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정상보다도 더 높았던 꿈과 열정 *-

paxlee 2009. 9. 11. 22:04

서울시립대학교 파키스탄 바투라2 원정대

 

8월 11일 남벽 통해 김창호·최석문 세계 초등정

정상보다도 더 높았던 꿈과 열정

 

히말라야와 카라코람 산맥에 있는 수많은 산들 중에 아직까지 인간에게 그 정상을 허락하지 않은 가장 높은 산 중 하나인 바투라2(7762m)봉으로 우리 원정대는 향했다. 한걸음 한걸음이 어두운 동굴을 헤매듯 미지의 빙하와 세락, 그리고 바위벽들로 이루어진 불확실한 세계였다. 더욱이 서부 카라코람에 위치한 바투라2봉은 1976년 독일대에 의해 주봉인 바투라1(7794m)봉이 등정된 후, 78년에 일본팀은 주봉 서쪽의 한 봉우리를 올랐는데 정확히 그 위치를 알지 못하여 바투라4(7594m)봉으로 보고했으나, 최근 일본산악협회에 의해 바투라3(7720m)봉이라고 수정 발표할 정도로 이 산군을 포함한 독일, 영국, 일본, 스위스, 미국에서 발행된 지도가 제각기 다르다.

 

이와 같이 바투라 산군에 대장벽으로 선 1∼4봉은 그 자리가 명확하지 않아 우리 원정대는 등정은 물론 이 산군을 규명하는 작업을 두 번째 목표로 삼았다. 이번 원정은 서울시립대학교 개교 9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원정등반을 얼마 남겨놓지 않고 추진되어 훈련과 준비기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특히 원정대장을 맡은 내가 봄 시즌 네팔의 마칼루와 로체를 등정하고 귀국하니 출국은 20여일밖에 남지 않았고, 대부분의 원정대원들이 고산등반은 처음인데다가 우리가 등반할 남벽의 정상부 밑에는 600∼700m의 수직 암벽이 가로막고 있다.

 

이 점을 고려하여 탁월한 벽 등반 실력과 대원들과 잘 어울릴 인품을 가진 최석문(노스페이스 클라이밍팀)대원을 초청하여 합류하였고 이동훈 교수, KBS영상앨범 <山>의 김석준 PD를 포함, 총 9명으로 원정대가 구성되었다. 대원들에게 큰 형님인 이동훈 교수(환경공학과)는 예전 원정에서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등반결과 못지않게 ‘친환경 등반’ 활동을 강조했고 이것이 우리의 세 번째 원정 목표가 되었다. 다음은 이동훈 교수의 등반기 중 일부이다.


‘원정으로 인해 환경을 하나도 훼손하지 않을 수는 없다. 특히 아무도 오른 적이 없는 미답봉의 초등원정은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따라서 본 원정대에서는 완벽히 환경보전을 할 수는 없더라도 원정기간에 환경훼손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방법을 모색하고 원정 종료 후 장기적으로는 환경보전에 거의 문제가 없도록 하는 조치는 물론 환경오염문제 최소화 대책을 마련했다.’ 베이스캠프를 철수할 때까지 원정대는 화장실, 음식물 찌꺼기, 폐기물 분리수거, 고소캠프의 쓰레기 처리 등 이 교수의 지도에 따라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처리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벽에 설치해놓은 고정로프는 모두 회수하지 못했다.

 

살짝 붙은 얼음과 바위 위를 좌측으로 가로질러 오르는 루트를 선택했다. 3캠프에서 4캠프구간.

 

쉴 틈 없이 몰아친 캠프 구축


7월 2일, 3일간의 도보 캐러밴으로 최석문 대원과 내가 적절한 베이스캠프를 찾기 위해 선발로 나서 두 개의 빙하 사이에 올라앉은 바토쿠시(Batokushi·4115m) 초지대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할 수 있었다. 각양각색의 야생화가 핀 천상의 화원이었다. 베이스캠프는 기존의 팀들이 설치했던 바투라 월(Wall)의 남서쪽 발타르(Baltar) 빙하를 택하지 않고 남동쪽으로 들어왔다. 베이스캠프의 고도는 너무 낮았고 정상까지는 무려 3650m의 표고차가 난다.

