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성산악인들의 파워
“등반에서 남자 도움? 그런 것 필요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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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계에도 여인천하가 있다. 웬만한 남자보다 더 나은 힘과 기술로 산을 오르는 여성들이 있다. 산은 남자들의 영역이라는 인식을 깨고, 타고난 체력의 불리함을 딛고 산에 오르는 여성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이번 가을 시즌은 그냥 넘겼지만 오은선은 내년 봄 8,000m 14좌 여성 초등을 이룰 것이 거의 확실하다. 그 후 한국 산악계의 여성 파워는 폭발적으로 신장할 것이다. 이 빅뱅을 이끌어갈 한국 여성 산악인들의 활동상을 알아본다.<편집자>
“고산등반, 여성에게 불리하지만은 않다”
오은선·김영미·김가영 유향미
- ▲ 오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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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등반을 위해선 힘과 체력, 등반 기술과 경험, 시간과 돈 등이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이 충족되어도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단순히 등반을 잘하는 정도로는 성공할 수 없는 것이 고산등반이다. 여기에 도전장을 낸 여성들이 있다. 현재 여성 고산등반가를 대표하는 이는 단연 오은선(블랙야크)이다. 8,000m 14좌를 눈앞에 두고 있으니 체력이나 등반기술은 말할 필요가 없다. 오은선(43)의 가장 큰 강점은 ‘정신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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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반까지도 그녀는 히말라야 원정시 고소증세로 고생했다. 그러나 끊임없이 노력해 스스로 고소체질이 됐다. 오은선은 “과거에 산은 남성에게 유리했으나 지금은 여성에게도 불리하지만은 않다. 남녀를 떠나서 자기 꿈을 이루기 위해 도전하는 것”이라며 “요즘은 장비가 워낙 경량화되어 여자도 충분히 가능하다. 다만 산을 극복할 수 있는 의지가 문제다”라며 정신적인 강인함이 등반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 ▲ 김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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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등반가로 오은선과 쌍벽을 이루던 고미영을 빼놓을 수 없으나 안타깝게도 지난 낭가파르바트에서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고산등반에서 고미영의 무게감을 채울 수 있는 이는 당장 없으나 가장 눈에 띄는 이는 김영미(강릉대 OB)다. 김영미(29)는 지난해 에베레스트를 등정함으로써 한국 여성으로는 두 번째로 7대륙 최고봉에 올랐다. 더불어 국내 최연소 세븐 서미트 달성자이기에 가장 촉망받는 여성 등반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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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륙 최고봉 등정 후에는 지난해 가셔브룸Ⅱ와 에베레스트 남서벽을 등반했으며, 올해는 가셔브룸Ⅱ와 로체를 등반했다. 이 중 로체는 등정에 성공했다. 앞으로 더 기대되는 것은 젊음 때문이기도 하지만 8,000m 봉우리인 가셔브룸, 브로드피크, K2, 에베레스트, 로체를 등반한 경험을 축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왕용 대장은 김영미의 강점으로 “소처럼 우직한 성품”을 꼽았다. 한 대장은 “영미는 꾸준하게 밀어붙이는 면이 있고 인내력이 강하다. 어린 나이답지 않게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뭔지 알고 찾아서 한다”며 인내력과 추진력 강한 성품이 고산등반에 적합한 성품이라고 얘기했다. 김영미는 “경험이 곧 기술이다. 기회만 된다면 다양한 등반을 닥치는 대로 해보고 싶다”며 등반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다.
지금 가장 가고 싶은 등반 대상지로 가셔브룸을 꼽았다. 김영미는 “가셔브룸Ⅱ봉을 2003, 2008, 2009년 세 번이나 갔지만 모두 등정 기회를 놓쳤다. 그만큼 잘 아는 산이기에 더 즐겁게 등반할 자신이 있다. 가고 싶은 산은 너무 많고 머뭇거리기에는 젊음이 아깝다”며 자신감과 패기를 드러냈다.
- ▲ 김가영.
