 끝에 올랐으며 그 옆에 ‘수퍼 보니또’라는 고난도 신루트를 개척했다.
그도 그럴 것이 ‘파워 파워’는 5.14c로 국내 최고 난이도며 이를 샤마가 온사이트로 등반하는 순간인 것이다. 영화 ‘황야의 무법자’에 나오는 결투 신처럼 긴장감과 함께 ‘빠라바라밤’하는 소리가 바위꾼들 가슴속에서 울릴 것만 같다.

루트 파인딩에 제법 시간을 쏟는다. 앞선 등반에 비하면 임하는 자세가 다른 듯 심각하다. 그의 몸이 바위에 달라붙자 관중들의 집중력도 그의 손가락 발가락 끝마디와 함께 한다. 그러나 잠시……. “아!” 하는 탄식이 사람들 입에서 흘러나온다. 퀵드로 두 개를 걸고 본격적으로 오버행에 접어들 즈음 살짝 떨어진 것이다. 이제까지와는 달리 너무 쉽게 추락했다.

왼손으로 옆쪽의 홀드를 잡고 오른손으로 오버행 위쪽 홀드를 잡으려 팔을 뻗는 순간 살짝 떨어졌다. 자세히 보지 않은 이는 떨어졌는지조차 모를 정도다. 이후 그는 아예 퀵드로를 잡고 위쪽의 홀드를 유심히 살피더니 내려와 장비를 정리한다. 오늘의 등반이 끝난 것이다.

어떤 이는 “아무리 실패한 뒤라 해도 5.15를 하는 사람이 퀵드로를 손으로 잡고 올라가 홀드를 살핀다는 게 이해가 안 된다”고 한다. 게다가 관중들 속에서 화려한 기술이나 강한 임팩트 없이 물 흐르듯 자연스런 등반을 하다 보니 “등반이 심심하다”는 얘기도 나온다.

그렇다. 크리스 샤마는 세계 최초의 5.15 클라이머로서 대중의 기대치에는 미치지 못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방식대로 바위와 최대한 하나가 되어 등반한 것은 분명하다. 겉멋 없이 조용히 구름 흐르듯 오르는 크리스 샤마만의 날갯짓이다.
인터뷰

북한산 무당골에 볼더 ‘보니또’ 개척

3월  30일 북한산 무당골에서 크리스 샤마는 볼더 ‘수퍼 보니또(SUPER BONITTOㆍV11)’ 를 개척했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의 허가를 받아 무당골에 들어간 샤마는 약 6m 높이의 갬블(V7)을 온사이트로 등반한 후 왼쪽에 새로운 루트를 만들었다. 세 번의 시도 끝에 등반에 성공했으며 보니또(BONITTOㆍV10)라는 이름을 붙였다. 보니또는 스페인어로 ‘예쁘고 참 좋은’ 이라는 뜻이며 그의 여자 친구인 다이라 오헤다가 지었다. 

이후 그는 보니또를 앉아서 출발하는 자세(sit down start)로 시도해 두 번 만에 성공하고 이를 수퍼 보니또(V11)라 이름 붙였다. 수퍼 보니또는 보니또에 비해 2~3동작이 더 필요하며 더 어렵다. 등반 후 그는 “수퍼 보니또는 별 다섯 개를 줄 만한 재미있는 루트다”라고 했다. 샤마가 개척한 볼더는 극히 적은 크림프 홀드와 미세하게 흐르는 홀드로 구성된 고난도의 화강암 루트다.

크리스 샤마 일문일답
“물처럼 자연스럽게 등반하는 것이 내 스타일이다”

선운산에서 등반을 한 소감?
- 정확한 암질은 모르겠지만, 아마 화산암류 같은데 돌기나 촉감이 흥미롭다. 한국 클라이머들의 수준이 높다는 걸 실감했다. 산은 한국적인 아름다움이 풍긴다.

한국 방문 목적은?
- 이벌브 클라이밍팀의 일원으로 아시아 투어(브랜드 홍보)를 위해 왔다. 이번 등반은 센 루트에 대한 도전보다 각국의 클라이머들과 가볍게 즐기기 위한 것이다.

요즘 근황?
- 스페인에 머물며 프로젝트 등반(고난이도의 기록적 등반)을 하고 있다. 지금 하는 바위는 높이가 15m 정도지만 체조처럼 고난도의 동작을 요구하는 어려운 볼더다. 과거에는 한정된 시간에 등반을 했기에 스트레스가 굉장히 많았다. 이젠 등반을 스트레스 받으며 하고 싶진 않다. 지금은 라이프 스타일이 한군데 정착해서 쉬엄쉬엄 하는 편이다. 그렇게 해서 등반 실력도 늘었다.

프로젝트 선택기준?
- 내 능력보다 위의 것, 아름답고 환상적인 것을 택한다. 또 항상 새로운 것을 찾고 도전하려 한다. 안주하거나 타성에 젖지 않으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프로 클라이머 치곤 29살이란 나이는 많은 편인데.
- 신체적인 나이와 상관없이 다치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성장해 나가는 것이 내 목표다. 하드 스포츠클라이밍과 고난이도의 기록적인 자연암릉 등반에 항상 관심이 간다. 어떤 등반을 하든지 내 자신을 전력투구할 생각이다.

등반의 난이도가 5.15를 넘어 계속 높아질 수 있다고 보는가?
- 지금 스페인에서 여러 개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하고 있다. 그 중에 가장 어려운 게 5.15c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5.15c~d 이런 식으로 계속 발전할 것 같다.

등반하는 스타일이 마치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럽다.
- 그렇다. 물처럼 자연스럽게 하는 것이 내 스타일이다. 나는 바위를 보고 동기가 생길 때 오른다. 억지로 하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다. 바위에 몰입했을 때 그런식으로 등반한다. 등반은 동기부여가 중요하다. 그래서 내 내면의 소리에 항상 귀 기울인다. 더불어 등반할 때는 재미있어야 한다. 

오늘처럼 사람들의 기대가 클 경우의 등반은 어떤가?
- 오늘의 등반은 완전한 내 스타일은 아니지만 직업적인 비즈니스이기에 해야 할 부분이다. 거기에 대한 스트레스는 없다.

파워 파워(5.14c)를 오른 까닭은?
- 궁금해서 했다. 보고 나서 이게 가장 어려운 루트일 거라 예상했다. 다시 할 생각은 없다. 

- 글 : 신준범 기자 / 사진 : 강레아 산악사진가 / 월간 산 [475호] 2009.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