 

대원 중 재학생들 네 명이 시험기간으로 출국이 늦은데다 카라코람의 등반시즌을 맞추려면 쉴 시간이 없었다. 베이스캠프 도착 다음날 7명의 포터들을 고용해 본격적인 등반이 시작되는 얼음 빙하까지 150m의 로프를 고정하여 짐을 데포하고 되돌아 왔다. 3일째 되던 날 1캠프(5150m)를 구축하고 2캠프 개척에 필요한 장비와 식량도 일부 수송을 마쳤다. 하루도 쉬지 않고 앞에서 루트를 개척했다. 7월 8일, 위험스러운 세락을 돌파하여 2캠프(5950m) 구축, 15일 3캠프(6650m)를 구축하기까지 대원들을 몰아 붙여야 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기회는 많지 않았다. 신태문, 최석문 대원이 지원을 맡고 박성구, 박영재, 이윤지, 서정희 대원은 고소적응을 하며 힘겨운 짐수송을 했다. 45kg의 체중과 작은 체격의 서정희 대원 또한 15∼20kg의 짐 수송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서정희 대원은 이러한 상황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일기장에 적었다.


‘처음으로 내 힘으로 올라가 보고 싶은 산이 생겼다. 나는 그 동안 산을 좋아한다고 하면서도 그에 상응하는 노력을 하지 않고 살아온 것 같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말이다. 산은 남녀를 차별하지 않는다. 그 차별은 우리 자신이 만들 뿐이다. 산 앞에 여자란 없다. 인간만이 있을 뿐이다. 나는 이제부터 인간 서정희로 산을 대할 것이다’ 히말라야의 등반 경험이 있고 서정희 대원의 선배로서 줄을 묶었던 이윤지 대원, 어려움 속에서도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던 그녀 또한 땀에 전 바투라의 쓴 냄새를 맡으며 기록하고 있다.

 

‘선배들이 개척해 놓은 캠프지에 도착할 때, 고정로프를 이용할 때, 진정한 알피니스트의 마음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다른 모든 일들이 그러하겠지만 등반에 관해서만큼은 전적으로 마음에 대한 문제이다. 이곳에 와서 그것을 확실하게 깨닫는다. 추위와 위험에 나아가는 용기, 힘든 상황에서도 앞장설 수 있는 의지, 동료들을 아끼고 팀에 공헌 할 수 있는 희생정신,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마인드 컨트롤(Mind Control). 이번 등반에서 나는 이러한 것들을 배워간다면 내 인생의 가장 큰 배움을 얻는 것이 아닐까! 산에서 한없이 작고 부족한 내 자신을 본다’


바투라2봉의 초등을 목표로 2005년에 이어 두 번째 시도를 위해 올해 같은 시즌에 입산 신청한 이태리의 시모네 모로(Simone moro)는 미국인 베네가스 쌍둥이 형제와 함께 팀을 보강하였고 어느 날 갑자기 바토쿠시(6050m) 정상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나타나지 않는다. 그들은 발타르 빙하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하였고 정상대로라면 우리의 2캠프에서 그들의 루트도 합류하게 된다. 나중에 한국에서 온 연락에 의하면 시모네 모로 팀은 다른 산으로 대상지를 바꾸었다고 했다. 등반을 마친 지금의 생각이지만 남벽은 그들이 채택한 알파인 스타일로 오르기에는 벽이 너무 높았고 난이도 또한 어려웠다.


이제 3캠프 위로 바투라 대장벽을 뚫고 나가야 한다. 출국 전에 예상했던 벽의 각도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었고 오르려는 의지를 짓눌렀다. 눈이 붙어있어 난이도는 그렇게 어려울 것 같지 않다고 판단했지만 실제는 오버행을 이루고 있었다. 벽을 넘어서기 가능한 루트를 신태문·최석문 대원과 상의했지만 각기 의견이 달랐다. 망설임은 원정대장의 미덕이 아니다. 원래 예정루트인 우측 벽으로 올라 중단의 살짝 붙은 얼음과 바위 위를 좌측으로 가로질러 오르는 루트를 선택했다.


루트 작업을 위해 2조로 나누었다. 신태문 대원과 최석문 대원, 그리고 나와 박성구 대원이 한 조다. 벽에서는 다이니마 7mm 로프를 사용했다. 나는 고정로프 마지막 지점에 도착하여 후등자가 도착할 때까지 몇 시간을 기다릴 수 없어 K2에서처럼 단독으로 로프를 지고 설치해 나갔다. 미치지 않았다면 7000m가 넘는 바위벽에서 이런 등반을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하겠는가. 최석문 대원은 나의 이런 모습을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린 하루를 쉬고 창호형과 성구가 다시 그 길이를 연장하고 돌아왔다.