일반인에게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현재 고산등반을 하고 있는 전남대 OB 김가영(25)과 부산 동주대
OB 유향미(33)가 있다. 김가영은 가장 젊은 여성 고산등반가로 에베레스트, 가셔브룸Ⅰ·Ⅱ, 매킨리
원정에 참가했으며 이 중 매킨리를 등정했다. 김영미는 그녀를 “어릴 때 달리기와 수영을 해서 기본
체력이 상당히 좋다. 인내력과 의지가 강하고 영어·중국어·일어를 곧잘 한다”며 차세대 고산등반 주
자로 꼽았다.
- ▲ 유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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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향미는 대산련 부산시연맹에 근무하고 있으며 부산등산학교 강사, 스포츠클라이밍 심판, 친환경등산교실 강사 등 부산 산악계의 안방마님 같은 역할을 해내고 있다. 매킨리, 마칼루-로체, 요세미티를 등반했으며 푸모리를 등정했다. 고산등반가 김창호(몽벨)는 그녀에 대해 “원정 관련 행정이나 시스템을 잘 안다. 성격도 밝고 원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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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칼루-로체 원정 때 여성들끼리의 원정이었다면 충분히 등정했을 텐데 팀이 움직이는 거라 올라가진 못했다. 8,000m 노멀 루트는 충분히 올라갈 능력이 있다”고 말했다. 유향미는 이에 대해 “여성 산악인이라는 말은 부담스럽다. 아직 모자란 점이 많다. 미답봉의 벽등반을 하고 싶고 마흔 되기 전에 백두대간 일시종주도 하고 싶다. 항상 즐거운 등반을 하고 싶다”고 향후 등반 계획에 대해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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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거벽, 이제 금녀의 벽 아니다”
이명희·채미선·한미선 이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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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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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거벽등반을 추구하는 여성들도 있다. 고산거벽은 고소적응부터 암벽등반, 인공등반, 빙벽등반, 혼합등반을 다 해내야 하기에 상당한 체력과 기술이 필요하다. 고산거벽에서 가장 선두에 선 이는 이명희(36·노스페이스)다. 이명희는 대승·소승·토왕·소토왕빙폭에 올랐으며 요세미티 엘캡을 등반했다. 산악계에 이름을 알린 건 카라코람 멀티4 등반(2001년)을 통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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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는 5,000m대이지만 미답봉이라 정보가 열악하고 낙석 등의 위험이 큰 네 개의 거벽등반 경험은 그녀를 강한 여성 등반가로 재탄생시켰다. 이외에도 그랑조라스 북벽, 타귈 삼각 북벽, 몽블랑을 등정했으며 파타고니아 파이네 중앙봉을 등정하고 세레토레와 아이거 북벽을 등반했다. 더불어 익스트림라이더 인공등반대회에서 4연패했으며 빙벽등반대회(2005년)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 최근에는 설악산 적벽 에코길과 독주길을 자유등반으로 완등했다. 이명희는 5.13b를 등반한다.
멀티4 등반에 동행했던 서울시연맹 임성묵 이사는 이씨에 대해 “고산거벽을 하는 여성 중에서 선두주자”라며 “여자가 고산거벽을 한다는 게 말이 쉽지 정말 힘들다. 멀티4 원정 때도 거벽 네 곳을 연달아 등반할 때 여성의 신체로 극복하기에는 한계라고 생각했지만 포기하지 않더라. 등반 욕심과 인내력과 근성이 강하며 원정에서 여자라고 빠지거나 하는 것이 없다”며 추켜세웠다.
