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의 다양한 문화

-* 알피니즘이란 무엇인가 [1] *-

paxlee 2009. 6. 20. 22:38

                         알피니즘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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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알피니즘이란 무엇인가

 

오늘날 100여개 국적의 등반가들이
전 세계 광범위한 산악지대에서 등반활동을 벌이고 있다.
지구 최고봉 에베레스트만 보더라도
1953년 이래 54년간 무려 3.025명이 그 꼭짓점에 올랐다.


국가별로는 네팔, 미국, 일본, 중국, 영국, 인도, 러시아,
스페인, 한국 순으로 많은 등정 자를 배출했고
1명 이상의 등정 자를 보유한 나라가 91개국에 달한다.

이런 에베레스트 등정의 이면에는
인간의 끝없는 탐구욕과 한계극복의 의지가 숨어있다.
그렇다면 전 세계 등반가들 모두가
같은 동기를 가지고 산에 오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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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이태리 등반가 귀도 레이는
등산은 알피니스트의 수만큼 다양하다고 했다.
이 말은 등산의 형식과 내용이
산에 오르는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기위해 한 말이다.

어떤 사람들에게 등반은

일종의 스포츠며 자기 과시의 기회일 수 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들에게 등반은 철학적 행위며,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 등반은
‘스포츠가 아니라 삶의 방법’(조지 인켈)이고,
그보다 어떤 이들에게 있어서 등반은
자기를 구원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장 프랑코는
이를 종합하여 등산은 스포츠요,

탈출이며, 정열이고
일종의 종교라고 설파한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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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떤 경우의 등반가든 피해 갈 수 없는 질문이 있다.
“도대체 산엘 왜 가느냐?”다.

등반의 행위는 외적으로는
격렬한 육체노동과 위험을 수반한 행위이지만
그것을 통해서 추구하는 것은
지극히 내면적이며 주관적인 세계다.

 

스스로 험한 산을 찾아 올라 가서는
다시 살아 내려오려고 투혼을 불사르는 산악인들을 보며
일반인들은 어떤 역설과 모순을 느낀다.
그래서 사람들은 왜 산에 가느냐고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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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질문에 답하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이미 산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요.
삶의 방식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존재론적으로 산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그 질문은
마치 “왜 사느냐”는 질문처럼 난감하기 짝이 없다.

오죽하면 영국의 말로리(1886~1924)는
제3차 에베레스트 원정을 앞두고
기자들의 왜 산에 가느냐는 질문에

“산이 거기 있기 때문에”라고 말했을까.
우문선답의 대표적인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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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왜 산에 가느냐는 질문은
등반가 스스로도 자신에게 수없이 던지는 질문이며
그 해답을 찾으려 또다시 산으로 향한다.

이렇듯 독특한 영역을 구축하고 있는
알피니즘에 대한 이해는
등반가들이 공유하고 계승해온 정신적 소득이 무엇이고
그 본질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데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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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알피니즘의 정의

A. 눈과 얼음에 덮인 알프스와 같은 고산에서 하는 등반
   영한사전에 보면 ‘알피니즘(Alpinism)’이란 단어가 있다.
   여기서는 ‘알프스 등산’
   혹은 일반적으로 고도가 높은 등산 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영국에서 발행된 등산 백과사전
   (Encyclopedia df Mountaineering, Penguin Books)에는
   좀 더 구체적으로 눈과 얼음에 덮인
   알프스와 같은 고산에서 행하는 등반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브리태니커 사전에는 알피니즘이란
   알프스의 봉우리를 순수하게 등반을 목적으로 오르는
   새로운 사상 이라고 했다.