 

그렇게 남벽에 조금씩 우리의 집념과 의지를 연장시켜 나갔다. 이번엔 네 명이 함께 벽으로 향했고 멀게만 느껴지던 중앙 설벽까지, 창호형이 로프를 연결시켜 놓았다. 혼자서 많은 고정로프와 피톤으로 연결했던 그곳을 나는 형의 닉네임을 따서 ‘방랑자의 트래버스(Himalayan Vagabond’s Traverse)라고 부르고 싶었다. 창호형의 그런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책임감, 의지와 열정만으로 혼자서 그곳을 등반한다는 게 쉽지 않았으리라 생각이 된다.

 

또 다른 무엇이 그의 심장을 뛰게 하여 그곳으로 향해 갈수 있게 만들었을까! 마지막 트래버스 설벽 구간을 창호형이 오르고 있다. 리듬에 맞추어 춤을 추는 것처럼 반박자도 어긋남 없이 그렇게 벽과 형은 황홀하게 취해가고 있었다’라고 그는 자신의 등반기에 적었다. 박성구 대원이 말없이 뒤에서 로프를 지고 따라오다가 “형 저도 가고 싶어요”라고 허공에 대고 외친다. 어디로 간단 말인가. 정상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또 어떤 어려움과 위험이 기다리고 있는지 나도 알지 못한다. 호되게 호통치고는 내려 보냈다. 박성구 대원의 첫 고산 등반은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 함축되어 있다.


‘어머님. 이곳에 온지도 한 달 열흘이 지나고 있습니다. 매일같이 쏟아지는 눈사태와 무너지는 세락의 틈바구니에서 살아서 빠져 나올 때마다 기도를 합니다. 어머님의 얼굴을 다시 보게 해 달라고…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왜 이 거대한 산군을 찾아다니고 헤매면서 무엇을 얻으려고 이토록 갈구하는 지를. 원정을 떠난다고 할 때 저의 뺨을 때리시며 말리시던 어머니의 마음을 조금은 헤아릴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사랑합니다.’


바위벽에서 확보 포인트는 대부분 하나의 피톤이나 스크류를 설치해 32피치 등반과 5일간의 작업으로 드디어 대장벽을 벗어났다. 드디어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가파른 설면에 닿았다. 최석문 대원과 나는 하이파이브를 했으며 그냥 웃어댔다. 내일은 정상에 갈수 있으리라. 8월2일이었다.

 


지구상에 있는 수많은 산들 중에 아직까지 인간에게 그 정상을 허락하지 않은 가장 높은 산 중 하나인 바투라2(7762m)봉으로 우리 원정대는 향했다. 3캠프에서 4캠프 구간.

 

등반열정으로 뭉친 대원 모두가 등정자


돌아 온 비박 텐트는 바위 위에 덮인 만년빙을 깎아 만들었으나 반쯤 허공에 매달려 스크루를 하나씩 박아 개인 확보를 별도로 해야 했다. 밤새 눈이 내린다. 쏟아져 내리는 분설눈사태에 우리 둘은 두려움을 친구삼아 텐트와 설면 사이의 눈을 헬멧으로 퍼내며 새벽이 오기를 기다렸다. 지긋한 새벽이 밝았고 정상이 아닌 하산을 결정했다. 다음은 최석문 대원의 기록이다.


‘3일간 휴식을 하며 정상이란 목표를 향해 마음을 정리하며 대원들의 환송을 받으며 8월7일 1캠프로 떠났다. 높은 기온으로 그동안 많이 내린 눈도 거의 녹아 힘들지 않게 캠프로 이동할 수 있었다. 또한 텐트를 접어놓고 내려와 쉽게 복구할 수 있었다. 예상 등정일의 불안정한 일기예보로 다음날은 3캠프까지 진출했고 다른 대원들도 일정을 하루 앞당겨 운행했다. 8월 9일 새벽 다시 남벽으로 향한다.

 

방랑자의 트래버스를 지나 암벽구간의 마지막 픽스로프 지점에 도착했고 먼저 도착한 형은 텐트자리를 만들고 있었다. 2m 가까이 눈을 쌓아 올리는 힘든 작업을 마치고서야 4캠프(7250m)를 설치 할 수 있었다. 형은 200m 6mm로프 한 동을 더 가지고 혼자서 로프를 고정시키고 텐트로 돌아왔다.


4캠프에서 보이는 아름다운 산과 불안정한 감정들로 혼돈되는 나를 본다. 베이스캠프에 새벽 2시쯤 깨워 달라고 무전교신을 하고 잠을 자려하지만 내일 등반의 긴장감 때문일까 잠이 오질 않는다. 설사면에 눈사태가 나지 않을까, 날씨가 나빠지지는 않겠지, 추위로 손발에 동상이 걸리지 않아야 하는데 그리고 내사랑하는 사람들, 또 여러 생각과 생각들이 얽히는 밤이었다.