이명희는 향후 등반 계획에 대해 “트랑고타워, 파타고니아, 세로토레, 피츠로이, 요세미티, 파키스탄의 5,000~6,000m 미답봉까지 다 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으니 상황에 맞춰 가려 한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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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채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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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고산거벽 주자로 채미선(37·포리스트시스템·골수회)이 있다. 채미선은 토왕과 소승빙폭에 올랐으며 요세미테 조디악을 등반했고 2003년 미국 암장 순례로 노즈, 시오브드림, 조수아트리, 비숍 등을 등반했다. 2006년에는 김점숙, 이명희, 김동애와 함께 에귀디미디·타귈·몽블랑·그랑조라스를 등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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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미선의 장점에 대해 정승권 대장은 “일단 얼굴이 예쁘고 힘도 좋고 근성도 갖췄다. 암빙벽을 다 잘하고 특히 테크니컬한 등반을 잘한다”며 칭찬했다. 향후 등반 계획에 대해서 “꾸준히 스포츠클라이밍에도 집중하며 4,000~6,000m대 벽등반을 하고 싶다. 빅월이든 알파인 등반이든 상관없이 체력과 능력이 닿는 대로 마음 맞는 사람들과 등반하고 싶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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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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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3d를 등반하는 한미선(37·한산악회)을 빼놓을 수 없다. 호주 블루마운틴 지역과 요세미티 엘캡, 세로토레와 알프스 몽블랑을 등반했으며 칠레 파이네 중앙봉을 등정했다. 토왕성빙벽대회에선 2위를 차지했으며 하드프리 루트를 다수 등반했다. 이명희는 그녀에 대해 “스포츠클라이밍과 빙벽에 있어선 여성 산악인들 중 톱 수준이다. 설벽이나 믹스등반에서의 적응력이 뛰어나고 배려심과 포용력이 있다”며 높이 평가했다.
한미선은 앞으로의 등반에 대해 “국내에서는 적벽 에코·크로니 자유등반을 하고 싶고 그 밖에도 많은 고난도의 자유등반 루트를 하고 싶다. 해외에서는 거벽등반을 하고 싶다. 트랑고 산군이나 캐나다 부가부, 알래스카나 요세미티에서의 자유등반을 경험하고 싶다. 그러나 기록 경쟁이나 고정로프로 오르는 등반은 지양하고 싶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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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빙벽을 고루 잘하는 이진아(34·경원전문대 OB)도 탁월한 고산거벽등반 가능성이 있다. 그녀는 박희용과 함께 트랑고타워를 등반했으며, 2005년부터 빙벽대회와 암벽대회에서 순위권에 빠지지 않고 입상했다. 박희용은 이진아에 대해 “여자 같지 않은 힘이 있다. 등반 열정이 강하고 분야를 가리지 않고 두루 잘한다. 가장 큰 강점은 폭발적인 힘이다”라고 평가했다. 그녀는 앞으로 “알파인 스타일의 고산거벽등반을 하고 싶다”고 얘기했다.
스포츠클라이밍으로 넘어가면 김자인(노스페이스)과 신윤선(노스페이스), 김인경(노스페이스)을 비롯해 떠오르는 신예들인 송한나래, 사솔, 한스란 등이 있다. 스포츠클라이밍 경기부문에선 김자인(21)의 파워가 단연 압도적이다. 2001년부터 국내의 경기대회란 대회는 모두 휩쓸다시피 했으며 최근에는 아시아 1위를 넘어 세계대회에서도 상위권에 입상, 기량이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다.
노스페이스 클라이밍팀의 이재용은 김자인에 대해 “욕심이 많고 마음 먹으면 하고야 만다. 벽에서 자기 능력의 100%를 다 쓰고 내려오며 키가 작다는 핸디캡을 노력으로 극복, 오히려 장점으로 만들었다. 장신에 불리한 홀드가 몰려 있는 구간에 상당히 강하며 하이스텝을 본인 어깨 높이까지 사용한다. 스스로 몸에 맞는 무브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갖췄다”고 설명했다.