   여기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알프스 정도의 높이를 가진 고산이란,
   빙하, 바위와 눈,
   그리고 저산소등 자연적 위험을 갖춘 산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풀이하면 알피니즘은
   자연적인 위험이 있는 산을 오르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요, 
  

   그렇게 오르기 다난한 과정을  
   위험의 극복을 하나의 정신적 지표이자
   전제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알피니즘의 세계는
   외적인 자연과 내적인 인간 정신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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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산의 위험을 극복하며 오르는 행위와 그 정신
    따라서 알피니즘은
    단지 알프스에서 행하는 등반뿐만 아니라
    위험을 갖춘 산이라면 어디서든 실천이 가능하다.

    프랑스의 등산가 폴 베시에르는
    그의 책 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산에 오르는 것을 프랑스 말로 ‘알피니즘’이라고 하지만
    배타적인 사람들이 강조하는 표현과 달리
    그것은 알프스를 오른다는 좁은 뜻이 아니다.
    거기에는 역사적 기원이 있을 뿐 넓게 일반적이다.


    전문적인 사람들은
    피레네에 오르면 피레네이즘(Pyreneism),
    히말라야는 히말라이즘(Himalaism),
    안데스를 안디니즘(Andinism)이라 할는지 모르나,
    요는 모두가 산을 오르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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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는 빙하도, 만년설도,
저산소증을 느낄만한 고도가 없지만,
설악산에는 거센 눈보라에 감춰진 천화대 암릉이,
혹한속의 토왕성 빙폭이 있다.

서울 북쪽에는 수직의 인수봉이
보통 사람들의 발길을 거부하고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국산에서 알피니즘을 실천할 수 있는 길은
무수히 많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산의 위험은 무엇을 말하는가,
눈과 얼음, 암벽, 폭풍설, 눈사태, 낙석, 낙뢰....
이런 것들은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자연 조건이다.

또한 동료의 부상, 추락, 고산병등
인위적인 위험도 발생할 수 있다.

여기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선택을 강요하고
그에 따른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불안전하고 불확실한 상황을
우리는 불확실성이라고 부른다.

불확실성은 알피니스트 들이 추구하면서
동시에 극복해야하는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다.

그래서 알피니즘은
다시 산의 불확실성과 맞서서 얻는
깨달음 이라고도 정의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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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알피니즘의 배경과 기원

인간이 산을 도전과 극복의 대상으로 삼은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8세기 이전에 알프스는
악마가 사는 곳으로 인식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스위스의 피라투스(Pilatus 2.132m) 산은,
루체른(Lucerne) 시의회의 법령으로
수세기 동안 오르지 못했다.

그리스도를 처형한 로마 총독 폰티우스 필라투스의 망령이
이곳에 정착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18세기 초에는 저주받은 산 몽블랑(4.807m)의 빙하가
마을로 덮치는 재앙을 막기 위해
앙시(Annecy)의 주교를 샤모니에 초대하기도 했다.

이러한 전설과 자연적인 위험들은
유럽 사람들로 하여금
알프스로의 접근을 불가능으로 인식하게 했고
이런 단절은 적어도 18세기 초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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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알피니즘의 배경

18세기 초 낭만주의(Romanticism)와
인본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문학가와 예술가들이
미지의 자연세계를 동경하면서
알프스의 아름다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고산지대의 전경을 흥미롭게 기술한 루소와
워즈워스등 낭만주의 시인들은
사람들을 부추겨 알프스에 관심을 갖게 했다.

또한 지질학자,
식물학자,
그리고 빙하를 연구하는 자연과학자들이
그동안 인간과 단절되었던
알프스의 고지대에 발길을 들여놓는다.

그들은 지구에 대한 관념적 이해로부터 벋어나
갖가지 자연 현상에 대한 실증적 관찰과,
실험을 위해 알프스의 고지대로 접근하게 되었다.

이때는 봉건주의의 몰락과 절대주의의 붕괴로
새로운 세계를 맞은 유럽 근대 시민들에게
자유와 인간 개성에 대한 관심이 시작한 때였다.