 

베이스캠프에서 무전이 왔고 일어나 보니 눈이 내리고 텐트 위로 분설 눈사태가 쏟아진다. 시간을 기다려 보지만 날씨는 바뀌지 않는다. 우린 많은 식량은 없어도 인내심과 물을 녹일 가스는 충분히 가져 왔기 때문에 4∼5일은 버틸 수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만 형은 시간이 모자라면 베이스캠프를 철수하고 두세 명이 남아서 등반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다고 한다.

 

8월 11일 새벽 베이스캠프로부터 무전이 왔고 텐트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영하 27도의 냉기가 손끝과 발가락을 헤집고 들어온다. 언제 쏟아질지 모르는 불안정한 설벽을 형이 노련하게 오르고 있다. 무릎이상 빠지는 눈 상태에 힘들어 하는 것 같았다. 내가 앞으로 나가 러셀을 하고 싶었지만 내 느린 두 다리는 나의 의지와는 다르게 많은 걸음을 내어 주지 않는다. 그러기를 4시간 30분이 지나고 마지막 50m의 무너져 내리는 설릉을 형이 마무리 지으며 정상에 섰다.

 

8월 11일 오전 9시 25분이다. 정상에서 동훈형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등정자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고 단지 “두 명의 대원이 정상에 올랐다”라고만’ 저 아래로 발타르 빙하가 구름 사이로 순간 나타났다 사라진다. 2004년 바투라 탐사의 마지막 계곡 발타르 빙하에서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권총으로 현지인 두 명을 쏴 죽이고 달아난 세 명의 살인범들이 빙하 옆 텐트로 돌아오던 나에게 총을 쏘며 달려들었다.

 

나는 그들에게 목숨을 살려달라고 하지 않았다. 찍은 바투라의 필름은 두고 가라고 말하고 싶었다. 겨우 도망쳤고 그리고 살아났다. 그때 찍은 사진 몇 장으로 나는 이 원정대를 꾸렸다. 정상에서 내려와 후출사표(後出師表)와 같은 이 글을 홈 페이지에 올렸다.

 

저에게는 8년간 가슴속에 품어 온
꿈이 있었습니다.

언제나 그 꿈은 누군가
‘그건 불가능해’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럴수록 심장은 더 뛰었고
자신의 꿈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서울시립대학교 개교 90주년 파키스탄 바투라2(7762m)
세계초등정 원정대’가
인간으로서는 처음으로 그 정상에 올라
그 꿈을 이루었습니다.

 

2008년 8월 11일, 현지시각 오전 9시 25분,
두 차례에 걸친 시도 끝에 2명의 대원 손에 든 깃발은
영하 27도의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힘차게 펄럭였습니다.

 

원정대는 해발고도 7762m 바투라2를 정복한 것이 아니라
이상범 총장님을 비롯하여 일만 명의 서울시립대인,
총동창회, 삼화회, 산악회
그리고 원정대에 대원을 보내주신 가족들, 협찬사 등
모든 분들의 사랑과 열정, 도전정신이
7762m 바투라2봉 정상보다 높았기 때문입니다.


원정대장으로서 저는
각자의 캐릭터와 모습을 가진 대원들이
하나 되는 조화 속에
바투라2봉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무거운 배낭을 지고 묵묵히
함께 그 길을 걸었습니다.

 

등정 후
날씨는 갑자기 바뀌어 휘몰아치는 폭풍설 속에서
안전하게 베이스캠프로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던 것은
원정대에 깊은 관심과 애정으로
응원하고 초조하게 지켜보아주신 많은 분들의 간절함이
우리의 따뜻한 옷이 되었고 용기와 인내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바투라2 세계 초등정 기록은
우리들만의 축제가 아닙니다.
원정대를 가로막았던
바투라2의 대장벽을 넘었듯
서울시립대인을 넘어서
한국인의 자랑스러운 한걸음이며
세계산악계의 역사가 될 것입니다.

 

저는
바투라2봉 정상에서
그 정상 너머에 새로운 정상을 보았습니다.
우리 모두의 꿈과 희망을 가지고 힘차게 도전해야 할,

새로운 정상을…



최석문 대원은 남벽에 조금씩 우리의 집념과 의지를 연장시켜 나갔다.


- 글·사진 김창호 원정대장 / 월간 마운틴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