탁월한 리더십으로 여성 산악인들 이끄는
배경미·이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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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경미
산악 행정과 리더십으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이들로 배경미(덕성여대OB)와 이연희(바우산악회)가 있다. 배경미는 한국여성산악회의 회장이자 대산련 국제교류이사로 여성 산악인들을 이끄는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배경미(45) 이사는 산악인 김태삼(푸른여행사 대표)씨와 부부이며 매킨리를 남편과 함께 등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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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련 <산악인>지를 5년간 발간했으며 여성 최초로 대산련 중앙연맹이사로 발탁되었다. 그녀는 특히 교류가 넓어 현역 여자 후배들의 맏언니 역할을 하며, 편집·실무 능력과 외국어가 뛰어나 연맹 서적 발간이나 통역, 해외 산악연맹과의 소통 등을 담당하고 있다. 대산련 이인정 회장은 그녀에 대해 “여성 산악계의 덕장이자 지장이다. 여성 산악인들의 리더로서 큰 언니로서의 몫을 잘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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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많은 일을 해주었기에 항상 기대가 크다. 가정, 비즈니스, 산악계 모든 분야에서 매사에 성실하다. 배경미는 단점을 찾을 수 없다”며 극찬했다. 향후 계획에 대해 배 이사는 “여성 산악인들이 나이나 경계를 넘어 결속력을 갖도록 가교 역할을 하고 싶다. 체력적인 열세로 편히 등반하기 힘들었던 부분을 서로가 울타리가 되어 편히 등반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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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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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희는 2005년부터 서울시연맹 이사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1986년 암벽대회에서 우승했으며 3년간 북한산 익스트림대회 인수봉 지역 기술책임을 맡았다. 현재 교육기술 상임이사이며 ‘즐거운 산행교실’ 등산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임덕신 서울시연맹 전무이사는 그녀에 대해 “거침없고 씩씩해서 활력을 불어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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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산>이란 책을 펴냈고, 여성 특유의 섬세함으로 맡은 일을 꼼꼼히 처리한다. 일 추진 능력이 탁월하다”고 평가했다. 이 이사는 “시민을 위한 등산교육이 일반화되는 데 힘을 싣고 싶다. 산악인을 위해서도 6,000~7,000m대의 벽등반을 지원할 계획을 추진 중이다. 두 가지 사안을 충실히 풀어나가겠다”며 현재 직무에 책임감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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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들 중 미처 거론하지 못한 이들도 있겠지만 해외 원정에 나설 정도의 여성 등반가들이 많은 편은 아니다. 암벽이나 빙벽등반을 하고, 그 기량이 뛰어나면 눈에 띄게 되고 자연히 여성들끼리 서로 알게 된다. 과거에는 그저 아는 수준에 그치며 활동은 소속 산악회를 따라 가는 경우가 많았으나 최근에는 여성들로 이뤄진 원정이 늘어나면서 여성들의 등반 활동과 그 성과가 적극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여성 위주로 이뤄진 원정대의 장점은 심리적으로 편하고 등정 기회가 자주 주어진다는 것이다. 혼합 팀의 일원으로 갈 경우 남자 대원의 능력이 더 뛰어날 수밖에 없고, 등정 확률이 더 높은 남성에게 정상 공격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반면 여성 원정대는 최대한 편안한 분위기에서 자신의 등반 능력을 다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여성 고산거벽 주자들로 원정에 자주 나서는 이들은 이명희, 채미선, 한미선, 이진아다. 이들은 국내 암벽에서 함께 등반할 때가 많고 연배도 비슷해서 친하다. 거벽등반 능력도 다들 수준급이므로 해외 원정을 함께 갈 기회는 앞으로도 잦을 것으로 예상된다.
반면 오은선처럼 자이언트봉에 오르는 이들은 여건상 지속적으로 여성들만의 원정대를 꾸리긴 힘들다. 일단 여성 고산등반가 수가 너무 적고 막대한 비용과 스폰서 등을 구하기도 어렵다. 대한민국에서 여성 산악인으로 산다는 건 쉽지 않다. 결혼과 출산 그리고 아이들 양육을 생각하면 실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들은 여성들에게 말한다.
“남자 여자를 떠나 후배가 없어도 너무 없습니다. 인공등반하는 사람은 인공등반만 하려 하고, 스포츠클라이밍이나 빙벽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등반이 꼭 위험한 것만은 아니니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도전을 하세요.”
-고산거벽등반가 이명희
“등산에서 여성은 남자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관점은 바뀌어야 합니다. 남녀를 떠나 꿈을 이루기 위해 도전해보세요. 후배 여성 산악인들에게 조언하자면, 여성 산악인이 극복해 나가야 할 부분은 8,000m같이 강한 담력을 요구하는 곳에서도 이겨내는 강한 용기와 자신감입니다. 해보지도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해보는 게 좋습니다. 고산에 무조건 오른다는 생각은 금물이고, 내가 올라갈 수 있는 높이가 어디까지인가 한계를 알아본다는 식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여성 여러분, 도전하세요.”
-8,000m 13고봉 등정자 오은선
- 글 신준범 월간 산 기자 - 월간 산 11월호에서 -