이들은 자연에 대한 인식을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identity)을 확인하고자 했는데
그 구체적인 대상이 바로 알프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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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알피니즘의 기원

A. 자연 과학자 소쉬르의 집념과 열정
    1760년, 갓 20세를 넘긴 부유한 귀족집안의 청년

    소쉬르(Horace Benedict de Saussure)는
    언젠가는 몽블랑을 오르려는 생각을 가지고
    몸종과 함께 샤모니로 들어갔다.

    몽블랑이 마주 보이는 브레방 언덕에서
    몽블랑(4.807m)을 관찰 한 후
    소쉬르는 등정의 가능성을 확신하게 되고,
    과학적인 연구와 준비를 시작한다.

    자연 과학자였던 그는
    당시로서 어느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것 까지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과연 얼마나 많은 관찰과 실험을 통해야 
    몽블랑을 오를 수 있을까?
    그는 대기압을 측정하는 실험부터 시작한다.
    그 외 온도와 기압의 관계,
    빙하의 방향과 산맥의 관찰,
    습도에 따른 대기투명도의 차이 등...

    성격이 꼼꼼했던 소쉬르는
    수없이 샤모니를 들락거리며
    과학적 실험을 토대로 얻어진 결과를 가지고
    처음으로 몽블랑 지도와 산세를 스케치 한다.
    이 모든 자료들은 몽블랑 등정을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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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연구와 실험은 늘 새로운 문제와
어려움에 부딪히며 20년 세월이 흐른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실험을 통해서 얻은 자료를 가지고도
그는 확실한 등정 가능성을 찾지 못한다.

그는 어디서 출발해 어느 루트로 올라야
정상으로 연결 되는지 풀지를 못했다.

가이드들과 여러해 동안 여러 방향으로
수많은 등반을 시도했지만
해가 지면 더 이상 진행을 못하고 되돌아 내려오곤 했다.

결국 처음 샤모니를 찾은 지 25년의 세월이 흐른 후
소쉬르는 몽블랑 등정의 꿈을 포기 하게 된다.
대신에 그는 몽블랑을 오르는 사람에게
상금을 내놓겠다고 공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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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미셀 파카드와 작 팔마의 몽블랑(4.807m) 등정

1786년 8월, 샤모니에서 태어난 푸른 눈을 가진
미셀 갸브리엘 파카드(Michel Gabriel Paccard)는
순수한 열정으로 남몰래 몽블랑을 오르려는
꿈을 키워온 29세의 젊은 의사였다.

그와 수정채취업자 작 발마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샤모니를 출발한다.
그리고 빙하에서의 비박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사람들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보름달 아래 비박을 한 후, 새벽 네 시에 다시 출발하여
아무도 발길이 닫지 않은
몽블랑의 정상을 향해 오르기 시작한다.

한낮이 되면서 태양빛에 의사 미셸 파카드는
거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설맹에 걸렸고
정상이 가까워지면서 때마침 불기 시작한 거센 바람이
더욱 진행을 어렵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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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6년 8월8일 오후 6시23분
두 사람의 손과 발이 추위로 감각을 잃어버릴 무렵
그들은 마침내 전인미답의 정상에 올랐다.

드 소쉬르가 비록 오르지는 못했지만,
그가 몽블랑을 오르려는 계획을 세운지 26년만의 일다.
다음해 소르쉬 자신도 기어코 몽블랑을 올라
결국 그의 길고도 불확신한 꿈은 실현되었다.

미셀 파카드와 작 발마,
그리고 소쉬르가 펼친 일련의 몽블랑 등정은
알프스가 더 이상 경외와 공포의 장소가 아니라...
도전과 극복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의 대 전환점이 되었다.

이로부터 시작된 근대 등산은
알프스 전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했고
이것이 알피니즘의 기원이 되었다.

 
-> 위 글은 지난 5월 14일 명동로얄호텔에서 '한국등산연구소 세미나'에서 '남선우'님이 '알피니즘이란 무엇인가' 하는 주제발표를 요약한 내용입니다. - 남선우 / 월간 마운틴 발행인, 대한산악연맹 등산교육원 부원장 -

 

 - lasan114님의 LA의 산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